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현왕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인현왕후는 조선 숙종의 계비로, 여흥 민씨 가문 출신이다. 1681년 숙종과 혼인하여 왕비가 되었으나, 숙종의 총애를 받던 희빈 장씨의 모함으로 폐위되었다가 1694년 갑술환국을 통해 복위되었다. 건강 악화로 1701년 34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사후 희빈 장씨가 저주했다는 고변으로 장씨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인현왕후의 일대기는 소설 《인현왕후전》과 여러 드라마, 영화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인현왕후 - 민진후
민진후는 조선 후기 문신으로, 인현왕후의 오빠이자 문과 급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충청도관찰사로 민생 안정에 힘썼으며, 소론의 탄핵으로 귀양을 갔다가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경종 묘정에 배향되고 충문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인현왕후 - 인현왕후 (드라마)
1988년 드라마 인현왕후는 박순애, 강석우, 전인화 등이 출연하여 인현왕후, 숙종, 장희빈을 중심으로 궁중 암투와 권력 다툼을 그린 신봉승 극본의 작품이다. - 소박맞은 왕비 - 희빈 장씨
희빈 장씨는 조선 숙종의 총애를 받은 후궁이자 경종의 생모로, 뛰어난 미모와 숙종 시대의 당쟁 속에서 왕비까지 올랐으나, 결국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한 비극적인 인물이다. - 소박맞은 왕비 - 프랑스의 잔
프랑스의 잔은 프랑스의 공주이자 성녀로, 정치적 목적으로 루이 12세와 결혼했으나 이혼 후 수녀회를 설립했으며 사후 시성되었다. - 1667년 출생 - 조너선 스위프트
조너선 스위프트는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이자 사제로, 풍자와 사회 비판으로 유명하며 '걸리버 여행기', '드레이피어 서한', '겸손한 제안' 등의 작품을 통해 인간 본성과 사회 부조리를 풍자적으로 비판했고 더블린 세인트 패트릭 대성당의 학장으로도 활동했다. - 1667년 출생 - 요한 베르누이
요한 베르누이는 스위스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로, 미적분학, 특히 미분 방정식과 변분법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사슬선의 방정식 발견과 지수 함수의 미적분법 확립 등으로 유명하지만, 가족과의 갈등과 업적 가로채기 시도는 그의 명성에 오점을 남겼다.
인현왕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인현왕후 |
한글 | 인현왕후 |
한자 | 仁顯王后 |
로마자 표기 | Inhyeon Wanghu |
별칭 | 효경숙성장순원화의열정목인현왕후 |
생애 | |
출생일 | 1667년 4월 23일 (음력) / 1667년 5월 15일 (양력) |
출생지 | 서울 반송동 사저 |
사망일 | 1701년 8월 14일 (음력) / 1701년 9월 16일 (양력) |
사망지 | 창경궁 경춘전 |
능묘 | 명릉 (서오릉)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민유중, 여양부원군 |
어머니 | 은성부부인 은진 송씨 |
배우자 | 숙종 |
자녀 | 없음 |
왕비 정보 | |
왕비 책봉 | 1681년 5월 2일 (음력) |
폐위 | 1689년 5월 4일 (음력) |
복위 | 1694년 6월 1일 (음력) |
전임 왕비 | 인경왕후 김씨, 희빈 장씨 |
후임 왕비 | 희빈 장씨, 인원왕후 김씨 |
가문 | |
본관 | 여흥 민씨 |
왕가 | 전주 이씨 (혼인으로) |
기타 정보 | |
종교 | 불교 (폐비 기간 중 청암사에서 생활) |
2. 생애
1667년 여흥 민씨 가문에서 민유중과 그의 두 번째 부인 은성부부인 송씨의 차녀로 태어났다. 1681년 숙종의 첫 번째 왕비인 인경왕후가 승하한 다음 해, 명성왕후와 송시열 등의 추천으로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숙종은 남인을 등에 업은 궁녀 출신 장씨를 총애하였고, 서인 출신인 왕비는 소외되었다. 인현왕후는 병약하여 자식을 낳지 못했다.[2]
1689년 기사환국으로 장씨가 왕비로 책봉되고 남인이 정권을 잡으면서 폐위되어 친정으로 돌아갔다.[11] 1694년 갑술환국으로 복위되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1701년 창경궁 경춘전에서 34세의 나이로 붕어하였다.[3]
2. 1. 유년 시절
숙종 8년(1667년) 5월 15일, 여흥 민씨 가문에서 태어난 인현왕후는 민유중의 둘째 딸이자 그의 계실인 은진 송씨 송씨 부인의 딸이었다.어머니 송씨를 통해 인현왕후는 서인 소속이었던 송준길의 외손녀이자 이언적의 5촌 양자손녀였다. 외가 쪽 혈연 관계와 두 오빠의 혼인 관계로 인해 명성황후와 인경왕후와는 먼 친척 관계였다.
인현왕후는 인경왕후의 아버지 김만기와 삼촌 김만중과 같은 혈통으로 10촌 관계였으며, 인경왕후와는 11촌 관계였다. 인경왕후의 증조부 김계휘는 인현왕후의 외증조모인 광산 김씨 부인(송준길의 어머니)의 삼촌이며, 송준길의 외조부 김은휘는 김계휘의 동생이었다.
인현왕후의 고모인 남양 홍씨 부인(민정중의 계실)과 인경왕후의 조모인 해평 윤씨(김만기와 김만중의 어머니)는 외사촌 관계였다. 김만기와 김만중의 외조모 홍씨(홍명원의 딸)는 홍처윤(민정중의 장인)과 홍처후(한성우의 장인)의 누이동생이었다.
인경왕후의 조모 윤씨는 이숙의 딸과 혼인한 홍수헌(홍처후의 아들, 한성우의 처남)과 외사돈 관계였다. 이숙의 딸은 인현왕후의 처남 이만창의 누이동생이었다. 인현왕후의 큰 시누이(민진후의 처)와 김만중의 처는 6촌 관계였고, 민진후의 장인 이단상과 김만중의 장인 이은상은 사촌 관계였다. 김만균과 민진후는 인현왕후의 4촌이었다. 인현왕후 사망 무렵에는 인경왕후의 5촌 조카이자 김만중의 손자인 김광택이 민진후의 사위이자 인현왕후의 조카가 되었다.
외조모 연안 이씨를 통해 인현왕후는 성종의 4대손이자 경숙공주의 5대손, 허적과는 숙질 관계였다. 외고조모 여흥 민씨 부인(연안 이씨의 어머니)을 통해 인현왕후는 선조의 후궁 정빈의 5촌 당숙녀였다.
1672년, 인현왕후의 어머니는 쌍둥이 여동생을 낳은 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민유중은 송씨 부인의 상을 마친 후 재혼하였다.
인현왕후는 어질고 자애로우며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2. 2. 왕비 시절
1667년 판송동 사저에서 여양부원군 민유중과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은성부부인 송씨의 차녀로 태어났다. 숙종의 첫 번째 왕비인 인경왕후가 승하한 다음 해인 1681년에 숙종과 혼례를 올려 왕비가 되었다. 이는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와 외가 친척인 송시열 등의 추천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왕은 남인을 등에 업은 궁녀 출신의 측실인 장씨를 총애하였고, 서인 출신인 왕비는 소외되었다. 또한 병약했던 탓인지 생애 동안 자식을 낳지 못했다.초반에는 숙종이 장씨에게 마음을 빼앗겨 별다른 애정을 받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비로서 관대한 마음과 너그러운 태도로 모든 일을 처리했다고 한다. 1687년 숙종은 왕비의 아버지인 민유중을 위해 감고당이라는 집을 짓게 했는데, 이곳에서 후일 명성황후가 태어났다.[1]
1689년 희빈 장씨와 남인의 계략으로 폐위되어 친정으로 돌아갔다. 1694년 왕비로 복위되었으나, 궁핍한 생활을 보냈던 탓인지 건강이 악화되었고, 1701년 창경궁 경춘전에서 붕어하였다. 향년 34세였다.
2. 2. 1. 왕비 책봉
1681년에 인경왕후가 승하한 후,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와 외가 친척인 송시열의 추천으로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2] 가례 초기부터 숙종의 총애를 받지 못하였고, 명성왕후 사후 숙종은 명성왕후에 의해 출궁되었던 궁인 장씨를 환궁시켜 총애하였다. 인현왕후는 장희빈을 견제하고자 김수항의 종손녀인 영빈 김씨를 간택후궁으로 추천하여 입궐시키기도 했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1]1681년 봄, 14세의 나이로 20세의 숙종과 결혼하여 그의 계비가 되었다. 그녀의 부모는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과 은성부부인(恩城府夫人)으로 책봉되었고, 그녀의 아버지의 첫째 부인과 세 번째 부인 또한 각각 해풍부부인(海豊府夫人)과 풍창부부인(豊昌府夫人)으로 책봉되었다.
2. 2. 2. 옥교 사건
1689년 숙종은 희빈 장씨와 남인의 계략에 따라 인현왕후를 폐위시키고 친정으로 내쫓았다. 인현왕후를 몰아낸 희빈 장씨는 왕비가 되었다.[2]폐위된 인현왕후는 빈곤한 생활을 강요당했지만 이를 견뎌냈다. 이는 주변 사람들의 동정을 불러일으켰고, 마침내 왕의 마음에까지 전달되었다. 남인에게 억압받던 서인은 인현왕후의 복위 운동(민씨 중정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는 과거 서인과 마찬가지로 남인의 성장을 우려하여 남인을 견제하려는 숙종의 의중과 일치하였다.
2. 2. 3. 원자 정호 사태
1688년 희빈 장씨(소의 장씨)가 아들 윤(昀)(훗날의 경종)을 낳자 숙종은 이 왕자를 원자로 정하고자 했으나,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들은 원자 정호를 뒤로 미룰 것을 주장했다. 송시열 등은 송나라 철종의 고사를 예로 들기도 했다.[2] 원자 정호 문제는 결국 기사환국으로 이어져 1689년 서인들이 쫓겨나고 남인들이 집권하였으며 그녀 역시 폐서인되어 안국동 사가로 내쳐졌다.숙종의 남인 계열 후궁 희빈 장씨가 1688년 아들 경종(이윤)을 낳자, 기사환국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정쟁이 벌어졌다. 당시 숙종은 장자 이윤에게 원자(元子)의 작위를 주고 희빈 장씨를 소의(昭儀)에서 빈(嬪)으로 격상시키려 했다. 빈(嬪)은 왕의 후궁 중 최고의 품계이다.
이러한 숙종의 조치는 송시열 등 서인들이 주도하는 인현왕후를 지지하는 세력의 반대에 부딪혔다. 반면 남인들은 장씨를 지지했다.
숙종은 인현왕후가 이윤을 양자로 삼는 타협안을 제시했으나, 인현왕후는 이를 거절했다. 숙종은 반대 세력에 분노하여 송시열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인현왕후의 가족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유배되었다. 인현왕후 자신은 1688년에 폐위되어 안국동(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으로 유배되었고, 이후 경상북도 김천시 청음사라는 폐쇄된 사찰로 유배되어 불교에 귀의했다.
2. 3. 폐서인 시절
1689년 기사환국으로 장씨가 왕비로 책봉되고, 남인이 정권을 잡으면서 인현왕후는 폐위되어 친정으로 돌아갔다.[11]노론과 소론은 폐비 민씨 복위 문제를 두고 대립하였다. 노론은 김춘택을 중심으로, 소론은 한정혁을 중심으로 폐비 민씨 복위 운동을 벌였다.[11] 1693년, 숙종의 후궁 숙빈 최씨는 폐비 민씨를 지지하며 왕에게 복위를 권유하였다.[11]
이후 숙종은 기사환국 당시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장씨세가에 염증을 느껴 갑술환국을 일으켜 장씨를 빈으로 강등시키고 폐비 민씨를 왕비로 복위시켰다. 이 과정에서 숙종은 장씨의 오빠 장희재를 제주도로 유배 보내고 남인 지도자들을 제거하여 남인은 정치적으로 몰락했다.[11]
2. 3. 1. 안국동 친정 생활
인현왕후는 1667년 판송동 사저에서 여양부원군 민유중과 그의 두 번째 부인 은성부부인 송씨 사이의 차녀로 태어났다.2. 3. 2. 청암사 생활
1689년 폐위된 인현왕후는 빈곤한 생활을 강요당했지만, 이를 견뎌냈다. 이는 주변 사람들의 동정을 불러일으켰고, 마침내 숙종의 마음에까지 전달되었다.2. 4. 복위 후
1694년, 숙종은 장희재를 제주도로 유배 보내고 남인 지도자들을 제거했다. 이로 인해 남인은 정치적으로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었다.[8] 장옥정은 빈으로 강등되었고, 6월 1일 폐비 민씨는 왕비로 복위되어 궁으로 돌아왔다. 이 사건을 갑술환국이라 한다.[8]복위 후, 인현왕후는 병을 앓기 시작했다. 1700년부터 통풍과 옹저로 고생했으며, 이로 인해 식욕 부진과 수면 장애를 겪으며 체력이 급격히 나빠졌다.[3] 1701년 8월 14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3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
2. 4. 1. 복위 과정
1694년 4월 1일, 숙종은 남인을 몰아내고 서인을 기용하여 정권을 교체했는데, 이를 갑술환국이라 한다. 그러나 숙종은 처음에는 폐비(인현왕후 민씨)를 신원하는 자는 역률로 다스린다는 명을 내려 왕비를 교체할 마음이 없음을 선포했다.[8]4월 9일, 숙종은 마음을 바꾸어 민씨를 서궁으로 이전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고, 4월 12일 민씨가 서궁에 입거하자 왕비 복위령이 내려졌다. 동시에 왕비였던 장씨는 국모가 둘일 수 없다는 이유로 왕비 아래 지위인 빈으로 강등되어 본래의 희빈 작호를 돌려 받았다.[8]
이러한 결정에 대해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다. 노론은 폐비 민씨의 복위를 주장한 반면, 소론은 장씨의 왕후직을 유지한 채 민씨가 궐 밖 사가에서 궐 내 서궁으로 입주하는 것만을 주장했기 때문이다.[8] 숙종의 명이 번복되자 병조판서 서문중, 이조참판 박태상 등 소론의 주요 인물들은 민씨가 먼저 왕비였고 더 오래 왕비 자리에 있었지만, 세자의 어머니인 장씨가 더 귀하므로 장씨가 강등되고 민씨가 복위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9] 정원은 조정 백관과 신중히 공론을 거쳐 결정할 때까지 명을 받들 수 없다는 거부 의사를 표명했다.[10] 우의정 윤지완, 공조판서 신익상, 한성부우윤 임상원, 병조참의 이유 등 소론 대표 인물들이 줄이어 사직 상소를 올리는[11] 등 강경하게 거부 의사를 밝혀, 갑술환국 이전까지 합심했던 노론과 소론이 강하게 대립하게 되었다.[12]
4월 17일, 영의정이자 소론 영수인 남구만은 '민씨의 복위는 이미 정해졌으니 이에 대해 거론하여 다투는 것은 아들이 어머니에 대해 논하고 신하가 임금에 대해 의논하는 것과 같아 천하의 도리에 맞지 않으며, 희빈의 강등은 죄가 있어서 폐출된 것이 아니라 민씨가 복위함에 있어 왕비가 둘이 있을 수 없으니 부득이한 것이다'라고 선언하여 노론과 소론을 중재했다. 이로 인해 민씨의 복위가 결정되었지만, 노론과 소론 사이에는 깊은 갈등이 생겼다. 노론은 장씨의 친오빠인 장희재를 남인과 함께 제거하려 했지만, 노론의 행위가 희빈 장씨와 왕세자(경종)를 제거하기 위한 단계임을 간파한 남구만과 소론의 강력한 제지로 민암 부자만 처형되었을 뿐, 장희재는 목숨을 보존하여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같은 해 6월 1일, 인현왕후는 정식으로 왕비 책봉을 받았다.
2. 4. 2. 투병과 사망
1700년(숙종 26) 3월 26일, 인현왕후의 발병이 처음 보고되었는데, 이때 진단명은 중증 통풍이었다. 양쪽 다리, 특히 오른쪽 다리의 통증이 심했으며, 환도혈 윗부분 요척 부위 근처에 붓기가 있고 통증을 견디기 어려웠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통증 부위가 점점 넓어졌다. 4월 14일부터 다리에서 경련이 시작되어 전신의 경련으로 이어지면서 상황이 심각해졌다. 치료로 인해 가장 심했던 경련은 점차 줄어들어 5월 5일부턴 경련은 완전히 멈춘 듯하였으나, 5월 7일 붓기가 복부에까지 올라오면서 다시 비상사태가 되었다. 5월 12일, 전날 침을 놓았던 요척 아래 아시혈에 고름이 차올라 파종(破腫: 종기의 고름을 짜냄)하였으며, 6월 21일에 이르러 역시 앞서 침을 맞았던 우측 협하 부위에서도 고름이 올라 파종하였다. 이때를 기점으로 옹저 치료가 병행됐다.[3]하반신, 특히 다리와 관절 부위의 극렬한 통증과 피부와 근육이 서로 분리되는 느낌이 들 정도로 환부 주위에 가득 차오르는 고름 외에도 오심, 구토, 복통, 설사, 발열 증상이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식욕부진과 수면장애가 더해져 체력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이러한 증상은 약 1년간 지속되다가 1701년(숙종 27) 7월 8일, 환부가 확장되어 복부에 이르러 상완혈 근처에 뭔가 잔뜩 고인 형상이 있어 손으로 눌러보면 통증이 느껴졌다 하며 곧 가슴이 답답하고 손발이 차가워졌으며 설사가 10여 차례에 이르렀다. 8월 12일, 구강에 부스럼이 생기고 소변이 붉은색인데 이 또한 제대로 나오지 않으며, 특히 야간에 다리가 아파 침수가 편치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인 8월 13일, 의식이 혼미해지고 이마와 허리에서 식은땀이 나고 맥박도 불규칙해지는 등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부터 급속도로 상태가 위중해져 8월 14일 축시(丑時: 오전 1시~3시)에 요양처였던 창경궁 경춘전에서 사망했다. 향년 34세였다.[3]
2. 5. 사후
인현왕후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은 옛 한글 연구에 참고가 되고 있으나, 소설 내용이 실록 등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다수이고 사건과 인명 표기에도 오류가 많아 사료적 가치는 인정되지 않는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인현왕후전》은 영`정조대에 남성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밝혀져 인현왕후의 궁인이 아닌 인현왕후의 친족 일족이나, 그의 폐출에 반대했던 박태보의 후예가 쓴 것이라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13] 1701년 창경궁 경춘전에서 붕어하였으며, 향년 34세였다. 인현왕후 사후, 왕비의 죽음은 장씨가 몰래 무녀를 궁궐에 들여 왕비가 빨리 죽도록 저주했기 때문이라는 숙빈 최씨의 고변으로 인해 장씨에게 사약이 내려졌다.3. 가족 관계
인현왕후의 가족 관계는 크게 본가인 여흥 민씨와 시가(媤家)인 전주 이씨 왕가로 나눌 수 있다.
구 분 | 관 계 | 성 명 | 비 고 |
---|---|---|---|
본가 (여흥 민씨) | 조부 | 민광훈 | 강원도관찰사, 증 영의정 |
조모 | 연안 이씨 | 이광정의 딸, 정부인, 증 정경부인 | |
아버지 | 민유중 | 호조판서, 증 영의정, 여양부원군, 문정공 | |
외조부 | 이경증 | 이조판서 | |
외조모 | 전주 이씨 | 순화군의 장녀, 정부인 | |
친어머니 | 은진 송씨 | 송준길의 딸, 은성부부인 | |
계모 | 이효아 | 해풍부부인 | |
계모 | 풍양 조씨 | 풍창부부인 | |
언니 | 여흥 민씨 | (1656~1728) | |
오빠 | 민진후 | 예조판서, 충문공, 명성황후의 5대조[14] | |
오빠 | 민진원 | 좌의정, 문충공, 순명효황후의 5대조 | |
여동생 | 신석화와 혼인 | 평산 신씨, 장렬왕후의 이종손녀, 영풍군부인의 질부 | |
남동생 | 민진영[15] | 고종의 어머니 여흥부대부인의 5대조 | |
여동생 | 이장휘와 혼인 | 진사 | |
여동생 | 홍우조와 혼인 | 참봉 | |
왕가 (전주 이씨) | 시아버지 | 현종 | 조선 제18대 왕 |
시어머니 | 명성왕후 김씨 | ||
남편 | 숙종 | 조선 제19대 왕 | |
양자 | 경종 | 조선 제20대 왕 |
인현왕후는 서인 명문가인 여흥 민씨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는 민유중이고 어머니는 은진 송씨이다. 어머니 은진 송씨를 통해 송준길의 외손녀이자 이언적의 5촌 양자손녀가 된다. 또한, 혼인 관계를 통해 명성황후 및 인경왕후와도 먼 친척 관계를 맺고 있었다.
- 인경왕후와 인현왕후는 11촌 관계였다.
- 인현왕후의 고모부 민정중과 인경왕후의 조모 해평 윤씨는 외사촌 관계였다.
- 인현왕후의 큰 시누이(민진후의 처)와 김만중의 처는 6촌 관계였다.
- 외조모 연안 이씨를 통해 성종의 4대손이자 경숙공주의 5대손, 허적과는 숙질 관계였다.
3. 1. 본가 여흥 민씨(驪興 閔氏)
인현왕후의 본가는 여흥 민씨이다. 아버지는 호조판서와 영의정을 지낸 여양부원군 문정공 민유중이며, 어머니는 은성부부인 은진 송씨이다. 은진 송씨는 송준길의 딸로, 인현왕후는 송준길의 외손녀가 된다. 또한 이언적의 5촌 양자손녀이기도 하다.인현왕후의 가계는 서인 명문가와 폭넓은 혼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외가 쪽으로는 명성황후 및 인경왕후와 먼 친척 관계였다.
인현왕후는 1667년(숙종 8년) 여흥 민씨 가문에서 민유중의 둘째 딸이자 계실인 은진 송씨 부인의 딸로 태어났다. 1672년, 어머니 은진 송씨가 쌍둥이 여동생(민정성, 민정제)을 낳은 후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 민유중은 은진 송씨 부인의 상을 마친 후 풍양 조씨와 재혼하였다.
인현왕후의 친가 및 외가 정보는 다음과 같다.
구분 | 내용 |
---|---|
조부 | 민광훈 (증 영의정) |
조모 | 연안 이씨 (증 정경부인, 이광정의 딸) |
아버지 | 민유중 (증 영의정, 문정공) |
외조부 | 이경증 (이조판서) |
외조모 | 전주 이씨 (정부인, 순화군의 장녀) |
친어머니 | 은진 송씨 (송준길의 딸) |
계모 | 이효아 |
계모 | 풍양 조씨 |
인현왕후의 형제자매는 다음과 같다.
구분 | 성명 |
---|---|
언니 | 여흥 민씨 (1656~1728) |
오빠 | 민진후 (예조판서, 충문공) |
오빠 | 민진원 (좌의정, 문충공) |
여동생 | 평산 신씨와 혼인 |
남동생 | 민진영[15] |
여동생 | 이장휘와 혼인 |
여동생 | 홍우조와 혼인 |
서모 | 불명 |
서제 | 민진창 |
서제 | 민진오 |
서매 | 이만과 혼인 |
서매 | 유현과 혼인 |
인현왕후의 시댁(왕가) 정보는 다음과 같다.
구분 | 내용 |
---|---|
시아버지 | 현종 |
시어머니 | 명성왕후 김씨 |
남편 | 숙종 |
양자 | 경종 |
3. 2. 왕가(王家 : 전주 이씨)
인현왕후의 본관은 여흥 민씨이며, 왕가(王家)는 전주 이씨이다.관계 | 이름 및 정보 |
---|---|
아버지 | 민유중(호조판서 증 영의정 여양부원군 문정공, 1630~1687) |
어머니 | 이효아(해풍부부인, 1628~1652) |
외조부 | 이경증(군수 이통의 아들, 이조판서, 1595~1648) |
외조모 | 전주 이씨 계여(정부인, 1598~?), 순화군 이보(1580~1607)의 장녀 |
친어머니 | 은진 송씨(은성부부인, 1637~1672) = 송준길의 딸 |
외조부 | 송준길(문정공 좌참찬 증 영의정, 1606~1672) |
외외종조부 | 정심(예문관 검열, 1596~1625) |
외외종조모 | 여강 이씨(이언적의 손자 군수 이의활(1573-1627)의 딸) |
외조모 | 진주 정씨(증 정경부인, 정경세(대제학 증 좌찬성, 1563~1633)의 딸) |
계모 | 풍양 조씨(풍창부부인, 1659~1741) |
서모 | 불명 |
조부 | 민광훈(강원도관찰사 증 영의정, 1595~1659) |
조모 | 연안 이씨(정부인 증 정경부인, 이광정(이조판서 연원부원군, 1552~1629)의 딸) |
언니 | 여흥 민씨(증 정부인, 1656~1728) |
조카 | 이재(1680~1746) |
오빠 | 민진후(예조판서 충문공, 1659~1720)[14] |
오빠 | 민진원(좌의정 문충공, 1664~1736) |
여동생 | 평산인 신석화(가평군수, 1672~1714)에게 출가 (장렬왕후의 이종손녀, 영풍군부인의 질부) |
남동생 | 민진영[15] |
여동생 | 이장휘(진사)에게 출가 |
여동생 | 홍우조(참봉)에게 출가 |
서제 | 민진창(학관) |
서제 | 민진오(현감) |
서매 | 민씨(1671?~?) |
서매부 | 이만(1669~1734) |
서매 | 민씨 |
서매부 | 유현(1686년~?) |
'''왕가(王家)'''
관계 | 이름 및 정보 |
---|---|
시아버지 | 제18대 현종대왕(1641~1674, 재위 1660~1674) |
시어머니 | 명성왕후 김씨(1642~1684) |
남편 | 제19대 숙종대왕(1661~1720, 재위 1674~1720) |
양자 | 제20대 경종대왕(1688~1724, 재위 1720~1724) |
인현왕후는 숙종 8년(1667년) 5월 15일, 여흥 민씨 가문에서 민유중의 둘째 딸이자 그의 계실인 은진 송씨 송씨 부인의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 송씨를 통해 인현왕후는 서인 소속이었던 송준길의 외손녀이자 이언적의 5촌 양자손녀였다. 외가 쪽 혈연 관계와 두 오빠의 혼인 관계로 인해 명성왕후와 인경왕후와는 먼 친척 관계였다.
인경왕후와 인현왕후는 11촌 관계였다. 인현왕후는 인경왕후의 아버지 김만기와 삼촌 김만중과 같은 혈통으로 10촌 관계였다. 인경왕후의 증조부 김계휘는 인현왕후의 외증조모인 광산 김씨 부인(송준길의 어머니)의 삼촌이며, 송준길의 외조부 김은휘는 김계휘의 동생이었다.
인현왕후의 고모인 남양 홍씨 부인(민정중의 계실)과 인경왕후의 조모인 해평 윤씨(김만기와 김만중의 어머니)는 외사촌 관계였다. 김만기와 김만중의 외조모인 홍씨(홍명원의 딸)는 홍처윤(민정중의 장인)과 홍처후(한성우의 장인)의 누이동생이기도 하였다.
인경왕후의 조모인 윤씨는 이숙의 딸과 혼인한 홍수헌(홍처후의 아들, 한성우의 처남)과 외사돈 관계였다. 이숙의 딸은 인현왕후의 처남 이만창의 누이동생이었다. 인현왕후의 큰 시누이(민진후의 처)와 김만중의 처는 6촌 관계였고, 민진후의 장인 이단상과 김만중의 장인 이은상은 사촌 관계였다. 또한 인경왕후의 처가인 김만균과 민진후는 인현왕후의 4촌이 되었다. 인현왕후 사망 무렵에는 인경왕후의 5촌 조카이자 김만중의 손자인 김광택이 민진후의 사위이자 인현왕후의 조카가 되었다.
외조모인 연안 이씨를 통해 인현왕후는 성종의 4대손이자 경숙공주의 5대손, 허적과는 숙질 관계였다.
외고조모인 여흥 민씨 부인(이씨의 어머니)을 통해 인현왕후는 선조의 후궁 정빈의 5촌 당숙녀였다.
1672년, 인현왕후의 어머니는 쌍둥이 여동생을 낳은 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민유중은 송씨 부인의 상을 마친 후 재혼하였다.
인현왕후는 어질고 자애로우며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4. 인현왕후와 관련된 인물
서인(분당 이후로는 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인현왕후와 친인척 관계이자 정치적 동지였다.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17], 큰아버지 민정중, 오빠 민진후, 민진원은 모두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끈끈한 관계를 맺었다.[16]
숙종의 첫 왕비 인경왕후와 인현왕후는 11촌 고질(姑姪)지간으로, 먼 친척 관계였다.[18] 인경왕후 가문과 인현왕후 가문은 혼인 관계로도 얽혀 있었다.
4. 1. 송시열과의 관계
송시열은 인현왕후의 외조부인 송준길과 부계로는 13촌, 진외가로는 6촌 관계이다.[16] 송시열은 송준길의 집에서 8세 때부터 수학했고, 함께 동문수학하며 서인을 통합, 지휘하여 양송(兩宋)으로 불릴 정도로 특별한 관계였다.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17], 큰아버지 민정중, 오빠 민진후, 민진원은 모두 송시열의 제자였다.인현왕후가 왕비로 간택될 당시, 명성왕대비와 송시열은 민씨를 다음 왕비로 추천했다. 이후 숙종이 장희빈에게 총애를 빼앗기자, 인현왕후는 서인 출신 김수항의 손녀인 영빈 김씨를 후궁으로 추천했지만 실패했다.
기사환국 당시, 숙종이 희빈 장씨 소생의 아들(훗날 경종)에게 원자 칭호를 부여하려 하자, 송시열 등 서인들은 이에 반대했다.[2] 숙종은 반대 세력에 분노하여 송시열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죽이거나 유배 보냈고, 인현왕후 역시 폐위되어 유배되었다.
4. 2. 인경왕후와의 관계
숙종의 초비(初妃) 인경왕후와 인현왕후는 촌수로 따지면 11촌 고질(姑姪)지간으로, 인현왕후는 인경왕후의 아버지인 김만기, 숙부인 김만중과 같은 항렬인 10촌 사종형제지간이다.[18] 인경왕후의 5대조 김계휘는 인현왕후의 외증조모 광산 김씨(송준길의 어머니)의 숙부이고, 송준길의 외조부 김은휘는 김계휘의 아우이다.[18]인현왕후의 중모(仲母)인 남양 홍씨(민정중의 계실)와 인경왕후의 조모 해평 윤씨(김만기, 김만중의 어머니)는 외사촌자매 지간이다.[18] 김만기, 김만중의 외조모 홍씨(홍명원의 딸)는 홍처윤(민정중의 장인)과 홍처후(한성우의 장인)의 누이이다.[18] 인경왕후 조모 윤씨의 외사촌형제 홍수헌(홍처후의 아들, 한성우의 처남)은 이숙의 딸과 혼인했는데, 이 이숙의 딸은 인현왕후의 형부 이만창의 누이이다.[18] 인현왕후의 큰올케(민진후의 처)와 김만중의 처는 6촌 사이로, 민진후의 장인 이단상과 김만중의 장인 이은상은 사촌형제이다.[18] 인경왕후의 당숙 김만균과 민진후는 처4촌 지간이다.[18] 인현왕후 사후, 인경왕후의 5촌 조카이자 김만중의 손자 김광택이 민진후의 사위가 되어 인현왕후의 조카사위가 되었다.[18]
5. 인현왕후가 등장하는 작품
인현왕후는 영화와 드라마에서 여러 배우들에 의해 재현되었다.
구분 | 연도 | 작품명 | 배우 | 참고 |
---|---|---|---|---|
영화 | 1961년 | 장희빈 | 1대 조미령 | 정창화 감독 |
영화 | 1968년 | 요화 장희빈 | 2대 태현실 | 임권택 감독 |
드라마 | 1971년 | 장희빈 | 3대 김민정 | MBC |
드라마 | 1981년 ~ 1982년 | 여인열전 시리즈 중 제1화 장희빈 | 4대 이혜숙 | MBC |
드라마 | 1988년 | 인현왕후 | 5대 박순애 | MBC |
드라마 | 1995년 | 장희빈 | 6대 김원희 | SBS |
드라마 | 2002년 ~ 2003년 | 장희빈 | 7대 박선영 | KBS |
드라마 | 2010년 | 동이 | 8대 박하선 | MBC |
드라마 | 2012년 | 인현왕후의 남자 | 9대 김해인 | tvN |
드라마 | 2013년 | 장옥정, 사랑에 살다 | 10대 홍수현 | SBS |
드라마 | 2015년 | 웹툰히어로 툰드라쇼 | 11대 이현지 | MBC 에브리원 |
소설에서는 《인현왕후전》이 대표적이나, 사료적 가치는 인정되지 않는다.
5. 1. 드라마
구분 | 연도 | 작품명 | 배우 | 참고 |
---|---|---|---|---|
영화 | 1961년 | 《장희빈》 | 1대 조미령 | 정창화 감독 |
1968년 | 《요화 장희빈》 | 2대 태현실 | 임권택 감독 | |
드라마 | 1971년 | 《장희빈》 | 3대 김민정 | MBC |
1981년 ~ 1982년 | 여인열전 시리즈 중 제1화 《장희빈》 | 4대 이혜숙 | MBC | |
1988년 | 《인현왕후》 | 5대 박순애 | MBC | |
1995년 | 《장희빈》 | 6대 김원희 | SBS | |
2002년 ~ 2003년 | 《장희빈》 | 7대 박선영 | KBS | |
2010년 | 《동이》 | 8대 박하선 | MBC | |
2012년 | 《인현왕후의 남자》 | 9대 김해인 | tvN | |
2013년 | 《장옥정, 사랑에 살다》 | 10대 홍수현 | SBS | |
2015년 | 《웹툰히어로 툰드라쇼》 | 11대 이현지 | MBC 에브리원 |
5. 2. 소설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인현왕후전》이 전해져 옛 한글 연구에 참고가 되고 있으나, 소설 내용이 실록 등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다수이고 사건과 인명 표기에도 오류가 많아 사료적 가치는 인정되지 않는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인현왕후전》은 영`정조대에 남성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밝혀져 인현왕후의 궁인이 아닌 인현왕후의 친족 일족이나, 그의 폐출에 반대했던 박태보의 후예가 쓴 것이라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13]참조
[1]
웹사이트
Home > Tourism> Historical Relic
http://www.yeoju.gye[...]
2008-01-20
[2]
웹사이트
네이버 학술정보
http://academic.nave[...]
[3]
서적
The history of Korea
https://archive.org/[...]
Seoul, Methodist Pub. House
[4]
문서
Women in Korean History (한국 역사 속의 여성들)
[5]
서적
The history of Korea
https://archive.org/[...]
Seoul, Methodist Pub. House
[6]
웹사이트
Femme Fatale, Jang Hee-bin (''Yohwa, Jang Hee-bin'') (1968)
http://www.kmdb.or.k[...]
2013-01-26
[7]
뉴스
역사와 가을 마주하는 김천 수도산 '인현왕후길' 거닐어 볼까?
https://news.v.daum.[...]
[8]
문서
숙종실록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4월 1일(무진) 2번째기사 ‘노당은 폐비를 복위시키려 하고, 소당은 폐비를 별궁(別宮)에 옮기려 한다.’
[9]
문서
숙종실록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4월 12일(기묘) 6번째기사
[10]
문서
숙종실록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4월 13일(경진) 2번째기사
[11]
문서
승정원일기 숙종 20년 4월 16일 (계미) 원본356책/탈초본18책
[12]
문서
숙종실록에는 소론의 반발과 윤지완 등이 단체로 사직 상소를 올린 기록이 완전히 누락되어 있고 승정원일기에서만 확인이 가능하다. 대신 숙종실록에는 '거칠고 학식이 없어 무식한 소수의 무리(서문중, 윤지완 등을 지목함)'가 '의리가 어두워지고 윤리를 잃어' '뒷날의 화복(세자의 즉위)만 생각하고', '흉당(남인과 희빈)에 아부하였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더러워했다.'는 표현을 수차례 반복해 다른 기사에 나누어 실었다.
[13]
서적
환관과 궁녀
[14]
문서
한수재선생문집 중 여양부원군문정민공신도비명, 약천집 중 동춘선생묘지문추지 外
[15]
문서
민치구의 고조부이다. 민치구는 고종의 외조부이다.
[16]
문서
아버지들이 외사촌 관계
[17]
문서
본래는 송준길의 문하였지만 송준길의 사위가 되어 송시열의 문하가 되었다.
[18]
문서
김만균은 이단상의 형 이일상의 사위로, 김만균의 처와 민진후의 처는 사촌자매이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