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당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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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 2. 본기(本紀)
- 3. 지(志)
- 4. 표(表)
- 5. 열전(列傳)
- 5.1. 후비(后妃)
- 5.2. 종실(宗室)
- 5.3. 공주(公主)
- 5.4. 당 건국 세력
- 5.5. 초기 명신(名臣)
- 5.6. 제이번장(諸夷蕃將)
- 5.7. 명장(名將)
- 5.8. 유학(儒學)
- 5.9. 문예(文藝)
- 5.10. 충의(忠義)
- 5.11. 탁행(卓行)
- 5.12. 효우(孝友)
- 5.13. 은일(隱逸)
- 5.14. 순리(循吏)
- 5.15. 방기(方技)
- 5.16. 열녀(列女)
- 5.17. 외척(外戚)
- 5.18. 환자(宦者)
- 5.19. 혹리(酷吏)
- 5.20. 번진위박(藩鎭魏博), 번진진기(藩鎭鎭冀), 번진노룡(藩鎭盧龍), 번진치청횡해(藩鎭淄靑橫海), 번진선무장의택로(藩鎭宣武彰義澤潞)
- 5.21. 돌궐(突厥), 토번(吐蕃), 회흘(回鶻), 사토(沙陀), 북적(北狄), 동이(東夷), 서역(西域), 남만(南蠻)
- 5.22. 간신(姦臣)
- 5.23. 반신(叛臣)
- 5.24. 역신(逆臣)
- 6. 부록
- 참조
1. 개요
《신당서》는 송나라 때 편찬된 당나라의 역사서로, 본기, 지, 표, 열전, 부록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기에는 당나라 역대 황제들의 재위 기간 동안 일어난 주요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지는 당나라의 제도, 문물, 사회, 경제 등 다양한 분야를 주제별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표에는 재상, 방진, 종실, 재상세계 등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고, 열전에는 당나라 시대의 다양한 인물들의 삶과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한국과 관련된 고구려, 백제, 신라에 대한 기록은 한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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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소설은 당나라 시대 중국에서 발생한 소설 유형으로, 괴이하고 초자연적인 이야기부터 현실적인 이야기까지 다루며, 당나라 초기에 지괴소설에서 발전하여 중당 시대에 전성기를 맞았고 송대 이후 쇠퇴했으나 후대 문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신당서 | |
---|---|
개요 | |
제목 (한자) | 新唐書 |
제목 (간체) | 新唐书 |
로마자 표기 (병음) | Xīn Tángshū |
로마자 표기 (웨이드-자일스) | Hsin T'angshu |
로마자 표기 (POJ) | Sin Tông-su |
다른 제목 (한자) | 唐書 |
다른 제목 (간체) | 唐书 |
다른 제목 (병음) | Tángshū |
다른 제목 (웨이드-자일스) | T'ang-shu |
일반 정보 | |
유형 | 역사서 |
언어 | 한문 |
시대 | 중국 당나라 |
저자 | 구양수, 송기 |
완성 | 1060년 |
권수 | 225권 |
이전 작품 | 구당서 |
다음 작품 | 송사 |
일부 | 이십사사 |
2. 본기(本紀)
본기(本紀)는 당나라 역대 황제들의 재위 기간 동안 일어난 주요 사건들을 시간 순서대로 기록하고 있으며, 당나라의 정치 발전 과정을 보여주는 핵심적인 부분이다.
- 본기 제1 고조
고조 이연(高祖 李淵)은 615년부터 635년 5월까지 재위하였으며, 수나라 대업(大業) 11년에서 정관(貞觀) 9년까지의 기간에 해당한다.
- 본기 제2 태종
태종 이세민(太宗 李世民)은 617년부터 649년 5월까지 재위하였으며, 그의 치세는 정관(貞觀) 23년에 해당한다. 태종의 시대는 '정관의 치'로 불리며 정치적 안정과 번영을 이루었다.
- 본기 제3 고종
고종 이치(高宗 李治)는 649년 5월부터 683년 12월까지 재위했다.(정관(貞觀) 23년 ~ 홍도(弘道) 원년)
고종 이치(高宗 李治)가 683년 12월에 사망한 후, 측천황후 무조(則天皇后 武曌)와 중종 이현(中宗 李顯)이 즉위하였다. 측천무후는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며 당나라를 통치했고, 중종은 복위 후에도 혼란스러운 정국을 수습하지 못했다. 이 시기는 710년 6월까지 이어졌다.
예종 이단은 710년 6월부터 761년 4월까지 재위하였다. 예종 시대는 비교적 짧았으며, 이후 현종 이융기가 즉위하여 당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현종은 개원의 치를 통해 당나라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으나, 말년에 안사의 난이 일어나 당나라는 혼란에 빠졌다.
숙종 이형(肅宗 李亨)은 756년 6월부터 762년까지 재위하였고, 대종 이예(代宗 李豫)는 762년부터 779년 5월까지 재위하였다. 이 시기는 안사의 난 이후 당나라가 혼란과 쇠퇴의 길을 걷던 때였다.
덕종 이괄, 순종 이송, 헌종 이순의 치세는 779년 5월부터 820년 1월까지, 즉 대력 14년에서 원화 15년에 해당한다. 이 시기 당나라는 중흥을 위해 노력했으나, 여러 한계에 직면했다.
목종 이항, 경종 이담, 문종 이앙, 무종 이염, 선종 이침의 재위 기간은 820년 1월부터 859년 8월까지로, 당나라의 쇠퇴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는 환관 정치와 당쟁이 심화되어 국정이 혼란스러웠다.
의종 이최와 희종 이현의 치세(859년 8월 ~ 888년 3월)는 대중 13년에서 문덕 원년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는 황소의 난 등 민란이 발생하여 당나라 멸망의 징후를 보였다.
소종 이엽(昭宗 李曄)은 888년 3월부터 907년 4월까지 재위하였다. 애제 이축(哀帝 李柷) 또한 이 시기에 재위하였다. 신당서에서는 당나라의 멸망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2. 1. 고조(高祖)
고조 이연(高祖 李淵)은 615년부터 635년 5월까지 재위하였으며, 수나라 대업(大業) 11년에서 정관(貞觀) 9년까지의 기간에 해당한다.2. 2. 태종(太宗)
태종 이세민(太宗 李世民)은 617년부터 649년 5월까지 재위하였으며, 그의 치세는 정관(貞觀) 23년에 해당한다. 태종의 시대는 '정관의 치(貞觀之治)'로 불리며 정치적 안정과 번영을 이루었다.2. 3. 고종(高宗)
고종 이치(高宗 李治)는 649년 5월부터 683년 12월까지 재위했다.(정관(貞觀) 23년 ~ 홍도(弘道) 원년)2. 4. 측천황후(則天皇后)와 중종(中宗)
고종 이치(高宗 李治)가 683년 12월에 사망한 후, 측천황후 무조(則天皇后 武曌)와 중종 이현(中宗 李顯)이 즉위하였다. 측천무후는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며 당나라를 통치했고, 중종은 복위 후에도 혼란스러운 정국을 수습하지 못했다. 이 시기는 710년 6월까지 이어졌다.2. 5. 예종(睿宗)과 현종(玄宗)
예종 이단은 710년 6월부터 761년 4월까지 재위하였다. 예종 시대는 비교적 짧았으며, 이후 현종 이융기가 즉위하여 당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현종은 개원의 치를 통해 당나라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으나, 말년에 안사의 난이 일어나 당나라는 혼란에 빠졌다.2. 6. 숙종(肅宗)과 대종(代宗)
숙종 이형(肅宗 李亨)은 756년 6월부터 762년까지 재위하였고, 대종 이예(代宗 李豫)는 762년부터 779년 5월까지 재위하였다. 이 시기는 안사의 난 이후 당나라가 혼란과 쇠퇴의 길을 걷던 때였다.2. 7. 덕종(德宗), 순종(順宗), 헌종(憲宗)
덕종 이괄, 순종 이송, 헌종 이순의 치세는 779년 5월부터 820년 1월까지, 즉 대력 14년에서 원화 15년에 해당한다. 이 시기 당나라는 중흥을 위해 노력했으나, 여러 한계에 직면했다.2. 8. 목종(穆宗), 경종(敬宗), 문종(文宗), 무종(武宗), 선종(宣宗)
목종 이항, 경종 이담, 문종 이앙, 무종 이염, 선종 이침의 재위 기간은 820년 1월부터 859년 8월까지로, 당나라의 쇠퇴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는 환관 정치와 당쟁이 심화되어 국정이 혼란스러웠다.2. 9. 의종(懿宗)과 희종(僖宗)
의종 이최와 희종 이현의 치세(859년 8월 ~ 888년 3월)는 대중 13년에서 문덕 원년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는 황소의 난 등 민란이 발생하여 당나라 멸망의 징후를 보였다.2. 10. 소종(昭宗)과 애제(哀帝)
소종 이엽(昭宗 李曄)은 888년 3월부터 907년 4월까지 재위하였다. 애제 이축(哀帝 李柷) 또한 이 시기에 재위하였다. 신당서에서는 당나라의 멸망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3. 지(志)
《신당서》의 〈지〉(志)는 당나라의 제도, 문물, 사회, 경제 등 다양한 분야를 주제별로 나누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지는 제11권부터 제60권까지에 수록되어 있으며, 《구당서》에 비해 크게 확장되었다.
《신당서》는 정사 중 관리를 선발하고 임명하는 방법에 대한 지(選擧志)를 포함한 최초의 역사서였다. 여기에는 당나라에서 특히 780년 이후 관료 채용의 중요한 측면이 된 과거 제도에 대한 설명이 포함되어 있다.
- 〈예악지(禮樂志)〉는 권11부터 권22까지 총 12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국가 의례와 음악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 〈의위(儀衛)〉(지 제13상·하)는 황제의 행차와 관련된 의장과 호위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 〈거복지(車服志)〉는 당나라의 수레와 복식에 대한 규정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 〈역(曆)〉은 당나라에서 사용된 역법(曆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천문(天文)〉은 권31부터 권33까지 총 3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천문 관측과 관련된 기록 및 이론을 담고 있다.
- 〈오행지(五行志)〉는 오행 사상을 바탕으로 자연 현상과 인간 사회의 일을 연결 지어 설명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오행지〉는 오행의 속성과 변화에 따라 발생하는 자연 현상, 예를 들어 가뭄, 홍수, 지진, 일식, 월식 등을 기록하고, 이를 당시 사회의 정치적 사건이나 인물들의 운명과 연결하여 해석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통치자에게 경고를 전달하거나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근거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 〈지리지(地理志)〉는 권37부터 권43까지 총 7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당나라의 행정 구역과 지리 정보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 〈선거지(選擧志)〉에서는 당나라의 관리 선발 제도를 설명하고 있다. 이 제도의 핵심은 과거 제도였다.
- 〈백관지(百官志)〉는 당나라의 관료 체계와 각 관직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다.
- 〈병(兵)〉은 당나라의 군사 제도와 조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당나라의 군사 제도는 부병제(府兵制)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 〈식화지(食貨志)〉는 당나라의 경제 정책과 재정 운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총 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 형법(刑法)〉은 당나라의 법률과 형벌 제도 전반을 다룬다.
- 예문지(藝文志)〉는 당나라 시대의 서적 목록과 학술 동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3. 1. 예악(禮樂)
《신당서》의 〈예악지〉는 권11부터 권22까지 총 12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국가 의례와 음악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3. 2. 의위(儀衛)
《신당서》〈지〉 제13상·하(志第十三上·下)는 의위(儀衛)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황제의 행차와 관련된 의장과 호위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3. 3. 거복(車服)
신당서의 〈거복지〉는 당나라의 수레와 복식에 대한 규정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 지(志)는 신당서 권24에 해당한다.3. 4. 역(曆)
《신당서》의 〈역(曆)〉은 당나라에서 사용된 역법(曆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3. 5. 천문(天文)
《신당서》의 〈천문〉은 권31부터 권33까지 총 3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천문 관측과 관련된 기록 및 이론을 담고 있다.3. 6. 오행(五行)
《신당서》의 〈오행지(五行志)〉는 오행 사상을 바탕으로 자연 현상과 인간 사회의 일을 연결 지어 설명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오행은 각각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를 의미하며, 이들은 서로 상생하고 상극하는 관계를 맺는다고 여겨졌다.〈오행지〉는 이러한 오행의 속성과 변화에 따라 발생하는 자연 현상, 예를 들어 가뭄, 홍수, 지진, 일식, 월식 등을 기록하고, 이를 당시 사회의 정치적 사건이나 인물들의 운명과 연결하여 해석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통치자에게 경고를 전달하거나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근거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신당서》에서 오행(五行)에 관한 내용은 지(志) 제24, 25, 26권에 해당한다.
3. 7. 지리(地理)
《신당서》의 지리지는 권37부터 권43까지 총 7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당나라의 행정 구역과 지리 정보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3. 8. 선거(選擧)
《신당서》의 〈선거지〉(選擧志)에서는 당나라의 관리 선발 제도를 설명하고 있다. 이 제도의 핵심은 과거 제도였다.3. 9. 백관(百官)
《신당서》의 〈백관지(百官志)〉는 당나라의 관료 체계와 각 관직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다. 이 〈백관지〉는 총 4개의 권(卷)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권46은 백관1, 권47은 백관2, 권48은 백관3, 권49는 백관 4(상, 하)로 나뉜다.3. 10. 병(兵)
《신당서》〈병(兵)〉은 당나라의 군사 제도와 조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당나라의 군사 제도는 부병제(府兵制)를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이는 권50에 해당한다.3. 11. 식화(食貨)
《신당서》〈식화지〉는 당나라의 경제 정책과 재정 운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총 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식화 1 (권51): 식화(食貨) 1
- 식화 2 (권52): 식화(食貨) 2
- 식화 3 (권53): 식화(食貨) 3
- 식화 4 (권54): 식화(食貨) 4
- 식화 5 (권55): 식화(食貨) 5
3. 12. 형법(刑法)
신당서 〈지〉(志) 제46은 형법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당나라의 법률과 형벌 제도 전반을 다룬다.3. 13. 예문(藝文)
《신당서》 〈예문지〉는 당나라 시대의 서적 목록과 학술 동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목록은 경(經), 사(史), 자(子), 집(集)의 4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부는 다시 여러 개의 소분류로 나뉜다.4. 표(表)
wikitable
권 | 제목 | 목록 | 비고 | |
---|---|---|---|---|
권61 | 표1 | 재상(宰相) 上 | ||
권62 | 표2 | 재상(宰相) 中 | ||
권63 | 표3 | 재상(宰相) 下 | ||
권64 | 표4 | 방진(方鎭) 1 | ||
권65 | 표5 | 방진(方鎭) 2 | ||
권66 | 표6 | 방진(方鎭) 3 | ||
권67 | 표7 | 방진(方鎭) 4 | ||
권68 | 표8 | 방진(方鎭) 5 | ||
권69 | 표9 | 방진(方鎭) 6 | ||
권70上 | 표10上 | 종실세계(宗室世系) 上 | ||
권70下 | 표10下 | 종실세계(宗室世系) 下 | ||
권71上 | 표11上 | 재상세계(宰相世系) 1-上 | 배씨(裵氏), 한유씨(漢劉氏), 하남유씨(河南劉氏) | |
권71下 | 표11下 | 재상세계(宰相世系) 1-下 | 소씨(蕭氏), 두씨(竇氏), 진씨(陳氏), 봉씨(封氏), 양씨(楊氏), 고씨(高氏), 방씨(房氏), 우문씨(宇文氏) | |
권72上 | 표12上 | 재상세계(宰相世系) 2-上 | ||
권72中 | 표12中 | 재상세계(宰相世系) 2-中 | 왕씨(王氏), 위씨(魏氏), 온씨(溫氏), 대씨(戴氏), 후씨(侯氏), 잠씨(岑氏) | |
권72下 | 표12下 | 재상세계(宰相世系) 2-下 | 장씨(張氏), 마씨(馬氏), 저씨(褚氏), 최씨(崔氏), 우씨(于氏) | |
권73上 | 표13上 | 재상세계(宰相世系) 3-上 | ||
권73下 | 표13下 | 재상세계(宰相世系) 3-下 | ||
권74上 | 표14上 | 재상세계(宰相世系) 4-上 | ||
권74下 | 표14下 | 재상세계(宰相世系) 4-下 | 구양씨(歐陽氏), 적씨(狄氏), 원씨(袁氏), 요씨(姚氏), 누씨(婁氏), 두로씨(豆盧氏), 주씨(周氏), 길씨(吉氏), 고씨(顧氏), 주씨(朱氏), 당씨(唐氏) | |
권75上 | 표15上 | 재상세계(宰相世系) 5-上 | ||
권75下 | 표15下 | 재상세계(宰相世系) 5-下 |
4. 1. 재상(宰相)
《신당서》의 재상표는 역대 재상들의 명단과 가계 정보를 제공한다. 재상표는 상, 중, 하(권61-63)와 재상세계 1-5(권71-75)로 구성되어 있다. 재상세계 1-상(권71상)에는 배씨(裵氏), 한유씨(漢劉氏), 하남유씨(河南劉氏)가 기록되어 있다. 재상세계 1-하(권71하)에는 소씨(蕭氏), 두씨(竇氏), 진씨(陳氏), 봉씨(封氏), 양씨(楊氏), 고씨(高氏), 방씨(房氏), 우문씨(宇文氏)가 기록되어 있다. 재상세계 2-중(권72중)에는 왕씨(王氏), 위씨(魏氏), 온씨(溫氏), 대씨(戴氏), 후씨(侯氏), 잠씨(岑氏)가 기록되어 있다. 재상세계 2-하(권72하)에는 장씨(張氏), 마씨(馬氏), 저씨(褚氏), 최씨(崔氏), 우씨(于氏)가 기록되어있다. 재상세계 4-하(권74하)에는 구양씨(歐陽氏), 적씨(狄氏), 원씨(袁氏), 요씨(姚氏), 누씨(婁氏), 두로씨(豆盧氏), 주씨(周氏), 길씨(吉氏), 고씨(顧氏), 주씨(朱氏), 당씨(唐氏)가 기록되어 있다.4. 2. 방진(方鎭)
《신당서》의 방진(方鎭) 관련 표는 권64부터 권69까지 총 6개로 구성되어 있다. 이 표들은 당나라 시대 지방 군벌 세력인 방진의 변천 과정을 보여준다.권 | 제목 | 목록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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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64 | 표4 | 방진(方鎭) 1 | |
권65 | 표5 | 방진(方鎭) 2 | |
권66 | 표6 | 방진(方鎭) 3 | |
권67 | 표7 | 방진(方鎭) 4 | |
권68 | 표8 | 방진(方鎭) 5 | |
권69 | 표9 | 방진(方鎭) 6 |
4. 3. 종실세계(宗室世系)
colspan="2" width="13%"| | 제목 | 목록 | 비고 | |
---|---|---|---|---|
권70上 | 표10上 | 종실세계(宗室世系) 上 | ||
권70下 | 표10下 | 종실세계(宗室世系) 下 |
4. 4. 재상세계(宰相世系)
《신당서》의 재상세계(宰相世系)는 재상을 배출한 주요 가문의 가계도를 보여주는 표이다. 표는 권71부터 권75까지 수록되어 있으며, 각 가문의 시조부터 당나라 대까지의 주요 인물들의 관계를 나타낸다.권 | 제목 | 목록 |
---|---|---|
권71上 | 재상세계(宰相世系) 1-上 | 배씨(裵氏), 한유씨(漢劉氏), 하남유씨(河南劉氏) |
권71下 | 재상세계(宰相世系) 1-下 | 소씨(蕭氏), 두씨(竇氏), 진씨(陳氏), 봉씨(封氏), 양씨(楊氏), 고씨(高氏), 방씨(房氏), 우문씨(宇文氏) |
권72上 | 재상세계(宰相世系) 2-上 | |
권72中 | 재상세계(宰相世系) 2-中 | 왕씨(王氏), 위씨(魏氏), 온씨(溫氏), 대씨(戴氏), 후씨(侯氏), 잠씨(岑氏) |
권72下 | 재상세계(宰相世系) 2-下 | 장씨(張氏), 마씨(馬氏), 저씨(褚氏), 최씨(崔氏), 우씨(于氏) |
권73上 | 재상세계(宰相世系) 3-上 | |
권73下 | 재상세계(宰相世系) 3-下 | |
권74上 | 재상세계(宰相世系) 4-上 | |
권74下 | 재상세계(宰相世系) 4-下 | 구양씨(歐陽氏), 적씨(狄氏), 원씨(袁氏), 요씨(姚氏), 누씨(婁氏), 두로씨(豆盧氏), 주씨(周氏), 길씨(吉氏), 고씨(顧氏), 주씨(朱氏), 당씨(唐氏) |
권75上 | 재상세계(宰相世系) 5-上 | |
권75下 | 재상세계(宰相世系) 5-下 |
5. 열전(列傳)
'''열전(列傳)'''은 당나라 시대의 다양한 인물들의 삶과 업적을 기록한 부분이다.
- '''후비(后妃)'''
태목황후 두씨, 문덕황후 장손씨, 태종현비 서혜, 고종폐후 왕씨, 측천황후 무씨, 화사황후 조씨(和思皇后 趙氏), 서인 위씨, 상관소용(上官昭容), 숙명황후 유씨(肅明皇后 劉氏), 소성황후 두씨(昭成皇后 竇氏), 현종폐후 왕씨(玄宗廢后 王氏), 정순황후 무씨, 원헌황후 양씨(元獻皇后 楊氏), 현종귀비 양씨등 황후와 후궁들의 삶을 다룬다.
- '''종실(宗室)'''
《신당서》 〈종실〉 편에서는 당나라 황족들의 삶과 그들의 정치적 역할을 조명한다.
남양공 이연백, 초왕 이진, 필왕 이장, 옹왕 이회, 순왕 이의, 채열왕 이울, 정효왕 이관, 양왕 이징, 촉왕 이담 등이 기록되어 있다.
- '''공주(公主)'''
신당서 〈열전〉 제8은 세조 1명, 고조 19명, 태종 21명, 고종 3명, 중종 8명, 예종 11명, 현종 29명, 숙종 7명, 대종 18명, 덕종 11명, 순종 11명, 헌종 18명, 목종 8명, 경종 3명, 문종 4명, 무종 7명, 선종 11명, 의종 8명, 희종 2명, 소종 11명 등 여러 황제의 공주들에 대한 기록이다. 이들은 황제의 딸로서, 각자의 삶과 혼인 관계 등을 통해 당나라 황실의 일면을 보여준다.
- '''당 건국 세력'''
당나라 건국 초기에는 여러 군웅들이 할거하며 각축을 벌였다. 이들 중 이밀은 수나라 말기 최대 군벌 세력 중 하나였으며, 왕세충은 수나라의 마지막 황제 양동을 옹립했다가 찬탈하여 정(鄭)나라를 세웠다. 두건덕은 하북 지역에서 세력을 떨치며 당나라에 대항했다.
이밀, 왕세충, 두건덕 등은 당나라 건국의 주요 경쟁자들이었다.
- '''초기 명신(名臣)'''
당나라 초기의 정치는 방현령, 두여회, 위징 등 명신들이 이끌었다. 이들은 당 태종을 보좌하여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태평성대를 이루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방현령과 두여회는 당 태종의 가장 중요한 참모였다. 방현령은 당나라 초기의 법률과 제도를 정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두여회는 군사 전략과 외교 문제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위징은 당 태종에게 직언을 아끼지 않은 강직한 신하였다. 그는 황제의 잘못을 비판하고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조언했다. 당 태종은 위징의 쓴소리를 경청하고 받아들여 정치를 개선해 나갔다.
이 외에도 우세남, 이백약, 잠문본 등 여러 명신들이 당나라 초기의 정치에 참여하여 각자의 능력을 발휘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당나라는 안정과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 '''제이번장(諸夷蕃將)'''
사대내(史大柰)는 돌궐 출신으로 당나라에 귀순하여 활약한 장수이다. 풍앙(馮盎)은 영남(嶺南) 지역의 유력자로 당에 귀부하여 충성을 다했다. 아사나사이(阿史那社爾)는 돌궐 출신으로 당나라에 투항하여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아사나충(阿史那忠)은 아사나사이의 동생으로, 형과 함께 당나라에 충성을 다했다. 집실사력(執失思力)은 돌궐 출신으로 당 태종에게 귀부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계필하력(契苾何力)은 철륵(鐵勒) 부족 출신으로 당나라의 장수로 활약하며 여러 이민족을 정벌하는 데 공을 세웠다.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백제 출신으로 당나라에 투항하여 장군이 되었으며, 백제 부흥 운동을 진압하고 토번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이근행(李謹行)은 말갈 출신으로 당나라의 장수가 되어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천남생(泉男生)은 고구려 연개소문의 아들로, 당나라에 투항하여 고구려 멸망에 기여했다. 이다조(李多祚)는 말갈 출신으로 당나라의 장수가 되어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논궁인(論弓仁)은 토번 출신으로 당나라에 귀순하여 장군이 되었다. 손유정(孫惟貞)은 당나라의 장수로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울지승(尉遲勝)은 우전 출신으로 당나라에 귀순하여 장군이 되었다. 상가고(尙可孤)는 당나라의 장수로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배분(裴玢)은 당나라의 장수로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 '''명장(名將)'''
당나라의 군사를 이끌었던 뛰어난 장수들의 업적을 기록한다.
- '''이정'''(李靖): 당나라 초기의 명장으로, 돌궐 정벌 등 많은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 '''이적'''(李勣): 당나라 초기의 명장으로, 고구려 정벌 등 많은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 '''곽자의'''(郭子儀): 안사의 난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당나라 중기의 명장이다.
이 외에도 굴돌통(屈突通), 울지공(尉遲恭), 장공근(張公謹), 진경(秦瓊), 당검(唐儉), 단지현(段志玄), 유홍기(劉弘基), 은개산(殷開山), 유정회(劉政會), 허소(許紹), 정지절(程知節), 시소(柴紹), 임괴(任瓌), 구화(丘和), 후군집(侯君集), 장량(張亮), 설만균(薛萬均), 고검(高儉), 곽효각(郭孝恪), 장검(張儉), 왕방익(王方翼), 소열(蘇烈), 설인귀(薛仁貴), 정무정(程務挺), 왕효걸(王孝傑), 당선(唐璿), 장인원(張仁愿), 왕준(王晙), 유인궤(劉仁軌), 배행검(裴行儉), 누사덕(婁師德), 흑치상지(黑齒常之), 이다조(李多祚), 곽건관(郭虔瓘), 곽지운(郭知運), 왕군착(王君㚟), 장수규(張守珪), 왕충사(王忠嗣), 우선객(牛仙客), 가서한(哥舒翰), 고선지(高仙芝), 봉상청(封常淸), 이광필(李光弼), 이사업(李嗣業), 마린(馬璘), 이포옥(李抱玉), 노사공(路嗣恭), 내전(來瑱), 전신공(田神功), 후희일(侯希逸), 최녕(崔寧), 엄려(嚴礪), 왕사례(王思禮), 노경(魯炅), 왕난득(王難得), 신운경(辛雲京), 풍하청(馮河淸), 이봉(李芃), 이숙명(李叔明), 곡환(曲環), 왕건휴(王虔休), 노군(盧群), 이원소(李元素), 노사매(盧士玫), 영호창(令狐彰), 장효충(張孝忠), 강일지(康日知), 이유(李洧), 유옹(劉澭), 전홍정(田弘正), 왕승원(王承元), 우원익(牛元翼), 사효장(史孝章), 이성(李晟), 마수(馬燧), 혼감(渾瑊), 양조성(楊朝晟), 대휴안(戴休顔), 양혜원(陽惠元), 이원량(李元諒), 이관(李觀), 한유괴(韓遊瓌), 두희전(杜希全), 형군아(邢君牙), 고숭문(高崇文), 이신(伊愼), 주충량(朱忠亮), 유창예(劉昌裔), 범희조(范希朝), 왕악(王鍔), 맹원양(孟元陽), 왕서요(王栖曜), 유창(劉昌), 조창(趙昌), 이경략(李景略), 임적간(任迪簡), 장만복(張萬福), 고고(高固), 이광진(李光進), 오중윤(烏重胤), 왕패(王沛), 양원경(楊元卿), 조화(曹華), 고우(高瑀), 유면(劉沔), 석웅(石雄) 등 많은 장수들이 당나라를 위해 활약했다.
- '''유학(儒學)'''
서문원(徐文遠), 육덕명(陸德明), 조헌(曹憲), 안사고(顔師古), 공영달(孔穎達) 등은 유학을 연구하고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구양순(歐陽詢), 주자사(朱子奢), 장사형(張士衡), 장후윤(張後胤), 개문달(蓋文達), 곡나률(谷那律), 소덕언(蕭德言), 경파(敬播), 나도종(羅道琮) 등도 유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낭여령(郎餘令), 서제담(徐齊聃), 심백의(沈伯儀), 노경순(路敬淳), 왕원감(王元感), 왕소종(王紹宗), 팽경직(彭景直), 노찬(盧粲), 윤지장(尹知章), 장제현(張齊賢), 류충(柳沖), 마회소(馬懷素), 공약사(孔若思) 등은 유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학문적 깊이를 더했다.
저무량(褚無量), 원행충(元行沖), 진정절(陳貞節), 시경본(施敬本), 노이빙(盧履冰), 왕중구(王仲丘), 강자원(康子元), 조동희(趙冬曦), 담조(啖助), 위동(韋彤), 진경(陳京), 창당(暢當), 임온(林蘊), 위공숙(韋公肅), 허강좌(許康佐) 등은 유학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전파하는 데 힘썼다.
- '''문예(文藝)'''
신당서 〈문예열전(文藝列傳)〉은 문인들의 문학 작품과 예술 활동을 소개하는 부분이다. 여기에는 원랑, 가덕인, 채윤공, 사언, 최신명, 유연우, 장창령, 최행공, 두심언, 왕발, 원만경 등이 포함된다.
이적, 위원단, 유윤제, 심전기, 송지간, 염조은, 윤원개, 유헌, 이옹, 려향, 왕한, 손적, 이백, 왕유, 정건, 소영사, 소원명 등도 이 〈문예열전〉에 포함된다.
이화, 맹호연, 유태진, 소설, 우소, 최원한, 우공이, 이익, 노륜, 구양첨, 이하, 오무릉, 이상은, 설봉, 이빈, 오융 역시 〈문예열전〉에 등장한다.
- '''충의(忠義)'''
하후단(夏侯端), 유감(劉感), 상달(常達), 경군홍(敬君弘), 여자장(呂子臧), 왕행민(王行敏), 나사신(羅士信), 장도원(張道源), 이육덕(李育德), 고예(高叡), 안금장(安金藏), 왕동교(王同皎), 오보안(吳保安), 이징(李憕), 노혁(盧奕), 장개연(張介然), 무피(無詖) 등이 국가에 충성을 다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당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절개를 지킨 충신들이다.
- '''탁행(卓行)'''
원덕수(元德秀), 권고(權皐), 견제(甄濟), 양성(陽城), 사공도(司空圖)는 뛰어난 덕행을 실천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덕을 쌓고 실천하여, 당나라 시대에 귀감이 되었다.
- '''효우(孝友)'''
효우/孝友중국어는 효도와 우애를 실천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모아놓은 신당서의 한 부분이다. 이지본(李知本), 장지관(張志寬) 등 여러 인물들의 효행과 우애가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를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당나라 시대에는 이러한 덕목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효우/孝友중국어 열전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다.
- '''은일(隱逸)'''
왕적(王績)은 속세에 뜻이 없어 벼슬을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가 술을 즐기며 살았다. 손사막(孫思邈)은 수나라와 당나라 때의 명의로, 수 문제와 당 태종이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거절하고 약초 연구와 의술 활동에 전념하였다. 전유암(田遊巖)은 개원 연간에 현종의 부름을 받았으나,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핑계로 거절하고 은둔 생활을 계속하였다. 맹선(孟詵)은 늙어서도 학문에 정진하여 98세까지 살았으며, 저서로는 《보양방》(補養方), 《식경》(食經) 등이 있다. 왕우정(王友貞)은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태산에 들어가 도사로 살았다. 왕희이(王希夷)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많은 책을 읽었으며, 과거에 합격했으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은둔 생활을 하였다. 이원개(李元愷)는 도가에 심취하여 은둔 생활을 하였으며, 저서로는 《오성현주》(五星玄珠)가 있다. 위대경(衛大經)은 도술을 즐겨 행하였으며, 벼슬을 하지 않고 산에 들어가 은둔 생활을 하였다. 무유서(武攸緖)는 측천무후의 조카로, 측천무후가 주나라를 건국한 후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은둔 생활을 하였다. 백이충(白履忠)은 과거에 합격했으나 간신 이임보에게 미움을 받아 벼슬을 얻지 못하고 은둔 생활을 하였다. 오긍(吳兢)은 당나라의 역사가로, 《당서》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은둔 생활을 하였다. 노홍(盧鴻)은 현종이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거절하고 초당을 짓고 은둔 생활을 하였다. 오균(吳筠)은 도교에 심취하여 여러 산을 돌아다니며 은둔 생활을 하였다. 반사정(潘師正)은 도교에 심취하여 숭산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으며, 현종이 여러 차례 불렀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사마승정(司馬承禎)은 도교에 심취하여 천태산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으며, 저서로는 《좌망론》(坐忘論), 《천은자》(天隱子) 등이 있다. 하지장(賀知章)은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도사가 되어 은둔 생활을 하였다. 진계(秦系)는 시에 능하였으며, 벼슬을 버리고 호숫가에 집을 짓고 은둔 생활을 하였다. 장지화(張志和)는 도교에 심취하여 호숫가에서 배를 타고 다니며 은둔 생활을 하였다. 손술예(孫述睿)는 도교에 심취하여 여러 산을 돌아다니며 은둔 생활을 하였다. 육우(陸羽)는 차(茶)에 대한 연구로 유명하며, 《다경》(茶經)을 저술하였다. 최근(崔覲)은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둔 생활을 하였다. 육구몽(陸龜蒙)은 벼슬에 뜻이 없어 강호에 은둔하며 시를 짓고 살았다.
- '''순리(循吏)'''
위인수(韋仁壽), 진군빈(陳君賓), 장윤제(張允濟), 이소립(李素立), 손지원(孫至遠), 설대정(薛大鼎), 가돈이(賈敦頤), 전인회(田仁會), 배회고(裴懷古), 위경준(韋景駿), 이혜등(李惠登), 나향(羅向), 위단(韋丹), 노홍선(盧弘宣), 설원상(薛元賞), 하역우(何易于) 등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친 훌륭한 관리들이다. 이들은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고, 정의를 실현하며, 사회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 '''방기(方技)'''
이순풍(李淳風)은 천문, 역법, 수학에 능통했던 인물로, 당 태종 때 태사령(太史令)을 지냈다. 그는 인덕력(麟德曆)을 제정하고, 《典要》, 《乙巳占》, 《秘閣錄》 등 다양한 저서를 남겼다. 견권(甄權)은 수나라 때 의술로 명성을 떨쳤으며, 당나라 건국 후 태의서승(太醫署丞)에 임명되었다. 그는 침술에 능했고, 《鍼經》, 《明堂圖》 등을 저술했다.
원천강(袁天綱)은 수나라 말기에 명성을 얻은 술사로, 당 태종의 부름을 받아 관상, 풍수, 점술 등에 대한 자문에 응했다. 설이(薛頤)는 천문, 역법, 점술에 능통했으며, 당 고조 때 태사승(太史丞)을 지냈다. 명숭엄(明崇儼)은 뛰어난 의술과 방술로 당 고종과 측천무후의 총애를 받았으며, 정요대부(正諫大夫)에 임명되었다.
상헌보(尙獻甫)는 당 예종 때 태사령(太史令)을 지낸 천문학자로, 역법 개정에 참여했다. 엄선사(嚴善思)는 점술과 도참에 능통하여 측천무후의 신임을 얻었다. 두생(杜生)은 의술과 도교에 정통했으며, 장과(張果)는 신선술로 유명하여 당 현종의 부름을 받았다. 강무(姜撫)는 천문, 역법, 점술에 능통했고, 상도무(桑道茂)는 의술과 침술로 명성을 떨쳤다.
- '''열녀(列女)'''
신당서 〈열녀전〉은 절개와 정절을 지킨 여성들의 삶을 기록한 부분이다. 당나라 시대의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일부 여성들의 사례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배숙영(裴淑英): 남편을 따라 전쟁터에 나가 극진히 보살폈다.
양경 처 왕씨(楊慶 妻 王氏): 남편이 죽은 후 재혼하지 않고 절개를 지켰다.
방현령 처 노씨(房玄齡 妻 盧氏): 남편 방현령이 병에 걸리자 자신의 눈을 빼서 바치려 할 정도로 지극한 정성을 보였다.
왕난영(王蘭英): 도적에게 잡혀갔으나 끝까지 저항하며 절개를 지켰다.
양삼안 처 이씨(楊三安 妻 李氏): 남편이 죽은 후 시부모를 봉양하고 자식을 키우며 꿋꿋하게 살았다.
가효녀(賈孝女):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게 복수했다.
왕아족(王阿足): 남편을 대신해 징병에 응했다.
이 외에도 많은 여성들이 등장하며, 이들의 삶은 당시 사회에서 여성에게 요구되었던 덕목을 보여주는 동시에,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간 여성들의 용기를 보여준다.
- '''외척(外戚)'''
《신당서》 〈외척열전(外戚列傳)〉은 황후나 후궁의 친척으로 권력을 행사한 인물들의 행적을 다룬다. 여기에는 독고회은(獨孤懷恩), 무사확(武士彠), 위온(韋溫), 주인궤(周仁軌), 왕인교(王仁皎), 양국충(楊國忠), 이소(李翛), 정광(鄭光) 등이 포함된다.
- '''환자(宦者)'''
당 중기 이후 환관들은 군사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 황제의 폐립마저 좌우했다. 이러한 환관들의 정치 개입은 당나라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
신당서에는 환관들의 전기인 〈환자전〉이 상, 하 두 편으로 나뉘어 있다. 여기에는 양사욱, 고력사, 정원진, 어조은, 유정량, 토돌승최, 마존량, 구사량, 양복광 등 당나라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환관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보국, 왕수징, 유극명, 전영자, 양복공, 유계술, 한전회, 장언홍 등도 〈환자전〉에 포함되어 그들의 행적을 상세히 살펴볼 수 있다.
- '''혹리(酷吏)'''
색원례(索元禮)는 후관 출신으로, 측천무후 때 추밀원의 관리가 되어 잔혹한 고문을 일삼았다. 내준신(來俊臣) 역시 가혹한 형벌을 남용하여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후사지(侯思止)는 내준신의 부하로, 비슷한 방식으로 악명을 떨쳤다. 왕홍의(王弘義)는 측천무후의 명을 받아 가혹한 고문을 자행했다. 곽홍패(郭弘霸)는 왕홍의와 함께 잔혹한 관리로 기록된다. 요소지(姚紹之)는 형벌을 가혹하게 집행하여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주이정(周利貞)은 내준신의 잔당으로, 그의 악행을 이어받았다. 왕욱(王旭)은 가혹한 형벌로 백성들을 억압했다. 최기(崔器)는 내준신의 부하로, 가혹한 고문 기술을 전수받았다. 모약허(毛若虛)는 최기와 함께 잔혹한 행위를 일삼았다. 경우(敬羽)는 측천무후 치하에서 가혹한 관리로 활동했다.
- '''번진위박(藩鎭魏博), 번진진기(藩鎭鎭冀), 번진노룡(藩鎭盧龍), 번진치청횡해(藩鎭淄靑橫海), 번진선무장의택로(藩鎭宣武彰義澤潞)'''
당나라 말기에 각지에서 번진(藩鎭)들이 할거하면서 중앙 정부와 대립하거나, 번진 내부에서 권력 다툼이 벌어지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졌다.
번진위박(藩鎭魏博)은 전승사(田承嗣)가 위박(魏博) 지역을 장악한 이후, 그의 가문이 대대로 절도사(節度使)를 세습하며 세력을 떨쳤다. 사헌성(史憲誠), 하진도(何進滔), 악언정(樂彦禎) 등이 주요 인물이며, 특히 나홍신(羅弘信)은 번진의 세력을 크게 확장시켰다.
번진진기(藩鎭鎭冀)는 이보신(李寶臣)이 진기(鎭冀) 지역에서 세력을 키운 이후, 왕무준(王武俊)이 그 뒤를 이어 번진을 다스렸다. 왕정주(王廷湊), 왕원규(王元逵) 등이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번진노룡(藩鎭盧龍)은 이회선(李懷仙)으로부터 시작되어, 주도(朱滔), 유평(劉怦), 주극융(朱克融) 등이 절도사를 지냈다. 이후 이재의(李載義), 양지성(楊志誠), 장중무(張仲武), 장윤신(張允伸), 장공소(張公素), 이무훈(李茂勛), 이전충(李全忠), 유인공
5. 1. 후비(后妃)
태목황후 두씨, 문덕황후 장손씨, 태종현비 서혜, 고종폐후 왕씨, 측천황후 무씨, 화사황후 조씨(和思皇后 趙氏), 서인 위씨, 상관소용(上官昭容), 숙명황후 유씨(肅明皇后 劉氏), 소성황후 두씨(昭成皇后 竇氏), 현종폐후 왕씨(玄宗廢后 王氏), 정순황후 무씨, 원헌황후 양씨(元獻皇后 楊氏), 현종귀비 양씨등 황후와 후궁들의 삶을 다룬다.5. 2. 종실(宗室)
《신당서》 〈종실〉 편에서는 당나라 황족들의 삶과 그들의 정치적 역할을 조명한다.남양공 이연백, 초왕 이진, 필왕 이장, 옹왕 이회, 순왕 이의, 채열왕 이울, 정효왕 이관, 양왕 이징, 촉왕 이담 등이 기록되어 있다.
5. 3. 공주(公主)
신당서 〈열전〉 제8은 세조 1명, 고조 19명, 태종 21명, 고종 3명, 중종 8명, 예종 11명, 현종 29명, 숙종 7명, 대종 18명, 덕종 11명, 순종 11명, 헌종 18명, 목종 8명, 경종 3명, 문종 4명, 무종 7명, 선종 11명, 의종 8명, 희종 2명, 소종 11명 등 여러 황제의 공주들에 대한 기록이다. 이들은 황제의 딸로서, 각자의 삶과 혼인 관계 등을 통해 당나라 황실의 일면을 보여준다.5. 4. 당 건국 세력
당나라 건국 초기에는 여러 군웅들이 할거하며 각축을 벌였다. 이들 중 이밀은 수나라 말기 최대 군벌 세력 중 하나였으며, 왕세충은 수나라의 마지막 황제 양동을 옹립했다가 찬탈하여 정(鄭)나라를 세웠다. 두건덕은 하북 지역에서 세력을 떨치며 당나라에 대항했다.이밀, 왕세충, 두건덕 등은 당나라 건국의 주요 경쟁자들이었다.
5. 5. 초기 명신(名臣)
당나라 초기의 정치는 방현령, 두여회, 위징 등 명신들이 이끌었다. 이들은 당 태종을 보좌하여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태평성대를 이루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방현령과 두여회는 당 태종의 가장 중요한 참모였다. 방현령은 당나라 초기의 법률과 제도를 정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두여회는 군사 전략과 외교 문제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위징은 당 태종에게 직언을 아끼지 않은 강직한 신하였다. 그는 황제의 잘못을 비판하고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조언했다. 당 태종은 위징의 쓴소리를 경청하고 받아들여 정치를 개선해 나갔다.
이 외에도 우세남, 이백약, 잠문본 등 여러 명신들이 당나라 초기의 정치에 참여하여 각자의 능력을 발휘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당나라는 안정과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5. 6. 제이번장(諸夷蕃將)
사대내(史大柰)는 돌궐 출신으로 당나라에 귀순하여 활약한 장수이다. 풍앙(馮盎)은 영남(嶺南) 지역의 유력자로 당에 귀부하여 충성을 다했다. 아사나사이(阿史那社爾)는 돌궐 출신으로 당나라에 투항하여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아사나충(阿史那忠)은 아사나사이의 동생으로, 형과 함께 당나라에 충성을 다했다. 집실사력(執失思力)은 돌궐 출신으로 당 태종에게 귀부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계필하력(契苾何力)은 철륵(鐵勒) 부족 출신으로 당나라의 장수로 활약하며 여러 이민족을 정벌하는 데 공을 세웠다.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백제 출신으로 당나라에 투항하여 장군이 되었으며, 백제 부흥 운동을 진압하고 토번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이근행(李謹行)은 말갈 출신으로 당나라의 장수가 되어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천남생(泉男生)은 고구려 연개소문의 아들로, 당나라에 투항하여 고구려 멸망에 기여했다. 이다조(李多祚)는 말갈 출신으로 당나라의 장수가 되어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논궁인(論弓仁)은 토번 출신으로 당나라에 귀순하여 장군이 되었다. 손유정(孫惟貞)은 당나라의 장수로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울지승(尉遲勝)은 우전 출신으로 당나라에 귀순하여 장군이 되었다. 상가고(尙可孤)는 당나라의 장수로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배분(裴玢)은 당나라의 장수로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5. 7. 명장(名將)
당나라의 군사를 이끌었던 뛰어난 장수들의 업적을 기록한다.- '''이정'''(李靖): 당나라 초기의 명장으로, 돌궐 정벌 등 많은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 '''이적'''(李勣): 당나라 초기의 명장으로, 고구려 정벌 등 많은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 '''곽자의'''(郭子儀): 안사의 난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당나라 중기의 명장이다.
이 외에도 굴돌통(屈突通), 울지공(尉遲恭), 장공근(張公謹), 진경(秦瓊), 당검(唐儉), 단지현(段志玄), 유홍기(劉弘基), 은개산(殷開山), 유정회(劉政會), 허소(許紹), 정지절(程知節), 시소(柴紹), 임괴(任瓌), 구화(丘和), 후군집(侯君集), 장량(張亮), 설만균(薛萬均), 고검(高儉), 곽효각(郭孝恪), 장검(張儉), 왕방익(王方翼), 소열(蘇烈), 설인귀(薛仁貴), 정무정(程務挺), 왕효걸(王孝傑), 당선(唐璿), 장인원(張仁愿), 왕준(王晙), 유인궤(劉仁軌), 배행검(裴行儉), 누사덕(婁師德), 흑치상지(黑齒常之), 이다조(李多祚), 곽건관(郭虔瓘), 곽지운(郭知運), 왕군착(王君㚟), 장수규(張守珪), 왕충사(王忠嗣), 우선객(牛仙客), 가서한(哥舒翰), 고선지(高仙芝), 봉상청(封常淸), 이광필(李光弼), 이사업(李嗣業), 마린(馬璘), 이포옥(李抱玉), 노사공(路嗣恭), 내전(來瑱), 전신공(田神功), 후희일(侯希逸), 최녕(崔寧), 엄려(嚴礪), 왕사례(王思禮), 노경(魯炅), 왕난득(王難得), 신운경(辛雲京), 풍하청(馮河淸), 이봉(李芃), 이숙명(李叔明), 곡환(曲環), 왕건휴(王虔休), 노군(盧群), 이원소(李元素), 노사매(盧士玫), 영호창(令狐彰), 장효충(張孝忠), 강일지(康日知), 이유(李洧), 유옹(劉澭), 전홍정(田弘正), 왕승원(王承元), 우원익(牛元翼), 사효장(史孝章), 이성(李晟), 마수(馬燧), 혼감(渾瑊), 양조성(楊朝晟), 대휴안(戴休顔), 양혜원(陽惠元), 이원량(李元諒), 이관(李觀), 한유괴(韓遊瓌), 두희전(杜希全), 형군아(邢君牙), 고숭문(高崇文), 이신(伊愼), 주충량(朱忠亮), 유창예(劉昌裔), 범희조(范希朝), 왕악(王鍔), 맹원양(孟元陽), 왕서요(王栖曜), 유창(劉昌), 조창(趙昌), 이경략(李景略), 임적간(任迪簡), 장만복(張萬福), 고고(高固), 이광진(李光進), 오중윤(烏重胤), 왕패(王沛), 양원경(楊元卿), 조화(曹華), 고우(高瑀), 유면(劉沔), 석웅(石雄) 등 많은 장수들이 당나라를 위해 활약했다.
5. 8. 유학(儒學)
서문원(徐文遠), 육덕명(陸德明), 조헌(曹憲), 안사고(顔師古), 공영달(孔穎達) 등은 유학을 연구하고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구양순(歐陽詢), 주자사(朱子奢), 장사형(張士衡), 장후윤(張後胤), 개문달(蓋文達), 곡나률(谷那律), 소덕언(蕭德言), 경파(敬播), 나도종(羅道琮) 등도 유학 발전에 기여하였다.낭여령(郎餘令), 서제담(徐齊聃), 심백의(沈伯儀), 노경순(路敬淳), 왕원감(王元感), 왕소종(王紹宗), 팽경직(彭景直), 노찬(盧粲), 윤지장(尹知章), 장제현(張齊賢), 류충(柳沖), 마회소(馬懷素), 공약사(孔若思) 등은 유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학문적 깊이를 더했다.
저무량(褚無量), 원행충(元行沖), 진정절(陳貞節), 시경본(施敬本), 노이빙(盧履冰), 왕중구(王仲丘), 강자원(康子元), 조동희(趙冬曦), 담조(啖助), 위동(韋彤), 진경(陳京), 창당(暢當), 임온(林蘊), 위공숙(韋公肅), 허강좌(許康佐) 등은 유학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전파하는 데 힘썼다.
5. 9. 문예(文藝)
신당서 〈문예열전(文藝列傳)〉은 문인들의 문학 작품과 예술 활동을 소개하는 부분이다. 여기에는 원랑, 가덕인, 채윤공, 사언, 최신명, 유연우, 장창령, 최행공, 두심언, 왕발, 원만경 등이 포함된다.이적, 위원단, 유윤제, 심전기, 송지간, 염조은, 윤원개, 유헌, 이옹, 여향, 왕한, 손적, 이백, 왕유, 정건, 소영사, 소원명 등도 이 〈문예열전〉에 포함된다.
이화, 맹호연, 유태진, 소설, 우소, 최원한, 우공이, 이익, 노륜, 구양첨, 이하, 오무릉, 이상은, 설봉, 이빈, 오융 역시 〈문예열전〉에 등장한다.
5. 10. 충의(忠義)
하후단(夏侯端), 유감(劉感), 상달(常達), 경군홍(敬君弘), 여자장(呂子臧), 왕행민(王行敏), 나사신(羅士信), 장도원(張道源), 이육덕(李育德), 고예(高叡), 안금장(安金藏), 왕동교(王同皎), 오보안(吳保安), 이징(李憕), 노혁(盧奕), 장개연(張介然), 무피(無詖) 등이 국가에 충성을 다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당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절개를 지킨 충신들이다.5. 11. 탁행(卓行)
원덕수(元德秀), 권고(權皐), 견제(甄濟), 양성(陽城), 사공도(司空圖)는 뛰어난 덕행을 실천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덕을 쌓고 실천하여, 당나라 시대에 귀감이 되었다.5. 12. 효우(孝友)
효우/孝友중국어는 효도와 우애를 실천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모아놓은 신당서의 한 부분이다. 이지본(李知本), 장지관(張志寬) 등 여러 인물들의 효행과 우애가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를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당나라 시대에는 이러한 덕목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효우/孝友중국어 열전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다.5. 13. 은일(隱逸)
왕적(王績)은 속세에 뜻이 없어 벼슬을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가 술을 즐기며 살았다. 손사막(孫思邈)은 수나라와 당나라 때의 명의로, 수 문제와 당 태종이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거절하고 약초 연구와 의술 활동에 전념하였다. 전유암(田遊巖)은 개원 연간에 현종의 부름을 받았으나,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핑계로 거절하고 은둔 생활을 계속하였다. 맹선(孟詵)은 늙어서도 학문에 정진하여 98세까지 살았으며, 저서로는 《보양방》(補養方), 《식경》(食經) 등이 있다. 왕우정(王友貞)은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태산에 들어가 도사로 살았다. 왕희이(王希夷)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많은 책을 읽었으며, 과거에 합격했으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은둔 생활을 하였다. 이원개(李元愷)는 도가에 심취하여 은둔 생활을 하였으며, 저서로는 《오성현주》(五星玄珠)가 있다. 위대경(衛大經)은 도술을 즐겨 행하였으며, 벼슬을 하지 않고 산에 들어가 은둔 생활을 하였다. 무유서(武攸緖)는 측천무후의 조카로, 측천무후가 주나라를 건국한 후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은둔 생활을 하였다. 백이충(白履忠)은 과거에 합격했으나 간신 이임보에게 미움을 받아 벼슬을 얻지 못하고 은둔 생활을 하였다. 오긍(吳兢)은 당나라의 역사가로, 《당서》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은둔 생활을 하였다. 노홍(盧鴻)은 현종이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거절하고 초당을 짓고 은둔 생활을 하였다. 오균(吳筠)은 도교에 심취하여 여러 산을 돌아다니며 은둔 생활을 하였다. 반사정(潘師正)은 도교에 심취하여 숭산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으며, 현종이 여러 차례 불렀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사마승정(司馬承禎)은 도교에 심취하여 천태산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으며, 저서로는 《좌망론》(坐忘論), 《천은자》(天隱子) 등이 있다. 하지장(賀知章)은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도사가 되어 은둔 생활을 하였다. 진계(秦系)는 시에 능하였으며, 벼슬을 버리고 호숫가에 집을 짓고 은둔 생활을 하였다. 장지화(張志和)는 도교에 심취하여 호숫가에서 배를 타고 다니며 은둔 생활을 하였다. 손술예(孫述睿)는 도교에 심취하여 여러 산을 돌아다니며 은둔 생활을 하였다. 육우(陸羽)는 차(茶)에 대한 연구로 유명하며, 《다경》(茶經)을 저술하였다. 최근(崔覲)은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둔 생활을 하였다. 육구몽(陸龜蒙)은 벼슬에 뜻이 없어 강호에 은둔하며 시를 짓고 살았다.5. 14. 순리(循吏)
위인수(韋仁壽), 진군빈(陳君賓), 장윤제(張允濟), 이소립(李素立), 손지원(孫至遠), 설대정(薛大鼎), 가돈이(賈敦頤), 전인회(田仁會), 배회고(裴懷古), 위경준(韋景駿), 이혜등(李惠登), 나향(羅向), 위단(韋丹), 노홍선(盧弘宣), 설원상(薛元賞), 하역우(何易于) 등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친 훌륭한 관리들이다. 이들은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고, 정의를 실현하며, 사회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5. 15. 방기(方技)
이순풍(李淳風)은 천문, 역법, 수학에 능통했던 인물로, 당 태종 때 태사령(太史令)을 지냈다. 그는 인덕력(麟德曆)을 제정하고, 《典要》, 《乙巳占》, 《秘閣錄》 등 다양한 저서를 남겼다. 견권(甄權)은 수나라 때 의술로 명성을 떨쳤으며, 당나라 건국 후 태의서승(太醫署丞)에 임명되었다. 그는 침술에 능했고, 《鍼經》, 《明堂圖》 등을 저술했다.원천강(袁天綱)은 수나라 말기에 명성을 얻은 술사로, 당 태종의 부름을 받아 관상, 풍수, 점술 등에 대한 자문에 응했다. 설이(薛頤)는 천문, 역법, 점술에 능통했으며, 당 고조 때 태사승(太史丞)을 지냈다. 명숭엄(明崇儼)은 뛰어난 의술과 방술로 당 고종과 측천무후의 총애를 받았으며, 정요대부(正諫大夫)에 임명되었다.
상헌보(尙獻甫)는 당 예종 때 태사령(太史令)을 지낸 천문학자로, 역법 개정에 참여했다. 엄선사(嚴善思)는 점술과 도참에 능통하여 측천무후의 신임을 얻었다. 두생(杜生)은 의술과 도교에 정통했으며, 장과(張果)는 신선술로 유명하여 당 현종의 부름을 받았다. 강무(姜撫)는 천문, 역법, 점술에 능통했고, 상도무(桑道茂)는 의술과 침술로 명성을 떨쳤다.
5. 16. 열녀(列女)
신당서 〈열녀전〉은 절개와 정절을 지킨 여성들의 삶을 기록한 부분이다. 당나라 시대의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일부 여성들의 사례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배숙영(裴淑英): 남편을 따라 전쟁터에 나가 극진히 보살폈다.
- 양경 처 왕씨(楊慶 妻 王氏): 남편이 죽은 후 재혼하지 않고 절개를 지켰다.
- 방현령 처 노씨(房玄齡 妻 盧氏): 남편 방현령이 병에 걸리자 자신의 눈을 빼서 바치려 할 정도로 지극한 정성을 보였다.
- 왕난영(王蘭英): 도적에게 잡혀갔으나 끝까지 저항하며 절개를 지켰다.
- 양삼안 처 이씨(楊三安 妻 李氏): 남편이 죽은 후 시부모를 봉양하고 자식을 키우며 꿋꿋하게 살았다.
- 가효녀(賈孝女):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게 복수했다.
- 왕아족(王阿足): 남편을 대신해 징병에 응했다.
이 외에도 많은 여성들이 등장하며, 이들의 삶은 당시 사회에서 여성에게 요구되었던 덕목을 보여주는 동시에,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간 여성들의 용기를 보여준다.
5. 17. 외척(外戚)
《신당서》 〈외척열전(外戚列傳)〉은 황후나 후궁의 친척으로 권력을 행사한 인물들의 행적을 다룬다. 여기에는 독고회은(獨孤懷恩), 무사확(武士彠), 위온(韋溫), 주인궤(周仁軌), 왕인교(王仁皎), 양국충(楊國忠), 이소(李翛), 정광(鄭光) 등이 포함된다.5. 18. 환자(宦者)
당 중기 이후 환관들은 군사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 황제의 폐립마저 좌우했다. 이러한 환관들의 정치 개입은 당나라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신당서에는 환관들의 전기인 〈환자전〉이 상, 하 두 편으로 나뉘어 있다. 여기에는 양사욱, 고력사, 정원진, 어조은, 유정량, 토돌승최, 마존량, 구사량, 양복광 등 당나라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환관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보국, 왕수징, 유극명, 전영자, 양복공, 유계술, 한전회, 장언홍 등도 〈환자전〉에 포함되어 그들의 행적을 상세히 살펴볼 수 있다.
5. 19. 혹리(酷吏)
색원례(索元禮)는 후관 출신으로, 측천무후 때 추밀원의 관리가 되어 잔혹한 고문을 일삼았다. 내준신(來俊臣) 역시 가혹한 형벌을 남용하여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후사지(侯思止)는 내준신의 부하로, 비슷한 방식으로 악명을 떨쳤다. 왕홍의(王弘義)는 측천무후의 명을 받아 가혹한 고문을 자행했다. 곽홍패(郭弘霸)는 왕홍의와 함께 잔혹한 관리로 기록된다. 요소지(姚紹之)는 형벌을 가혹하게 집행하여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주이정(周利貞)은 내준신의 잔당으로, 그의 악행을 이어받았다. 왕욱(王旭)은 가혹한 형벌로 백성들을 억압했다. 최기(崔器)는 내준신의 부하로, 가혹한 고문 기술을 전수받았다. 모약허(毛若虛)는 최기와 함께 잔혹한 행위를 일삼았다. 경우(敬羽)는 측천무후 치하에서 가혹한 관리로 활동했다.5. 20. 번진위박(藩鎭魏博), 번진진기(藩鎭鎭冀), 번진노룡(藩鎭盧龍), 번진치청횡해(藩鎭淄靑橫海), 번진선무장의택로(藩鎭宣武彰義澤潞)
당나라 말기에 각지에서 번진(藩鎭)들이 할거하면서 중앙 정부와 대립하거나, 번진 내부에서 권력 다툼이 벌어지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졌다.
- '''번진위박(藩鎭魏博)'''은 전승사(田承嗣)가 위박(魏博) 지역을 장악한 이후, 그의 가문이 대대로 절도사(節度使)를 세습하며 세력을 떨쳤다. 사헌성(史憲誠), 하진도(何進滔), 악언정(樂彦禎) 등이 주요 인물이며, 특히 나홍신(羅弘信)은 번진의 세력을 크게 확장시켰다.
- '''번진진기(藩鎭鎭冀)'''는 이보신(李寶臣)이 진기(鎭冀) 지역에서 세력을 키운 이후, 왕무준(王武俊)이 그 뒤를 이어 번진을 다스렸다. 왕정주(王廷湊), 왕원규(王元逵) 등이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 '''번진노룡(藩鎭盧龍)'''은 이회선(李懷仙)으로부터 시작되어, 주도(朱滔), 유평(劉怦), 주극융(朱克融) 등이 절도사를 지냈다. 이후 이재의(李載義), 양지성(楊志誠), 장중무(張仲武), 장윤신(張允伸), 장공소(張公素), 이무훈(李茂勛), 이전충(李全忠), 유인공(劉仁恭) 등이 노룡 지역을 통치했다.
- '''번진치청횡해(藩鎭淄靑橫海)'''는 이정기(李正己)가 치청(淄靑)과 횡해(橫海) 지역을 장악하면서 시작되었다. 그의 아들 정일화(程日華)와 이전략(李全略)이 번진을 이어받았다.
- '''번진선무장의택로(藩鎭宣武彰義澤潞)'''는 유현좌(劉玄佐)가 선무(宣武) 지역에서 세력을 일으킨 이후, 오소성(吳少誠), 유오(劉悟) 등이 번진을 이끌었다. 이좌지(李佐之), 이사회(李師晦), 이비(李丕) 등도 주요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5. 21. 돌궐(突厥), 토번(吐蕃), 회흘(回鶻), 사토(沙陀), 북적(北狄), 동이(東夷), 서역(西域), 남만(南蠻)
신당서는 당나라 주변의 여러 민족과 국가들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특히 한국과 관련된 고구려, 백제, 신라에 대한 기록은 한국사의 관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돌궐(突厥)'''
- '''토번(吐蕃)'''
- '''회흘(回鶻)'''
- '''사토(沙陀)'''
- '''북적(北狄)''' : 거란(契丹), 해(奚), 실위(室韋), 말갈(靺鞨), 발해(渤海)
- '''동이(東夷)''' : 고려(高麗), 백제(百濟), 신라(新羅), 왜국(倭國), 일본(日本)
- '''서역(西域)'''
- '''남만(南蠻)'''
신당서 동이 일본전에는 "천지(天智)가 죽자, 아들 천무(天武)가 섰다. 죽자, 아들 총지(總持)가 섰다. 함형 원년(670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평정을 축하했고, 이후 조금씩 한(夏)나라의 소리를 익히고 왜의 이름을 싫어하여, 다시 일본으로 칭했다."고 적혀 있으며, 670년 이후에 총지(혹은 지토 천황)가 "왜"를 고쳐 "일본"으로 칭했다는 기술이 있다.[5] 구당서에서는 왜와 일본이 병립된 상태로 쓰여 있지만, 신당서에서는 "일본전"으로 묶여 있다. 다만, "사신이 스스로 말하길, 국(國)이 최근에 해가 뜨는 곳에 위치하여, 그것을 이름으로 삼았다. 혹은 일본은 작은 나라이고, 왜에 병합되었기 때문에, 그 호칭을 빼앗았다."고 하며, 왜가 소국이었던 일본을 병합하여 국호를 취했다는 다른 이야기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수나라의 개황 말에 천황가의 메다리시비고(目多利思比孤)가 처음으로 중국과 통했다고 쓰여 있다. 그리고, 일본 왕의 성은 아매씨(阿毎氏)이며, 축자성(筑紫城)에 있던 진무(神武)가 대화(大和)를 통치하여 천황이 되었다는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천어중주/아메노미나카누시zh-tw부터 언염/우가야후키아에즈zh-tw까지의 32세, 천황은 진무 천황 이하 황극 천황까지 열거되어 있다. 또한 그 후에는 광효 천황까지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다만, 천어중주부터 언염까지의 세수는 송사 일본전에서는 "23세"이며, 모든 이름이 열거되어 수가 일치하므로, "32세"는 2와 3을 뒤바꾼 가능성이 높다. 고사기나 일본서기와 다른 기사로 주목받는다.[6]
또한 견당사에 참여한 귤일세/다치바나노 하야나리일본어나 공해/구카이일본어 등의 이름이 보인다. 마지막으로 ""에 대해 언급되어 있으며 (시대는 불분명), 이는 야쿠시마, 하야토, 타네가시마를 가리키는 것으로도 여겨진다.
쿠빌라이 칸은 "일본에 금과 은이 풍부하게 생산된다고 한다"는 신당서의 내용에 흥미를 느껴 일본과 친교를 맺으려 했으나, 당시 집권자인 호조 도키무네에게 거절당했다. 이는 쿠빌라이의 역린을 건드려 몽골의 일본 침략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5. 22. 간신(姦臣)
李林甫중국어, 陳希烈중국어 등은 당나라의 대표적인 간신들이다. 이들은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권력을 남용하고 정치를 어지럽혔다. 특히, 李林甫중국어는 현종의 신임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고, 조정의 요직을 독점하여 국정을 농단했다. 盧杞중국어, 崔胤중국어, 崔昭緯중국어, 柳璨중국어, 蔣玄暉중국어, 張廷範중국어, 氏叔琮중국어, 朱友恭중국어등도 당나라의 간신으로 기록되어있다.5. 23. 반신(叛臣)
신당서 〈반신전〉(叛臣傳)은 당나라에 반기를 든 인물들의 행적을 기록한 열전이다. 상편과 하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편에는 복고회은(僕固懷恩), 주지광(周智光), 양숭의(梁崇義), 이회광(李懷光), 진소유(陳少游), 이기(李錡)가, 하편에는 이충신(李忠臣), 교림(喬琳), 고변(高駢), 주매(朱玫), 왕행유(王行瑜), 진경선(陳敬瑄), 이거천(李巨川)이 기록되어 있다.이들은 주로 번진(藩鎭) 세력으로, 중앙 정부에 대한 불만이나 개인적인 야망으로 인해 반란을 일으켰다. 예를 들어, 복고회은은 당나라의 충신이었으나, 억울한 누명을 쓰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회광은 공을 세우고도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자 반란을 일으켰다.
반신전에 기록된 인물들의 행적은 당나라의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불안을 반영하며, 당나라 멸망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5. 24. 역신(逆臣)
안록산은 영주의 호족 출신으로, 개원 말기에 유주 (幽州) 절도사 장수규의 휘하에서 공을 세워 평로절도사가 되었다. 이후 천보 연간에 이임보의 후원을 받아 3개 절도사를 겸임하며 권력을 장악하고 양국충과의 갈등 끝에 반란을 일으켰다. 756년 낙양에서 스스로 대연(大燕) 황제를 칭했지만, 내분과 당나라군의 반격으로 757년 아들 안경서에게 살해당했다.사사명은 안록산의 부장으로, 안록산의 난에 가담하여 하북 지역을 장악했다. 안경서 사후 군대를 이끌고 당나라에 항복했으나, 다시 배반하고 759년 대연(大燕) 황제를 칭했다. 그러나 761년, 아들 사조의에게 살해당했다.
황소는 염상 (鹽商) 출신으로, 875년 왕선지의 난에 가담하여 세력을 키웠다. 왕선지 사후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 광주를 점령하고 장안으로 진격하여 881년 대제(大齊)를 건국하고 황제를 칭했다. 그러나 당나라군의 반격과 내부 분열로 세력이 약화되어 884년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이 외에도 이희렬, 주자, 진종권, 동창 등 당나라에 반역한 인물들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6. 부록
진신당서표(進新唐書表)는 신당서를 편찬하여 바치는 글이다.
참조
[1]
논문
Chaste and Filial Women in Chinese Historical Writings of the Eleventh Century
[2]
문서
From a description by Wang Yingling, in his Yuhai (玉海)
[3]
서적
Chinese History: A New Manual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Harvard-Yenching Institute Monograph Series
[4]
서적
中国小説史略 上
ちくま学芸文庫
[5]
문서
金石文と古代史料の研究
燃焼社
[6]
위키문헌
新唐書/卷220#.E5.80.AD.EF.BC.8C.E6.97.A5.E6.9C.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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