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성 (18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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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종성은 1890년 서울에서 태어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변호사이다. 1914년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수석 졸업하고, 1922년 제1회 조선 변호사 시험에 수석 합격했다. 일제강점기에는 항일 변론을 맡아 활동했으며, 해방 후 대법관, 검찰총장을 역임하고 반민족행위처벌법 검찰관으로 선임되었다.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 전쟁 발발 직후 납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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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성전문학교 동문 - 허헌
허헌은 일제강점기 변호사이자 독립운동가로서 3·1 운동 관련자 변호와 신간회 활동을 했고, 해방 후에는 건준위 부위원장, 민전 공동의장 등을 지내며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으며, 월북 후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등을 지냈다. - 보성전문학교 동문 - 박규정 (축구인)
박규정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로, 조선 및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활동하고 보성전문학교 축구부 주장을 지냈으며, 1954년 FIFA 월드컵에서 39세 이상의 나이로 출전한 최초의 선수라는 기록을 세웠다. - 일제강점기의 법조인 - 이호 (법조인)
이호는 일제강점기 일본 유학 후 법조인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법무부 장관, 내무부 장관, 주일본 대사 등을 역임하고 12·12 군사 반란 이후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장을 지냈다. - 일제강점기의 법조인 - 이태희 (1911년)
이태희는 일제 강점기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법조인으로 해방 후 검찰총장, 이화여자대학교 법정대학장 등을 역임했으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 납북 대한민국인 - 허영호 (정치인)
허영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신간회 활동을 했으나, 중일전쟁 이후 친일로 전향하여 해방 후 혜화전문학교 교장과 동국대학교 학장을 역임했으며, 제헌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지만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사후 친일 행적이 드러나 건국훈장이 취소되고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 납북 대한민국인 - 정지용
정지용은 충청북도 옥천 출생으로 모더니즘 문학을 선도했으며, 시문학 동인과 구인회 활동을 거쳐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했으나 한국 전쟁 중 행방불명되었다.
이종성 (1890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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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본관 | 전주 이씨 |
자 | 성오(聖五) |
호 | 하람(夏嵐) |
별칭 | 관서(關西) 수재 |
출생 | 1890년 3월 20일 |
사망 | 1960년 12월 23일 (향년 70세) |
국적 | 대한민국 |
학력 | |
최종 학력 | 일본 호세이 대학 법학부 졸업 |
경력 | |
주요 경력 |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조사관 |
가족 관계 | |
배우자 | 박혜숙 |
자녀 | 슬하 3남 |
2. 생애
이종성은 189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14년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수석 졸업하고, 1922년 제1회 조선 변호사 시험에 수석 합격하였다(陰曆壬戌八月(小)二十日 東亞日報 第七百七十三號). 허정(許政), 장택상(滄浪 張澤相), 정구영(鄭求瑛), 조병옥(趙炳玉)과 평생 우정을 나누었으며, 그의 장인은 추당(秋堂) 박호병이다.
2. 1. 일제강점기 활동
이종성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사건을 맡아 항일 변론 최일선에 나서 김병로, 허헌, 이인 등과 함께 항일 민족 변호사로 활동했다. 1923년 11월 최초의 사회주의 재판이라고 할 수 있는 ‘신천지 필화사건’으로 기소된 박제호, 유병기에 대한 무료 변론을 맡았으며, 1928년 참의부에서 활동하다 서울 동소문파출소와 백사면 주재소 등 4차례 경관파출소를 습격한 혐의로 체포된 이수흥(李壽興)의 변론을 맡기도 했다.1928∼1929년에는 대한통의부 소속으로 독립운동 군자금을 마련하다 체포된 유택수(柳澤秀) · 유순수(柳淳秀) 형제의 재판에서 그의 명변론은 재판장, 검사를 포함 재판정 내 모든 사람을 감동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1929∼1930년에는 중국에서 국공합작과 반제국주의 운동을 한 혐의로 체포된 여운형 사건의 변호를 담당했다.[2]
2. 2. 해방 이후 활동
해방 후 이종성은 대법관, 검찰총장을 역임하였고, 1948년 국회 내 반민특위 검찰관으로 선임되었다.[2]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1950년 6.25 발발 직후 납북되었다. (1974년 1월 16일 조선일보,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정구영(鄭求瑛) 증언, 1970년 장남 이상우 증언, 1979년 10월 30일 샘터사 발간 許政 회고록 "내일을 위한 證言")그러나 북한에서 그의 별세를 서거(逝去)라고 높이며 평양 룡성의 재북인사의 묘에 안치되어 있어 월북인사로 오인되기도 했다.
2. 3. 납북 이후
1948년 국회 내 반민특위 검찰관으로 선임되었고,[2]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1950년 6.25 전쟁 발발 직후 납북되었다. 북한에서 그의 별세를 서거(逝去)라고 높이며 평양 용성의 재북인사 묘에 안치하여 월북인사로 오인되기도 했다.3. 역대 선거 결과
연도 | 선거 종류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
1950년 |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 선거 | 무소속 | 5,367표 (19.47%) | 1위 | 당선 | 초선 |
참조
[1]
간행물
평양룡성구역 '재북인사들의 묘'를 가다 - 62기 중 안재홍 이광수 김효석 조헌영...등 좌우 인사 39명 묘소 최초 공개
http://www.minjog21.[...]
《민족21》
2004-05-01
[2]
웹사이트
민족정기의 심판
http://www.history.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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