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환국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기사환국은 1689년 숙종 대에 일어난 환국으로, 숙종이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고 인현왕후를 폐위하면서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숙종은 원자 책봉을 반대하는 서인 세력을 숙청하고, 송시열을 사사했다. 이로 인해 인현왕후는 폐위되고 장희빈이 왕비가 되었으며, 남인이 다시 집권하게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사화 - 환국
환국은 조선 시대에 정파 간의 권력 다툼으로 특정 정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다른 정파를 몰아내는 정치적 사건을 의미하며, 왕의 권력 강화, 당파 간의 갈등, 왕세자 문제 등이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 사화 - 경신환국
경신환국은 1680년 숙종 때 서인이 유악 사건과 삼복의 변을 계기로 남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으로, 서인이 요직을 차지하며 조선 정계가 서인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 조선의 정변 - 환국
환국은 조선 시대에 정파 간의 권력 다툼으로 특정 정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다른 정파를 몰아내는 정치적 사건을 의미하며, 왕의 권력 강화, 당파 간의 갈등, 왕세자 문제 등이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 조선의 정변 - 경신환국
경신환국은 1680년 숙종 때 서인이 유악 사건과 삼복의 변을 계기로 남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으로, 서인이 요직을 차지하며 조선 정계가 서인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기사환국 | |
---|---|
사건 개요 | |
이름 | 기사환국 |
원어 이름 | 己巳換局 |
별칭 | 기사사화 (己巳士禍) |
날짜 | 1689년 (숙종 15년) |
장소 | 조선 |
원인 | 소의 장씨(희빈 장씨) 소생의 아들 이윤(경종)을 원자로 삼는가에 대한 문제 |
결과 | 남인의 집권, 서인의 몰락 |
결과 상세 | 송시열 유배 후 사사 |
관련 인물 | |
주요 인물 | 숙종 희빈 장씨 송시열 |
관련 용어 | |
관련 용어 | 환국 |
2. 배경
17세기 후반, 서인과 남인은 당쟁(黨爭)으로 극심하게 대립하였다. 숙종은 자신의 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해 기존의 당파 연합 체제를 버리고 당파를 자주 교체하는 정책을 택하였다. 숙종 초기에 남인이 제2차 예송(禮訟)에서 승리하며 정권을 장악하자, 서인은 정적(政敵)인 남인의 정권 장악에 위기감을 느꼈고, 숙종 또한 남인의 지속적인 집권에 경계심을 품었다. 이는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 등 환국(換局)의 형태로 나타났다.[1]
17세기 후반, 서인과 남인은 당쟁(黨爭)으로 극심하게 대립하였다. 숙종은 자신의 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해 기존의 당파 연합 체제를 버리고 당파를 자주 교체하는 정책을 택하였다. 숙종 초기에 남인이 제2차 예송(禮訟)에서 승리하며 정권을 장악하자, 서인은 정적(政敵)인 남인의 정권 장악에 위기감을 느꼈고, 숙종 또한 남인의 지속적인 집권에 경계심을 품었다. 이는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 등 환국(換局)의 형태로 나타났다.[1]
1688년, 장씨가 아들 윤을 낳자, 숙종은 크게 기뻐하며 이듬해 1689년 1월, 서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윤을 원자로 책봉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책봉했다. 이는 인현왕후가 아직 젊어 후사를 기대할 수 있다는 서인들의 주장을 묵살한 결정이었다.
1688년, 후궁인 장씨가 왕자 윤을 낳았다. 제19대 국왕 숙종은 윤을 세자(왕위 계승 순위 제1위)로 책봉하려 하였으나,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들은 정비인 인현왕후를 지지하였기에 윤의 세자 책봉에 반대하였다. 이를 왕에 대한 반역으로 여긴 숙종은 서인들을 처벌하고, 장씨를 지지한 남인들을 대신하여 요직에 임명하며 정권 교체를 단행하였다.
숙종 시대 조선 조정에는 서인과 남인의 두 파벌이 있었으나, 1680년의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3. 원인
숙종 시대 조선 조정에는 서인과 남인의 두 파벌이 있었으나, 1680년의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숙종의 정비인 인경왕후가 1680년에 아들을 낳지 못한 채 천연두로 사망한 후, 인현왕후가 계비로 책봉되었지만, 수년이 지나도록 아들을 출산하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궁녀였던 장씨는 빼어난 미모로 숙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그녀를 매우 간악하다고 평가한 대비 명성왕후에 의해 궁에서 쫓겨났다.[3] 명성왕후 사후 장씨는 궁으로 복귀하였으나, 숙종의 총애가 날로 더해짐에 따라 그녀는 교만하고 제멋대로인 여인으로 변해 갔고, 신하들이 장씨의 추방을 요구하였으나 숙종은 크게 노하여 그들을 처벌하였다.[3] 장씨가 후궁에 책봉되어 두터운 총애를 받자, 서인들은 대부분 장씨가 일으킬 화를 두려워하여 그녀의 대우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반면 남인들은 장씨를 전적으로 지지하였고,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뚜렷해졌다.
1688년, 장씨는 아들 윤(昀)을 낳았다. 숙종이 왕위에 오른 후 처음으로 태어난 왕자였다.
4. 경과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은 원자 책봉이 시기상조임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숙종은 이를 묵살하고 송시열을 유배 보냈다. 이 과정에서 숙종은 명나라 황제의 예를 들어 송시열의 주장을 반박하고, 서인들을 파면하고 남인을 등용하여 정권을 교체했다.
기사환국이 단행된 지 4개월 만인 1689년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위하고, 1690년에는 원자를 세자로 책봉함과 동시에 장씨를 왕비로 승격시켰다. 이 과정에서 인현왕후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오두인, 박태보 등은 국문을 당해 사망했고, 송시열은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7]
이 사건으로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이 삼정승에 등용되었다. 이후 갑술환국까지 남인이 정권을 유지했다.
4. 1. 장희빈의 등장과 원자 탄생
1688년, 후궁이었던 장씨가 왕자 윤을 낳았다. 숙종은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기에, 왕자 탄생을 매우 기뻐했다.[7] 인경왕후가 1680년에 아들을 낳지 못한 채 천연두로 사망하고, 인현왕후가 계비로 맞이되었지만, 수년이 지나도록 아들을 출산하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장씨는 숙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대비인 명성왕후는 그녀를 매우 간악하다고 평가하여 궁에서 내쫓았다. 명성왕후가 죽은 뒤 장씨는 궁으로 돌아왔고, 숙종의 총애가 날로 더해짐에 따라 교만하고 제멋대로인 여인으로 변해 갔다고 한다. 신하들이 장씨를 내쫓을 것을 요구하였으나 숙종은 크게 노하여 그들을 처벌하였다.[3]
1689년 1월 10일, 숙종은 대신들을 불러 장씨의 아들 윤을 원자(元子)로 삼을 것을 건의했다. 당시 정비였던 인현왕후는 22세였기에 적자가 태어날 가능성이 충분했고, 왕자에게 원자 작위를 내리는 것은 매우 성급한 일이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서인(西人)의 고관들은 반대했다. 그러나 1월 15일, 숙종은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4] 윤을 원자로 책봉하고 장씨를 후궁의 최고 자리인 빈(嬪)으로 격상시켜 '''희빈(禧嬪)'''으로 삼았다.
송시열은 상소를 하여 신종이 28세에 철종을 낳았으나 후궁의 아들이라 하여 번왕(藩王)에 책봉하였다가 적자가 없이 죽자 태자로 책봉되어 신종의 뒤를 이었던 예를 들어 원자 책봉이 이를 때임을 주장하였다.
4. 2. 서인의 반대와 송시열의 상소
숙종은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는데 장소의가 왕자 윤(昀)을 낳자 크게 기뻐하여 원자로 삼고 희빈으로 책봉하려 하였다. 그러나 서인들은 왕비 민씨가 아직 젊으니 후일까지 기다리자고 주장하며 반대했다.[7]
1689년 (숙종 15) 숙종은 서인의 요청을 묵살하고 원자의 명호(名號)를 정하고 장소의를 희빈으로 책봉하였다. 이에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은 신종이 28세에 철종을 낳았으나 후궁의 아들이라 하여 번왕(藩王)에 책봉하였다가 적자가 없이 죽자 태자로 책봉되어 신종의 뒤를 계승하였던 예를 들며, 원자 책봉은 시기상조임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5]
하지만 숙종은 명의 황제가 황자를 낳자마자 황태자로 책봉(冊封)한 예를 들어 송시열의 논리를 궤변이라고 일축하고 즉시 그의 관직을 박탈하여 유배시킬 것을 명했다.[5]
4. 3. 남인의 집권과 인현왕후 폐위
숙종은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는데 장소의가 왕자 윤(昀)을 낳자 크게 기뻐하여 원자로 삼고 희빈으로 책봉하려 하였다. 그러나 서인들은 인현왕후가 아직 젊으니 후일까지 기다리자고 주장하며 반대했다.
1689년(숙종 15) 숙종은 서인의 요청을 묵살하고 원자의 명호(名號)를 정하고 장소의를 희빈으로 책봉하였다. 송시열은 상소를 하여 송나라 신종이 28세에 철종을 낳았으나 후궁의 아들이라 하여 번왕(藩王)에 책봉하였다가 적자가 없이 죽자 태자로 책봉되어 신종의 뒤를 계승하였던 예를 들어 원자 책봉의 시기가 아님을 주장하였다.[5]
기사환국이 단행된 지 4개월 만에 숙종은 서인계 왕비인 인현왕후 민씨를 폐출하고 부모의 봉작을 빼앗았다. 이에 대해 서인 노론측은 오두인 등 86인의 이름으로 상소를 올렸지만, 오두인, 박태보, 이세화 등은 국문당하여 위리안치 되거나 귀양을 갔으며, 오두인과 박태보는 국문 끝에 사망했다. 1690년 10월 22일 원자가 세자가 되면서, 장씨를 희빈에서 왕비로 승격시켰다. 같은 해 6월 송시열은 유배됐다가 사사되었다.[7]
이 사건 후 삼정승에 영의정 권대운, 좌의정 목내선, 우의정 김덕원이 등용되었다. 이후 갑술옥사 때까지 남인이 정권을 잡았다.
5. 결과 및 영향
숙종은 장씨가 낳은 아들 윤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서인은 인현왕후를 지지하며 반대했다. 숙종은 이를 반역으로 간주하여 서인을 처벌하고 남인을 등용했다. 이 과정에서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장씨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인현왕후 폐위에 대한 반발은 남인에게서도 있었지만, 대부분 유배형에 처해졌다.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고령을 이유로 심문 없이 사사(賜死)되었고, 자필 유서 『시제자손질손등(示諸子孫姪孫等)』이 전해진다.
5. 1. 정치적 영향
1689년(숙종 15) 서인의 요청을 묵살하고 원자의 명호(名號)를 정하고 장소의를 희빈으로 책봉한 것에 대해, 송시열은 송나라 신종의 예를 들어 원자 책봉이 시기상조임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7]기사환국 4개월 후, 숙종은 서인계 왕비인 인현왕후 민씨를 폐출하고 부모의 봉작을 빼앗았다. 이에 서인 노론측은 오두인 등 86인의 이름으로 상소를 올렸지만, 오두인, 박태보, 이세화 등은 국문당하여 위리안치 되거나 귀양을 갔으며, 오두인과 박태보는 국문 끝에 사망했다. 1690년 10월 22일 원자가 세자가 되면서, 장씨는 희빈에서 왕비로 승격되었다. 같은 해 6월 송시열은 유배됐다가 사사되었다.[7]
이 사건 후 남인계 권대운이 영의정에, 목내선이 좌의정에, 김덕원이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이후 갑술옥사 때까지 남인이 정권을 잡았다.
숙종이 윤을 왕세자로 책봉한 것은 후계자 관련 투쟁과 서인의 정치 독점을 막기 위함이었지만, 왕세자 확정 후 송시열의 상소는 임금을 홀대하는 행위로 여겨져 숙종은 크게 분노했다.
숙종은 명 황제가 황자를 낳자마자 황태자로 책봉(冊封)한 예를 들어 송시열의 주장을 반박하고 즉시 그의 관직을 박탈하여 유배시켰다.[5]
송시열의 유배를 시작으로 요직에 있던 서인 100여 명이 파면되었고, 빈 조정의 요직에는 남인이 임명되었다. 숙종은 사건의 발단을 인현왕후에게 돌려 왕후 자리를 폐위시켰다. 왕후 폐위는 서인뿐 아니라 남인에게서도 반발이 있었지만, 대부분 유배형에 처해졌다. 인현왕후 대신 장씨가 정비 자리에 올랐다.
또한,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80세가 넘는 고령이라는 이유로 심문 없이 사사(賜死) 명령을 받고 스스로 약을 마시고 죽었다.
5. 2. 사회적 영향
숙종은 기사환국 사건의 원인을 인현왕후에게 돌려 왕후 자리에서 폐위시켰다. 인현왕후의 폐위는 서인뿐 아니라 남인에게서도 반대하는 의견이 나왔지만, 이들 대부분은 유배형에 처해졌다.[1] 인현왕후는 폐위되어 궁궐에서 쫓겨났고, 장씨가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1]또한, 서인의 지도자인 송시열은 80세가 넘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심문 없이 사약을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1] 이때 송시열이 직접 쓴 유서인 『시제자손질손등(示諸子孫姪孫等)』이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1]
참조
[1]
웹사이트
한국사 콘텐츠
http://contents.kore[...]
2018-05-13
[2]
서적
丹岩漫録
[3]
서적
粛宗実録巻二〇
[4]
문서
根拠は国家の状況が危うく、「宗社の大計」を避けられないとした。
[5]
서적
粛宗実録巻二〇
1689-02-01 # 추정 날짜, 실제 날짜 정보 부족으로 추정
[6]
뉴스
성호의 군주론
http://www.kyeonggi.[...]
경기일보
2013-03-24
[7]
웹인용
한국사 콘텐츠
http://contents.kore[...]
2018-05-1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