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고 (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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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고는 명나라 시대에 활동한 여진족 인물로, 총명하고 여러 언어와 문자에 능통했으며 점술에도 뛰어났다. 그는 명나라 변경을 침략하고 약탈하며 명나라 관료들을 살해하여 명나라와 대립했다. 1572년 명나라에 투항한 여진족 문제로 명나라와 갈등을 겪었고, 가여익의 실책으로 인해 무순 지역에서 명나라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명나라 군대에 패배하여 도주하다가 1575년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의 여진 이름은 아돌한이며, 청 황실과의 관계에 대한 의문점이 존재한다.
왕고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무순에서 중국어를 배웠을 뿐만 아니라 여러 언어와 문자에도 밝았으며, 점치는 기술에도 정통했다. 명나라 사료는 왕고를 명나라 변경을 자주 침략하고 약탈한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9]
일설에 의하면 왕고의 여진 이름은 '''아돌한'''(阿突罕)이라고 한다.[31] 또한 『동이고략(東夷考略)』에 의하면, 초기 명나라 변경이 침략당하여 명나라 측이 입공을 중지한 후, '''과작'''(科勺)이라는 가짜 이름으로 입공을 했다고도 한다.
조이손(趙爾巽) 등이 편찬한 『청사고(清史稿)』(1928)는 왕고의 민족이나 출신에 대하여 '그의 종족은 모른다(不知其種族)'[32]고 하였으며, 누르하치와의 관계에 대하여서도 언급하지 않았다.[5] 청대사학자 맹삼(孟森)과 이나바 이와키치(稲葉岩吉) (일명 이나바 군잔稲葉君山)은 모두 청대 금기시된 연고와 관련 있다고 주장하였다.[33][34] 이들 주장의 핵심은 '''(1) 왕고=누르하치 외조부 (2) 왕고=아고도독''' 두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왕고는 천생이 총명하여 무순에서 중국어를 배웠을 뿐만 아니라 여러 언어와 문자에도 밝았다. 또한 점치는 기술에도 정통하였다.[9] 왕고는 모국어인 여진어는 물론 중국어나 몽골어에도 능통하였고, 심지어 그 문자도 이해하였다.[40] 일자술(日者術), 즉 무격(巫覡)에도 정통하여 주변 부락 사이에서도 유명하였다.[39]
[1]
서적
『명숙황제세종실록(明肅皇帝世宗實錄)』
2. 생애
건주좌위(建州左衛)의 충샨(Cungšan)이 천순(天順) 연간 이래 명나라에 계속 요청한 결과, 건주여진은 무순관(撫順關, 현재 랴오닝성(遼寧省) 푸순시(撫順市) 동주구東洲區 연반향碾盤鄉 관구촌關口村으로 추정)에 마시(馬市)를 개설하였다. 그러나 현지인들은 말 거래 이익에 의존했기 때문에 명나라 측의 구입가에 불만을 품고 무력시위를 벌이려 하였다.[10] 무순관 마시는 구러성(Gure i hoton, 古勒城)을 거점으로 하는 왕고에게도 요충지였다.[10]
2. 1. 명과의 초기 관계 및 무순관 마시
왕고는 무순에서 중국어를 배웠을 뿐만 아니라 여러 언어와 문자에도 밝았고, 점치는 기술에도 정통하였다.
건주좌위(建州左衛)의 충샨(Cungšan, 董山)이 천순(天順) 연간 이래 명에 계속 요청한 결과, 건주여진은 무순관(撫順關, 현재 랴오닝성(遼寧省) 푸순시(撫順市) 동주구東洲區 연반향碾盤鄉 관구촌關口村으로 추정)에서 마시(馬市)를 개설하였다. 그러나 현지인들은 마시에서의 말 거래로 얻는 이익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명측이 제시한 구입가에 불만을 품고 무력시위를 벌이려 하였다.[10]
무순관 마시는 구러성(Gure i hoton, 古勒城)을 거점으로 하는 왕고에게도 요충지였다.[10]
2. 2. 명 변경 침공과 명 관료 살해
1557년 10월, 왕고는 무순을 기습하여 명나라 수비(守備) 팽문수를 죽이고 일대를 노략하였다.[1] 1562년 5월, 부총병(副總兵) 흑춘이 군대를 이끌고 왕고를 소탕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왕고에게 부식산(婦媳山)에서 매복 공격을 당하여 생포되었고 능지형에 처해져 죽었다.[1] 이후 왕고는 요양, 고산(孤山), 무순, 탕참(湯站) 등을 공격하였고, 지휘(指揮) 왕국주(王國柱)•진기부(陳其孚)•대면(戴冕)•왕중작(王重爵)•양오미(楊五美), 파총(把總) 온란(溫欒)•우란(于欒), 왕수렴(王守廉)•전경(田耕)•유일명(劉一鳴) 등 명나라 무장 십수 명을 살해하였다.[1] 같은 시기 하다의 버일러 왕타이(王台)의 세력이 점차 커지자, 왕고와도 마찰이 자주 발생하였고, 후에 두 사람은 무순관(撫順關) 아래에서 맹세하면서 충돌은 일단락되었다.[1]
2. 3. 깊어지는 대립
융경(隆慶) 6년(1572), 건주여진 출신 하하나(哈哈納) 등 30명이 무순 변방에서 명나라에 투항했다. 명나라 관리가 투항을 받아들이자 왕고는 분개하여 개원(開原)으로 가서 투항자들을 돌려보낼 것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왕고는 왕타이에게 말 한 필과 안장을 바치며 협력을 요청했으나, 왕타이는 이를 거절했다. 난처해진 왕타이는 명나라에 기병 1천여 기를 파견하여 왕고를 동행시켰다.[11]
이때 왕고 부락의 작걸(조치?)(綽乞)이 왕고의 계획을 명나라에 밀고했다. 유격(遊擊) 조보(曹簠)와 파총(把總) 노둔(魯鈍)은 기동력 좋은 병사를 이끌고 출동하여 판장곡(板場谷) 방면에서 귀환하던 여진 부대를 습격하여 수급 5개, 소 66마리, 말과 노새 20마리를 노획하였다. 왕고는 자신의 본거지로 도주하였다.[12]
2. 3. 1. 가여익의 실책
같은 해, 무순의 호시(互市)가 재개되려는 것에 맞춰 가여익이 비어사(備禦使)[13]로 새롭게 취임하였다. 가여익은 명나라의 위엄을 보이려고 각 추장에 대하여 매우 엄격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양측의 관계는 긴장도를 높였다.
종래 관습에서는 무이청(撫夷廳)에 비어사가 나타나면 각 추장은 정해진 순서에 따라 비어사를 알현하고, 거기에 정해진 토산물을 봉헌하면, 말의 품급이 정해지기 시작하였다. 입공(入貢)한 측은 야윈 말이든 다리를 저는 말이든 상관 없이 봉헌하였고, 사전에 신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을 대하는 명나라는 추장들의 요구를 채워주고자, 또한 이적(夷狄)을 기미(羈縻)하는 목적도 있었기에, 양마(良馬, 품질 좋은 말)든 태마(駄馬, 짐말)든 고가로 사들였다. 이즈음 왕고는 자신의 힘을 믿고 스스로를 과시하면서, 호시에서는 자리에 앉아 있는 비어사를 매도하였으며, 술을 마실 때에는 취기에 맡겨 제멋대로 난폭하게 행동하였다. 주위에서는 이를 곤란하게 여겼지만 어쩔 도리 없이 지켜보기만 하였다.
그러나 새롭게 취임한 가여익은 구습을 답습하지 않고, 각 추장을 당(堂) 위에 올리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추장들이 명령을 무시하고 당에 오르려 하자 가여익은 책상을 두드리며 격분하였고, 명령에 따르지 않는 추장 십수 명을 매질하게 하였다. 한편 이즈음은 이전과 다르게 체격이 좋은 말이 많으며 도합 280여 기를 얻었다고 전한다.[14]
가여익은 왕고가 납입한 얼주(櫱酒)나 직미(稷米)에 대하여서도 무상(撫賞, 보상)하는 것을 최대한 억누르는 등의 모습을 보이자, 같은 해 7월 왕고는 같은 불만을 품은 여러 추장을 이끌고 무이청을 뒤로 하고 새외(塞外)로 나왔다. 그곳에서 소를 죽이고 맹약을 맺은 왕고와 추장들은 다시 새내(塞內)로 틈입(闖入)하여, 동주로부터 무순에 이르기까지의 지역을 습격하고 살인과 약탈을 자행하였다. 왕고 등은 비어사 교체를 요구하였다. 참가한 추장은 최소 30명, 최대 60명이었다고 한다.
2. 3. 2. 굴욕의 혈맹
요동순무(巡撫遼東) 장학안(張學顏)은 부총병(副總兵) 조완(趙完)에게 출병을 명했으나, 조완은 지령을 무시하고 응전하지 않았다.[14] 병부(兵部)는 조완을 비난하면서도 여진 군대에 대한 공격이 우선이었기에 처분을 잠시 보류했고, 조완은 여진 기병의 재공격 때 수급 18개를 획득하는 활약을 하였다.[15]
그러나 명군은 왕고 등의 습격을 물리쳤지만, 군의 피해도 커서 왕고 등에게 패배할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다.[16] 명나라가 왕고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하던 중, 왕고 등은 무순, 영전(寧前), 금주(錦州), 의주(義州) 등을 침범했고,[17] 홍타이지(王台吉)가 이끄는 기병 1천여 기와 왕고 등이 이끄는 3천여 기가 각각 무순관에 임박하였다.[18] 비어사 배승조(斐承祖)와 지휘사(指揮使) 정방(丁倣) 등이 왕고에게 경고했지만, 왕고 등은 가여익 처분을 요구하였다.
분수동녕도(分守東寧道) 이악(李鶚)과 개원비병사(開原備兵使) 왕지필(王之弼)은 하다 버일러 왕타이를 방문해 왕고를 단속하였다. 왕타이가 왕고를 따라 무순관에 이르자, 왕지필과 이악은 사자를 보내 왕고와 혈맹을 맺게 하였다. 남쪽으로 마근단보(馬根單堡)까지 왕고의 속령으로 정해졌고, 명 변방 침범을 금하는 한편, 명은 왕고 속령의 투항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서약하였다.[18]
가여익은 파면되었고,[19] 이악과 왕지필은 이적과 맹약을 맺고 국가 위신을 낮췄다는 이유로 감봉 처분을 받았다.[18] 왕고는 무순관에서 왕타이와 맹약을 맺고 약탈한 군민 149명과 말을 반환하였다. 명은 왕고의 입공 자격을 다시 승인했고 왕타이에게는 포상으로 은폐(銀幣)가 주어졌다.[20]
2. 4. 배승조의 맹세 배신과 홍력새 함락
만력(萬曆) 2년(1574) 음7월, 왕고의 영내 주민 4명이 명나라로 망명하였다. 왕고의 측근인 내력홍(來力紅)은 융경(隆慶) 6년(1572) 음9월 말에 체결된 혈맹에 근거하여 무순관으로 향하여 도망자 인도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새 비어사 배승조(裴承祖)가 인도를 거절하였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경고병(警固兵) 5명을 납치하였다. 내력홍의 불손한 태도에 분노한 배승조는 왕고가 입공하는 부재 시기를 노려 내력홍의 요새를 급습하였지만, 도리어 군사 300명과 함께 포위되어 고립무원 상황에 처하였다. 입공 중이었던 왕고는 사태를 알고 돌아가 내력홍과 함께 배승조를 만났다. 그러나 대치가 계속되는 가운데 기다리다 지친 배승조가 왕고의 병사를 참살하면서 긴장 상태는 전투로 발전하였다.
왕고가 무순을 방문하여 화호를 요구하자, 무순소(撫順所) 측은 처음으로 배승조의 위기를 인지하고 파총 유승혁(劉承奕)을 구출하기 위해 파견하였지만, 포로가 된 배승조와 함께 내력홍의 손에 참살되었다. 유승혁은 시체가 갈기갈기 찢어져 발견되었고 배승조는 왕고의 아들 왕타이(王太, 즉 아타이阿太)에 의하여 심장이 도려내진 상태로 발견되었다.[21]
장학안은 왕타이에게 내력홍 등의 생포를 요구하였고, 왕고의 입공 중지를 주청하였다. 공시가 중지되어 휘하 부락이 곤궁에 처해진 것을 이유로 왕고는 투메드(土默特)와 태녕(泰寧) 등 부락[21]을 규합하여 요양(遼陽)과 심양(瀋陽)을 습격하였다. 요동총병관(遼東總兵官) 이성량(李成梁)은 심양에 무장을 나눠 주둔시켰다. 왕고는 여러 부락의 기병 3천 기를 이끌고 오미자충(五味子衝)으로 진입하였지만, 명군에 포위되었고, 기병 병사들은 왕고의 부락으로 도주하였다. 왕고의 부락은 천험의 요새로 성곽이 견고하고 깊은 해자를 설치하였기에 공략하기 어려웠다. 같은 해 음10월, 명군은 포탄과 화기를 소지하고 왕고의 부락을 포위하였고, 요새를 몇 겹으로 둘러싼 목책을 도끼로 부수기 시작하였다. 이성량이 각 무장에게 신속히 성을 함락시킬 것을 명하자 왕고는 3백 명에게 성루 위에서 화살로 항전하게 하였지만, 명군은 불을 놓았고 가옥이나 마초가 모두 불타 하늘이 연기로 뒤덮였으며 여러 부락은 궤멸하였다. 명군은 수급 1,104개를 획득, 배승조 등을 살해한 이들은 모두 목이 달아났으나 왕고는 또다시 도주하였다. 명군은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거의 모든 사람과 가축을 살해하고 약탈하였다.
2. 5. 도주 실패와 최후
만력 3년(1575년) 음력 2월, 왕고는 다시 변방을 침범했지만 명나라 군대에 포위되었다. 왕고는 망괘(蟒褂)와 홍갑(紅甲)을 아하나(阿哈納)에게 주어 미끼로 삼고, 명나라 군대가 그를 추격하는 틈을 타 도주하려 했다. 도주에 성공한 왕고는 태녕위 수바하이(速把亥)에게 가려 했지만, 명나라 군대를 피해 북쪽으로 가는 것은 포기하고 왕타이의 영지를 지나가려 했다.[22]
같은 해 음력 7월 28일, 명나라의 격문을 받은 왕타이는 아들 후르간(Hūrgan, 扈爾干)[23][24]과 함께 왕고를 붙잡아 변방 수비병에게 넘겼다.[25] 음력 8월 6일, 만력제(萬曆帝)는 왕고를 자금성(紫禁城)에 가두도록 명했고, 왕고를 붙잡은 공으로 왕타이에게 용호장군(龍虎將軍)의 훈관을 수여했으며,[26] 왕타이의 아들 2명[27]을 도독첨사(都督僉事)로 승진시키고 은폐(銀幣)를 하사했다.[28] 같은 달 29일, 만력제는 오문(午門) 운루(雲樓)에 올라 요동수(遼東守)로부터 왕고의 신병을 인도받는 헌부례(獻俘禮)를 거행했다.[29] 일자술(日者術)에 능통하여 자신을 불사신이라고 큰소리치던 왕고는 시장에서 책형(磔刑)으로 처형되었고, 아내와 자식 27명은 왕타이에게 귀속되었으나, 아들 아타이(阿台)는 도주했다.[30]
3. 이름
4. 청 황실과의 관계에 관한 의문점
5. 일화
참조
[2]
서적
『만력무공록(萬曆武功錄)』
[3]
서적
『명사(明史)』
[4]
서적
『삼조료사실록총략(三朝遼事實錄總略)』
[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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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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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華書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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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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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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清朝前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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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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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무공록(萬曆武功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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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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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神宗顯皇帝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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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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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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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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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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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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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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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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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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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詳
[26]
서적
東夷考略 (Wikisource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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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詳
[27]
문서
후르간 이외 1명은 삼하투(三馬兎)라는 아들로 보이나 알 수 없다.
[28]
서적
明神宗實錄
不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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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明神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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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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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试论满族姓氏形成发展与演变 - 兼谈抚顺地区的满族姓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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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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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清朝全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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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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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满族宗谱研究
辽宁民族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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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
淸の太祖の顧問龔正陸
https://toyo-bunko.r[...]
東洋文庫
1952-09
[40]
서적
三朝遼事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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