사기 (역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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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기(史記)는 사마천이 편찬한 중국의 역사서로, 기원전 109년부터 기원전 91년 사이에 완성되었다.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궁중 문헌과 광범위한 자료 수집을 통해 이 책을 저술했으며, 무제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인해 궁형을 당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사기는 '본기', '표', '서', '세가', '열전'의 5가지 구성으로, 황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과 사건을 다루며, 기전체 형식의 모범이 되었다. 이 책은 문학적,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동아시아 역사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서술, 다양한 계층을 포괄하는 시각, 뛰어난 문학적 성취로 후대 역사서의 모범이 되었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현존하는 사기의 원본성 및 내용의 보충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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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역사서) | |
---|---|
개요 | |
제목 | 사기(史記) |
다른 이름 | 태사공서(太史公書) |
로마자 표기 | Sagi |
저자 | 사마천 |
저작 시기 | 기원전 91년경 |
분야 | 역사, 전기 |
언어 | 한문 |
구성 | |
본기(本紀) | 12편 |
세가(世家) | 30편 |
서(書) | 8편 |
표(表) | 10편 |
열전(列傳) | 70편 |
총 편수 | 130편 |
총 글자 수 | 약 52만 6500자 |
영향 | |
역사 서술 | 기전체 역사서의 효시 |
후대 평가 | 중국 정사의 으뜸 '역사 기록의 성서' |
관련 정보 | |
수록 | 이십사사 |
관련 항목 | 사기집해, 사기정의, 사기색은 |
2. 성립 과정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역사책 편찬을 구상했지만, 완수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며 아들 사마천에게 역사책을 완성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1]
《사기》는 '하늘의 도는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天道是也非也)라는 질문을 던지며, 인간 세상의 정의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7] 사마천은 〈백이열전(伯夷列傳)〉에서 의인(義人) 백이와 숙제가 굶어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데, 이는 친구 이릉의 항복을 변호하다 궁형을 받은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비통함이 담겨 있다.[7]
《사기》는 간결하고 힘찬 문장으로 역사 서술의 높은 평가를 받는다. 특히 〈항우본기〉는 명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사기》는 당대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본 정보를 상세하게 기술하여 당시의 생활과 습관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서〉(書)는 전한 시대의 세계관, 정치, 경제, 사회 제도 등에 대한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흉노 등 주변 이민족과 서역에 대한 기술은 현재 알려진 지리 및 유적 발굴 결과와 정합성이 높아, 이 지역의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단서가 된다. 진시황 본기의 "진시황이 자신의 무덤에 근위병 3천 인의 인형을 묻었다"는 기술은 시안시 교외의 병마용갱 발견으로 정확성이 증명되었다.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사기》 편찬을 계속했다. 기원전 99년, 사마천은 흉노에 투항한 장수 이릉을 변호하다 무제의 노여움을 사 투옥되었고, 이듬해에는 궁형에 처해졌다. 옥중에서 사마천은 역사 편찬을 완수하겠다고 결의하였고, 기원전 97년에 출옥한 뒤에도 집필에 몰두하여 기원전 91년경 《사기》를 완성했다.[1] 사마천은 자신의 딸에게 《사기》를 맡겼는데, 무제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제 시대에 이르러서야 사마천의 외손자 양운에 의해 널리 퍼지게 되었다.[1]
당대에 사마천의 후손 사마정은 《죽서기년》 등을 참조하여 삼황 시대에 대한 〈삼황본기〉를 짓고 〈서〉(序)도 곁들였다.[1]
3. 사상적 배경
사마천이 《사기》를 집필하던 시대는 한나라 무제에 의해 유교가 국교화되던 시기였다. 공자를 세가(世家)에 포함시킨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사기》는 유교 사상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도가 등 다양한 사상을 포용했는데, 이는 '사실'을 추구한다는 역사서 편찬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반진 세력의 명목상 지도자였던 의제 대신 실질적인 지배자였던 항우를, 혜제 대신 여후를 본기에 넣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기》는 왕후 중심의 서술 외에도 〈유협열전(遊俠列傳)〉, 〈화식열전(貨殖列傳)〉, 〈자객열전(刺客列傳)〉 등 권력과 거리가 멀었던 인물에 대한 기록도 많이 포함하고 있다.
또한, 〈위기무안후열전(魏其武安侯列傳)〉, 〈영행열전(佞幸列傳)〉, 〈혹리열전(酷吏列傳)〉, 〈순리열전(循吏列傳)〉 등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여 영웅 중심의 역사관을 벗어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흉노 등 주변 이민족에 대해서도 한나라 중심의 가치관으로 평가하지 않고 객관적인 사실만을 기록했다.
이러한 사마천의 태도는 유교가 중국 사회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비판받기도 했다. 《한서》를 지은 반표는 사마천이 건달, 졸부 등을 다루고 유교를 경시하며 도교에 가까운 입장을 취했다고 비판했다. 《문심조룡(文心雕龍)》에서는 여후를 본기로 서술한 점을 비난했다. 성제 때 유우가 《태사공서》를 요구했을 때, 조정에서는 "옛날의 합종연횡(合從連衡)과 권모술수가 담겨 있어 제후들에게 읽힐 책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7] 촉한의 초주(譙周)는 《사기》가 제자백가의 설까지 인용했다며 비난하고, 《고사고(古史考)》를 지어 《사기》의 오류를 교정하기도 했다. 《고사고》는 당나라 때 《사기》를 읽을 때 함께 읽혔다고 유지기(劉知畿)의 《사통(史通)》에서 확인할 수 있다.[8]
후대에는 많은 지식인들이 《사기》와 《한서》를 비교, 분석하기도 했다.
사마천의 가문은 대대로 "태사공"(태사령)이라는 사관(史官)직을 맡아 천문, 역법, 점성, 역사 기록 보관 및 정비에 힘썼다. 아버지 사마담은 기록 정리뿐만 아니라 자신의 저서를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사업을 마치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아들에게 자신의 작업을 이을 것을 유언했다.
사마천은 아버지 사후 3년째에 태사령이 되어 궁궐 도서관의 서적을 읽고 자료를 수집했다. 태초 원년(기원전 108년) 태초력 개정 작업에 참여하면서 《사기》 집필을 시작했다. 천한 3년(기원전 98년), 흉노에 투항한 친구 이릉을 변호하다 무제의 분노를 사 궁형에 처해졌으나 집필을 계속하여 정화 연간(기원전 92~89년)에 완성했다.
《사기》 집필 의도에 대해 사마천은 아버지의 말을 인용하여 "역전을 바르게 하고, 춘추를 계승하며, 시서예악의 때에 근본을 세울 자가 있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또한 당시 춘추 공양학의 영수 동중서의 설을 펴 공자의 《춘추》 집필 목적을 논하며,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그것을 추상적인 말에 담고자 했지만, 그것을 사람들이 실제로 행한 구체적인 행위의 흔적에서 보여주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말했다.
'추상적인 말'보다 '행사'를 중시하는 태도는 《사기》에 계승되었다. 사마천은 자신의 저작은 《춘추》의 주 왕조 칭찬에 따라 한 제국의 융성을 현창하는 것이라고도 말했다. 《사기》 집필의 최대 목적은 한대사의 기술에 있었고, 그것에 의해 동시대인 한 제국의 역사적 의의를 선양하는 데 있었다.
사마담은 무제에 의한 유교 관학화 이전의 인물이며, 도가사상이 성행하는 분위기 속에서 학문을 배우고, 양하에게 『주역』을 수학했다. 그의 "육가요지"에서는 도가사상을 가장 높게 평가하고 있으며, 이것을 중심으로 제 학문의 통일을 꾀하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한 의도 중 하나는 이 아버지의 생각을 잇는 것도 있었다.『사기』는 도가사상을 기조로 하는 제 학문의 통합을 사서의 형식으로 실현한다는 일면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사기』 열전 첫머리 "백이열전"에서, 사마천은 "'''천도(天道)는 옳은가 그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백이는 굶어 죽고, 공자가 가장 사랑한 현자 안회는 요절했음에도, 대도적 척은 천수를 누린 것에 대해 "천도"를 낙관적으로 신뢰해도 좋은 것인가라는 물음이었다. 여기에는 이릉 사건에서 공정한 발언을 하고도 궁형이라는 굴욕을 당한 사마천 자신의 경험이 반영되었다.
사마천은 역사의 실태에 맞춰 기술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항우는 황제나 군주가 아니었고, 그 패권도 5년에 지나지 않았지만, 진 시황제에서 한 고조에 이르는 실권의 흐름을 설명하기 위해 "본기"로 기록했다. 황제 혜제를 본기에서 제외하고, 여후를 위해 "여후본기"를 세운 것도 같은 예이다.
서술 대상은 왕후가 중심이지만, 유협이나 부호 등 정치 세력으로부터 독립된 존재, 암살자 등 권력으로부터 거리를 둔 인물에 대한 기술도 많다. 또한, 무제 외척 사이의 다툼을 그린 "위기무안후열전", 남색이나 아첨으로 부귀를 얻은 자들의 "예행열전", 법률을 휘두르며 사람을 엄하게 다스린 "혹리열전", 법률에 비추어 올바르게 사람을 이끈 "순리열전", 위정자를 교묘한 변설로 간하는 사람들을 기록한 "활계열전" 등 다양한 시점을 유지하고 있다.
4. 가치
4. 1. 문학적 가치
역사 서술을 위한 간결하면서도 힘찬 문장은 '문성(文聖)' 또는 '백전노장의 군대 운용'과 같은 것으로 격찬받았다. 특히 〈항우본기〉는 명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4. 2. 역사적 가치
정사로서 당대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본 정보를 섬세하게 기술하여 당시의 생활이나 습관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서〉(書)의 내용은 전한 시대의 세계관, 정치, 경제, 사회 제도 등에 대한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또한 흉노를 비롯한 주변 이민족이나 서역에 대한 기술도 현재 알려져 있는 지리와 유적 발굴 등에서 판명된 당시 상황과의 정합성이 높고, 이러한 지방의 당시를 알기 위한 귀중한 단서가 되고 있다. 진시황 본기의 "진시황이 자신의 무덤에 근위병 3천 인의 인형을 묻었다"는 기술에 대해서도, 시안시 교외의 병마용갱 발견으로 그 정확성이 증명되었다.
5. 구성
史記|사기중국어는 본기(本紀) 12편, 표(表) 10편, 서(書) 8편, 세가(世家) 30편, 열전(列傳) 70편, 총 13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9]
- 본기(本紀): 오제(五帝)부터 한 무제까지 중국 왕들의 연대기를 다룬다.
- 표(表): 제왕 및 제후들의 흥망을 정리한 연표이다.
- 서(書): 역대 정책, 제도, 문물 발달사 및 전망을 다룬다.
- 세가(世家): 제후(諸侯)들에 대해 다룬다.
- 열전(列傳): 왕, 제후 외의 영웅, 정치가, 학자, 군인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개인들을 다룬다.
5. 1. 본기(本紀)
총 12편으로, 중국 역사 초의 오제(五帝)에서 한나라(漢) 무제(武帝)까지 왕들의 연대기를 다룬다.[9]권 | 제목 | 국가 | 인물 | 비고 |
---|---|---|---|---|
권1 | 오제본기(五帝本紀) | - | 황제 제전욱 제곡(帝嚳) 제요(帝堯) 제순(帝舜) | |
권2 | 하본기(夏本紀) | 하나라(夏) | - | |
권3 | 은본기(殷本紀) | 상나라(商) | - | |
권4 | 주본기(周本紀) | 주나라(周) | - | |
권5 | 진본기(秦本紀) | 진나라(秦) | - | |
권6 |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 진 시황제(秦 始皇帝) | ||
권7 | 항우본기(項羽本紀) | 서초(西楚) | 항우(項羽) | |
권8 | 고조본기(高祖本紀) | 한나라(漢) | 한 고제 | |
권9 |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 | 고황후 여씨 한 혜제 한 전소제 한 후소제 | ||
권10 | 효문본기(孝文本紀) | 한 문제 | ||
권11 | 효경본기(孝景本紀) | 한 경제 | ||
권12 | 효무본기(孝武本紀) | 한 무제 |
5. 2. 표(表)
총 10편으로, 본기에 나오는 제왕 및 제후들의 흥망을 정리하여 보여주는 연표이다.[9]제목 | 비고 |
---|---|
삼대세표(三代世表) | |
십이제후연표(十二諸侯年表) | |
육국연표(六國年表) | |
진초지제월표(秦楚之際月表) | |
한흥이래제후연표(漢興以來諸侯年表) | |
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 | |
혜경간후자연표(惠景間侯者年表) | |
건원이래후자연표(建元以來侯者年表) | |
건원이래왕자연표(建元已來王子年表) | |
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漢興以來將相名臣年表) |
5. 3. 서(書)
총 8편으로, 역대의 정책과 제도, 문물의 발달사 및 전망을 다룬다.[9]제목 | 비고 |
---|---|
예서(禮書) | |
악서(樂書) | |
율서(律書) | |
역서(曆書) | |
천관서(天官書) | |
봉선서(封禪書) | |
하거서(河渠書) | |
평준서(平準書) |
5. 4. 세가(世家)
총 30편으로,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진 제후(諸侯)들에 대해 다룬다.권 | 제목 | 국가 | 목록 | 비고 |
---|---|---|---|---|
권31 |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 | 오 | ||
권32 |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 | 강제 | ||
권33 | 노주공세가(魯周公世家) | 노 | 주공 단, 태공 백금 | |
권34 | 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 | 연 | ||
권35 | 관채세가(管蔡世家) | 관, 채, 조 | 관숙 선 | |
권36 | 진기세가(陳杞世家) | 진, 기 | ||
권37 | 위강숙세가(衛康叔世家) | 위 | ||
권38 |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 송 | ||
권39 | 진세가(晉世家) | 진 | ||
권40 | 초세가(楚世家) | 초 | ||
권41 |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 | 월 | ||
권42 | 정세가(鄭世家) | 정 | ||
권43 | 조세가(趙世家) | 조 | ||
권44 | 위세가(魏世家) | 위 | ||
권45 | 한세가(韓世家) | 한 | ||
권46 | 전경중완세가(田敬仲完世家) | 전제 | ||
권47 | 공자세가(孔子世家) | - | 공자 | |
권48 | 진섭세가(陳涉世家) | - | 진승 | |
권49 | 외척세가(外戚世家) | 전한 | 한나라의 외척 | |
권50 | 초원왕세가(楚元王世家) | 초원왕 교 | ||
권51 | 형연세가(荊燕世家) | 형왕 유고, 연경왕 택 | ||
권52 | 제도혜왕세가(齊悼惠王世家) | 제도혜왕 비 | ||
권53 |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 | 소하 | ||
권54 | 조상국세가(曹相國世家) | 조참 | ||
권55 | 유후세가(留侯世家) | 장량 | ||
권56 |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 | 진평, 왕릉, 심이기 | ||
권57 | 강후주발세가(絳侯周勃世家) | 주발 | ||
권58 | 양효왕세가(梁孝王世家) | 양효왕 무 | ||
권59 | 오종세가(五宗世家) | 경제의 아들 | ||
권60 | 삼왕세가(三王世家) | 무제의 아들 |
5. 5. 열전(列傳)
열전은 총 70편으로, 왕과 제후 외에 영웅, 정치가, 학자, 군인, 일반 서민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개인들을 다룬다.[9]권 | 부제 | 목록 | 비고 |
---|---|---|---|
권61 | 백이 열전 (伯夷列傳) | 백이, 숙제 | |
권62 | 관안 열전 (管晏列傳) | 관중, 안영 | |
권63 | 노자한비 열전 (老子韓非列傳) | 노자, 장자, 신불해, 한비 | |
권64 | 사마양저 열전 (司馬穰苴列傳) | 사마 양저 | |
권65 | 손자오기 열전 (孫子吳起列傳) | 손무, 손빈, 오기 | |
권66 | 오자서 열전 (伍子胥列傳) | 오자서, 백공승 | |
권67 | 중니제자 열전 (仲尼弟子列傳) | 공자의 제자 | |
권68 | 상군 열전 (商君列傳) | 상앙 | |
권69 | 소진 열전 (蘇秦列傳) | 소진, 소대, 소려 | |
권70 | 장의 열전 (張儀列傳) | 장의, 진진, 서수 | |
권71 | 저리자감무 열전 (樗里子甘茂列傳) | 저리질, 감무, 감라 | |
권72 | 양후 열전 (穰侯列傳) | 위염, 미융 | |
권73 | 백기왕전 열전 (白起王翦列傳) | 백기, 왕전 | |
권74 | 맹자순경 열전 (孟子荀卿列傳) | 맹자, 추기, 추연, 순우곤, 신도, 추석, 환연, 접자, 전변, 순자, 묵적 | |
권75 | 맹상군 열전 (孟嘗君列傳) | 맹상군 전문, 풍환 | |
권76 | 평원군우경 열전 (平原君虞卿列傳) | 평원군 조승, 우경 | |
권77 | 위공자 열전 (魏公子列傳) | 신릉군 무기 | |
권78 | 춘신군 열전 (春申君列傳) | 춘신군 황헐 | |
권79 | 범수채택 열전 (范雎蔡澤列傳) | 범수, 채택 | |
권80 | 악의 열전 (樂毅列傳) | 망제군 악의, 창국군 악간, 무양군 악승 | |
권81 | 염파인상여 열전 (廉頗藺相如列傳) | 염파, 인상여, 이목 | |
권82 | 전단 열전 (田單列傳) | 전단 | |
권83 | 노중련추양 열전 (魯仲連鄒陽列傳) | 노중련, 추양 | |
권84 | 굴원가생 열전 (屈原賈生列傳) | 굴원, 가의 | |
권85 | 여불위 열전 (呂不韋列傳) | 여불위 | |
권86 | 자객 열전 (刺客列傳) | 조말, 전제, 예양, 섭정, 형가 | |
권87 | 이사 열전 (李斯列傳) | 이사 | |
권88 | 몽염 열전 (蒙恬列傳) | 몽염 | |
권89 | 장이진여 열전 (張耳陳餘列傳) | 조왕 장이, 대왕 진여 | |
권90 | 위표팽월 열전 (魏豹彭越列傳) | 위표, 양왕 팽월 | |
권91 | 경포 열전 (黥布列傳) | 회남왕 경포 | |
권92 | 회음후 열전 (淮陰侯列傳) | 회음후 한신 | |
권93 | 한신노관 열전 (韓信盧綰列傳) | 한왕 신, 연왕 노관, 양하후 진희 | |
권94 | 전담 열전 (田儋列傳) | 전담, 전영, 전횡 | |
권95 | 번역등관 열전 (樊酈滕灌列傳) | 무양후 번쾌, 곡주후 역상, 여음후 하후 영, 영음후 관영 | |
권96 | 장승상 열전 (張丞相列傳) | 북평후 장창, 분음후 주창, 광아후 임오, 고안후 신도가 | |
권97 | 역생육가 열전 (酈生陸賈列傳) | 역이기, 육가, 평원군 주건 | |
권98 | 부근괴성 열전 (傅靳蒯成列傳) | 양릉후 부관, 신무후 근흡, 괴성후 주설 | |
권99 | 유경숙손통 열전 (劉敬叔孫通列傳) | 건신후 유경, 직사군 숙손통 | |
권100 | 계포난포 열전 (季布欒布列傳) | 계포, 조구생, 계심, 정공, 난포 | |
권101 | 원앙조조 열전 (袁盎晁錯列傳) | 원앙, 조조, 등공 | |
권102 | 장석지풍당 열전 (張釋之馮唐列傳) | 장석지, 풍당 | |
권103 | 만석장숙 열전 (萬石張叔列傳) | 만석군 석분, 목구후 석경, 건릉후 위관, 새후 직불의, 주인, 장숙 | |
권104 | 전숙 열전 (田叔列傳) | 전숙, 전인 | |
권105 | 편작창공 열전 (扁鵲倉公列傳) | 편작, 창공 순우억 | |
권106 | 오왕비 열전 (吳王濞列傳) | 오왕 유비 | |
권107 | 위기무안후 열전 (魏其武安侯列傳) | 위기후 두영, 무안후 전분, 관부 | |
권108 | 한장유 열전 (韓長孺列傳) | 한안국 | |
권109 | 이장군 열전 (李將軍列傳) | 이광 | |
권110 | 흉노 열전 (匈奴列傳) | ||
권111 | 위장군표기 열전 (衛將軍驃騎列傳) | 위청, 곽거병 | |
권112 | 평진후주보 열전 (平津侯主父列傳) | 공손 홍, 주보언 | |
권113 | 남월 열전 (南越列傳) | 남월왕 조타, 문왕 조호, 명왕 조영제, 조건덕, 창오왕 조광 | |
권114 | 동월 열전 (東越列傳) | 민월왕 추무제, 동해왕 추요 | |
권115 | 조선 열전 (朝鮮列傳) | 위만, 우거왕 | |
권116 | 서남이 열전 (西南夷列傳) | 야랑, 전국, 공도, 사, 작도, 염방, 백마국 | |
권117 | 사마상여 열전 (司馬相如列傳) | 사마 상여 | |
권118 | 회남형산 열전 (淮南衡山列傳) | 회남여왕 유장, 회남왕 유안, 형산왕 유사 | |
권119 | 순리 열전 (循吏列傳) | 손숙오, 자산, 공의휴, 석사, 이리 | |
권120 | 급정 열전 (汲鄭列傳) | 급암, 정당시 | |
권121 | 유림 열전 (儒林列傳) | 신공, 원고생, 한영, 복승, 고당생, 서생, 양하, 동중서, 호무생, 강생 | |
권122 | 혹리 열전 (酷吏列傳) | 후봉, 조착, 질도, 영성, 주양유, 조우, 장탕, 의종, 왕온서, 윤제, 양복, 감선, 두주 | |
권123 | 대완 열전 (大宛列傳) | 대완, 강거, 조손, 엄채, 대월씨, 안식, 조지, 대하 | |
권124 | 유협 열전 (遊俠列傳) | 곽해, 극맹, 주가 | |
권125 | 영행 열전 (佞幸列傳) | 등통, 조동, 북궁백자, 주문인, 한언, 이연년 | |
권126 | 골계 열전 (滑稽列傳) | 순우곤, 우맹, 우전 | |
권127 | 일자 열전 (日者列傳) | 사마계주 | |
권128 | 귀책 열전 (龜策列傳) | 점복 | |
권129 | 화식 열전 (貨殖列傳) | 범려, 자공, 의돈, 백규, 탁씨, 정정, 공씨 | |
권130 | 태사공 자서 (太史公自序) |
6. 한국어 번역
이영무 옮김, 《사기》 (상·중·하, 전3권)는 범우사에서 2003년에 초판을 간행하였다. 번역자가 순서를 편집하였으며, 부분적으로 번역되었다.
7. 평가
사마천의 『사기』는 동아시아 역사학의 기초를 다진 기념비적인 저작으로 평가받는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역사 서술, 다양한 계층과 문화를 포괄하는 폭넓은 시각, 뛰어난 문학적 성취는 후대 역사서의 모범이 되었다. 특히 유교가 국교화되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도, 사마천은 '사실'을 추구하는 역사 서술을 위해 도가 등 다양한 사상을 포용하였다. 흉노를 비롯한 주변 이민족에 대한 기록에서도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여,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단서를 제공한다.[7]
그러나 『사기』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반고는 『한서』를 통해 『사기』가 유교 경전에 어긋나고, 황로사상을 우선시하며, 유협과 화식을 칭찬한 점 등을 비판했다.[7]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사기』에 역사를 소재로 한 이야기나 연출이 포함되어 있음을 지적하며, 모든 것을 실록이라고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1]
7. 1. 긍정적 평가
사마천의 『사기』는 동아시아 역사학의 기초를 다진 기념비적인 저작으로 평가받는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역사 서술, 다양한 계층과 문화를 포괄하는 폭넓은 시각, 뛰어난 문학적 성취는 후대 역사서의 모범이 되었다.사마천은 '하늘의 도라는 것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天道是也非也)라는 질문을 던지며, 인간 세상에서 이루어져야 할 올바른 길에 대한 고민을 드러냈다. 백이와 숙제와 같이 의로운 인물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현실에 대한 의문은, 사마천 자신이 겪은 부당한 형벌에 대한 비통함과도 연결된다.[7]
유교가 국교화되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도, 사마천은 '사실'을 추구하는 역사 서술을 위해 도가 등 다양한 사상을 포용하였다. 항우나 여태후와 같이 실질적인 권력자를 중심으로 역사를 기록하고, 민간의 인물, 남색으로 부귀를 얻은 자, 법률을 악용한 관리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을 묘사한 것은 기존의 영웅 중심 역사관을 벗어난 유연한 시각을 보여준다.
또한, 흉노를 비롯한 주변 이민족에 대한 기록에서도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여,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단서를 제공한다. 병마용 갱의 발견으로 증명된 진시황 무덤에 대한 기록은 『사기』의 역사적 정확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러한 『사기』의 특징은 후대에 다양한 평가를 받았다. 반고는 『한서』를 통해 『사기』가 유교 경전에 어긋나고, 황로사상을 우선시하며, 유협과 화식을 칭찬한 점 등을 비판했다.[7] 촉한의 초주는 『사기』가 제자백가의 설을 인용한 것을 비난하며, 『고사고』를 통해 『사기』의 오류를 바로잡으려 했다.
그러나 『사기』의 역사 서술 방식과 문체는 높이 평가받아, "글의 성스러움", "노련한 장수가 병사를 부리는 것과 같다"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특히 「항우본기」는 명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물론 『사기』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사기』에 역사를 소재로 한 이야기나 연출이 포함되어 있음을 지적하며, 모든 것을 실록이라고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1]
7. 2. 비판적 평가
사마천의 《사기》는 '하늘의 도라는 것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인간 세상에서 올바른 길이 সত্যিই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이러한 태도는 유교가 지배적인 사회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반표는 사마천이 유교를 경시하고 도가에 가까운 입장을 취했다고 비판했고, 《문심조룡》에서는 여후를 본기로 서술한 점을 비난했다. 촉한의 초주는 《사기》가 제자백가의 설을 인용했다며 비판하고, 《고사고》를 지어 《사기》의 오류를 교정하려 했다.[7][8]《사기》는 서주 이전 부분은 『서경』, 춘추 시대는 『춘추좌씨전』을 주요 자료로 삼았으며, 현존하는 선행 문헌과 중복되는 부분이 많다. 그러나 전국 시대 기술은 《사기》에만 보이는 정보가 많으며, 다양한 자료를 조합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마천은 궁정 문헌 외에도 직접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사기》를 편찬했으며, 이러한 지견을 바탕으로 문헌의 진위 검증을 하기도 했다.
《사기》는 사마천 사후에도 가필과 수정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저소손은 진섭세가, 외척세가, 활계열전 등을 보충했다. "삼황본기"는 당대에 사마정이 가필한 것이다.
반고의 『한서』는 『사기』를 비판하며 다음과 같은 관점을 제시했다.
- 유교 경전 외 학파의 내용을 포함하여 모순이 있다.
- 황로사상을 우선시하고 유협·화식을 칭찬한다.
- 항우·진승을 추켜세우고 회남·형산을 물러나게 했다.
- 사마상여와 소하·조참·진평, 동중서에 대한 기록의 통일성이 없다.
삼국 시대에는 『사기』와 『한서』를 "사한"으로 칭하고, 『동관한기』를 더하여 "삼사"로 칭하기도 했다. 그러나 옛 중국에서는 『한서』가 더 우세했고, 『수서』 경적지에 따르면 『사기』의 주석은 매우 적었다.
현존하는 『사기』 완본은 남송 경원 2년(1196년)의 것이 가장 오래되었으며, 사마천의 원작에 얼마나 충실한지는 불분명하다. 「삼황본기」 외에도 태사공자서에 나오는 「금상본기」가 현행본에는 없고, 「효무본기」가 있는데, 이는 후세의 보작임이 분명하다. 그 외 권에도 사마천이 사용했을 리 없는 용어가 보이며, 소제까지 언급된 부분도 있다.
『한서』 사마천전에 따르면, 반고가 본 『사기』는 130권 중 10권이 제목만 있었다. 현행본은 130권 전부 갖춰져 있으므로, 후한 이후 보충된 것이다.
《사기》는 정사로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당시 생활과 습관을 알 수 있는 세부 묘사도 많다. "서"에 기록된 내용은 전한 시대 세계관, 정치 경제, 사회 제도 등에 대한 중요한 자료이다. 주변 이민족과 서역에 대한 기술도 현재 밝혀진 상황과 일치성이 높아, 이들 지방의 당시를 알기 위한 귀중한 단서가 된다. 진시황 본기의 병마용 관련 기술은 정확성이 증명되었다.
한편, 『죽서기년』 등과의 비교에서 연대 모순 등의 문제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미야자키 시테이는 『사기』에 역사를 소재로 한 이야기나 연출이 포함되어 있어 모두 실록으로 믿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오가와 타마키는 사마천이 『전국책』 등의 기술을 많이 참조했을 것이라고 했고, 가토 토루는 전국 칠웅의 병력에 과장이 많을 것이라고 보았다.[1]
8. 현대 한국 사회에의 시사점
《사기》는 단순한 역사 기록을 넘어 권력, 인간 욕망, 정의 등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어 현대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다양한 가치관과 이념이 충돌하는 현대 사회에서 《사기》가 보여주는 포용성과 균형 잡힌 시각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하늘의 도라는 것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天道是也非也)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는 인간 세상에서 이루어져야 할 올바른 길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다. 백이와 숙제와 같이 의로운 인물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현실을 통해, 사마천은 정의와 현실 사이의 괴리를 보여준다. 이는 사마천 자신이 겪은 부당한 형벌에 대한 비통함과도 연결되어, 권력과 정의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제시한다.[7]
《사기》는 유교 사상이 주류를 이루던 시대에 쓰였지만, 도가 등 다양한 사상을 포용하여 '사실'을 추구하고자 했다. 이러한 태도는 항우나 여태후와 같이 실질적인 권력자를 중심으로 역사를 기록하고, 민간 인물, 권력과 거리가 멀었던 인물, 심지어 외적까지도 객관적으로 다루는 모습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사기》의 다양한 관점은 현대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이러한 사마천의 태도는 유교 중심 사회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반고는 《한서》에서 사마천이 유교를 경시하고 도교에 가까운 입장을 취했다고 비판했고, 초주는 《사기》가 유교 경전에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기》는 간결하고 힘 있는 문체와 역사적 사건에 대한 생생한 묘사로 높이 평가받았다. 특히, 전한 시대의 세계관, 정치, 경제, 사회 제도, 주변 이민족에 대한 기록은 귀중한 역사적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역사의 진실을 추구하고 다양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기》의 정신은 민주주의 사회의 성숙을 위해서도 필요한 덕목이며, 현대 한국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를 지닌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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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史記列伝・解説
[2]
서적
近江奈良朝の漢文學
養徳社
1946
[3]
웹사이트
指定文化財|国宝|史記孝文本紀第十
http://www.pref.mi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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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古代中世における日中関係史の研究
同朋舎出版
1996
[5]
서적
日中文化交流史叢書 第6巻・文学
大修館書店
1995
[6]
서적
紅葉山文庫
郷学舎
1980
[7]
서적
한서 권80 〈선원육왕전〉
[8]
서적
사기
[9]
서적
史記(本記, 世家)
홍신문화사
1993-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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