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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손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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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손초 전투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이의 이손초 강을 따라 벌어진 일련의 전투를 통칭한다. 1915년부터 1917년까지 12차례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이탈리아는 런던 조약을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영토 일부를 약속받고 트리에스테 항구를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감행했다. 이손초 전투는 막대한 인명 피해를 냈으며, 이탈리아군 95만 명, 오스트리아-헝가리군 52만 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1917년 카포레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독일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이 전투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 등 여러 문학 작품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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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손초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이손초 전선
도베르도 전투 묘사
기간1915년 5월 23일 – 1917년 10월 27일
장소이손초강 계곡
결과이탈리아의 5승
3번의 승패 불분명
오스트리아-헝가리의 3승 및 최종 중앙 강대국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이탈리아 왕국
교전국 2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 제국 (1917년부터)
지휘관
지휘관 1루이지 카도르나
피에트로 푸르고니
세티미오 피아첸티니
루이지 카펠로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디 사보이아아오스타
지휘관 2프리드리히 폰 외스터라이히테셴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아르투르 아르츠 폰 슈트라우센부르크
스베토자르 보로예비치
오토 폰 벨로
부대
부대 1제2군 (이탈리아)
제3군 (이탈리아)
부대 2제5군 (오스트리아-헝가리)
전력
전력 1알 수 없음
전력 2알 수 없음
사상자
사상자 1645,000 (카포레토 이전)
사상자 2450,000 (카포레토 이전)
관련 정보
관련 캠페인이탈리아 전선 (제1차 세계 대전)

2. 지리적 배경

당시 138km 길이의 소차 강은 줄리안 알프스의 브르시치 고개에서 아드리아 해까지 이탈리아와의 국경과 평행하게 오스트리아-헝가리 내부를 완전히 흘렀다. 고리치아 북쪽 수 킬로미터 지점에서 강폭이 급격하게 넓어지면서 비파바 계곡과 비교적 낮은 포스토이나 게이트의 북동쪽 가장자리를 통해 내부 크라니올라와 류블랴나로 이어지는 북이탈리아와 중앙 유럽 사이의 좁은 통로가 열렸다.[3]

보베츠와 로그 포드 만그르톰 사이에 있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요새인 클루제(Kluže)의 잔해

3. 이탈리아의 군사 계획

1915년 4월, 비밀 런던 조약에서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연합국으로부터 주로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오스트리아계 독일인이 거주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 일부를 약속받았다.

이탈리아군 사령관 루이지 카도르나는 정면 공격을 강력히 지지했던 인물로, 처음에는 슬로베니아 고원을 돌파하여 류블랴나를 점령하고 을 위협하는 계획을 세웠다. 아드리아 해 최북단과 이손조 강 발원지 사이 지역은 이후 12차례에 걸친 연이은 전투의 장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동부 전선에서 일부 병력을 이동시켜야 했고, 이손조 강 주변 산악 지대에서 전쟁이 시작되었다.[2]

1915년 이손초 전투 당시 이탈리아 병사들


전선의 나머지 산악지대 약 643.74km는 거의 모든 곳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이 전쟁 동안 이탈리아 군사 작전에 실질적으로 적합한 지역은 소차(이손초) 강뿐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1915년 5월 23일 이탈리아의 참전에 앞서 산악지대를 요새화했다.

이탈리아 참모총장 루이지 카도르나는 이탈리아군의 진격이 소차(이손초) 강 하류 동쪽 해안 평야(고리치아에서 트리에스테까지)에서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카도르나는 이손초 지역에서의 작전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예상했다. 그는 소차 강이 범람하기 쉽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실제로 1914년부터 1918년까지 기록적인 강우량이 있었다. 더욱이, 북쪽으로 더 진격할 경우 이탈리아군은 딜레마에 직면했다. 안전하게 이손초 강을 건너려면 상류 산악지대에 있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 방어군을 무력화해야 했지만, 이들 군대를 무력화하려면 먼저 강을 건너야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한 이탈리아의 최대 진격 지점, 이탈리아 북동부

4. 전투의 전개



이탈리아 전선의 다른 산악 지대는 대부분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탈리아 군사 작전에 실질적으로 적합한 지역은 소차(이손초) 강뿐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1915년 5월 23일 이탈리아가 참전하기 전에 이미 산악 지대를 요새화했다.

이탈리아 참모총장 루이지 카도르나는 이탈리아군이 소차(이손초) 강 하류 동쪽 해안 평야(고리치아에서 트리에스테까지)에서 진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카도르나는 이손초 지역에서의 작전이 쉽지 않을 것임을 예상했다. 그는 소차 강이 범람하기 쉽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실제로 1914년부터 1918년까지 기록적인 강우량이 있었다.

더욱이, 북쪽으로 진격할 경우 이탈리아군은 딜레마에 직면했다. 안전하게 이손초 강을 건너려면 상류 산악지대에 있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 방어군을 무력화해야 했지만, 이들을 무력화하려면 먼저 강을 건너야 했다.

4. 1. 주요 전투

이손초 강 유역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이탈리아 왕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간의 격전지였다. 이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들은 횟수를 특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빈번하게 일어났다.[6] 일부 역사가들은 특정 전투에 별도의 이름을 붙이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예가 1917년 10월의 코바리드(Caporettoit, Karfreitde) 전투이며, 이는 이손초 제12차 전투에 해당한다.

이탈리아에서 이 전투들을 이손초 강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선전 면에서 유리하게 작용했다. 이는 이탈리아군이 제국의 국경선을 뚫는 데 বারবার 실패했음을 부각하는 효과를 가져왔다.[6]

이손초 전투는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이손초 전투 요약
전투날짜이탈리아군 사상자오스트리아-헝가리군 사상자결과
이손초 제1차 전투1915년 6월 23일 – 7월 7일15,00010,000제한적인 이탈리아군의 전진
이손초 제2차 전투1915년 7월 18일 – 8월 3일41,80046,600이탈리아군의 승리
이손초 제3차 전투1915년 10월 18일 – 11월 3일66,99841,847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승리
이손초 제4차 전투1915년 11월 10일 – 12월 2일49,50032,100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승리
이손초 제5차 전투1916년 3월 9일–15일1,8821,985결론 없음
이손초 제6차 전투1916년 8월 6일–17일51,00042,000이탈리아군의 승리
이손초 제7차 전투1916년 9월 14일–18일17,00015,000이탈리아군의 승리
이손초 제8차 전투1916년 10월 10일 – 12일55,00038,000결론 없음
이손초 제9차 전투1916년 10월 31일 – 11월 4일39,00033,000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승리, 이탈리아군의 공격 저지
이손초 제10차 전투1917년 5월 10일 – 6월 8일150,00075,000제한적인 이탈리아군의 전진
이손초 제11차 전투1917년 8월 18일 – 9월 12일158,000115,000이탈리아군의 승리
이손초 제12차 전투1917년 10월 24일 – 11월 19일305,00070,000오스트리아-헝가리-독일군의 승리; 이송소 전투 종결
총 사상자1915년 6월 – 1917년 11월950,180520,532중앙 연합국의 승리, 피아베 강에서의 반격 (제1차 및 제2차 전투)


4. 1. 1. 이손초 제1차 전투 (1915년 6월 23일 – 7월 7일)

이손초 제1차 전투는 1915년 6월 23일부터 7월 7일까지 벌어졌다. 이탈리아군은 15,000명,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10,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이탈리아군이 제한적으로 전진하였다.[6]

이손초 제1차 전투 요약
이탈리아군 사상자오스트리아-헝가리군 사상자결과
15,00010,000제한적인 이탈리아군의 전진


4. 1. 2. 이손초 제2차 전투 (1915년 7월 18일 – 8월 3일)

이손초 제2차 전투는 1915년 7월 18일부터 8월 3일까지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은 41,800명,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46,6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탈리아군의 승리로 끝났다.[6]

이손초 전투 요약
전투날짜이탈리아군 사상자오스트리아-헝가리군 사상자결과
이손초 제2차 전투1915년 7월 18일 – 8월 3일41,80046,600이탈리아군의 승리


4. 1. 3. 이손초 제3차 전투 (1915년 10월 18일 – 11월 3일)

이송소 제3차 전투는 1915년 10월 18일부터 11월 3일까지 벌어졌다. 이탈리아군은 66,998명의 사상자를 냈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41,847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 전투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송소 전투 요약
전투날짜이탈리아군 사상자오스트리아-헝가리군 사상자결과
이송소 제3차 전투1915년 10월 18일 – 11월 3일66,99841,847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승리


4. 1. 4. 이손초 제4차 전투 (1915년 11월 10일 – 12월 2일)

이손초 제4차 전투는 1915년 11월 10일부터 12월 2일까지 벌어진 전투이다. 이탈리아군은 49,500명,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32,10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손초 전투 요약
전투날짜이탈리아군 사상자오스트리아-헝가리군 사상자결과
이손초 제4차 전투1915년 11월 10일 – 12월 2일49,50032,100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승리


4. 1. 5. 이손초 제5차 전투 (1916년 3월 9일 – 17일)

1916년 3월 9일부터 17일까지 벌어진 이손초 제5차 전투는 결론이 나지 않았다.[6] 이탈리아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각각 1,882명과 1,985명의 사상자를 냈다.[6]

이손초 전투 요약
전투날짜이탈리아군 사상자오스트리아-헝가리군 사상자결과
이손초 제5차 전투1916년 3월 9일–15일1,8821,985결론 없음


4. 1. 6. 이손초 제6차 전투 (1916년 8월 6일 – 17일)

이손초 제6차 전투는 1916년 8월 6일부터 17일까지 벌어진 전투이다. 이탈리아군은 51,000명,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42,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 전투는 이탈리아군의 승리로 끝났다.[6]

이손초 전투 요약
전투날짜이탈리아군 사상자오스트리아-헝가리군 사상자결과
이손초 제6차 전투1916년 8월 6일–17일51,00042,000이탈리아군의 승리


4. 1. 7. 이손초 제7차 전투 (1916년 9월 14일 – 17일)

이송소 제7차 전투는 1916년 9월 14일부터 17일까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은 17,000명,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15,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 전투는 이탈리아군의 승리로 끝났다.

4. 1. 8. 이손초 제8차 전투 (1916년 10월 10일 – 12일)

이송소 제8차 전투는 1916년 10월 10일부터 12일까지 벌어진 전투이다. 이탈리아군은 55,000명,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38,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전투는 어느 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끝났다.

이송소 전투 요약
전투날짜이탈리아군 사상자오스트리아-헝가리군 사상자결과
이송소 제8차 전투1916년 10월 10일 – 12일55,00038,000결론 없음


4. 1. 9. 이손초 제9차 전투 (1916년 10월 31일 – 11월 4일)

이송소 제9차 전투는 1916년 10월 31일부터 11월 4일까지 벌어진 전투이다. 이탈리아군은 39,000명,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33,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 전투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탈리아군의 공격을 저지했다.

이송소 전투 요약
전투날짜이탈리아군 사상자오스트리아-헝가리군 사상자결과
이송소 제9차 전투1916년 10월 31일 – 11월 4일39,00033,000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승리, 이탈리아군의 공격 저지


4. 1. 10. 이손초 제10차 전투 (1917년 5월 12일 – 6월 8일)

이손초 제10차 전투는 1917년 5월 12일부터 6월 8일까지 벌어졌다. 이탈리아군은 150,000명,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75,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 전투 결과 이탈리아군이 제한적으로 전진했다.

4. 1. 11. 이손초 제11차 전투 (1917년 8월 19일 – 9월 12일)

이송소 제11차 전투는 1917년 8월 19일부터 9월 12일까지 벌어진 전투이다. 이탈리아군은 158,000명,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115,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 전투는 이탈리아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송소 전투 요약
전투날짜이탈리아군 사상자오스트리아-헝가리군 사상자결과
이송소 제11차 전투1917년 8월 18일 – 9월 12일158,000115,000이탈리아군의 승리


4. 1. 12. 카포레토 전투 (이손초 제12차 전투) (1917년 10월 24일 – 11월 7일)

1917년 10월, 브르시치 고개를 넘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 보급로


이손초 강 유역에서 거의 끊임없이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에, 이손초 전투를 구성하는 전투의 정확한 수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손초 전투 중 몇몇 전투에 별도의 이름을 붙였는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1917년 10월 코바리드 (Caporettoit, Karfreitde) 전투이다. 이 전투는 이손초 제12차 전투에 해당한다.

이탈리아에서 이 전투들이 항상 이손초 강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사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는 선전의 성공으로 여겨졌다. 이는 제국의 중요한 국경을 돌파하려는 이탈리아의 반복적인 실패를 강조한 것이다.[6]

이손초 제12차 전투는 1917년 10월 24일부터 11월 7일까지 벌어졌으며, 카포레토 전투라고도 한다.

5. 피해 규모

이존초 전투에 막대한 노력과 자원을 쏟았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이 전투의 지리적 어려움을 고려할 때 결과는 항상 실망스러웠고 실질적인 전술적 가치가 없었다.

수많은 이존초 전투의 누적 사상자 수는 엄청났다. 이탈리아군의 전체 전사자 수의 절반인 약 300,000명이 소차 강(이존초 강)에서 전사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손실은 그 수가 훨씬 적었지만, 전체 사상자 약 1,200,000명 중 약 200,000명으로 상당히 높았다.[4]

30,000명 이상의 사상자는 슬로베니아계 민족이었으며, 그 대부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에 징집되었다. 고리치아와 그라디스카 지역의 슬로베니아 민간인들도 수천 명이 이탈리아 난민 수용소로 이주되어 영양실조로 사망하는 등 많은 고통을 겪었다. 이들은 난민 수용소에서 국가의 적처럼 취급받았다.[5]

1916년 이탈리아군이 참호를 나서는 모습


1917년 11월 오스트리아군이 이존초 강을 건너는 모습

6. 대중 매체에서의 이손초 전투


  •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는 이 전선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부분적으로 다루고 있다.[1]
  • 이탈리아 시인 주세페 운가레티의 자전적 시 "이소체강(I Fiumi)"은 그가 전선에 배치되었을 당시 이소체강에서 쓴 시이다.[2]
  • 마크 헬프린의 《대전의 병사》는 이손초 전투의 일부를 언급하고 있다.[3]
  • 12차 전투는 스웨덴 작가 F. J. 노르드스테트의 소설 《카포레토》(Stockholm 1972)의 주제이다.[4]
  • 이소체 전선은 블랙밀 게임즈의 비디오 게임 《이손초》의 배경이다.[5]
  • 슈탄옐에서 벌어진 가상의 전투는 비디오 게임 《배틀필드 1》에서 플레이 가능한 맵 중 하나로 등장한다.[6]
  • 에밀리오 루수의 《남부 전선의 병사》는 이탈리아 측 관점에서 이손초 전투를 기술한 회고록이다.

참조

[1] 서적 Seeking Victory on the Western Front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2018-09-25
[2] 서적 A War in Words Simon & Schuster 2003
[3] 서적 A War in Words Simon & Schuster 2003
[4] 웹사이트 The Battles of the Isonzo, 1915-17. http://www.firstworl[...]
[5] 서적 Slovenski begunci v Italiji med prvo svetovno vojno 1991
[6] 문서 Isonzo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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