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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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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성량은 명나라 시대의 군인으로, 요동 지역을 방어하는 요동 총병관을 두 번 역임했다. 그는 여진족 방어에 기여했으며, 인삼과 모피 교역으로 부를 축적하고 사병 부대를 조직했다. 이성량은 건주 여진과 해서 여진 간의 분열을 유도하여 요동의 안정을 도모했으며, 누르하치의 세력 확장을 지원했다. 그러나 군비 유용 등의 혐의로 탄핵되어 실직하기도 했다. 그는 차하르 몽골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영원 백에 봉해지기도 했다. 이성량은 누르하치와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후금 건국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명나라 멸망에도 일정한 책임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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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량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성량의 초상
이성량의 초상
개인 정보
이름이성량 (李成梁)
출생1526년
출생지요동 톄링 (현재의 랴오닝성)
사망1615년
경력
소속명나라
활동 시기명나라 만력제 시기
주요 역할요동 총병
가계
아버지이빈 (李斌)
아들이여송 (李如松)
이여백 (李如柏)
이여매 (李如梅)
이여정 (李如楨)
이여계 (李如桂)
이여남 (李如楠)
이여장 (李如樟)
이여경 (李如경)
기타
업적여진족 세력 약화, 요동 지역 안정화
평가명나라 후기 군사적 영향력 행사, 사치스러운 생활과 권력 남용으로 비판도 존재

2. 생애

이성량은 요동 철령위(鐵嶺衛)의 지휘첨사(指揮僉事) 관직을 세습했지만, 1570년 요동총병관(遼東總兵官)이 되어 여진족 방어를 담당하였다. 그는 요동의 인삼과 모피 교역을 장악하여 부를 축적했고, 사병 부대를 조직하여 건주여진해서여진 등 여진족의 내부 분열을 도모하였다. 이 과정에서 청태조 누르하치가 이성량의 후원을 받아 세력을 확장했다.[3]

1570년대 차하르 몽골이 동쪽으로 이동하여 랴오둥 지역을 자주 괴롭히자, 이성량은 랴오둥 지역 총병으로 재직하면서 차하르를 상대로 5번의 승리를 거두었다. 1579년 그는 "영원백" (寧遠伯)으로 임명되었으며, 이 작위는 1580년에 세습 작위가 되었다.

연도사건
1575년 (만력 3년)투멘 칸이 10만 명이 넘는 기병 부대를 이끌고 의주와 금주 지역을 공격하고 약탈했지만 이성량에게 패했다.
1578년 (만력 6년)투멘 칸이 다시 공격하여 랴오양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또다시 패배했다.
1579년 (만력 7년)투멘 칸은 의주/금주 지역을 공격하여 광녕(廣寧, 오늘날의 베이닝)을 포위했다.
1580년 (만력 8년)투멘 칸은 4만 명의 기병을 모았고, 각 말 뒤에는 소 한 마리와 양 세 마리가 따랐다.
1581년 (만력 9년)투멘 칸은 9개의 부족을 모아 총 10만 명의 병력과 말을 동원하여 베이징에 도달하려는 의도로 랴오둥을 공격했다.



만력 11년 음력 2월, 이성량은 왕고(王杲)의 아들 아타이(Atai)를 공격하여 왕고의 손녀 사위이자 누르하치의 할아버지 기오창가(Giocangga, 覺昌安)와 아버지 탁시(Taksi, 塔克世)가 사망하였다. 기오창가와 탁시는 왕고의 일계였지만 이땐 이미 이성량에게 귀부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이성량과 니칸 와일란(Nikan Wailan, 尼堪外蘭)이 고의로 기오창가 부자를 죽게 하였다. 어쨌든 이에 대해 누르하치는 매우 한탄해 하며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무슨 이유로 해를 입었는가? 너희는 곧 우리의 불구대천지원수이다! 너는 더 할 말이 있는가?(我祖·父何故被害? 汝等乃我不共戴天之讐也, 汝何辭)"라고 하였다.[4] 이성량은 일이 틀어진 것을 알고 탁시의 땅과 사람, 말을 누르하치에게 보냈고 그에게 도독(都督) 지휘직함을 주어 보상하였다. 후에 누르하치는 여진 부락을 통일하고 후금(後金)을 세운 후에,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는 것을 명분으로 명(明)을 배신한다는 '칠대한(七大恨)'의 하나로 삼았다.

이성량은 만년에 누르하치와 매우 밀접하게 왕래하였으며, 한 차례 누르하치의 병사를 빌어 조선(朝鮮)을 점하고 자립하겠다는 야심을 보이기도 했다.[5]

오랫동안 요동을 통괄하며 지방 실력자로서 사병을 기르고 할거한 이성량은, 한편으로는 군비 유용 등의 부정부패와 전횡이 많아 1591년에 탄핵되어 실직되었으며, 치안 상황의 악화로 인해 일단 복직했지만, 1608년에 다시 파면되었다.

2. 1. 가계와 초기 생애

이성량의 가계는 성주이며, 직계 조상은 고려 원종 때의 관료이자 학자였던 이조년의 친형 이천년의 6대손이라고 전해진다. 이천년의 아들이자 이성량의 5대조 이승경은 원나라에서 벼슬을 지냈고 고려에서는 문하시랑 평장사에 이르렀다. 이승경의 아들 이영은 고려인으로 중국에 정착하였고, 이후 고려인끼리 혼인하며 가계를 이었다. 이영의 4대손이 바로 이성량이다.

이성량은 랴오닝성 톄링 출신으로, 요동 철령위의 지휘첨사 관직을 세습했지만, 1570년 요동총병관이 되어 여진족 방어를 담당하였다. 그는 요동의 인삼과 모피 교역을 장악하여 부를 축적했고, 사병 부대를 조직하여 여진족의 내부 분열을 도모하였다. 이 과정에서 청태조 누르하치가 이성량의 후원을 받아 세력을 확장했다.[3]

철령이씨(鐵嶺李氏)는 원래 당나라 말기에 압록강을 건너 철령에 왔다고 전해지며, 조선에서는 이 일파가 성주이씨에서 나왔다고 한다. 14세기 말 시조 이응니가 조선에서 철령으로 이사했고, 후에 명의 위소에 편입되어 관직에 나갔다고 전해진다. 족보는 철령위지휘첨사 이영을 1세로 하며, 그 위에 다섯 선조가 있다고 전해지지만, 정혁으로 인해 기록이 파손되어 고증하기 어렵다고 한다.

이성량 가계는 다음과 같다.

세대이름비고
1세이영철령위지휘첨사
2세이문빈철령위지휘첨사 세습
3세이춘영(혹은 이춘미)철령위지휘첨사 세습, 5개의 방(房)으로 나뉨
4세이경철령위지휘첨사 세습, 아들 4명
5세이성량요동총병관



이성량은 랴오닝성 철령시의 군인 집안에서 태어나 가난에 시달렸으나, 40세에 관직에 임명된 후 장거정의 후원으로 요동 총병이 되었다. 그는 요동 총병으로 두 번 임명되어 각각 22년, 8년 동안 재임했다. 이성량은 조선에서 이민 온 이영의 후손으로,[1] 여진족을 분열시켜 요동 안정에 기여했지만, 군비 유용 등의 부정부패로 탄핵되어 파면되었다. 아들로는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이여송사르후 전투에 참가한 이여백 등이 있다.

2. 2. 요동 총병관 재임

1570년 융경제의 명으로 이성량은 요동총병관(遼東總兵官)이 되어, 당시 침입이 격렬했던 여진족 방어를 담당하였다. 이성량은 요동의 인삼과 모피 교역을 장악하여 부를 축적하는 한편, 사적으로 모병한 군대와 함께 투항한 여진인, 조선인, 몽골인 가운데 선발한 정예병을 직속으로 거느리는 일종의 사병 부대를 조직하였다.[3] 건주여진(建州女眞)과 해서여진(海西女眞) 등 여진족이 명과의 교역권을 둘러싸고 싸우는 것에 개입해 내부 분열을 도모하였고, 요동의 안정에 큰 공적을 올렸다. 이 시기 이성량의 후원을 얻어 세력 확대에 성공한 것이 후의 청태조(淸太祖) 누르하치(Nurhaci, 努爾哈赤)이다.

이성량은 요동 총병으로 두 번 임명되어 각각 22년, 8년 동안 재임했다.[1] 오랫동안 요동을 통괄하며 지방 실력자로서 사병을 기르고 할거한 이성량은 군비 유용 등의 부정부패와 전횡이 많아 1591년 만력제에 의해 탄핵되어 실직되었으며, 치안 상황의 악화로 인해 복직했지만, 1608년에 다시 파면되었다.

2. 3. 몽골과의 전쟁

1570년대에 차하르 몽골이 동쪽으로 이동하여 랴오둥 지역을 자주 괴롭혔다. 이성량은 랴오둥 지역 총병으로 재직하면서 차하르를 상대로 5번의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들을 통해 1579년 그는 "영원백" (寧遠伯)으로 임명되었으며, 이 작위는 1580년에 세습 작위가 되었다.

연도사건
1575년 (만력 3년)투멘 칸이 10만 명이 넘는 기병 부대를 이끌고 의주와 금주 지역을 공격하고 약탈했지만 이성량에게 패했다.
1578년 (만력 6년)투멘 칸이 다시 공격하여 랴오양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또다시 패배했다.
1579년 (만력 7년)투멘 칸은 의주/금주 지역을 공격하여 광녕(廣寧, 오늘날의 베이닝)을 포위했다.
1580년 (만력 8년)투멘 칸은 4만 명의 기병을 모았고, 각 말 뒤에는 소 한 마리와 양 세 마리가 따랐다.
1581년 (만력 9년)투멘 칸은 9개의 부족을 모아 총 10만 명의 병력과 말을 동원하여 베이징에 도달하려는 의도로 랴오둥을 공격했다.


2. 4. 누르하치와의 관계

만력 11년(1583) 음력 2월, 이성량은 왕고(王杲)의 아들 아타이(Atai)를 공격하여 왕고의 손녀 사위이자 누르하치의 할아버지 기오창가(Giocangga, 覺昌安)와 아버지 탁시(Taksi, 塔克世)가 이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기오창가와 탁시는 왕고의 일계였지만 이땐 이미 이성량에게 귀부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이성량과 니칸 와일란(Nikan Wailan, 尼堪外蘭)이 고의로 기오창가 부자를 죽게 하였다. 일부에서는 오인 사살되었다고 전한다. 어쨌든 이에 대해 누르하치는 매우 한탄해 하며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무슨 이유로 해를 입었는가? 너희는 곧 우리의 불구대천지원수이다! 너는 더 할 말이 있는가?(我祖·父何故被害? 汝等乃我不共戴天之讐也, 汝何辭)"라고 하였다.[4] 이성량은 일이 틀어진 것을 알고 탁시의 땅과 사람, 말을 누르하치에게 보냈고 그에게 도독(都督) 지휘직함을 주어 보상하였다. 후에 누르하치는 여진 부락을 통일하고 후금(後金)을 세운 후에,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는 것을 명분으로 명(明)을 배신한다는 '칠대한(七大恨)'의 하나로 삼았다.

이성량은 만년에 누르하치와 매우 밀접하게 왕래하였으며, 한 차례 누르하치의 병사를 빌어 조선(朝鮮)을 점하고 자립하겠다는 야심을 보이기도 했다.[5] 변방 업무에 있어 항상 말하길, 누르하치가 충심을 보이기만 한다면 '추천하고 보증을 서서 관직을 지급(保奏給官)'하게 하거나, 심지어는 '땅을 버리고 유인(棄地以餌之)'하게 하였으며, 이로 인해 송일한(宋一韓)과 웅정필(熊廷弼) 등에게 탄핵당하였다.[6][7] 건주여진이 요동에서 굴기할 수 있었고 심지어 청(淸)이 수립될 수 있었던 것도 이성량의 비호 그리고 배신과도 관련이 있으며, 청병이 입관(入關)하는 것에 있어서도 복선이 되었다. 간접적으로는 이후 명조가 중원의 농민군을 진압할 방법이 없게 하였고, 이로 인해 명조가 멸망에 있어 일정한 책임이 있다고 본다.[5]

건주 여진의 추장 왕고(王杲중국어)는 1573년에 명나라 도시를 자주 공격하고 푸순에서 명나라 지휘관을 살해했다. 명나라는 징벌 원정을 보내 왕고를 다른 여진 부족인 하다의 땅으로 몰아냈고, 그곳에서 훌룬 연맹의 지도자 왕태에게 사로잡혀 이성량에게 넘겨졌으며, 이성량은 1575년에 그를 처형했다.

왕고의 죽음은 이미 건주 여진 추장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던 권력 투쟁을 격화시켰다. 조이창가와 그의 아들 탁시는 왕고의 지배를 받던 인물이었으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성량과 은밀히 동맹을 맺었다. 1582년 왕고의 아들 아태(阿台중국어)가 명나라 영토를 침략했다. 명나라는 징벌 원정을 보냈고, 조이창가와 탁시는 이를 지원했다. 아태의 요새에 대한 그 후의 공격에서, 불분명한 상황 속에서, 조이창가와 탁시는 이성량의 지휘하에 명나라 군대와 함께 했던 경쟁 여진 지도자 니칸 와이란에게 살해되었다. 이성량은 탁시의 아들 누르하치를 보호하고 지원했다. 이성량의 지원으로 누르하치는 그 후 몇 년 동안 점차 세력을 키웠다. 1583년 초, 누르하치는 이성량으로부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작은 여진 추장이 될 권리를 얻었다.

이후 이성량은 1587년 니칸 와이란을 누르하치에게 넘겼고, 누르하치는 즉시 그를 참수했다.

일련의 동맹과 군사적 승리를 통해 누르하치는 결국 자신의 지도력 아래 모든 여진 부족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후금의 칸으로 자칭한 그는 명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1618년에 선포된 명나라에 대한 그의 7대 죄상 중 첫 번째는 "아무런 정당성 없이 우리 국경을 침범하여 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살해했다"는 것이었다.

이성량은 여진 부족과의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 시기에 이성량의 후원을 얻어 세력 확장에 성공한 것이 훗날 의 태조 누르하치이다.

3. 가계

철령이씨는 원래 당(唐) 말기에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철령에 왔다고 전한다. 조선에서는 이 일파가 성주 이씨에서 나왔으며, 14세기 말 시조 이응니가 가솔을 이끌고 조선에서 철령으로 이사하였고, 후에 명의 위소(衛所)에 편입되어 관직에 나갔다고 전한다.

족보는 철령위지휘첨사(鐵嶺衛指揮僉事) 이영을 1세로 하고, 그 위에 이철근수, 이화산, 이하패노, 이파도리, 이응니 다섯 선조가 있다고 전한다. 다만 '정혁(명청교체)으로 인하여 비문 기록이 파손되어 보계는 흩어졌으니, 이로 인해 다섯 분의 조상이 고증할 도리가 없어 감히 망령되이 주석을 달지 못한다'고 전하고 있다.

2세 이문빈, 3세 이춘영 혹은 이춘미, 4세 이경은 모두 철령위지휘첨사를 세습하였다. 이경은 아들 4명이 있었는데, 이중 장남이 바로 이성량이었다고 전한다. 이씨는 3대 춘(春)자 돌림에서 다섯 명이 다섯개의 방(房)으로 나뉘었으며, 이성량 일계가 노장방(老長房), 이하는 차례대로 노이방(老二房), 노삼방(老三房), 노사방(老四房), 노오방(老五房)이라 하였다.

이성량의 아들 아홉 명 중, 이여송, 이여백은 명나라의 총병(總兵)과 참장(參將)이 되었다. 이여송은 결국 몽골족에게 처형되었고, 이여백은 누르하치에게 패배한 후 자결했다.


  • 동생: 이성재
  • 아들: 이여송이여백・이여정・이여장・이여매・이여재・이여오・이여계・이여남 (『명사』이여송전(李如松伝)에 따름)

참조

[1] 웹사이트 李成梁の故郷感情 https://megalodon.jp[...] 中国鉄嶺市政府公式サイト
[2] 웹사이트 총사령관 https://sengokumiman[...]
[3] 서적 동아시아 속의 중국사 혜안 2015
[4] 문서 大淸太祖高皇帝實錄 卷1 癸未歲(1583) 음2월 1일 계미삭
[5] 서적 满洲开国史讲义 中华书局 2006
[6] 서적 清史讲义 中华书局 2010
[7] 서적 明史讲义 中华书局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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