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폴리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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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갈리폴리 전역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국(영국,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이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다르다넬스 해협을 장악하려 했던 군사 작전이다. 1915년 4월 시작된 이 작전은 헬레스 곶, 안작 만, 수블라 만 등지에 상륙전을 펼쳤지만, 오스만 제국의 강력한 방어에 막혀 실패로 끝났다. 해군력만으로 해협을 통과하려던 시도 역시 좌절되었고, 8월의 대규모 공세마저 실패하면서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결국 연합군은 1915년 말부터 1916년 초까지 철수했고, 이 작전은 막대한 인명 피해와 함께 연합국의 실패로 기록되었다. 갈리폴리 전역은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안작 데이(ANZAC Day)로 기념되며, 터키에서는 다르다넬스 해협 방어의 승리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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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폴리 전역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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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분쟁 명칭 | 갈리폴리 전투 |
다른 명칭 | The Gallipoli Campaign 다르다넬스 전역 |
일부 | 제1차 세계 대전 중동 전역 |
기간 | 1915년 2월 19일 – 1916년 1월 9일 |
장소 | 갈리폴리 반도, 겔리볼루 산자크, 아드리아노플 빌라예트, 오스만 제국 |
결과 | 오스만 제국의 승리 |
교전 세력 | |
연합군 | }} }} 알제리 튀니지 서아프리카 |
오스만 제국군 지원 세력 | |
지휘관 | |
연합군 지휘관 | 이언 해밀턴 허버트 키치너 존 드 로벡 윌리엄 버드우드 윈스턴 처칠 앙리 구로 모리스 바이유 에밀 게프라트 |
오스만 제국군 지휘관 | 엔베르 파샤 오토 폰 산더스 제바트 파샤 메흐메트 에사트 파샤 웨히프 파샤 촐락 파이크 파샤 에리히 베버 페브지 파샤 자페르 타야르 베이 아흐메트 페브지 베이 할릴 사미 베이 셀라하틴 아딜 베이 무스타파 케말 베이 제밀 콘크 야쿱 셰브키 베이 카즘 베이 |
병력 | |
연합군 병력 | 초기 5개 사단 최종 15개 사단 총 489,000–550,000명 영국군 (아일랜드, 인도, 뉴펀들랜드 포함) 345,000명 프랑스군 79,000명 오스트레일리아군 약 50,000명 뉴질랜드군 약 15,000명 민간 노동자 약 2,000명 |
오스만 제국군 병력 | 초기 6개 사단 최종 16개 사단 총 250,000–315,500명 독일군 약 700명 |
사상자 | |
연합군 사상자 | 영국 제국: 198,340명 (사망 31,389명, 실종 및 포로 9,708명, 부상 78,749명, 질병으로 후송 78,494명) 프랑스: 사망 및 실종 9,000명, 부상 18,000명, 질병으로 후송 20,000명 오스트레일리아: 사망 8,709명, 부상 18,500명 뉴질랜드: 사망 3,431명, 부상 4,140명 총 300,000명 총 사망자 56,707명 |
오스만 제국군 사상자 | 255,268명 (사망 56,643명, 부상 97,007명, 실종 및 포로 11,178명, 질병으로 후송 69,440명, 질병 사망 21,000명) 총 255,268명 총 사망자 77,643명 |
부대 | |
연합군 부대 | 지중해 원정군 이집트 노동자 부대 몰타 노동자 부대 동방 원정군 |
오스만 제국군 부대 | 제5군 독일 군사 사절단 |
관련 정보 |
2. 배경
제1차 세계 대전은 1914년 프랑스와 벨기에 지역의 서부 전선에서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전황 돌파구가 필요하게 되었다. 연합국 측 러시아 제국은 카프카스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에 진군했으나 맹렬한 반격에 직면하여 연합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영국 해군장관 윈스턴 처칠은 다르다넬스 해협 서쪽 갈리폴리 반도를 점령하고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로 진격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스탄불 점령은 연합군이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해 흑해에서 러시아군과 연결되고, 불가리아, 그리스 등 발칸 국가들의 연합국 가담을 기대할 수 있게 했다. 서 이언 해밀턴 장군을 사령관으로 하는 지중해 원정군 파병이 결정되었다.
지중해 원정군에는 영국 자치령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지원병으로 구성된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군단(ANZAC), 영국 제29사단, 영국 해군 사단, 프랑스 부대가 참가했다. 오스만 측은 독일 제국에서 초청한 오토 리만 폰 잔더스 중장을 군사 고문으로 하는 최정예 6개 사단으로 구성된 제5군단을 배치했다. 다르다넬스 해협에는 대량의 기뢰를 매설하고, 해협 양안에 다수의 포대를 설치하여 요새화했다.
2. 1. 그레이트 게임
그레이트 게임(1813~1907)은 1813년부터 1907년까지 대영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중앙아시아에서 인도, 흑해 연안에서 극동을 아우르는 유라시아까지 패권을 두고 벌인 전략적 경쟁을 의미한다. 이 경쟁에서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로 남하하여 인도양의 부동항을 확보하려 했고, 영국은 이를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1907년 이후 영국과 러시아는 경쟁을 끝내고 독일 제국에 대항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오스만 제국은 중립을 표방하면서 영국, 프랑스에게 차관을 받고, 독일로부터 군사고문단을 파견받아 육군 근대화를 이루는 등 강대국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펼쳤다. 그러나 독일이 러시아, 영국에 대항하며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중립 외교는 깨지게 된다.
2. 2.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사라예보 사건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와 벨기에 지역의 서부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연합국 측 러시아 제국은 카프카스에서 오스만 제국에 밀려 연합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영국 해군장관 윈스턴 처칠은 다르다넬스 해협 서쪽 갈리폴리 반도를 점령하고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로 진격하는 계획을 세웠다.이스탄불 점령은 연합군이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해 흑해에서 러시아군과 연결되고, 불가리아, 그리스 등 발칸 국가들의 연합국 가담을 기대할 수 있게 했다. 서 이언 해밀턴 장군을 사령관으로 하는 지중해 원정군 파병이 결정되었다.
지중해 원정군에는 영국 자치령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지원병으로 구성된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군단(ANZAC), 영국 제29사단, 영국 해군 사단, 프랑스 부대가 참가했다. 오스만 측은 독일 제국에서 초청한 오토 리만 폰 잔더스 중장을 군사 고문으로 하는 최정예 6개 사단으로 구성된 제5군단을 배치했다. 다르다넬스 해협에는 대량의 기뢰를 매설하고, 해협 양안에 다수의 포대를 설치하여 요새화했다.
2. 3. 다르다넬스로의 선택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서쪽으로는 영국, 프랑스, 동쪽으로는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영국을 비롯한 연합군은 러시아를 통해 독일을 견제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러시아에 군수물자를 지원하려 했다. 그러나 육로는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의해 차단되었기 때문에, 연합군은 바닷길을 통해 러시아를 지원해야 했다.처음 고려된 세 가지 바닷길은 다음과 같다.
북해는 파도가 거칠고 겨울에는 얼어붙었으며, 발트해는 해협이 좁고 독일군이 주둔하고 있어 제외되었다. 결국 흑해를 통해 갈리폴리로 진입하는 방안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판단되었다. 영국군은 갈리폴리를 사용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을 끌어들이려 했으나, 오스만 제국은 이미 독일과 군사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중립을 포기하고 독일 편에 섰다.[10]
영국군은 갈리폴리 상륙과 이스탄불 점령을 통해 흑해의 해상운용권을 얻으려 했고, 이를 위해 다르다넬스 해협을 거쳐 갈리폴리로 진입한 후 이스탄불까지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1914년 10월 29일, 독일의 옛 군함인 오스만 제국 전함 야부즈 술탄 셀림(Yavûz Sultân Selîm)과 순양함 미딜리(Midilli)가 흑해 공격을 감행하여 러시아 항구도시 오데사를 폭격하고 여러 척의 선박을 침몰시켰다. 10월 31일,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러시아를 상대로 카프카스 전역을 시작했다. 영국은 갈리폴리 요새를 폭격하고 메소포타미아를 침략했으며, 다르다넬스 해협 강제 통과 가능성을 연구했다.
1914년 말, 서부 전선에서는 프랑스와 영국의 반격 작전인 마른 전투가 끝났고, 벨기에와 프랑스는 이프르 전투에서 많은 사상자를 냈다. 기동전은 참호전으로 바뀌었다.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서쪽의 영국, 프랑스와 동쪽의 러시아 사이의 육로 교역로를 봉쇄했다. 북극의 백해와 극동의 오호츠크해는 겨울에 얼어붙었고 동부 전선과는 거리가 멀었다. 발트해는 독일 제국 해군에 의해 봉쇄되었고,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한 흑해 입구는 오스만 제국이 통제하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이 중립을 유지하는 동안에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해 러시아에 물자를 보낼 수 있었지만, 오스만 제국이 전쟁에 참전하기 전에 해협은 폐쇄되었고, 11월에 오스만 제국은 해로에 기뢰를 매설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정치인 아리스티드 브리앙은 11월에 오스만 제국 공격을 제안했지만 거절되었고, 영국이 오스만 제국에 협상국 편에 가담하도록 뇌물을 주려는 시도도 실패했다. 그달 말, 해군본부 장관 윈스턴 처칠은 오스만군 병력에 대한 잘못된 보고서를 바탕으로 다르다넬스 해협에 대한 해군 공격을 제안했다. 처칠은 독일 고해군에 대항할 수 없는 많은 낡은 전함을 다르다넬스 작전에 사용하고, 육군이 소규모 점령군을 제공하기를 원했다.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면 불가리아와 그리스가 협상국 편에 가담할 것이라는 희망도 있었다. 1915년 1월 2일, 러시아의 니콜라이 대공은 코카서스에서 작전 중인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영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코카서스에서 오스만군을 유인하기 위한 다르다넬스 해협 해상 시위 계획이 시작되었다.

1915년 2월 17일, 영국 수상 비행기가 해협 상공 정찰 비행을 실시했다. 이틀 후, 영국과 프랑스 함대(영국 드레드노트 전함 포함)가 오스만 제국의 해안 포대에 장거리 포격을 개시하며 다르다넬스 해협 공격이 시작되었다. 악천후로 공격이 지연되었지만, 2월 25일까지 외곽 요새가 함락되고 해협 입구의 기뢰가 제거되었다. 왕립 해병대가 쿠몰 칼레와 세뒤르바히르에 상륙하여 포대를 파괴하는 동안, 해군 포격은 쿠몰 칼레와 케페즈 사이의 포대를 공격하는 것으로 전환되었다.
오토 리만 폰 잔더스 장군의 지시에 따라 배치된 오스만군 포대의 기동성에 좌절한 처칠은 해군 사령관 새크빌 카든 제독에게 함대의 노력을 증강할 것을 압박했다. 카든은 새로운 계획을 세웠고 3월 4일 처칠에게 보낸 전문에서 함대가 14일 안에 이스탄불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오스만 제국의 다르다넬스 해협 요새의 탄약이 부족하다는 독일 무선 메시지가 가로채지면서 승리의 기대감이 고조되었다. 카든에게 이 메시지가 전달되었을 때, 주 공격은 3월 17일 또는 그 무렵에 시작하기로 결정되었다. 스트레스를 받던 카든은 병가를 받았고, 사령관은 존 드 로벡 제독에게 넘어갔다.
1915년 3월 18일 아침, 순양함과 구축함을 포함한 18척의 전함으로 구성된 연합군 함대가 다르다넬스 해협의 가장 좁은 지점(폭 약 1.6km)을 향해 본격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연합군 함선이 오스만 제국의 반격으로 일부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뢰 제거 작업이 해협에서 진행되었다. 오스만 제국 공식 보고서에 따르면 오후 2시경 "모든 전화선이 두절되었고, 요새와의 모든 통신이 두절되었으며, 일부 포대가 파괴되는 등 방어측의 포격이 상당히 약화되었다"고 한다. 프랑스 전함 부베는 기뢰를 밟아 2분 만에 침몰했고, 718명의 승무원 중 75명만 생존했다. 민간인이 운용하는 기뢰 제거함은 오스만 제국의 포격 속에 후퇴하여 기뢰밭은 대부분 그대로 남았다. 영국 전함 이레지스티블과 인플렉시블도 기뢰를 밟았고, 이레지스티블은 침몰했지만 대부분의 승무원은 구조되었다. 인플렉시블은 심각한 피해를 입고 철수했다. 전투 중 피해 원인에 대한 혼란이 있었으며, 일부 참가자들은 어뢰 공격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이레지스티블 구조를 위해 파견된 오션은 포탄을 맞고 기뢰를 밟아 침몰했다.
프랑스 전함 쉬프랭과 고왈루아는 10일 전 오스만 제국 기뢰부설함 누스레트가 비밀리에 설치한 새로운 기뢰밭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손실로 인해 드 로벡은 남은 함대를 보호하기 위해 "전면 철수" 명령을 내렸다. 작전 계획 단계에서 해군 손실은 예상되었고, 독일 함대에 대항할 수 없는 주로 구식 전함들이 투입되었다. 퀸 엘리자베스 함장인 로저 키스 준장과 같은 일부 고위 해군 장교들은 오스만 제국의 함포가 거의 탄약이 소진되었다는 믿음을 가지고 승리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지만, 드 로벡, 제1해군장관인 존 피셔 경 등의 견해가 우세했다. 손실과 악천후로 인해 해군력을 이용한 해협 돌파 시도는 중단되었다. 함선 통행로를 확보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의 방어 시설을 육상에서 점령하려는 계획이 시작되었다. 두 척의 연합군 잠수함이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하려고 시도했지만, 기뢰와 강한 조류 때문에 침몰했다.
3. 다르다넬스 해전
다르다넬스 해협은 입구 폭이 약 3.7km이고 흑해에서 에게해로 급류가 흘러, 오스만 제국은 이 곳을 '요새'라고 불렀다. 다르다넬스 해협을 가운데에 놓고 양옆에 해상 방어 요새를 건설하여 약 6.4km의 방어선을 구축했다.[11]
1915년 2월과 3월, 영국과 프랑스 연합 함대는 해상에서 포격을 가했으나, 악천후와 오스만 제국의 방어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특히 3월 18일, 연합 함대는 해협 돌파를 시도했으나, 오스만 제국 누스렛이 설치한 기뢰에 접촉하여 전노급 전함 3척(프랑스의 부브, 영국 해군의 오션, 이레지스티블)이 침몰하고, 다른 3척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이로 인해 연합군은 해군력만으로 다르다넬스 해협을 장악하는 것을 단념하고, 육상 병력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해상 공격 실패 후, 연합군은 오스만 제국의 이동 포대를 제거하기 위해 아이언 해밀턴 경 장군이 지휘하는 지중해 원정군(MEF) 7만 8천 명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오스트레일리아 군단과 뉴질랜드 원정군 병사들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군단(ANZAC)으로 편성되었으며, 윌리엄 버드우드 경이 지휘했다. ANZAC 군대에는 제29사단과 왕립 해군 사단이 합류했다. 프랑스의 ''Corps expéditionnaire d'Orient''(동방 원정군)도 해밀턴의 지휘 아래에 놓였다.
그러나 연합군은 오스만 군의 전투력을 과소평가하고,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했다. 4월 말까지 5주간의 지연이 발생했고, 그 동안 오스만 제국은 반도의 방어를 강화했다.
3. 1. 해협으로의 진격
1914년 12월, 러시아 제국이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오스만 제국의 공격으로 어려움을 겪자 영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영국은 '사크빌 카르당' 해군 중장의 지휘 아래 영국-프랑스 합동 함대를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급파하여 다르다넬스를 공략하기로 결정했다.1915년 2월 17일, HMS 아크 로열 소속 영국 수상기가 해협 상공에서 정찰 비행을 실시했다. 이틀 후, 영국과 프랑스 함대는 오스만 제국의 해안 포대에 장거리 포격을 개시하며 다르다넬스 해협 공격을 시작했다. 악천후로 공격이 지연되었지만, 2월 25일까지 외곽 요새가 함락되고 해협 입구의 기뢰가 제거되었다. 왕립 해병대가 쿠물 칼레와 세듀르바히르에 상륙하여 포대를 파괴하는 동안, 해군 포격은 케페즈 사이의 포대를 공격하는 것으로 전환되었다.
오토 리만 폰 산더스 장군의 지시에 따라 배치된 오스만군 포대의 기동성에 좌절한 윈스턴 처칠은 해군 사령관 사크빌 카든 제독에게 함대의 노력을 증강할 것을 압박했다. 카든은 새로운 계획을 세웠고, 3월 4일 처칠에게 보낸 전문에서 함대가 14일 안에 이스탄불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오스만 제국의 다르다넬스 해협 요새의 탄약이 부족하다는 독일 무선 메시지가 가로채지면서 승리의 기대감이 고조되었다. 스트레스를 받던 카든은 의무관에 의해 병가를 받았고, 사령관은 존 드 로벡 제독에게 넘어갔다.
1915년 3월 18일, 연합군 함대는 다르다넬스 해협의 가장 좁은 지점(폭 약 1.6km)을 향해 본격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연합군 함선이 오스만 제국의 반격으로 일부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뢰 제거 작업이 해협에서 진행되었다. 프랑스 전함 부베(Bouvet)는 기뢰를 밟아 2분 만에 침몰했고, 718명의 승무원 중 75명만 생존했다. 민간인이 운용하는 기뢰 제거함은 오스만 제국의 포격 속에 후퇴하여 기뢰밭은 대부분 그대로 남았다. 영국 전함 이레지스티블(HMS Irresistible)과 인플렉시블(HMS Inflexible)도 기뢰를 밟았고, 이레지스티블은 침몰했지만 대부분의 승무원은 구조되었다. 인플렉시블은 심각한 피해를 입고 철수했다. 이레지스티블 구조를 위해 파견된 오션(HMS Ocean)은 포탄을 맞고 기뢰를 밟아 침몰했다.[1]
프랑스 전함 쉬프랭(Suffren)과 고왈루아(Gaulois)는 오스만 제국 기뢰부설함 누스레트(Nusret)가 비밀리에 설치한 새로운 기뢰밭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손실로 인해 드 로벡은 남은 함대를 보호하기 위해 "전면 철수" 명령을 내렸다. 작전 계획 단계에서 해군 손실은 예상되었고, 독일 함대에 대항할 수 없는 주로 구식 전함들이 투입되었다. 퀸 엘리자베스 함장인 로저 키스 준장과 같은 일부 고위 해군 장교들은 오스만 제국의 함포가 거의 탄약이 소진되었다는 믿음을 가지고 승리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지만, 존 피셔 등의 견해가 우세했다. 손실과 악천후로 인해 해군력을 이용한 해협 돌파 시도는 중단되었다. 함선 통행로를 확보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의 방어 시설을 육상에서 점령하려는 계획이 시작되었다. 두 척의 연합군 잠수함이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하려고 시도했지만, 기뢰와 강한 조류 때문에 침몰했다.
3. 1. 1. 1915년 2월 17일
영국 해군의 수상기 모함인 아크 로얄의 수상 비행기가 다르다넬스 해협 상공에서 정찰 임무를 시작했다.[1] 이틀 뒤인 2월 19일, 퀸 엘리자베스 호를 포함한 영국-프랑스 함대가 해안에 장거리 포격을 시작하면서 첫 공격이 시작되었다.[1] 2월 25일까지 해협 입구의 기뢰가 제거되자, 영국 왕립해병대는 해안포를 파괴하기 위해 상륙했다.[1] 영국 해군은 해협 진입을 위해 기뢰제거함을 파견했지만, 오스만 제국 포대의 견제로 어려움을 겪자 윈스턴 처칠은 공세를 재촉했다.[1] 한편, 다르다넬스 요새 해안 포대의 탄약이 부족하다는 독일의 무전을 연합군이 입수하면서 본격적인 해협 진격을 준비했다.[1]
3. 1. 2. 1915년 3월 18일
1915년 3월 18일, 연합군 함대는 전함 18척, 순양함, 구축함으로 구성되어 다르다넬스 해협의 가장 좁은 폭 1.6km 지점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연합군 함선들은 함포 사격으로 요새를 타격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연합군 전함이 가까이 접근하자 오스만 제국군은 포격을 시작했고, 미리 설치해 둔 기뢰로 연합군을 압박했다.[12]오스만 제국의 반격으로 연합군 함대가 손상되었지만, 해협의 기뢰를 제거하기 위해 기뢰제거함이 투입되었다. 그러나 기뢰는 탐지되지 않았고, 프랑스 전함 부브가 기뢰에 의해 전복되었다. 영국 전함 이리지스터블과 인플렉서블은 심하게 손상되어 작전에서 철수했다. 결국 연합함대는 함정의 1/3을 잃었으나,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해전의 패배는 갈리폴리 지상 작전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다.[12]
4. 갈리폴리 상륙작전
1915년 2월 17일, 영국 수상 비행기가 다르다넬스 해협 상공을 정찰 비행했다. 이틀 후, 영국과 프랑스 함대가 오스만 제국의 해안 포대에 장거리 포격을 개시하며 다르다넬스 해협 공격이 시작되었다. 악천후로 공격이 지연되었지만, 2월 25일까지 외곽 요새가 함락되고 해협 입구의 기뢰가 제거되었다. 왕립 해병대는 쿠몰 칼레와 세뒤르바히르에 상륙하여 포대를 파괴했고, 해군 포격은 쿠몰 칼레와 케페즈 사이의 포대로 옮겨갔다.
해상 공격 실패 후, 연합군은 기뢰 제거를 방해하는 오스만 제국의 이동 포대를 제거하기 위해 육군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키치너는 아이언 해밀턴 경 장군을 지중해 원정군(MEF)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7만 8천 명의 병력을 지휘하게 했다. 오스트레일리아 군단(AIF)과 뉴질랜드 원정군(NZEF) 병사들은 프랑스로 파병되기 전 이집트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다. 이들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군단(ANZAC)으로 편성되어 중장 윌리엄 버드우드 경이 지휘했다. ANZAC에는 제29사단, 왕립 해군 사단, 프랑스 동방 원정군도 합류했다.
해밀턴은 갈리폴리 반도 남부 헬레스 곶과 세드위바히르에 집중하기로 결정하고, 오스만 군의 전투력을 과소평가했다. 4월 말까지 5주간의 지연으로 오스만 제국은 방어를 강화했다. 해밀턴과 본부 직원들은 4월 10일 무드로스에 도착했고, ANZAC 군단은 4월 12일 렘노스 섬에 집결하여 상륙 훈련을 실시했다. 영국 제29사단은 4월 7일, 왕립 해군 사단은 4월 17일 무드로스에 도착하여 스키로스 섬에서 훈련했다.
버드우드 장군 부대는 북쪽 상륙 지점을 할당받아, 제1오스트레일리아 사단과 뉴질랜드 및 오스트레일리아 사단 약 25,000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상륙 후 내륙으로 진격하여 남쪽 오스만군의 통신선을 차단하는 임무를 맡았다. 제1오스트레일리아 사단이 먼저 상륙하고, 제3보병여단이 선봉으로 건 리지에 진지를 구축할 예정이었다. 뉴질랜드 및 오스트레일리아 사단은 반도를 가로질러 진격할 준비를 했다. 이들은 야간에 집결하여 새벽에 상륙, 방어군을 기습할 계획이었다.
4월 25일 오전 4시, 제3여단 선봉대가 해안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항해 오류로 목표 지점보다 약 2km 북쪽인 아리 부르누 남쪽 만에 상륙했다. 오스만군 2개 중대가 주둔하고 있었지만, 고지에서 호주군에게 많은 사상자를 낸 후 제압당했다. 험한 지형과 부정확한 지도로 인해 호주군은 조직적인 진격이 어려웠다.
제1, 제2여단과 뉴질랜드 및 오스트레일리아 사단이 아리 부르누 주변 해변에 상륙했지만 혼란이 발생하여 정리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케말은 추누크 바이르와 사리 바르 고지대 반격을 위해 방어군을 재편성했다. 저녁 무렵, 브리지스와 고들리는 재승선을 권고했지만, 해밀턴은 참호를 파도록 명령했다. 안작군 첫날 사상자는 약 2,000명이었고, 고지 확보 실패로 전술적 교착 상태에 빠졌다.
호주 잠수함 AE2는 4월 24일 밤 해협을 통과했다. 4월 25일 새벽, 헬레스 곶과 안작 코브 상륙이 시작되자 AE2는 차낙에 도착하여 오스만 군함에 어뢰를 발사하고 구축함을 피했다. AE2는 마르마라 해로 진격하여 야간까지 해저에 잠수함을 정박시켰다가, 밤에 부상하여 함대에 무선 보고를 보냈다. AE2의 성공은 버드우드가 계속하기로 결정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헬레스 곶 상륙 작전은 영국 제29사단(에일머 헌터-웨스턴 소장)이 수행했다. 29사단은 반도 끝 5개 해변("S", "V", "W", "X", "Y")에 상륙했다. 5월 1일, 제29인도여단이 상륙하여 사리 바르를 점령했다. "Y" 해변에서는 크리티아 제1차 전투에서 연합군이 무방비 상륙하여 내륙으로 진격했지만, 오스만 제국군 증원으로 저지당했다.
주요 상륙 지점은 세드듄바히르 요새 아래 "V" 해변과 헬레스 곶 서쪽 "W" 해변이었다. 로열 먼스터 퓨실리어스와 햄프셔 연대는 개조된 수송선 리버 클라이드 호에서, 로열 더블린 퓨실리어스는 "V" 해변, 랭커셔 퓨실리어스는 "W" 해변에 상륙했다. 오스만군 수비대는 유리한 위치에서 영국 보병에게 많은 사상자를 냈다.
오스만군은 병력이 부족했지만 해안 근처에서 공격을 저지했다. 상륙 후 연합군은 소규모 진격을 제외하고는 상황을 활용하지 못했고, 오스만군은 증원군을 파견하고 수비대를 재편성할 시간을 벌었다.
4월 27일, 오스만 제19사단은 6개 대대 증원을 받아 안작에서 연합군에 반격했다. 해군 함포 지원을 받은 연합군은 밤새 공격을 막아냈다. 4월 28일, 연합군은 크리티아 점령을 위해 크리티아 제1차 전투를 치렀지만, 오스만군 방어에 막혀 약 3,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오스만군 증원으로 연합군의 신속한 승리는 불가능해졌고, 헬레스와 안작 전투는 소모전으로 변했다. 4월 30일, 왕립 해군 사단이 상륙했고, 케말은 병력을 전진시켰다.
4월 30일, 잠수함 ''AE2''는 술탄히사르함 근처에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가 다시 침몰 후 재부상했다. ''술탄히사르''함의 사격으로 선체에 구멍이 났고, 스토커는 승무원에게 배를 버리도록 명령하고 잠수함을 자침시켰다. ''AE2''의 업적은 해협 돌파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영국과 프랑스 잠수함 작전으로 오스만군 통신이 방해받았다.
1915년 4월 25일, 연합군 상륙 작전이 시작되었다. 오스만군은 상륙 예상 지점에 병력을 증강하고 견고한 진지를 구축했다. 영국 제29사단은 헬레스 곶 5곳에 상륙했지만, 오스만군 반격으로 2곳에서 철수하고 3곳 해안을 확보했다. ANZAC 군은 안작 만에 상륙하여 교두보를 확보했다.
4. 1. 연합군의 상륙작전의 준비
연합군은 해군력만으로 다르다넬스 해협을 돌파하려던 기존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영국 정부의 전략적 혼란은 정치인들이 유럽 대륙 전쟁의 영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을 보여주었다. 이후 영국군 제29사단을 주축으로, ANZAC과 영국 해군 사단(RND)이 이안 해밀턴 대장의 지휘 하에 모였다. 해밀턴 장군은 갈리폴리 반도 상륙작전을 통해 다르다넬스 해협을 감제하는 킬리드 바흐르 고원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갈리폴리 반도는 지형적으로 협소하여 방어에 유리했기 때문에, 상륙작전을 어떻게 수행할지가 중요했다. 지중해 원정군(MEF)의 작전 준비 지연은 터키 군의 방어 강화를 초래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해밀턴은 오스만 제국에 대한 기만작전을 통해 전술적 우위를 확보하려 했다.[13]

영국군은 제29사단에 5개의 상륙부대를 편성하여 갈리폴리 반도의 헬레스 곶[14]에 상륙시키는 계획을 세웠다. ANZAC 군단은 반도 북쪽의 클리드 바흐르 반대편, 가바 테페 북쪽 해안에 상륙하기로 했다. (이곳은 현재 ANZAC 해변으로 불린다.)
프랑스군은 아시아 해변의 쿰 칼레에 상륙하여 영국군 제29사단의 후방을 엄호하기로 했다. 연합군은 오스만 제국군을 혼란시키기 위해 프랑스군이 베시카 만에서, 영국 해군 사단이 반도의 목에서 공격하는 양동작전을 계획했다. 해밀턴 장군은 부대를 분할하여 집중을 막고, 모든 곳에서 실패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오토 리만 폰 산더스 장군 휘하의 오스만 제국 제5군은 예비대를 위험 지역으로 이동시켜 역습을 가해 연합군을 바다로 몰아낼 계획이었다.[15]
4. 2. 오스만 제국의 준비
오스만 제국은 다르다넬스 해협의 지형적 이점을 활용하여 연합군의 해상 공격을 큰 피해 없이 막아냈다. 하지만 오스만 군대는 연합군에 비해 훈련 수준과 장비가 부족했고, 지휘 체계도 통일되지 않았다. 영국제 소총과 독일제 소총을 혼용하여 탄약 규격이 맞지 않았고, 독일군 장교들이 지휘를 맡아 의사소통에도 문제가 있었다.[16]연합군의 상륙에 대비하여 오스만군은 제9사단의 5개 대대를 다르다넬스 해협 양쪽 육지에 배치했다. 이들은 헬레스 곶에서 가바 테페, 안작 해변까지 이어지는 해안선을 방어했다. 오스만군은 갈리폴리 반도의 능선에 있는 고지를 지키는 것이 방어의 핵심이라고 판단했다. 발칸 전쟁에서 불가리아를 상대로 작전을 펼쳤던 무스타파 케말 중령은 갈리폴리 반도의 지형을 잘 알고 있었고, 연합군이 헬레스 만과 가바 테페에 상륙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했다.[17] 그는 영국군이 여러 지역에 동시에 상륙하여 오스만 군을 혼란에 빠뜨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오토 리만 폰 산더스 장군 역시 가바 테페에서 연합군의 상륙을 예상하고, 제5군의 약 1/3을 해당 지점에 배치했다. 또한 2개 사단은 갈리폴리 반도 북쪽 끝에서 반도 아래로 향하는 보급선과 통신선을 보호하기 위해 배치했다.[13]
4. 3. 상륙작전
연합군은 이전부터 순전히 해군력만으로 공격하려던 계획에 대해 머뭇거렸다. 이후 영국군 제29사단을 중심으로 호주-뉴질랜드 연합군 군단(ANZAC)과 영국해군사단(RND)이 이안 해밀턴 대장의 지휘 하에 들어갔다. 해밀턴 장군은 갈리폴리 반도 상륙작전을 통해 다르다넬스 해협을 감제하는 '킬리드 바흐르' 고원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13]
지형적으로 협소하여 방어 측에 유리한 갈리폴리 반도에서 상륙작전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지중해 원정군(MEF)이 집결하여 작전을 준비하는 데 지연이 불가피했기에, 더 지연될 경우 터키 군의 방어 강화 가능성이 높았다. 따라서 해밀턴은 오스만 제국에 기만작전을 시도하여 전술적 우위를 가져가려 했다.[13]
영국군은 제29사단을 중심으로 5개 상륙부대를 갈리폴리 반도의 '헬레스 곶[14]'에 상륙시켜 작전하도록 계획했다. ANZAC 군단은 반도 북쪽 '클리드 바흐르' 반대편 '가바 테페' 북쪽 해안에 상륙하기로 했다. (이곳은 현재 ANZAC해변으로 불린다.)
프랑스군은 아시아 해변 '쿰 칼레'에 상륙하여 영국군 제29사단의 후방을 엄호하기로 했다. 연합군은 오스만 제국군을 혼란시키기 위해 프랑스군이 '베시카'만에서, 영국 해군사단은 반도 목 부분에서 공격하는 양동작전을 계획했다. 해밀턴 장군은 부대를 분할하여 집중을 막고 모든 곳에서 실패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오토 리만 폰 산더스 장군 지휘 하의 오스만 제국 제5군은 예비대가 위험지역으로 이동하면 역습하여 연합군을 바다로 몰아낼 계획이었다.[15]
'''1) 헬레스 상륙작전 (영국군)'''
영국군은 갈리폴리 반도 남쪽 끝 헬레스 곶에 상륙할 계획이었다. 이 작전은 영국 29사단이 수행했다. 29사단장 'Aylmer Gould Hunter-weson' 소장은 헬레스 곶 주변 5개 지점을 상륙지점으로 선정, 헬레스 곶을 포위하여 오스만군을 격멸하는 계획을 세웠다. 반도 아래쪽부터 시계방향으로 S, V, W, X, Y 지점을 선택하고, 주공은 V, W 해변에 상륙하는 영국군 제86여단이, 조공부대는 S, X, Y 해변에 상륙하여 터키 군 측방을 위협하는 전략이었다. 프랑스군은 헬레스 곶 맞은편 '쿰 칼레'에 상륙하여 아시아 지역 요새로부터 연합군 후방을 엄호했다. 이후 영국군이 헬레스를 점령하고 반도 위쪽으로 진격하여 ANZAC 해변에 상륙한 ANZAC군과 함께 킬리드 바흐 고원을 공격하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18]
'''S, X, Y 해변 상륙작전'''
거의 저항 없이 상륙에 성공했으나, 상륙 이후 공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특히 Y 해변 부대는 오스만 제국군 증원으로 전투가 혼란스럽게 진행되었다.[19]
'''W, V 해변 상륙작전'''
오스만 제국군은 2개 중대 규모만 배치했기 때문에 연합군은 큰 저항과 피해 없이 상륙에 성공했다.[19]
'''Y 해변 상륙작전'''
Y 해변 상륙작전은 연합군에게 매우 절망적이었다. 오스만 제국군은 용맹하게 저항했다. 당시 상륙은 큰 전함에서 소형단정에 병력을 태우고 해변 가까이에서 병사가 내려 단정 줄을 끌고 상륙하는 방식이었다. 해안 견제사격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Y 해변은 소형단정이 가까워지자 소총 사격이 쏟아졌다. 영국군 상륙까지 많은 시간과 사상자가 발생했다.[19]
'''2) 쿰 칼레 작전 (프랑스군)'''
쿰 칼레에 상륙한 프랑스군은 오스만 제국군 분산이라는 양동작전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쿰 칼레는 다르다넬스 해협 건너편이라 병력 분산 목표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프랑스군은 상륙작전 경험이 없어 주둔 중이던 오스만 군에게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20]
'''3) ANZAC 해변 상륙작전 (ANZAC)'''

ANZAC은 에게 해 '가바 테페' 북쪽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가바 테페 상륙은 해안에서 킬리드의 오스만 군대를 차단하고, 오스만 증원군이 헬레스 곶 영국군에게 가는 것을 막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버드우드 부대(호주 제1사단)는 남쪽 오스만 군대와 본부 통신선을 끊기 위해 상륙, 내륙 진격 임무를 받았다. 호주 제1사단이 먼저 상륙하고, 제3보병여단이 내륙으로 이동해 진지를 구축했다. 제2보병여단은 '사리 바이어' 고지대를 점령했다. 제1보병여단은 예비군으로 가장 마지막에 상륙했다.
4월 24일 오전 2시, 아리부르누 언덕에서 해안을 관찰하던 오스만 군은 지평선 너머 수많은 배를 확인했다. 오전 3시경 달빛이 가려져 육안 확인이 어려워 상륙인지 단순 기동인지 판단이 어려웠다. 오전 6시경 포격 소리가 울렸으나, 총지휘관 산더스는 본부를 떠나 부하들에게 명확한 지시가 내려지지 않았고, 상륙 포격에 대한 방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21]
4월 25일 오전 4시, 제3여단 일부 병력이 배를 타고 해안으로 이동했다. 엄호부대는 항해 오류로 상륙 계획지점 '아리 부르누'보다 약 2km 북쪽 ANZAC 해변에 상륙했다. 아리 부르누보다 해변이 가팔라 상륙이 어려웠다. 익숙하지 않은 지형과 부정확한 지도는 호주군 작전에 어려움을 줬다. 가파른 계곡과 울창한 삼림은 호주군 진격과 부대 유지를 힘들게 해 소그룹으로 나뉘게 했다.[22]
5. 지상작전(갈리폴리 반도)
Kara harekâtı (Gelibolu)|카라 하레카트 (겔리볼루)tr
5월 5일, 제42사단(이스트 랭커셔)가 이집트에서 파병되었다. 안작(ANZAC)이 안전하다고 판단한 해밀턴은 호주 제2보병여단과 뉴질랜드 보병여단을 20문의 호주 야포와 함께 헬레스 전선으로 이동시켜 크리티아 전투(제2차)의 예비대로 배치했다. 2만 명의 병력이 투입된 이 전투는 헬레스에서의 최초의 대규모 공격이었으며, 주간 공격으로 계획되었다. 프랑스군은 케레베스 데레를, 영국군, 호주군, 뉴질랜드군은 크리티아와 아치 바바를 공격할 임무를 맡았다. 30분간의 포병 사격 준비 후, 5월 6일 오전 공격이 시작되었다.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깊은 계곡으로 분리되어 오스만 제국군이 요새화한 협곡, 전나무, 크리티아, 케레베스 지맥을 따라 진격했다. 공격군은 오스만군의 강력한 방어진지를 우회하려다 분산되었고, 생소한 지형에 놓이게 되었다. 영국군 정찰기가 발견하지 못한 오스만군 전초기지의 포격과 기관총 사격을 받아 공격은 막혔고, 다음 날 증원군이 도착하여 진격을 재개했다.
공격은 5월 7일에 계속되었고, 5월 8일에는 뉴질랜드군 4개 대대가 크리티아 지맥을 공격했으며, 제29사단과 함께 마을 남쪽에 위치한 곳까지 진출했다. 오후 늦게 호주 제2여단은 개활지를 신속하게 돌파하여 영국군 전선에 도달했다. 소화기와 포격 속에서 여단은 크리티아를 향해 돌격하여 목표 지점까지 약 400m 부족한 지점까지 600m를 진격했지만, 1,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전나무 지맥 근처에서 뉴질랜드군은 전진하여 호주군과 합류했지만, 영국군은 막혔고 프랑스군은 목표 지점을 내려다보는 지점을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쳐 있었다. 공격은 중단되었고, 연합군은 크리티아와 아치 바바를 점령하지 못하고 참호를 구축했다.
잠시 교전이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연합군은 특히 포병용 탄약이 거의 소진되었고, 양측 모두 방어를 강화했다. 오스만 제국군은 호주군 전선 맞은편의 병력을 교체했고, 호주군은 보병으로 작전하는 호주 경기병에 의해 증원되었다. 저격, 수류탄 공격, 기습 공격 등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되었고, 양측 참호는 곳곳에서 불과 수 미터 떨어져 있었다. 호주군은 저격으로 많은 장교를 잃었는데, 제1사단장인 윌리엄 브리지스 소장은 "스틸 포스트" 근처의 제1경기병연대 진지를 시찰하던 중 부상을 입고 5월 18일 군함 HMHS 가스콩에서 사망했다.
5월 19일, 오스만 제국군 4만 2천 명이 안작 코브에 있는 1만 7천 명의 호주와 뉴질랜드 군을 바다로 몰아내기 위해 공격을 개시했다. 포병과 탄약이 부족했던 오스만 제국군은 기습과 병력의 우세에 의존하려 했으나, 5월 18일 영국 비행대의 비행 중대가 오스만 제국의 준비를 발견했다. 이 공격에서 오스만 제국군은 약 1만 3천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그중 3천 명이 사망했다. 호주와 뉴질랜드군의 사상자는 160명이 사망하고 468명이 부상했다. 사망자 중에는 부상병을 나귀를 이용해 후송하다가 전사한 들것 운반병 존 심프슨 커크패트릭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의 행위는 안작 전투에 참여한 호주군 사이에서 유명해졌고, 이후 그의 이야기는 갈리폴리 전투에 대한 호주의 서사의 일부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군의 손실이 너무 심각하여 5월 24일 오브리 허버트 등이 주도하여 무인지대에 널려 있는 전사자들을 매장하기 위한 휴전이 성립되었고, 이는 1914년 서부 전선의 크리스마스 휴전과 마찬가지로 양국 군대 간의 동지애로 이어졌다.
호주 제2야전 구급대의 비커토 레이들로 병장의 증언에 따르면 그날은 다음과 같았다.
> 오늘 아침 8시 30분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휴전이 선포되었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비정상적으로 조용하고 저는 스스로 소란을 피우고 싶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총격전이 멈추고 포격도 없습니다. 몇 주 동안 시체가 널려 있던 참호 주변의 악취는 끔찍했습니다. 일부 시체는 해골만 남았습니다. 각 측이 서로의 참호 근처에서 전사자를 매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매우 다릅니다. 의식에 참여하는 각 사람을 개척자라고 부르며 팔에 흰색 띠 두 개를 착용합니다. 모두가 휴전을 이용하여 은폐물 밖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목욕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이 우리 해변의 컵 데이인 것 같습니다.[4]
이 휴전은 공식적으로 다시는 반복되지 않았다.
영국 해군의 포병 우세는 5월 13일 전함 가 오스만 제국 구축함 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하면서 약화되었다. 함장 토마스 셸퍼드 대위를 포함한 750명의 승무원 중 570명이 사망했다. 독일 잠수함 는 5월 25일에 , 5월 27일에 을 침몰시켰다. 갈리폴리 주변에 더 많은 영국 정찰 순찰이 실시되었고, ''U-21''은 그 지역을 떠나야 했다. 연합군은 이 사실을 모르고 대부분의 군함을 임브로스 섬으로 철수시켜 정박시켰고, 이로 인해 특히 헬레스 지역에서 연합군의 해군 화력이 크게 감소했다. 잠수함 (나중에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받은 마틴 네스미스 중위)는 5월 18일에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하여 5월 23일 3척을 포함한 11척의 선박을 침몰 또는 손상시킨 후 콘스탄티노플 항구에 진입하여 병기고 옆에 있는 수송선을 공격하고, 군함을 침몰시키고 부두를 손상시켰다.
오스만 제국군은 포병 탄약이 부족하여 5월 초부터 6월 첫째 주까지 약 1만 8천 발의 포탄만 발사할 수 있었다. 5월 중순 안작에서의 반격 실패 후 오스만 제국군은 정면 공격을 중단했다. 5월 말 오스만 제국군은 안작 지역의 퀸 포스트 주변에 터널을 파기 시작했고, 5월 29일 이른 아침 호주군의 대응 지뢰 매설에도 불구하고 지뢰를 폭파하고 제14연대의 대대와 함께 공격했다. 호주 제15대대는 후퇴했지만 반격하여 그날 늦게 지상을 탈환한 후 뉴질랜드군에 의해 교대되었다. 6월 초 안작에서의 작전은 통합, 소규모 교전, 수류탄과 저격수 사격을 통한 소규모 충돌로 돌아갔다.
헬레스 지역은 양측 모두 광범위하게 참호를 구축했는데, 연합군은 6월 4일 제3차 크리티아 전투에서 29사단, 왕립 해군 사단, 42사단과 프랑스 사단 2개를 동원하여 크리티아와 아치 바바를 다시 공격했다. 이 공격은 격퇴되었고, 결정적인 돌파구를 열 가능성은 사라졌다. 참호전이 재개되었고, 목표는 수백 야드 단위로 측정되었다. 양측의 사상자는 약 25%였으며, 영국군은 2만 명 중 4,500명, 프랑스군은 1만 명 중 2,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오스만 제국의 손실은 ''오스만 공식 역사''에 따르면 9,000명, 다른 기록에 따르면 1만 명이었다.
6월에 수상 비행기 모함 벤-마이-크리가 도착했고, 연합군의 공중 작전은 편대에서 제3비행대(No. 3 Wing) RNAS로 확대되었다. 52(저지대)사단도 6월 28일부터 시작된 굴리 협곡 전투를 준비하여 헬레스에 상륙했으며,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전장의 좌익(에게해 측면)을 따라 전선을 진격시키는 지역적 성공을 거두었다. 샌더스는 파이크 파샤와 알바이 레페트 두 오스만 장교의 방어 덕분이라고 평가했다. 6월 30일, 앞서 알베르 다마드를 대신했던 프랑스군 사령관 앙리 구로가 부상을 입어 사단장 모리스 바유로 교체되었다. 7월 1일부터 5일까지 오스만군은 새로운 영국군 전선을 여러 차례 역습했지만, 잃어버린 지역을 되찾지 못했다. 이 기간 동안 오스만 제국의 사상자는 1만 4천 명으로 추산되었다. 7월 12일, 52사단의 신선한 여단 2개가 아치 바바 눌라(블러디 밸리)를 따라 전선 중앙을 공격했지만, 거의 전진하지 못하고 7,500명 중 2,5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왕립 해군 사단은 600명, 프랑스군은 8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오스만 제국의 사상자는 약 9,000명, 포로는 600명이었다.
바다에서는 잠수함 E14가 마르마라 해로 두 번 항해했다. 세 번째 항해는 7월 21일에 시작되었는데, E14는 해협 근처에 설치된 새로운 잠수함 방지망을 통과했다. 다음 시도는 7월 27일에 프랑스 잠수함 마리오트가 했는데, 그물에 걸려 수면으로 떠올랐고 해안 포대의 포격을 받았다. 마리오트는 자침했다. 8월 8일, E11은 전함 바르바로스 하이레딘을 어뢰로 공격하여 253명의 사상자를 냈고, 군함 1척, 수송선 7척, 범선 23척을 격침시켰다.
협상국이 크리티아를 점령하거나 헬레스 전선에서 어떤 진전도 이루지 못하자 해밀턴은 사리바이르 산맥을 확보하고 사리바이르 전투에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새로운 계획을 세웠으며, 추누크 바이르 전투에서 971고지를 점령하려 했다. 양측 모두 증원되었는데, 원래 5개 사단이었던 협상국 사단은 15개로, 처음 6개 사단이었던 오스만 제국 사단은 16개로 증가했다. 협상국은 제9군단의 신선한 보병 2개 사단을 안작에서 북쪽으로 약 8.05km 떨어진 수블라에 상륙시키고, 북서쪽에서 사리바이르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안작에서는 안작 주변부 북쪽의 험하고 방어가 허술한 지형을 통과하여 사리바이르 산맥을 공격할 예정이었다. 이는 넥에서 제3경기병여단의 오스트레일리아 경기병들이 해체되어 베이비 700을 공격하고, 뉴질랜드 보병 여단의 뉴질랜드군이 로도덴드론 능선, 정상, 농장을 횡단하여 추누크 바이르 정상을 공격하는 것으로 이루어질 것이었다. 971고지는 제29인도여단의 구르카 군과 제4보병여단의 오스트레일리아군이 공격할 예정이었다. 협상국은 주로 임브로스에 있는 제3비행대 소속의 40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보와쟁기를 파르망기와 뉴포트 X로 교체했다. 테네도스에는 MF98T 에스카드릴도 설립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20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중 8대는 차나칼레에 배치되었다. 협상국 항공기는 정찰 비행을 하고, 해군 함포를 위한 탐지 임무를 수행했으며, 전장으로 이동하는 오스만 제국 예비군을 저공 폭격했다. 협상국 항공기는 사로스 만에서 대함 작전도 수행했는데, HMS 벤-마이-크리의 수상기가 공중 발사 어뢰로 오스만 제국의 예인선을 격침시켰다.
수블라 만 상륙 작전은 8월 6일 밤 경미한 저항 속에서 이루어졌다. 영국군 사령관인 프레더릭 스탑포드 중장은 초기 목표를 제한했고, 내륙으로의 진격을 강력하게 요구하지 못했으며, 해변 이외의 지역은 거의 점령하지 못했다. 오스만 제국군은 아나파르타 언덕을 점령하여 영국군이 내륙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았고, 이로 인해 상륙 작전이 제한되었으며 수블라 전선은 정적인 참호전으로 변했다. 공세는 8월 6일 저녁 헬레스에서의 기만 작전으로 시작되었는데, 크리티아 포도밭 전투는 또 다른 막대한 손실을 초래한 교착 상태가 되었다. 안작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 제1보병여단이 이끈 기만 작전인 론 파인 전투에서 주요 오스만 제국 참호선을 점령하고 오스만 제국군을 끌어들였지만, 추누크 바이르와 971고지 공격은 실패했다.
뉴질랜드 보병 여단은 8월 7일 새벽 추누크 바이르의 정상 근처 500m까지 접근했지만, 다음 날 아침까지 정상을 점령하지 못했다. 8월 7일 아침, 오스트레일리아 제3경기병여단은 추누크 바이르에서의 뉴질랜드군 공격과 동시에 오스만 제국 방어선 후방을 공격하기 위해 넥의 좁은 전선에서 공격했다. 개전 포격이 7분이나 일찍 끝나 오스만 제국군에 경고를 주었고, 공격은 막대한 손실을 초래하는 실패로 끝났다. 오스트레일리아 제4보병여단과 인도 여단이 야간에 길을 잃으면서 971고지 공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공격을 재개하려는 시도는 오스만 제국 방어군에 의해 쉽게 격퇴되었고, 협상국은 큰 손실을 입었다. 뉴질랜드군은 추누크 바이르에서 이틀 동안 버틴 후 윌트셔 연대와 충성스러운 북부 랭커셔 연대의 두 개의 신군 대대에 의해 구원받았지만, 8월 10일 무스타파 케말이 이끈 오스만 제국군의 반격으로 고지에서 쫓겨났다. 정상에 도달한 뉴질랜드 웰링턴 대대의 760명 중 711명이 사상자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군이 지면을 탈환하면서 협상국의 승리 가능성은 사라졌다.
8월 7일에는 제10(아일랜드)사단이, 8월 8일부터 상륙을 시작한 제53(웨일스)사단, 8월 10일 늦게 도착한 제54(동앵글리아)사단, 그리고 8월 18일에는 해체된 제2기병사단의 자치경비대가 수블라 상륙을 증원했다. 8월 12일, 제54사단은 아나파르타 평야를 건너 카바크 테페와 테케 테페를 공격했다. 공격은 실패했고, 해밀턴은 잠시 수블라와 안작의 철수를 고려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제2사단의 부대는 이집트에서 안작에 도착하기 시작했으며, 제5보병여단은 8월 19~20일부터 상륙했고, 제6보병여단과 제7보병여단은 9월 초에 도착했다. 제29사단도 헬레스에서 수블라로 이동했다. 공세를 재개하려는 마지막 영국군 시도는 8월 21일 사브르 언덕 전투와 힐 60 전투에서 이루어졌다. 언덕을 장악하면 안작과 수블라 전선이 통합되었을 것이지만, 공격은 실패했다. 8월 17일, 해밀턴은 추가로 95,000명을 요청했지만, 하루 전 프랑스는 프랑스에서 가을 공세 계획을 키치너에게 발표했다. 8월 20일 다르다넬스 위원회 회의에서 프랑스 공세를 최대한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다르다넬스에는 25,000명만 남았다. 8월 23일, 사브르 언덕에서의 실패 소식이 들려온 후, 해밀턴은 방어 태세로 전환했는데, 독일이 오스만 제국군을 재무장할 수 있게 해 줄 불가리아의 참전이 임박했고, 공세 작전을 재개할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1915년 9월 20일, 뉴펀들랜드 연대가 제29사단과 함께 수블라 만에 배치되었다. 9월 25일, 키치너는 그리스 살로니카에서 복무할 영국 2개 사단과 프랑스 1개 사단을 파견할 것을 제안했는데, 이는 갈리폴리에서의 협상국 원정의 끝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 대신 이언 해밀턴 경의 역제안이 받아들여졌다. 제10(아일랜드)사단과 프랑스 제156보병사단만 반도에서 철수했다. 9월 말까지 이 군대는 무드로스에 집결하여 새로운 전선으로 이동했다.
앨런 무어헤드는 교착 상태 동안 오래된 오스만 제국의 속사정이 자신의 소대 빨래를 아무런 방해 없이 철조망에 걸도록 허용받았고, 아무도 없는 땅을 가로질러 선물이 끊임없이 오갔다고 썼다. 오스만 제국 쪽에서는 대추야자와 과자를, 협상국 쪽에서는 소고기 통조림과 담배를 주고받았다. 갈리폴리의 여름 더위와 열악한 위생으로 파리 개체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모든 사람들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매장되지 않은 시체가 부풀어 오르고 부패하면서 식사가 매우 어려워졌다. 불안정한 협상국 주둔지는 위치가 좋지 않아 보급과 대피소 문제가 발생했다. 이질 전염병이 안작과 헬레스의 협상국 참호로 퍼져 나갔고, 오스만 제국군도 질병으로 큰 고통을 겪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8월 공세 실패 이후, 갈리폴리 전투는 답보 상태에 빠졌다. 오스만 제국의 성공은 영국 여론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고, 키스 머독, 엘리스 애쉬미드-바틀렛 등 기자들이 해밀턴의 지휘 능력에 대한 비판을 외부로 유출했다. 스탑포드 등 반대파 장교들도 침울한 분위기에 기여했고, 1915년 10월 11일 철수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해밀턴은 영국 위신에 대한 손상을 우려하여 이 제안을 거부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해임되었고, 찰스 몬로 중장이 그를 대신하게 되었다. 가을과 겨울에는 더위가 누그러졌지만, 강풍, 눈보라, 홍수가 발생하여 병사들이 익사하거나 동사했고, 수천 명이 동상을 앓았다. 1915년 가을 세르비아 전역에서 세르비아가 패배하자 프랑스와 영국은 갈리폴리 전역에서 그리스 마케도니아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세르비아군 잔여 병력을 지원하여 바르다르 마케도니아를 정복하기 위해 마케도니아 전선이 구축되었다.
9월 4일, 잠수함 HMS E7는 또 다른 순찰을 시작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잠수함 방지망에 걸렸다. 이러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9월 중순까지 연합군의 그물과 기뢰는 다르다넬스 해협 동쪽 입구를 독일 U보트에 폐쇄했고, ''U-21''은 9월 13일 해협을 통과하여 이스탄불로 진입하려다 실패했다. 마르마라 해에 진입한 최초의 프랑스 잠수함은 프랑스 잠수함 Turquoise였지만, 되돌아가야 했다. 10월 30일, 해협을 통과하여 돌아오던 중 요새 아래에서 좌초되어 그대로 포획되었다. 25명의 승무원은 포로로 잡혔고, 연합군 작전 계획이 담긴 문서들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11월 6일 HMS E20와의 만남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만남은 독일 U보트 SMU U-14가 대신 수행했고, E20을 어뢰로 격침시켜 승무원 9명을 제외한 모두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
갈리폴리의 상황은 불가리아가 중앙 연합국에 가입하면서 더욱 복잡해졌다. 1915년 10월 초, 영국과 프랑스는 갈리폴리에서 두 개 사단을 이동시키고 증원군의 유입을 줄여 살로니카에 두 번째 지중해 전선을 열었다. 독일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 불가리아를 통과하는 육로가 열렸고, 독일은 연합군 참호, 특히 ANZAC의 협소한 전선을 파괴할 수 있는 중화기, 현대 항공기 및 숙련된 승무원으로 오스만 제국을 재무장했다. 11월 말, 독일 Albatros C.I에 탑승한 오스만 제국 승무원이 가바 테페 상공에서 프랑스 항공기를 격추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36. Haubitzbatterie 및 9. Motormörserbatterie 포병 부대가 도착하여 오스만 제국 포병을 상당히 증강했다. 몬로는 키치너에게 철수를 권고했고, 키치너는 11월 초 동부 지중해를 방문했다. 헬레스의 제8군단, 수블라와 ANZAC의 제9군단 사령관과 협의한 후, 키치너는 몬로의 의견에 동의하여 영국 내각에 권고안을 전달했고, 내각은 12월 초 철수 결정을 확정했다.
무인지대의 협소함과 겨울 날씨로 인해 상륙 작전 중 많은 사상자가 예상되었다. 1915년 11월 26일 폭풍우가 연합군의 위치가 취약함을 보여주었다. 수블라의 호우는 사흘 동안 계속되었고, 12월 초에는 눈보라가 몰아쳤다. 비로 참호가 침수되어 병사들이 익사했고, 매장되지 않은 시체들이 전선으로 떠내려왔다. 그 후 내린 눈으로 더 많은 병사들이 동상으로 사망했다. 수블라와 ANZAC는 12월 말에 철수될 예정이었고, 마지막 병력은 12월 20일 새벽 전에 철수했다. 12월 7일부터 병력이 서서히 감소했고, 윌리엄 스커리의 방아쇠에 연결된 팬에 물이 떨어지면 발사되도록 조작된 자체 발사 소총과 같은 계략이 연합군의 철수를 위장하는 데 사용되었다. ANZAC 코브에서는 호기심 많은 오스만 제국 병사들이 참호를 조사하기 위해 나올 때까지 병사들이 한 시간 이상 침묵을 유지했고, 그때 ANZAC 병사들이 사격을 가했다. 이 사건은 실제 철수가 이루어질 때 오스만 제국군의 조사를 성공적으로 막았다. 넥에서 기뢰가 폭발하여 오스만 제국 병사 70명이 사망했다. 연합군은 철수했고, 호주군은 마지막 밤에 사상자가 없었지만, 많은 물자와 보급품이 오스만 제국군의 손에 넘어갔다.
헬레스는 일정 기간 유지되었지만, 12월 28일 주둔군 철수 결정이 내려졌다. ANZAC 코브에서의 철수와 달리, 오스만 제국군은 철수 징후를 찾고 있었다. 샌더스는 그 기간 동안 증원군과 보급품을 확보하여 1916년 1월 7일 보병과 포병을 동원하여 굴리 스퍼의 영국군을 공격했지만, 공격은 큰 실패로 끝났다. 시한 퓨즈가 장착된 지뢰가 매설되었고, 그날 밤과 1월 7일/8일 밤, 해군 포격의 엄호 아래 영국군은 전선에서 해변으로 약 8.05km 후퇴하기 시작했고, 임시 부두를 이용하여 배에 승선했다. 마지막 영국군은 1916년 1월 8일 04:00경 랭커셔 상륙장에서 출발했다. 뉴펀들랜드 연대는 후위 부대의 일부였고, 1916년 1월 9일에 철수했다. 가장 먼저 상륙한 부대 중 하나인 플리머스 대대 해병대 경보병대의 잔여 병력이 마지막으로 반도를 떠났다.
최대 30,000명의 사상자가 예상되었지만, 35,268명의 병사, 3,689마리의 말과 노새, 127문의 대포, 328대의 차량, 약 1625675.20kg의 장비가 철수되었다. 오스만 제국군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508마리의 노새는 사살되었고, 1,590대의 차량은 바퀴가 부서진 채로 남겨졌다. ANZAC처럼 많은 양의 보급품(15문의 영국산 및 6문의 프랑스산 사용 불가능한 포가 포함되며 파괴됨), 포대, 탄약이 남겨졌고, 수백 마리의 말이 오스만 제국군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도살되었다. 폭약고가 조기에 폭발하면서 파편에 맞아 선원 1명이 사망했고, 조명선과 경비정 1척이 손실되었다. 새벽 직후, 오스만 제국군이 헬레스를 재탈환했다. 전투 마지막 날, 오스만 제국의 방공은 독일-오스만 제국 전투기 중대가 증강되었고, 반도 상공에서 작전을 시작하여 헬레스 철수 며칠 후, 세 대의 독일 Fokker Eindecker 전투기가 RNAS 항공기 두 대를 격추하면서 최초의 영국 항공기 손실을 입혔다.
5. 1. 1915년 4월
1915년 4월 25일, 연합군의 상륙 작전이 시작될 무렵, 오스만 군은 상륙 예상 지점에 병력을 증강하고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여 매복하고 있었다. 영국 제29사단은 다르다넬스 해협 북쪽의 갈리폴리 반도 끝자락 헬레스곶 부근 5곳에 상륙했지만, 오스만 군의 반격에 막혀 2곳에서는 철수하고, 3곳의 해안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군단(ANZAC) 군은 갈리폴리 반도 북쪽 에게해에 면한 이름 없는 만에 상륙 작전을 감행, 오스만 제19사단의 맹공격을 받으면서도 교두보를 확보했다. 이 만은 오늘날 "안작 만"으로 불린다. 또한 영국 해군 사단과 프랑스군 부대는 해협의 아시아 쪽에 양동 작전으로 상륙을 시도했다.[23]갈리폴리 상륙 후 지상 작전 초기에 론 파인 주변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1915년 4월 25일 ANZAC군이 안작 해변에 상륙한 첫날 오전 7시경 호주군은 론 파인으로 진격하여 오스만군의 포병대를 공격하였다. 이후 오스만군은 남서쪽 능선으로 철수하였으나 이후 오스만군 27연대가 남동쪽에서 론 파인을 향해 반격을 시작하자 ANZAC 연합군은 후퇴했다. 이에 400고지의 탈환을 목표로 6개의 대대를 편성한 오스만군은 ANZAC군을 론 파인에서 '가바 테베' 지역까지 밀어붙였다. 많은 사상자를 낸 ANZAC군은 북쪽의 론 파인에서 철수해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이후 뉴질랜드에서 지원군이 나오자 오후에 두 번째 오스만군의 77연대가 도착해 반격이 둔화되기 전까지 격렬한 백병전이 계속되었다. 이후 어느 한쪽도 더 전진할 수 없는 참호전이 론 파인 전역에서 펼쳐졌다.[24]
4월 25일 오전 4시, 제3여단의 첫 번째 파도 병력이 바지선과 배의 보트를 타고 해안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선봉 부대는 미확인 해류나 항해 오류로 인해 목표 지점보다 약 2km 북쪽, 아리 부르누 바로 남쪽의 만에 상륙했다. 남쪽의 목표 지점과 달리 해변에서 가파르게 상승하는 지형 때문에 상륙이 더 어려웠다. 상륙 지점에는 오스만군 2개 중대만 주둔하고 있었지만, 오스만군은 고지에 있는 위치에서 호주군에게 많은 사상자를 낸 후 제압당했다. 험한 지형으로 인해 내륙으로의 조직적인 진격이 불가능해졌고, 호주군은 낯선 지형과 부정확한 지도를 가지고 있었다. 가파른 계곡, 지맥, 빽빽한 관목 미궁 속에서 앞으로 나아간 호주군 부대는 연락이 끊기고 작은 부대로 분산되었다. 일부 호주군은 두 번째 고지에 도달했지만, 목표에 도달한 병력은 더 적었고, 분산된 선봉 부대는 후속 부대에 거의 지원을 제공할 수 없었다.
호주 잠수함 AE2(헨리 스토커 중위)는 4월 24일 밤 해협을 통과했다. 4월 25일 새벽 헬레스곶과 안작 코브에서 상륙이 시작되자, AE2는 오전 6시에 차낙에 도착하여 오스만군의 페익-이 셰브켓급 순양함으로 추정되는 군함에 어뢰를 발사하고 구축함을 피했다. 잠수함은 오스만군 요새 아래에서 좌초되었지만, 오스만군 포병은 포를 조준할 수 없었고 AE2는 자유롭게 움직였다. 부상 직후, 잠망경이 오스만군 전함에 발견되었고, 전함은 반도 너머 연합군 상륙 지점을 향해 사격을 중단하고 철수했다. AE2는 마르마라 해로 진격했고, 오전 8시 30분 스토커는 야간까지 해저에 잠수함을 정박시키기로 결정했다. 오후 9시경, AE2는 수면으로 부상하여 배터리를 충전하고 함대에 무선 보고서를 보냈다. 헬레스곶의 상륙은 순조로웠지만, 안작 코브의 상륙은 성공적이지 못했고, 안작 사령관인 윌리엄 버드우드 중장은 병력의 재승선을 고려했다. AE2의 성공은 버드우드가 계속하기로 결정하는 데 고려 사항이었고, AE2에 대한 보고서는 사기 진작을 위해 육지의 병사들에게 전달되었다. 스토커는 "일반적으로 마구 활보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적이 보이지 않자 마르마라 해로 항해했으며, AE2는 5일 동안 더 많은 수의 척수를 보여주기 위해 순항했고, 오스만군 함선에 대한 여러 공격을 감행했지만 어뢰의 기계적 문제로 실패했다.
4월 27일 오후, 제19사단은 제5사단에서 온 6개 대대의 증원을 받아 안작에서 연합군 여섯 여단에 대한 반격을 감행했다. 해군 함포 사격의 지원을 받은 연합군은 밤새도록 오스만 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다음 날, 영국군에는 아시아 해안의 쿰 칼레에서 모르토 만의 'S' 해변 근처 전선 우측으로 이동한 프랑스군이 합류했다. 4월 28일, 연합군은 크리티아 마을을 점령하기 위해 크리티아 제1차 전투를 치렀다. 헌터-웨스턴 장군이 세운 계획은 지나치게 복잡했고 현장 지휘관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제29사단 병력은 해변과 세디르바히르 마을을 둘러싼 전투로 인해 여전히 탈진하고 불안한 상태였는데, 세디르바히르 마을은 4월 26일 많은 전투 끝에 함락되었다. 오스만군 방어자들은 헬레스 곶과 크리티아 사이 중간 지점에서 연합군의 진격을 저지했는데, 오후 6시경까지 약 3,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4월 30일, 잠수함 ''AE2''는 제어 불능 상태로 상승하기 시작하여 술탄히사르함 근처에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가 급격히 안전 잠항 심도 아래로 침몰한 후 다시 선미에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술탄히사르''함은 즉시 잠수함에 사격을 가해 압력 선체에 구멍을 냈다. 스토커는 승무원에게 배를 버릴 것을 명령했고, 잠수함을 자침시켰으며 승무원들은 포로로 잡혔다. ''AE2''의 업적은 해협을 돌파하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주었고, 곧 오스만군의 통신은 영국과 프랑스 잠수함 작전에 의해 심각하게 방해받았다.
5. 2. 1915년 5월
5월 5일, 제42사단(이스트 랭커셔)이 이집트에서 파병되었다.[25] 안작 전선이 비교적 안정되었다고 판단한 해밀턴 장군은 호주 제2보병여단과 뉴질랜드 보병여단을 20문의 호주 야포와 함께 헬레스 전선으로 이동시켜 크리티아 전투(제2차)의 예비대로 배치했다.[25] 2만 명의 병력이 투입된 이 전투는 헬레스에서의 최초의 대규모 공격이었으며, 주간 공격으로 계획되었다. 프랑스군은 케레베스 데레를, 영국군, 호주군, 뉴질랜드군은 크리티아와 아치 바바(Achi Baba)를 공격할 임무를 맡았다. 30분간의 포병 사격 준비 후, 5월 6일 오전 공격이 시작되었다.[25]영국군과 프랑스군은 깊은 계곡으로 분리되어 오스만 제국군이 요새화한 협곡, 전나무, 크리티아, 케레베스 지맥을 따라 진격했다. 공격군은 오스만군의 강력한 방어진지를 우회하려다 분산되었고, 생소한 지형에 놓이게 되었다. 영국군 정찰기가 발견하지 못한 오스만군 전초기지의 포격과 기관총 사격을 받아 공격은 막혔고, 다음 날 증원군이 도착하여 진격을 재개했다.[25]
공격은 5월 7일에 계속되었고, 5월 8일에는 뉴질랜드군 4개 대대가 크리티아 지맥을 공격했으며, 제29사단과 함께 마을 남쪽에 위치한 곳까지 진출했다. 오후 늦게 호주 제2여단은 개활지를 신속하게 돌파하여 영국군 전선에 도달했다. 소화기와 포격 속에서 여단은 크리티아를 향해 돌격하여 목표 지점까지 약 400미터(600야드) 부족한 지점까지 600미터(400야드)를 진격했지만, 1,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전나무 지맥 근처에서 뉴질랜드군은 전진하여 호주군과 합류했지만, 영국군은 막혔고 프랑스군은 목표 지점을 내려다보는 지점을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쳐 있었다. 공격은 중단되었고, 연합군은 크리티아와 아치 바바를 점령하지 못하고 참호를 구축했다.[25]
잠시 교전이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연합군은 특히 포병용 탄약이 거의 소진되었고, 양측 모두 방어를 강화했다.[25] 오스만 제국군은 호주군 전선 맞은편의 병력을 교체했고, 호주군은 보병으로 작전하는 호주 경기병(Australian Light Horse)에 의해 증원되었다.[25] 저격, 수류탄 공격, 기습 공격 등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되었고, 양측 참호는 곳곳에서 불과 수 미터 떨어져 있었다.[25] 호주군은 저격으로 많은 장교를 잃었는데, 제1사단장인 윌리엄 브리지스(William Bridges) 소장도 "스틸 포스트"(Steele's Post) 근처의 제1경기병연대(1st Light Horse Regiment) 진지를 시찰하던 중 부상을 입고 5월 18일 군함 HMHS 가스콩(HMHS Gascon)에서 사망했다.[25]
5월 19일, 오스만 제국군 4만 2천 명이 안작 코브에 있는 1만 7천 명의 호주와 뉴질랜드 군을 바다로 몰아내기 위해 공격을 개시했다.[25] 포병과 탄약이 부족했던 오스만 제국군은 기습과 병력의 우세에 의존하려 했으나, 5월 18일 영국 비행대의 비행 중대가 오스만 제국의 준비를 발견했다.[25] 이 공격에서 오스만 제국군은 약 1만 3천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그중 3천 명이 사망했다. 호주와 뉴질랜드군의 사상자는 160명이 사망하고 468명이 부상했다.[25] 사망자 중에는 부상병을 나귀를 이용해 후송하다가 전사한 들것 운반병 존 심프슨 커크패트릭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의 행위는 안작 전투에 참여한 호주군 사이에서 유명해졌고, 이후 그의 이야기는 갈리폴리 전투에 대한 호주의 서사의 일부가 되었다.[25] 오스만 제국군의 손실이 너무 심각하여 5월 24일 오브리 허버트 등이 주도하여 무인지대에 널려 있는 전사자들을 매장하기 위한 휴전이 성립되었고, 이는 1914년 서부 전선의 크리스마스 휴전과 마찬가지로 양국 군대 간의 동지애로 이어졌다.[25]
호주 제2야전 구급대의 비커토 레이들로 병장의 증언에 따르면 그날은 다음과 같았다.
> 오늘 아침 8시 30분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휴전이 선포되었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비정상적으로 조용하고 저는 스스로 소란을 피우고 싶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총격전이 멈추고 포격도 없습니다. 몇 주 동안 시체가 널려 있던 참호 주변의 악취는 끔찍했습니다. 일부 시체는 해골만 남았습니다. 각 측이 서로의 참호 근처에서 전사자를 매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매우 다릅니다. 의식에 참여하는 각 사람을 개척자라고 부르며 팔에 흰색 띠 두 개를 착용합니다. 모두가 휴전을 이용하여 은폐물 밖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목욕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이 우리 해변의 컵 데이인 것 같습니다.[4]
이 휴전은 공식적으로 다시는 반복되지 않았다.[25]
영국 해군의 포병 우세는 5월 13일 전함 가 오스만 제국 구축함 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하면서 약화되었다. 함장 토마스 셸퍼드 대위를 포함한 750명의 승무원 중 570명이 사망했다.[25] 독일 잠수함 는 5월 25일에 , 5월 27일에 을 침몰시켰다.[25] 갈리폴리 주변에 더 많은 영국 정찰 순찰이 실시되었고, ''U-21''은 그 지역을 떠나야 했다. 연합군은 이 사실을 모르고 대부분의 군함을 임브로스 섬으로 철수시켜 정박시켰고, 이로 인해 특히 헬레스 지역에서 연합군의 해군 화력이 크게 감소했다.[25]

5. 3. 1915년 6월~7월
5월부터 7월까지 연합군과 오스만 제국군은 모두 여러 차례 공세를 펼쳐 전황을 타개하려 했지만, 모두 적에게 저지당하여 전선이 크게 움직이지는 않았다. 5월에는 상륙 부대를 지원하던 영국 전전함 3척이 어뢰 공격으로 잇달아 격침되었다. 5월 중순에는 오스만 제국 구축함 무아베네티 밀리예에 의해 고라이어스가, 하순에는 독일 잠수함 U-21에 의해 트라이엄프 및 마제스틱이 격침되었다. 이로 인해 해군은 전선에서 이탈했다.
5월 19일, 42,000명의 오스만 군이 17,000명의 호주, 뉴질랜드 군을 다시 안작 해변으로 밀어내기 위해 공격했다.[26] 탄약이 부족했던 오스만군은 기습과 병력의 수를 통해 극복하려했으나, 영국 항공기가 오스만군의 전투 준비를 발견했고, 기습의 이점을 사용할 수 없었던 오스만군은 13,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그 중 3,000명은 전사했다. 반면에 ANZAC군은 160명 사망, 468명 부상에 그쳤다.[26] 오스만군의 피해가 너무 심각했기에, 5월 24일, 오브리 허버트 등이 주도하여 무인지대에 널려 있는 전사자들을 매장하기 위한 휴전이 성립되었고, 이는 1914년 서부 전선의 크리스마스 휴전과 마찬가지로 양국 군대 간의 동지애로 이어졌다.[24] 그러나 휴전은 더 이상 없었다.
호주 제2야전 구급대의 비커토 레이들로 병장의 증언에 따르면 그날은 다음과 같았다.
> 오늘 아침 8시 30분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휴전이 선포되었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비정상적으로 조용하고 저는 스스로 소란을 피우고 싶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총격전이 멈추고 포격도 없습니다. 몇 주 동안 시체가 널려 있던 참호 주변의 악취는 끔찍했습니다. 일부 시체는 해골만 남았습니다. 각 측이 서로의 참호 근처에서 전사자를 매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매우 다릅니다. 의식에 참여하는 각 사람을 개척자라고 부르며 팔에 흰색 띠 두 개를 착용합니다. 모두가 휴전을 이용하여 은폐물 밖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목욕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이 우리 해변의 컵 데이인 것 같습니다.[4]
한편 오스만군은 지속적으로 소총 총알과 포탄이 부족했다. 그들은 5월에서 6월 첫째 주간 약 18,000발의 포탄밖에 사용하지 못했다. 군수품 보급이 공격을 따라가지 못하자 오스만군은 5월의 안작 공격 실패 후 정면 공격을 중단했다. 대신에 퀸스 초소 주변에 터널을 파고 지뢰를 심는 등의 공격을 통해 ANZAC군에 맞섰다.
헬레스 지역은 양측 모두 광범위하게 참호를 구축했는데, 연합군은 6월 4일 제3차 크리티아 전투에서 29사단(29th Division), 왕립 해군 사단(Royal Naval Division), 42사단(42nd Division)과 프랑스 사단 2개를 동원하여 크리티아와 아치 바바를 다시 공격했다. 이 공격은 격퇴되었고, 결정적인 돌파구를 열 가능성은 사라졌다. 참호전이 재개되었고, 목표는 수백 야드 단위로 측정되었다. 양측의 사상자는 약 25%였으며, 영국군은 2만 명 중 4,500명, 프랑스군은 1만 명 중 2,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오스만 제국의 손실은 ''오스만 공식 역사''에 따르면 9,000명, 다른 기록에 따르면 1만 명이었다.
6월에 수상 비행기 모함 벤-마이-크리(HMS Ben-my-Chree)가 도착했고, 연합군의 공중 작전은 편대에서 제3비행대(No. 3 Wing) RNAS로 확대되었다. 52(저지대)사단(52nd (Lowland) Division)도 6월 28일부터 시작된 굴리 협곡 전투(Battle of Gully Ravine)를 준비하여 헬레스에 상륙했으며,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전장의 좌익(에게해 측면)을 따라 전선을 진격시키는 지역적 성공을 거두었다. 6월 말 ~ 7월 초, 오스만 제국군은 영국군에 여러 차례 역습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8월에 들어 연합군 신예 2개 사단이 안자크 만 북쪽의 수블라 만에 상륙하여 공세를 시도했지만, 오스만 군이 먼저 고지를 점령했기 때문에 여기서도 교두보를 확보하는 이상의 진전은 없었고, 참호전이 되었다. 안자크 만과 수블라 만의 교두보를 연결하려는 연합군의 8월 마지막 대공세도 실패로 끝나면서 오스만 영토로의 추가 진격은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5. 4. 1915년 8월/론 파인 전투
이언 해밀턴은 사리바이르 전투에서 사리바이르 산맥(Sari Bair Range)을 확보하고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에는 추누크 바이르 전투에서 971고지(Hill 971)를 점령하는 것도 포함되었다.[29] 양측 모두 증원되어, 협상국 사단은 15개, 오스만 제국 사단은 16개로 증가했다.[29] 협상국은 제9군단의 보병 2개 사단을 안작(Anzac)에서 북쪽으로 약 8.05km 떨어진 수블라(Suvla)에 상륙시키고, 북서쪽에서 사리바이르로 진격할 계획이었다.[29] 안작에서는 안작 주변부 북쪽의 험하고 방어가 허술한 지형을 통과하여 사리바이르 산맥을 공격할 예정이었다. 이는 넥(the Nek)에서 제3경기병여단(3rd Light Horse Brigade)의 경기병들이 베이비 700(Baby 700)을 공격하고, 뉴질랜드 보병 여단(New Zealand Infantry Brigade)의 뉴질랜드군이 로도덴드론 능선(Rhododendron Ridge), 정상(Apex), 농장(Farm)을 횡단하여 추누크 바이르 정상을 공격하는 것으로 이루어질 것이었다. 971고지(Hill 971)는 제29인도여단(29th Indian Brigade)의 구르카 군과 제4보병여단(4th Infantry Brigade)의 오스트레일리아군이 공격할 예정이었다.[29]
8월 6일 저녁 헬레스(Helles)에서의 기만 작전으로 시작된 크리티아 포도밭 전투(Battle of Krithia Vineyard)는 막대한 손실을 초래했다. 안작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 제1보병여단(Australian 1st Infantry Brigade)이 이끈 기만 작전인 론 파인 전투(Battle of Lone Pine)에서 주요 오스만 제국 참호선을 점령했지만, 추누크 바이르와 971고지(Hill 971) 공격은 실패했다.[30]
뉴질랜드 보병 여단(New Zealand Infantry Brigade)은 8월 7일 새벽 추누크 바이르(Chunuk Bair)의 정상 근처 500m까지 접근했지만, 다음 날 아침까지 정상을 점령하지 못했다.[30] 같은 날 아침, 오스트레일리아 제3경기병여단(Australian 3rd Light Horse Brigade)은 추누크 바이르(Chunuk Bair)에서의 뉴질랜드군 공격과 동시에 오스만 제국 방어선 후방을 공격하기 위해 넥(Nek)의 좁은 전선에서 공격했으나, 포격이 일찍 끝나 오스만 제국군에 경고를 주었고, 공격은 실패했다.[30] 오스트레일리아 제4보병여단(Australian 4th Infantry Brigade)과 인도 여단이 야간에 길을 잃으면서 971고지(Hill 971) 공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공격 재개 시도는 오스만 제국 방어군에 의해 격퇴되었고, 협상국은 큰 손실을 입었다.[30] 뉴질랜드군은 추누크 바이르(Chunuk Bair)에서 이틀 동안 버틴 후 윌트셔 연대(Wiltshire Regiment)와 충성스러운 북부 랭커셔 연대(Loyal North Lancashire Regiment)의 두 부대에 의해 구원받았지만, 8월 10일 무스타파 케말이 이끈 오스만 제국군의 반격으로 고지에서 쫓겨났다. 정상에 도달한 뉴질랜드 웰링턴 대대(New Zealand Wellington Battalion)의 760명 중 711명이 사상자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군이 지면을 탈환하면서 협상국의 승리 가능성은 사라졌다.[30]
6. 철수
10월에 접어들자 영국 정부는 갈리폴리 작전의 철수를 검토하기 시작하여, 철수에 반대하는 해밀턴 장군을 해임하고 찰스 먼로 장군으로 교체했다. 이달, 그동안 중립을 지켜왔던 불가리아가 동맹국 측에 참전하면서 독일은 육로로 오스만 제국과 연락할 수 있게 되었고, 연합군은 독일의 초대형 대포로 갈리폴리 교두보가 포격을 받을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32] 10월 5일에는 그리스령 살로니카에 영국군이 상륙하여 지중해 방면에서 제2전선이 형성됨에 따라, 먼로 장군은 마침내 철수를 결심했다.
철수가 결정되었을 당시, 갈리폴리 반도에는 연합군 14개 사단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안작 만과 수블라 만에서는 12월 7일부터 순차적으로 철수가 진행되어 12월 20일 순조롭게 철수를 완료했다. 12월 7일 이후 병력 수는 서서히 줄어들었고, '윌리엄 스커리'의 자동소총과 같이 방아쇠에 달린 냄비에 물을 떨어뜨려 발사하도록 만든 장치와 계획이 영프연합군의 출발을 위장하는 데 사용되었다.[22][33] 안작 해변에서 군대는 한 시간 이상 침묵을 지켰고, 호기심 많은 오스만 군대가 참호를 조사하고 안작 해변에 포격을 시작했다. 이 사건은 오스만 제국군이 실제로 철수했을 때 조사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단념시켰다. '네크' 강에서 지뢰가 폭발하여 70명의 오스만 군인이 사망했다. 마지막 날 밤, 호주군은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많은 양의 보급품과 식료품들이 오스만 제국의 손에 넘어갔다.[22][33]
헬레스 곶은 미래의 공격을 위한 교두보로 유지할 계획이었지만, 12월 27일에는 헬레스 곶에서의 철수도 결정되었고, 1916년 1월 9일 마지막 영국군 부대가 헬레스 곶을 떠났다.[34] 최초로 상륙했던 영국 왕립 해병대 경보병대대의 잔존 병력은 반도를 마지막으로 떠났다.[34]
최대 30,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라는 예상에도 불구하고, 35,268명의 병력, 3,689명의 말과 노새, 127문의 대포, 328대의 차량, 1,600톤의 장비가 철수했다. 안작의 경우, 파괴된 15개의 영국군 포병과 프랑스군의 많은 양의 보급품, 총차, 탄약이 남겨져 있었다. 한 선원이 조기에 폭발한 잡지의 파편에 맞아 사망했고 라이터와 피켓보트가 유실됐다. 동틀 무렵 결국 오스만군은 헬레스를 탈환했다. 작전의 마지막 날, 독일-오스만 전투기 편대에 의해 오스만 제국의 방공망이 강화되었고, 헬레스가 철수한 지 며칠 후에 3대의 방공포가 2대의 RNAS 항공기를 격추시켜 영국군의 첫 비행 손실을 입혔다.[35]
7. 갈리폴리 전역에서의 함선, 배

- 오션(HMS-Ocean): 만재배수량 1만 3천톤, 305mm 주포와 152mm 부포를 탑재했다.

- 인플렉서블(Inflexible): 만재배수량 2만톤, 305mm 주포 6문, 102mm 부포 16문을 탑재했다.

- 부베(boubet): 만재배수량 1만 3000톤, 305mm 2문, 274mm 2문 138mm 8문, 100mm 8문을 탑재했다.

- 괴벤(SMS Goeben): 독일의 순양함으로, 만재배수량 2만 5천톤, 280mm 10문, 150mm 12문을 탑재했다.

- 술탄히사르(터키): 오스만 해군의 어뢰정으로, 전함이 아닌 보트급 함선이다.
8. 관련된 기념일, 기념장소
안작데이(ANZAC day)는 매년 4월 25일 갈리폴리 전투에서 전사한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군단(ANZAC) 군인들을 기리는 날이다. 1916년 첫 기념 행사가 열렸고, 1923년 호주, 1920년대 뉴질랜드에서 국경일로 지정되었다.
론 파인 기념관은 전사자들의 합동묘가 있는 곳이다. 안작 지역에서 전사한 호주군과 묘지가 알려지지 않은 뉴질랜드군을 기념한다. 론 파인, 힐 60, 추누크 베이르 기념관은 안작에서 전사한 뉴질랜드군을 기념한다. 트웰브 트리 콥스 기념관은 헬레스 지역에서 전사한 뉴질랜드군을, 헬레스 기념관은 헬레스 지역에서 사망한 영국, 인도, 호주군을 기념한다.
영국 연방 전쟁 묘지 위원회(CWGC)는 영국 연방군의 영구 묘지를 관리한다. 갈리폴리 반도에는 31개의 CWGC 묘지가 있다. (헬레스 6개, 수블라 4개, 안작 21개).[1] 병원선에서 사망하거나 바다에 매장된 많은 전사자들의 묘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이들은 5개의 "실종자 추모비" 중 하나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2]
그리스 레므노스 섬에는 3개의 CWGC 묘지가 있다. 포르티아누에는 연합군 병사 352명, 무드로스에는 호주군 148명과 뉴질랜드군 76명, 그리고 오스만 군인(이집트인 170명, 오스만 군인 56명)을 위한 묘지가 있다.[3] 레므노스는 연합군의 병원 기지였으며, 매장된 대부분은 부상으로 사망한 병사들이었다.[4][5] 세듄바히르에는 프랑스 묘지가 있다.[6]
갈리폴리 반도에는 대규모 오스만/터키 군사 묘지는 없지만, 수많은 기념비가 있다. 모르토 만 케이프 헬레스에는 차낙칼레 순국자 기념관, 추누크 베이르에는 터키 군인 기념관, 퀸스 포스트(봄바 시르트) 근처에는 57연대 기념관과 노천 모스크가 있다. 다르다넬스 해협 아시아 해안에는 많은 기념비와 묘지가 있는데, 이는 터키 역사가들이 반도에서의 이후 전투보다 3월 18일 승리에 더 큰 중점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1]
갈리폴리 전투는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독립 국가로서의 출현과 깊이 관련된 "첫 전투 경험"으로 중요하게 여겨진다. 약 5만 명의 호주인과 1만 6천 명에서 1만 7천 명의 뉴질랜드인이 갈리폴리에서 복무했다. 이 전투는 "안작 정신"으로 구체화된, 전투 참여 병사들의 자질에 대한 인식과 함께 전쟁 이후 독특한 호주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4월 25일 상륙은 매년 안작의 날로 기념된다. 1925년 퇴역 군인들의 조직적인 행진이 시작되었고, 같은 해 갈리폴리 해변에서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2년 후 시드니 케노타프에서 첫 공식적인 새벽 기념식이 열렸다. 1980년대 이후 호주와 뉴질랜드 관광객들이 갈리폴리 새벽 기념식에 참석하는 것이 유행이 되어 수천 명이 참석하고 있다.[1] 75주년 기념식에는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석했다.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는 새벽 기념식이 가장 인기 있는 기념 형태이다. 안작의 날은 추모의 날(휴전 기념일)을 능가하며 군인 사상자와 참전 용사를 기념하는 가장 중요한 행사로 남아 있다.
국가 | 기념비/장소 | 설명 |
---|---|---|
오스트레일리아 & 뉴질랜드 | 안작의 날 | 매년 4월 25일, 갈리폴리 전투에서 전사한 ANZAC 군인들을 기리는 날. 1916년 첫 기념 행사 이후, 1923년 호주, 1920년대 뉴질랜드에서 국경일로 지정. |
오스트레일리아 & 뉴질랜드 | 론 파인 기념관 | 전사자들의 합동묘. 안작 지역에서 전사한 호주군과 묘지가 알려지지 않은 뉴질랜드군 기념. |
오스트레일리아 & 뉴질랜드 | 힐 60, 추누크 베이르 기념관 | 안작에서 전사한 뉴질랜드군 기념. |
오스트레일리아 & 뉴질랜드 | 트웰브 트리 콥스 기념관 | 헬레스 지역에서 전사한 뉴질랜드군 기념. |
영국, 인도, 오스트레일리아 | 헬레스 기념관 | 헬레스 지역에서 사망한 영국, 인도, 호주군 기념. |
영국 | 영국 연방 전쟁 묘지 위원회(CWGC) 묘지 | 갈리폴리 반도에 31개 묘지 존재 (헬레스 6개, 수블라 4개, 안작 21개). |
그리스 레므노스 섬 | CWGC 묘지 3개 | 포르티아누: 연합군 병사 352명. 무드로스: 호주군 148명, 뉴질랜드군 76명. 오스만 군인 묘지: 이집트인 170명, 오스만 군인 56명. |
프랑스 | 세듄바히르 프랑스 묘지 | 갈리폴리 반도에 위치. |
튀르키예 | 차낙칼레 순국자 기념관 | 모르토 만 케이프 헬레스. |
튀르키예 | 추누크 베이르 터키 군인 기념관 | |
튀르키예 | 57연대 기념관 및 노천 모스크 | 퀸스 포스트(봄바 시르트) 근처. |
호주와 뉴질랜드의 도시들에는 전투와 관련된 많은 거리, 공공장소, 건물들이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퀸즐랜드주 에노게라에 있는 갈리폴리 병영, 뉴펀들랜드주 코너 브룩에 있는 캐나다군 무기고인 갈리폴리 무기고가 그 예이다. 갈리폴리는 영화, 텔레비전, 노래를 포함한 대중문화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1971년 스코틀랜드 출신 호주 포크 가수 겸 작곡가 에릭 보글은 갈리폴리 전투에서 불구가 된 젊은 호주 군인의 이야기를 담은 "그리고 밴드는 왈칭 마틸다를 연주했다"라는 노래를 작곡했다. 이 노래는 갈리폴리 상륙 작전의 참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이미지로 칭찬받았으며, 일부 사람들에게는 상징적인 반전 노래로 여겨진다.
터키에서는 이 전투가 국가의 출현에 있어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지지만, 주로 1915년 3월 영국 해군이 패배한 차나칼레 항구 주변에서 벌어진 전투로 기억된다. 터키인들에게 3월 18일은 호주와 뉴질랜드인들에게 4월 25일과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공휴일은 아니지만 특별한 행사로 기념된다. 터키 국민들에게 이 전투의 주요 의미는 전쟁 후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무스타파 케말의 출현에 기여한 역할에 있다. "차나칼레 게칠메즈"(차나칼레는 넘을 수 없다)는 공격을 물리친 국가의 자부심을 표현하는 일반적인 표현이 되었고, "차나칼레를 위한 발라드"라는 노래는 전투 중 전사한 터키 젊은이들을 기념한다. 터키 영화 감독 시난 체틴은 "차나칼레의 아이들"이라는 영화를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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