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술 (수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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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술은 수나라 문제 시기에 활약한 인물로, 유기의 아들로 태어나 태자 친위가 되었으며, 문제의 딸인 난릉공주와 결혼하여 내사시랑을 지냈다. 그는 양소와 대립하며 문제의 신임을 얻었으나, 604년 문제의 병환 중 양소와 양광의 모함으로 조서 위조 혐의를 받아 관직을 잃고 유배되었다. 결국 영남의 용천군에서 녕월군으로 옮겨진 후 풍토병으로 39세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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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술 (수나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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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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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언예(彦藝) |
생몰년 | 565년 ~ 642년 |
시대 | 수나라, 당나라 |
가계 | |
부친 | 유현 |
배우자 | 수 양제의 딸, 남양공주 |
자녀 | 유인궤 등 |
관직 | |
주요 관직 | 내사시랑(內史侍郞) 민부상서(民部尙書) |
기타 | |
서예가로서의 활동 | 정나라의 해서를 좋아함 "종요법(鍾繇法)"이라는 독특한 서체를 창조 장회관의 《서단(書斷)》에 이름을 올림 |
2. 생애
유술은 수나라의 고위 관료 유기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음서를 통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문제의 딸인 난릉공주와 혼인하여 황제의 사위로서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내사시랑, 판병부상서사 등 주요 관직을 역임했다. 그는 문제의 총애를 바탕으로 권력자 양소와 대립하기도 했다.
604년, 문제가 임종을 앞두고 병상에 있을 때, 유술은 황태자 양광의 후궁 희롱 사건을 문제에게 알리고 폐태자 양용을 다시 부르라는 밀명을 받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양소와 양광의 계략에 휘말려 조서 위조 혐의로 체포되었다. 양광이 양제로 즉위하자 유술은 모든 관작을 박탈당하고 난릉공주와 강제로 이혼당했으며, 영남의 용천군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더 먼 곳인 녕월군으로 옮겨져 풍토병으로 인해 3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유기의 아들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에는 아버지의 공 덕분에 관직에 나아가 태자의 친위 관리가 되었다. 이후 문제의 다섯째 딸인 난릉공주 양아오우와 결혼하면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의 지위를 받고 내사시랑(內史侍郎)에 임명되었다. 그는 문제의 사위들 가운데서 가장 큰 신임을 받았다.판병부상서사(判兵部尚書事)를 맡기도 했다. 한번은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잠시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곧 급사황문시랑(給事黃門侍郎)으로 복귀하였고 아버지의 작위인 건안군공(建安郡公)을 이어받았다. 인수 연간(601년~604년)에는 판리부상서사(判吏部尚書事)를 담당했다.
유술은 당시 권력자였던 양소와 사이가 좋지 않아 여러 차례 그를 모욕했으며, 문제 역시 유술을 중용하고 양소를 점차 멀리하게 되었다. 유술은 병부상서(兵部尚書)에 임명되기도 했으나, 스스로 공적이 없다는 이유로 사양하여 섭병부상서사(攝兵部尚書事)가 되었다.
2. 2. 문제 시기 활동
젊은 시절 아버지 유기의 음서로 태자 친위가 되었다. 이후 문제의 다섯째 딸인 난릉공주 양아오우와 혼인하면서 개부의동삼사의 지위를 받고 내사시랑이 되었다. 황제의 사위들 가운데 문제로부터 가장 큰 신임을 받았다. 판병부상서사를 맡기도 했다.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잠시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곧 급사황문시랑으로 복귀하여 건안군공의 작위를 이어받았다. 인수 연간에는 판리부상서사를 맡았다.유술은 당시 권력자였던 양소와 사이가 좋지 않아 여러 차례 그를 모욕했다. 문제 역시 유술을 중용하면서 양소를 점차 멀리하게 되었다. 이러한 신임을 바탕으로 유술은 병부상서에 임명되었지만, 스스로 내세울 공적이 없다고 말하며 사양하였다. 이에 섭병부상서사 직을 맡게 되었다.
2. 3. 양제 즉위와 몰락
604년, 문제가 인수궁에서 병상에 눕자 유술은 양소, 원엄 등과 함께 황제의 곁을 지켰다. 당시 황태자였던 양광이 문제의 후궁인 진귀인에게 무례를 범하자, 이 사실을 알게 된 문제는 크게 분노했다. 격노한 문제는 유술에게 폐태자였던 방릉왕 양용을 다시 불러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유술과 원엄은 문제의 뜻에 따라 칙서를 작성하기 위해 방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이 움직임을 감지한 양소는 양광과 공모하여, 유술과 원엄이 조서를 위조하려 했다는 거짓 죄목을 씌워 그들을 체포했다. 이는 양광의 황위 계승을 위한 정적 제거의 일환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사망하고 양광이 양제로 즉위하자, 유술은 즉시 모든 관작을 빼앗기고 아내인 난릉공주와도 강제로 이혼당하는 등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이는 양제가 자신의 즉위 과정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인물들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2. 3. 1. 유배와 죽음
604년, 문제가 인수궁에서 병상에 눕자, 유술은 양소, 원엄 등과 함께 궁중에서 시중을 들었다. 이때 황태자였던 양광이 진귀인에게 무례한 행동을 한 사실을 알게 된 문제는 크게 분노하여 유술에게 방릉왕 양용을 불러오도록 명했다. 유술과 원엄이 방 밖으로 나가 칙서를 작성하려 하자, 이 소식을 들은 양소는 양광과 공모하여 유술과 원엄 두 사람이 조서를 위조했다는 누명을 씌워 그들을 체포했다.이후 양광이 양제로 즉위하자, 유술은 모든 관작을 박탈당하고 아내인 난릉공주와 강제로 이혼당했다. 그는 영남의 용천군으로 유배되었는데, 난릉공주가 유술과의 동행을 간청했으나 양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유술은 용천군에서 몇 년을 지내다가 더 먼 곳인 녕월군으로 옮겨졌고, 결국 그곳에서 풍토병으로 인해 3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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