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우옌푹미엔푸
1. 개요
응우옌푹미엔푸는 자롱 16년(1817년)에 태어나 1885년에 사망한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황족이다. 그는 어려서 방종한 행동으로 인해 민망 황제에게 질책을 받았으나, 이후 뉘우치고 티에우찌 황제 때 조정에 참여했다. 뜨득 황제 때 부미군공에 봉해졌으나, 외국인 관련 사건으로 기내후로 강봉되기도 했다. 함응이 원년에 사망하여 공량의 시호를 받았으며, 13명의 아들과 8명의 딸을 두었다.
| 휘 | 阮福綿富 |
|---|---|
| 생년월일 | 1818년 12월 31일 |
| 사망일 | 1864년 11월 20일 (45세) |
| 묘소 | 承天府香水縣居正總楊春社 |
| 친족 | 아버지: 성조 어머니: 宮人阮氏瑞嬪 |
| 형제자매 | 31남 |
| 자녀 | 30남 30녀 |
| 관직 | 都督府掌府事 |
|---|---|
| 작위 | 堅江公 |
-
1817년 출생 -
헨리 데이비드 소로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미국의 작가이자 철학자, 자연주의자로서, 월든 연못에서의 자급자족 생활을 담은 『월든』과 시민 불복종 사상으로 미니멀리즘, 비폭력 저항 운동, 환경 보호 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
1817년 출생 -
영온옹주
영온옹주는 조선 순조와 숙의 박씨의 외동딸이자 효명세자의 이복 여동생으로, 11세에 옹주로 책봉되었으나 병약하여 13세에 요절하였으며 효명세자의 깊은 슬픔을 자아냈다. -
1885년 사망 -
빅토르 위고
빅토르 위고는 19세기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시인으로, 낭만주의 운동을 이끌고 《레 미제라블》 등의 작품을 남겼으며, 정치에도 참여하여 국민적 시인으로 존경받았다. -
1885년 사망 -
이와사키 야타로
이와사키 야타로는 메이지 시대의 실업가이자 몰락한 사무라이 가문 출신으로, 해운업을 중심으로 미쓰비시를 일본 최대 기업으로 성장시키고 정경유착 및 독점 비판을 받았으며, 현재 미쓰비시 그룹의 기반을 구축한 창업자이다.
2. 생애
자롱 16년 정월 13일(1817년 2월 28일), 후에 황성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사람됨이 교만하고 방종하였으며, 놀기만을 좋아하였다. 가복을 데리고 거리로 나가 말을 타고 사람들을 짓밟으니 때로 사상자가 나오기도 했다. 민망 황제는 이를 알고 매우 화를 내어 그의 관복을 벗겨 빼앗으라 명을 내렸고, 다른 황자들과 같은 반열에 들지 못하게 했으며, 그를 볼 때마다 모두 경칭을 붙이지 않고 이름만 불렀다. 이후 깨닫고 허물을 뉘우치자 민망 황제는 다시 관복을 돌려주도록 하였지만 여전히 조회에 나와 일을 논의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티에우찌 원년(1841년), 티에우찌 황제가 조회에 나오도록 윤허하였다.
뜨득 5년(1852년) 2월, 부미군공(符美郡公/Phù Mỹ Quận Công베트남어)에 봉해졌다.
뜨득 35년(1882년), 사람들을 데리고 노래를 불렀고, 외국인들을 불러 둘러싸고 구경하게 하였다. 이후 이 일을 다른 사람이 살피고 드러내었고, 뜨득 황제는 그를 기내후(畿內侯)로 강봉하였다.
뜨득 36년(1883년), 원래의 작위로 회복되었다.
함응이 원년 2월 28일(1885년 4월 15일), 사망하니 향년 69세였다. 시호를 공량(恭亮)이라 하였고, 승천부(承天府) 향수현(香水縣) 야리총청수사(野犁總淸水社)에 장사지냈다. 향차현(香茶縣) 부춘총춘양사(富春總春陽社)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2.1. 초기 생애 (1817년 ~ 1841년)
응우옌푹미엔푸는 자롱 16년(1817년 2월 28일) 후에 황성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교만하고 방종하며 놀기만 좋아하여 가복을 데리고 거리로 나가 말을 타고 사람들을 짓밟아 사상자가 나오기도 했다. 민망 황제는 이에 분노하여 그의 관복을 벗기고 다른 황자들과 같은 반열에 들지 못하게 했으며, 경칭 없이 이름만 불렀다. 이후 뉘우치자 민망 황제는 관복을 돌려주었으나, 한동안 조회 참여는 허락하지 않았다.
2.2. 조정 참여와 작위 변동 (1841년 ~ 1883년)
티에우찌 원년(1841년), 티에우찌 황제가 응우옌푹미엔푸가 조회에 참여하는 것을 윤허하였다. 뜨득 5년(1852년) 2월, 부미군공(符美郡公)에 봉해졌다. 뜨득 35년(1882년), 외국인 관련 문제로 인해 뜨득 황제가 그를 기내후(畿內侯)로 강봉하였다. 뜨득 36년(1883년), 원래의 작위로 회복되었다.
2.3. 사망 (1885년)
함응이 원년(1885년) 2월 28일(4월 15일), 6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시호는 공량(恭亮)이며, 승천부(承天府) 향수현(香水縣) 야리총청수사(野犁總淸水社)에 장사지냈다. 향차현(香茶縣) 부춘총춘양사(富春總春陽社)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3. 가족 관계
아들 13명과 딸 8명을 두었다. 후예들은 식(食) 자부(字部)를 하사받고 그에 따라 이름을 지었다.
응우옌푹홍닌(阮福洪䭢)은 부미정후(符美亭侯)를 습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