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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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세화는 조선 숙종 때의 문신으로, 1663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정언, 장령 등을 거쳐 광주부윤으로 당상관이 되었으며, 경상도관찰사, 전라도순무사 등 지방관을 역임했다. 숙종 즉위 후 동부승지, 우승지를 거쳐 경상도, 평안도,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인현왕후 폐비를 반대하다가 기사환국으로 퇴출되기도 했다. 갑술환국 이후 호조판서로 복직하여 여러 요직을 거쳤으며, 육조의 판서를 모두 역임하고 지중추부사를 지내다 1701년에 사망했다. 사후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묘는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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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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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직업 | 전직 대한민국 기자, 언론인, 정치인 |
출생 | 1930년 1월 28일 |
사망 | 2014년 1월 10일 (향년 83세) |
본관 | 경주 이씨 |
학력 | |
최종 학력 |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졸업 |
경력 | |
주요 경력 | 동아일보 기자 민주공화당 국회의원 KBS 이사 대한석탄공사 총재 |
수상 | |
주요 수상 | 국민훈장 무궁화장 |
2. 생애
1663년 (현종 4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이 되었다. 1669년 장령을 거쳐 1672년 광주부윤으로 당상관에 올랐다. 이후 경상도관찰사, 전라도순무사를 지내고 1675년 (숙종 즉위) 동부승지, 우승지를 역임했다. 경상도관찰사, 평안도관찰사,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1680년 경신환국 이후 장례원판결사, 평안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형조참판으로 복귀했다가 함경도관찰사로 다시 나갔다. 이후 전라도관찰사, 경상도관찰사를 거쳐 사은 부사로 중국에 다녀왔으나, 인현왕후 폐비에 반대하다 기사환국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갑술환국 이후 복직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1701년에 사망했다.
2. 1. 관직 생활
1663년(현종 4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이 되었다. 1669년에는 장령이 되었으며, 1672년에 광주부윤이 되면서 당상관이 되었다. 이후 경상도관찰사와 전라도순무사를 역임하였다. 숙종 즉위 후 1675년에 동부승지가 되었고, 우승지로 승진했다. 경상도관찰사, 평안도관찰사,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경신환국 이후에는 장례원판결사를 하다가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이후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형조참판으로 내직에 복귀했다가 함경도관찰사로 다시 외직에 나갔다. 이후 전라도관찰사를 거쳐 다시 경상도관찰사가 되었고 사은 부사로 중국에 다녀왔다.2. 2. 갑술환국 이후 활동
갑술환국 이후 호조판서로 복직하여 수어사를 겸했다. 지의금부사, 판의금부사, 지경연사를 역임했다. 호조판서, 공조판서, 형조판서, 좌참찬, 이조판서, 한성부판윤, 병조판서, 예조판서 등 육조의 판서를 두루 거쳤다. 지중추부사로 물러났다가 1701년(숙종 27년) 사망했다.3. 사후
이세화는 사후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이세화 선생 묘는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선유리에 있으며, 1981년 7월 16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60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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