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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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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병로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법조인이다. 1945년 한국민주당 중앙감찰위원장을 지냈으나 토지개혁에 대한 이견으로 탈당했고, 미군정 하에서 초대 법무부 장관을 역임하며 새로운 기본 법전 편찬을 주도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부장을 거쳐 초대 대법원장을 역임하며 사법부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이승만 정권과 대립각을 세우며 사법권 독립과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했으며, 1964년 사망하여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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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가인 김병로
가인 김병로
한글 이름김병로
한자 이름金炳魯
가타카나キム・ビョンノ
로마자 표기Kim Byung-ro
출생일1887년 12월 15일
출생지조선 전라도 순창군 복흥면 하리
사망일1964년 1월 13일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자택
사망 원인간장염
국적대한민국
본관울산(蔚山)
종교유교(성리학) → 개신교(장로회)
배우자연일 정씨 부인
자녀3남 1녀 (장남 김재중, 차남 김재열, 삼남 김재옥)
부모김상희(부), 장흥 고씨 부인(모)
친인척김종인(친손자), 김문평(사위), 이택돈(손녀사위)
직책 및 경력
초대 대법원장대법원장
임기1948년 9월 13일 ~ 1957년 12월 16일
대통령이승만
부통령이시영, 김성수, 함태영, 장면
총리이범석, 이윤영 (국무총리 권한대행 서리), 신성모 (국무총리 서리), 백낙준 (국무총리 권한대행 서리), 장면, 허정 (국무총리 서리), 장택상, 이갑성 (국무총리 임시서리 권한대행), 백두진, 변영태, 백한성
주요 경력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 부장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장
민정당 대표최고위원
국민의당 대표최고위원
훈장
서훈문화훈장(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1963년)

2. 생애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자극받아 최익현의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항일 투쟁에 참여했다. 1906년 김동신의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순창읍 일인보좌청(日人補佐廳)을 습격하기도 했다. 이후 김성수의 장인이 세운 창흥학교에서 수학하고, 1910년 일본 유학을 떠나 니혼 대학메이지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한일 병합 조약 소식에 귀국했다가 다시 도일하여 메이지 대학을 졸업하고, 1914년 주오 대학 고등연구과를 마쳤다. 유학 중에는 잡지 《학지광》 편집장을 맡고, 금연회를 조직하여 조선 유학생을 지원했다.

1915년 귀국 후 경성법학전문학교 조교수, 보성전문학교 강사 등으로 활동하며 형법과 소송법을 가르쳤다. 1919년 판사로 임용되어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원에서 근무했으나, 1920년 사임하고 변호사로 개업했다. 조선변호사협회 회장, 조선인변호사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변호사로서의 활동 기반을 다졌다.

이후 일제 강점기동안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주로 독립운동 관련 사건들을 변호하였고, 신간회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1931년 신간회가 강제 해산되자 경기도 양주군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한국민주당 중앙감찰위원장이 되었으나, 해당 당의 토지개혁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를 강하게 비판하며 탈당하였다.[25] 1946년 2월 14일 긴급국민회의 법제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6월 27일 미군정 하에서 초대 법무부 장관에 취임하여 새로운 기본 법전의 기초 및 편찬 책임자를 맡았다.[25] 당초 남북 분단된 조선의 통일을 간절히 바랐으나,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부장을 거쳐 초대 대법원장에 취임하였다.

이승만 정권 재임 중에는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등 이승만 정권의 노선에 반발하여 대립하였다. 1957년 대법원장 퇴임 후에는 자유법조단 대표, 민정당 대표최고위원, 국민의당 최고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1962년 문화훈장,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25]

2. 1. 생애 초반

전라북도 순창군의 향반(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상희는 한성부 사간원에서 정삼품으로 벼슬을 했기에, 조부로부터 유교의 영향을 받았다. 1904년 전라남도 담양군의 일신학교에서 서양 선교사로부터 산술과 서양사 등의 신학문을 배우고, 1905년 을사조약을 계기로 최익현을 찾아 의병투쟁에 참여하였다. 1906년 김성수가 설립한 창흥학교에 입학하여 유학을 결심하고, 1910년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 대학 법학부(야간부)에 입학하였다. 1912년 메이지 대학교 고등연구과 3학년에 편입하여 1915년 졸업하였다. 유학 중에는 도쿄에 거주하는 조선인 유학생 단체인 ‘학우회’의 간사장을 역임하고, 기관지 『학지광』을 발행하였다.

귀국 후에는 경성법학전문학교와 보성법률상업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형법과 소송법을 강의하였다. 1919년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원 판사로 임명되었으나 1920년 사직하고 변호사로 개업하였다.[1]

2. 1. 1. 출생과 가계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하리에서 조선사간원 정언을 지낸 아버지 김상희(金相熹)와 어머니 장흥 고씨(長興 髙氏) 사이에서 3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조선 성리학자 하서(河西) 김인후의 15대손으로, 가계상 울산 김씨(蔚山 金氏) 문정공파(文正公派) 자연당공파(自然堂公派)에 속하며 파조는 자연당(自然堂) 김시서(金時瑞)이다.

인촌(仁村) 김성수, 김연수 형제가 할아버지 뻘 되는 먼 친척으로 김인후의 5대손에서 갈라진다.

부모가 서울에서 머물렀기 때문에 유년 시절은 조부모 슬하에서 유교적인 소양을 쌓으며 자랐으나 열 살도 되기 전에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잃었다. 13세에 정교원의 딸 연일 정씨(延日 鄭氏)와 혼인하였으며, 17세 때 한말 거유(巨儒)인 간재(艮齋) 전우(田愚)에게 2년 간 성리학을 배우면서 백관수 등과 교분을 쌓았다. 1904년 18세 때 김병로는 전우를 떠나 전라남도 담양의 일신학교(日新學校)에서 서양인 선교사로부터 산술과 서양사 등 신학문을 접하였다.

2. 1. 2. 청년기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직후, 고향 용추사(龍湫寺)를 찾은 최익현의 열변에 감화되어 18세 때 5~6명의 포수들과 함께 최익현의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의병부대 해산 후, 1906년 20세에 김동신의 의병부대에 합류, 70여 명의 의병과 순창읍 일인보좌청(日人補佐廳)을 습격했으나 기적적으로 처벌을 면했다.[1] 같은 해, 고정주(김성수의 장인)가 설립한 전라남도 창평군 창흥학교(昌興學校)에 입학하여 유학을 결심했다.[1]

1910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니혼 대학 전문부 법학과와 메이지 대학 야간부 법학과에 입학, 두 학교를 동시에 다녔다. 같은 해 8월 한일 병합 조약 소식에 충격을 받고 귀국, 폐결핵 진단을 받아 요양했다.[1] 1912년 다시 도일하여 메이지 대학 3학년에 편입, 이듬해 졸업하고 1914년 주오 대학 고등연구과를 마치고 귀국했다.[1] 일본 유학 중 잡지 《학지광》(學之光) 편집장을 지내고, 금연회(禁煙會)를 조직하여 조선 유학생 학자금을 지원했다.[1]

교수의 일본 변호사 시험 응시 권유에도 불구하고, 조선인에게는 변호사 시험 응시 자격이 주어지지 않아 1915년 7월 귀국, 1916년 경성법학전문학교 조교수로 출강했다.[1] 1917년 보성전문학교 강사가 되고, 조선변호사협회 회장과 조선인변호사회장 등에 임명되어 활동했다.[1] 이후 경성전수학교와 보성법률상업학교에서 형법과 소송법 강의를 했다. 1919년 4월 16일 법학자로서 판사에 임용되어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원 판사로 근무하다 1920년 4월 17일 사임,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다.[1]

2. 2. 일제 강점기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자극받아 최익현의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항일 투쟁에 참여했다. 1906년 김동신의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순창읍 일인보좌청(日人補佐廳)을 습격하기도 했다. 이후 김성수의 장인이 세운 창흥학교에서 수학하고, 1910년 일본 유학을 떠나 니혼 대학메이지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한일 병합 조약 소식에 귀국했다가 다시 도일하여 메이지 대학을 졸업하고, 1914년 주오 대학 고등연구과를 마쳤다. 유학 중에는 잡지 《학지광》 편집장을 맡고, 금연회를 조직하여 조선 유학생을 지원했다.

1915년 귀국 후 경성법학전문학교 조교수, 보성전문학교 강사 등으로 활동하며 형법과 소송법을 가르쳤다. 1919년 판사로 임용되어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원에서 근무했으나, 1920년 사임하고 변호사로 개업했다. 조선변호사협회 회장, 조선인변호사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변호사로서의 활동 기반을 다졌다.

이후 일제 강점기동안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주로 독립운동 관련 사건들을 변호하였고, 신간회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1931년 신간회가 강제 해산되자 경기도 양주군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2. 2. 1. 인권변호사 활동

변호사 개업 후 김병로는 수많은 독립운동 관련 사건을 무료 변론하였는데, 105인 사건, 대동단 사건, 단천 농민 조합 사건[13], 여운형·안창호 등이 연루된 치안유지법 위반사건[14], 흥사단 사건, 6·10 만세운동, 간도 참변, 정의부 사건, 대한광복단 사건 등 변호한 사건이 1백여 건이 넘는다.

1922년 이상재, 윤치호, 이승훈, 김성수, 송진우 등과 함께 민립대학설립운동(民立大學設立運動)을 주동하여 발기인 1,170 명을 확보하여 민립대학기성회를 출범하여 모금 활동을 하기도 하였지만[15], 일제 당국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독립 운동 사건의 변호를 전담하다시피 했던 김병로와 허헌, 김용무, 김태영 등은 1923년 서울 인사동에 형사 변호 공동연구회를 창설하였는데, 무료 변론을 하는 한편 일반 형사 사건에서 수임료를 받아 활동자금으로 사용하였다. 형사 변호 공동연구회가 맡은 첫 사건이 김상옥 의사 사건(金相玉義士事件)[16]이며, 이어 김시현 등의 제2차 의열단 사건, 박헌영 등의 조선공산당 사건 등을 변호하였다.[17] 겉으로는 연구단체임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항일 변호사들이 공동전선을 형성, 법정을 통해 ‘독립운동이 무죄’임을 주장하는 독립운동 후원단체였다. 이 연구회는 독립투사들을 무료 변론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을 돌보기도 하는 등 다채로운 사회활동으로 독립운동에 공헌하면서[18] 이인, 허헌과 함께, 일제강점기 유명한 3인의 인권변호사로 활약하였다.[18]

1929년 신간회(新幹會)의 중앙집행위원 겸 회계장에 선임되었으며, 자신의 고향이자 곡창지대인 전북 지방에서 일어난 소작쟁의와 수리조합 분규 등의 사건과 갑산화전민항일운동의 진상조사[19] 등 농민·화전민들과 관련된 사건 변호를 많이 맡았는데, 이는 농민 생활에 이해와 관심을 가졌던 것에 따른 것으로 보이고 광복 후 토지개혁문제와 관련하여서도 무상분배를 주장하였던 사실과 일맥상통한다.[17]

1929년 광주에 파견되어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조사를 맡았고[20], 이 과정에서 신간회 간부들이 민중대회를 계획한 것이 일제에 의하여 탐지되면서 검거되자 결국 1931년 신간회는 해체되었다.[17]

이후 김병로는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 전신) 이사에 취임하였는데, 1932년 보성전문학교의 이사로서 운영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김성수에게 인수를 알선하였으며, 신간회 해체 이후 수많은 변호와 법정투쟁을 하던 중 만주사변중일 전쟁이 일어나면서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변호사 정직 처분이 떨어지고, 창씨 개명을 요구 받는 등 사상사건(思想事件)의 변론에서도 일부 제한을 받게 되자, 1932년부터는 경기도 양주군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면서 광복이 될 때까지 13년간 은둔 생활을 하였다. 따라서 1940년대 일제가 창씨 개명을 요구했을 때도 성을 바꾸지 않았고, 일제의 배급도 받지 않았다.

2. 2. 2. 신간회와 사회 활동

1922년 이상재, 윤치호, 이승훈, 김성수, 송진우 등과 함께 민립대학설립운동(民立大學設立運動)을 주동하여 발기인 1,170명을 확보하고 민립대학기성회를 출범하여 모금 활동을 전개했다.[15]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일제 당국의 탄압으로 인해 실패로 끝났다.

김병로는 허헌, 김용무, 김태영 등과 함께 독립운동 사건 변호를 전담하다시피 했다. 1923년 서울 인사동에 형사변호공동연구회를 창설하여 무료 변론을 진행하는 한편, 일반 형사 사건 수임료를 받아 활동 자금으로 활용했다. 형사변호공동연구회는 김상옥 의사 사건(金相玉義士事件)[16]을 시작으로, 김시현 등의 제2차 의열단 사건, 박헌영 등의 조선공산당 사건 등 다양한 독립운동 관련 사건을 변호했다.[17] 이 단체는 표면적으로는 연구단체를 표방했으나, 실제로는 항일 변호사들이 연대하여 법정에서 '독립운동은 무죄'임을 주장하는 독립운동 후원 단체였다. 또한 독립투사들의 무료 변론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을 지원하는 등 다채로운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에 기여했으며,[18] 이인, 허헌과 함께 일제강점기 3대 인권변호사로 활약했다.[18]

1929년 신간회(新幹會) 중앙집행위원 겸 회계장으로 선임된 김병로는 자신의 고향이자 곡창지대인 전북 지방에서 발생한 소작쟁의와 수리조합 분규, 갑산화전민항일운동 진상조사[19] 등 농민·화전민 관련 사건 변호를 다수 맡았다. 이는 농민 생활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광복 후 토지개혁 문제와 관련하여 무상분배를 주장했던 사실과도 연결된다.[17]

1929년 광주에 파견되어 광주 학생 항일 운동 진상 조사를 맡았다.[20] 이 과정에서 신간회 간부들이 민중대회를 계획한 사실이 일제에 탐지되어 검거되면서, 1931년 신간회는 결국 해체되었다.[17]

2. 3. 광복 이후

김병로는 은둔 생활로 어렵게 생활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이후 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하고자 했으나, 위원장 여운형이 이를 허락하지 않아 참여하지 못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부장을 거쳐 초대 대법원장에 취임하였다.

2. 3. 1. 광복 직후 활동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 김병로는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고자 했으나, 위원장 여운형의 반대로 무산되었다.[22][23] 9월 8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 내각) 사법부장으로 추천되었고,[22][23] 9월 한국민주당(한민당) 창당에 참여, 9월 21일 한민당 중앙감찰위원장이 되었다. 한민당은 조선공산당 등 좌파와 대립했지만, 김병로는 당내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들과 달리 좌파와의 대화와 타협을 강조했다.[24] 1946년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법제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25]

김병로는 한민당의 토지 개혁 소극성을 비판하며, 대다수 농민에게 토지를 무상 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일제강점기 인권 변호사로서 소작인들의 열악한 상황을 목격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농지 분배 문제로 다른 한민당 의원들과 갈등을 겪었으나, 김성수의 권고로 탈당하지는 않았다.

1946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참여했고, 1947년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장을 지냈다. 1946년 10월 한민당의 단정 노선과 토지 개혁 소극성에 반발하여 탈당하고, 김규식여운형 등이 주도하는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하며 적극 활동했다.[24] 그러나 1947년 7월 여운형 암살과 10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로 좌우합작위원회가 해체되자, 분단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적인 선택을 한다. 1948년 1월 12일 UN한국위원회가 서울에 오자 회의에 참관했고, 4월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단정 수립이 확실해지자 현실 노선으로 바꿔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했다.[24]

2. 3. 2. 좌우 합작 활동과 단정 참여

1945년 9월 8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 내각)의 사법부장으로 추천, 선임되었다.[22][23] 이후 1945년 9월 한국민주당(한민당)이 창당 되었을 때 한국민주당에 참여했다. 한국민주당은 ‘조선공산당’등 좌파와 대립했지만 김병로 자신은 한국민주당 내의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들과는 달리 좌파와의 대화와 타협을 강조했다. 이런 김병로의 태도는 신간회 활동 시절에서 드러나듯 일제강점기부터 일관된 것이었다.[24] 1945년 9월 21일 당 중앙감찰위원장이 되었고, 1946년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법제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25]

김병로는 한국민주당이 토지 개혁에 소극적이던 것을 격렬히 비판하면서 대다수 농민들에게 토지를 무상으로 나누어 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선공산당 등 좌파에서 요구하던 토지의 무상 분배를 김병로가 주장한 까닭은 사상에 관계없이 일제강점기 인권 변호사로서 수많은 소작 쟁의와 관련하여 소작인들의 열악한 상황을 목격한 결과였기 때문이었다. 농지 분배를 놓고 다른 한국민주당 의원들과 갈등이 많았으나, 김성수의 권고로 탈당은 하지 않았다.

1946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참여하였고, 1947년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장 등을 지냈다. 해방 정국에서 그는 한국민주당의 단정 노선과 토지개혁에 소극적 태도에 크게 반발하여 1946년 10월 탈당하였다. 이후 우파 김규식과 좌파 여운형 등이 주도하는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하면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24] 그러나 1947년 7월 여운형 암살과 10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완전 결렬로 좌우합작위원회가 해체되면서 김병로는 분단에 직면한 사태에 현실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1948년 1월 12일 UN한국위원회가 서울에 도착하자 회의에 참관하였으며, 1948년 4월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당시 김병로는 긍정적인 태도를 가졌으나, 결정을 내리지 못하던 중 이미 단정 수립이 확실해진 상황에서 현실적인 노선으로 바꿔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게 되었다.[24]

2. 4.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으로 독립 후, 한국민주당 중앙감찰위원장이 되었으나, 해당 당의 토지개혁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를 강하게 비판하며 탈당하였다.[25] 1946년 2월 14일 긴급국민회의 법제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25] 같은 해 6월 27일 미군정 하에서 초대 법무부 장관에 취임하여 새로운 기본 법전의 기초 및 편찬 책임자를 맡았다.[25] 당초 남북 분단된 조선의 통일을 간절히 바랐으나,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부장을 거쳐 초대 대법원장에 취임하였다.

이승만 정권 재임 중에는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등 이승만 정권의 노선에 반발하여 대립하였다. 1957년 대법원장 퇴임 후에는 자유법조단 대표, 민정당 대표최고위원, 국민의당 최고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1962년 문화훈장,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25]

2. 4. 1. 초대 대법원장 역임

이승만은 김병로가 김규식 계열이라는 생각에 대법원장 임명에 부정적이었으나, 법무부 장관인 이인의 적극적 요구로 결국 김병로를 초대(初代) 대법원장에 임명하였고[7], 이어 법전편찬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26]

반민특위 특별재판부의 모습


김병로는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장을 맡아 반민족행위자 처벌이 민족의 과제임을 천명하고,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을 요구했다.[6][27] 그러나 친일파 처벌에 미온적인 이승만이 반민족행위처벌법 개정을 요청하자 이를 거부하였고, 이승만이 친일파를 옹호하고 6.6 반민특위(특경대) 습격사건을 통하여 반민특위를 해산하자, 이에 대해 정면으로 대통령을 비판하였다.

대법원장으로서 반민특위 해산을 반대했지만, 이승만은 반민법에 규정된 죄의 공소시효를 당초의 1950년 6월 20일까지에서 1949년 8월 31일까지로 단축하는 반민족행위처벌법 개정안을 가결하였고, 1951년 2월 14일 반민족행위처벌법등폐지에관한법률을 통하여 공소계속 중의 사건은 법률시행일에 공소취소된 것으로 간주하여 결국 반민족행위처벌법은 폐지되었다.[28]

김병로는 이승만 정권 재임 중에는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등 이승만 정권의 노선에 반발하여 대립하였다.

2. 4. 2.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장을 맡아 반민족행위자 처벌이 민족의 과제임을 천명하고,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을 요구했다.[6][27] 그러나 친일파 처벌에 미온적인 이승만은 반민족행위처벌법 개정을 요청하자 이를 거부하였고, 이승만이 친일파를 옹호하고 6.6 반민특위(특경대) 습격사건을 통하여 반민특위를 해산하자, 이에 대해 정면으로 대통령을 비판하고 나섰다.

이승만은 반민법에 규정된 죄의 공소시효를 당초의 1950년 6월 20일까지에서 1949년 8월 31일까지로 단축하는 반민족행위처벌법 개정안을 가결하였고, 1951년 2월 14일 반민족행위처벌법등폐지에관한법률을 통하여 공소계속 중의 사건은 법률시행일에 공소취소된 것으로 간주하여 결국 반민족행위처벌법은 폐지되었다.[28]

2. 4. 3. 사법부 독립을 위한 노력

이승만은 김병로가 김규식 계열이라는 생각에 대법원장 임명에 부정적이었으나, 법무부 장관인 이인의 적극적 요구로 결국 김병로를 초대(初代) 대법원장에 임명하였다.[7] 김병로는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장을 맡아 반민족행위자 처벌이 민족의 과제임을 천명하고,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을 요구했다.[6][27] 그러나 친일파 처벌에 미온적인 이승만이 반민족행위처벌법 개정을 요청하자 이를 거부하였고, 6.6 반민특위(특경대) 습격사건을 통하여 반민특위를 해산하자, 이에 대해 정면으로 대통령을 비판하였다.

이승만은 반민법에 규정된 죄의 공소시효를 당초의 1950년 6월 20일까지에서 1949년 8월 31일까지로 단축하는 반민족행위처벌법 개정안을 가결하였고, 1951년 2월 14일 반민족행위처벌법등폐지에관한법률을 통하여 공소계속 중의 사건은 법률시행일에 공소취소된 것으로 간주하여 결국 반민족행위처벌법은 폐지되었다.[28]

김병로는 대법원장 재임 9년 3개월 동안 사법부 밖에서 오는 모든 압력과 간섭을 뿌리치고 사법권 독립의 기초를 다졌다. 사법부에 압력을 가하는 이승만 정권과 심심찮게 대립각을 세웠는데, 대표적인 것이 1950년 3월 국회 프락치 사건 판결이다. 법원은 ‘프락치’로 지목된 국회의원 13명에 대해 징역 3~10년의 비교적 가벼운 형벌을 내렸다. 이 판결과 안호상 전 문교부장관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윤재구 의원의 횡령 사건에 대한 잇따른 무죄 선고는 이승만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으며,[29] 1952년 부산 정치 파동 직후 대법관들에게 “폭군적인 집권자가, 마치 정당한 법에 의거한 행동인 것처럼 형식을 취해 입법기관을 강요하거나 국민의 의사에 따르는 것처럼 조작하는 수법은 민주 법치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를 억제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사법부의 독립뿐이다.”라고 강조하였다. 1956년에는 김종원 치안국장의 손아귀로부터 김선태를 석방시키기도 하였다.[30]

김병로에게 사법권의 독립과 재판의 독립성은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절대 명제였다. 그의 사법권 독립에 대한 신념은 이승만과의 마찰로 인하여 마음고생으로 지병이 도져 한국 전쟁 때 다쳤던 한쪽 다리를 절단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31] 이승만은 대수술을 받고 병석에 누운 그에게 사표를 종용했지만, 그는 이를 거부하며 의족을 짚고 등원(登院)할 만큼 강직한 성품이었다. 어느 대법관 출신 인사는 의족에 의지한 채 “지팡이를 짚고 한쪽으로 기운 그의 모습은 병들기 시작한 사법부의 모습 그대로였다”고 안타까워했다. 한번은 이승만이 법무부 장관에게 “요즘 헌법 잘 계시는가?”라고 물었는데, 장관이 말을 못 알아듣자 이승만은 재차 “대법원에 헌법 한 분 계시지 않느냐?”고 물었다는 일화가 있다.[32] 이승만1956년 국회 연설에서 “우리나라 법관들은 세계의 유례가 없는 권리를 행사한다.”라고 사법부를 비판하자 “이의가 있으면 항소하라.”라며 맞대응한 일화는 유명하다.[33] 또한 김병로는 대법원장 시절 법관들에게 항상 청렴을 강조하였다.

김병로는 반공주의자였지만 “국가보안법을 폐지해도 형법을 통해 얼마든지 대체가 가능하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국민은 악법의 폐지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하면서 경찰관직무집행법과 관련하여 이와 같은 법률이 헌법이나 형사소송법 기타 모든 법률에 우월한 성질을 가진 것으로 오인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하였다.[8]

2. 4. 4.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노력

김병로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해도 형법으로 충분히 대체 가능하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8]

또한 "국민은 악법의 폐지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강조하며, 경찰관직무집행법이 헌법이나 형사소송법 등 다른 법률보다 우선하는 것처럼 오인되는 것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8]

2. 5. 말년

1955년 고려대학교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35] 1956년부터 여성법률상담소, 경기여자고등학교 출신 여성의 해바라기회에 의하여 가족법 개정운동이 추진되었고, 정일형 외 33인의 이름으로 여성 입장을 반영한 가족법 개정안이 1957년 11월 국회에 제출되었으나, 심의위원장이던 김병로는 국회의원 유림 등과 함께 순풍 양속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가족법 개정안에 반대하였다.[36]

1957년 12월 대법원장 정년 퇴임[37] 후에도 재야 법조인으로서 활약하면서 정부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1958년 법관회의의 대법원장 제청권을 없애려는 정부를 규탄하였으며, 1959년 민권수호국민연맹 고문과 재일동포송북반대국민위원회 고문을 맡았다. 같은 해 정부가 《경향신문》을 폐간하자 ‘경향신문 폐간은 위헌 불법이다’라는 기고문을 《동아일보》에 싣기도 하였다. 4·19 혁명 당시 재야 정치지도자들과 함께 사태 수습을 위한 대(對) 정부 건의안을 발표하였으며, 이승만 하야 뒤에는 비상대책위원회 지도위원 명의로 과도정부의 개편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1960년 자유법조단대표를 지냈고, 같은 해 7월 민의원에서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1표를 얻었다.[38] 1961년 5·16 군사정변이 발생하자 《동아일보》를 통하여 박정희의 민정 참여를 반대하는 글을 기고하였고, 《사상계》에 ‘군정 연장과 국민투표에 대하여’를 기고한 뒤 야당 지도자들과 함께 군정 종식을 촉구하였다. 1963년 민정당(民政黨) 대표최고위원과 국민의당 창당에 참여하여 대표최고위원으로 윤보선, 허정과 함께 야당 통합과 대통령 단일후보 조정 작업 등을 하였다.[39]

1962년 문화훈장[9],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으며[10], 1964년 1월 13일 오후 6시 15분 간장염으로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자택에서 향년 78세로 사망하여, 사회장으로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선열묘역에 안장되었다.[11][12]

3. 평가

평생 한복을 입고 지낸 김병로는 사법(司法)의 기초를 다졌고, 법전 뿐만 아니라 3심 제도와 법복에 이르기까지 사법 행정 전반을 정한 '사법부의 수장'이었다.[40][41][42]

일제강점기 김병로와 함께 숱한 항일 변호를 맡았던 이인은 회고록에서 '당시 사회운동하는 사람들이 다 넉넉지 못해 신간회 동지들이 가인의 집에서 기식하면서 부근 설렁탕집에서 식사를 하기도 했는데, 1년만에 그 밥값을 갚으면서 자신의 서대문집 근 50간을 팔아야했다'고 하면서 김병로의 청빈을 강조했으며,[17] 법조계에서는 김병로를 정부의 압력과 간섭에 맞서 사법부 독립과 권위를 지켜낸 ‘법조인의 모범적인 표상’으로 꼽는 사람이 많다.

1999년 12월 3일 전북 출신 법조계 3대 성인(聖人)동상건립추진위원회는 전주시 덕진공원에서 김병로와 서울고등검찰청장을 지낸 화강(華剛) 최대교(崔大敎), 서울고등법원장을 지낸 김홍섭(金洪燮)의 동상 제막식을 가졌다.[43] 2001년 민음사에서 《가인 김병로 평전》이 출간되었고,[44]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 가운데 법률·경제 부문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었다.[45] 2010년 전북특별자치도 순창군대법원 가인 연수관이 개관되었고,[46] 대법원 주관으로 법학전문대학원 학생들의 변론경진대회인 가인 법정변론 경연대회가 매년 개최되고 있다.[47]

4. 사상과 신념

김병로는 대법원장 재임 9년 3개월 동안 사법부 밖에서 오는 모든 압력과 간섭을 뿌리치고 사법권 독립의 기초를 다졌다. 사법부에 압력을 가하는 이승만 정권과 심심찮게 대립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1950년 3월 국회 프락치 사건 판결이다. 법원은 ‘프락치’로 지목된 국회의원 13명에 대해 징역 3~10년의 비교적 가벼운 형벌을 내렸다. 이 판결과 안호상 전 문교부장관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윤재구 의원의 횡령 사건에 대한 잇따른 무죄 선고는 이승만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29] 1952년 부산 정치 파동 직후 대법관들에게 “폭군적인 집권자가, 마치 정당한 법에 의거한 행동인 것처럼 형식을 취해 입법기관을 강요하거나 국민의 의사에 따르는 것처럼 조작하는 수법은 민주 법치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를 억제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사법부의 독립뿐이다.”라고 강조하였다. 1956년에는 김종원 치안국장의 손아귀로부터 김선태를 석방시키기도 하였다.[30]

김병로에게 사법권의 독립과 재판의 독립성은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절대 명제였다. 그의 사법권 독립에 대한 신념은 이승만과의 마찰로 인한 마음고생으로 지병이 도져 한국 전쟁 때 다쳤던 한쪽 다리를 절단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31] 대수술을 받고 병석에 누운 그에게 이승만은 사표를 종용했지만, 그는 이를 거부하며 의족을 짚고 등원(登院)할 만큼 강직한 성품이었다. 이승만1956년 국회 연설에서 “우리나라 법관들은 세계의 유례가 없는 권리를 행사한다.”라고 사법부를 비판하자 “이의가 있으면 항소하라.”라며 맞대응한 일화는 유명하다.[33] 또한 김병로는 대법원장 시절 법관들에게 항상 청렴을 강조하였다.

평생 한복을 입고 지낸 그는 사법(司法)의 기초를 다졌고 법전 뿐만 아니라 3심 제도와 법복에 이르기까지 사법 행정의 제반사를 정한 ‘사법부의 수장’이었다.[40][41][42] 일제강점기 김병로와 함께 숱한 항일 변호를 맡았던 이인은 회고록에서 김병로의 청빈을 강조했으며,[17] 법조계에서는 김병로를 정부의 압력과 간섭에 맞서 사법부 독립과 권위를 지켜낸 ‘법조인의 모범적인 표상’으로 꼽는 사람이 많다.

5. 어록



김병로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해도 형법으로 대체 가능하다는 주장을 하였다. 또한 "국민은 악법의 폐지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강조하며, 경찰관직무집행법이 헌법이나 형사소송법에 우선하는 것으로 오인되는 것을 경계했다.[8]

6. 수상 경력

7. 가계(家係)

김병로는 전라도 순창군 복흥면 하리에서 조선사간원 정언을 지낸 아버지 김상희(金相熹)와 어머니 장흥 고씨(長興 髙氏) 사이에서 3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조선의 성리학자 하서(河西) 김인후의 15대손으로, 가계상 울산 김씨(蔚山 金氏) 문정공파(文正公派) 자연당공파(自然堂公派)에 속하며 파조는 자연당(自然堂) 김시서(金時瑞)이다.

인촌(仁村) 김성수, 김연수 형제가 할아버지 뻘 되는 먼 친척으로 하서(河西) 김인후의 5대손에서 갈라진다.

관계이름 및 설명
15대조부김인후(金麟厚, 1510년~ 1560년)
조부김학수
조모박씨(朴氏)
김상희(金相熹) - 조선사간원 정언
장흥 고씨(長興 髙氏)
연일 정씨(延日 鄭氏): 한국 전쟁기에 홀로 고향에 보내졌다가 공산당에게 살해되었다.[49]
장남김재중(1907년 11월 ~ 1955년 1월 5일)
첫째며느리고귀현
손자/손녀김원규(金元圭), 김형규, 김난규, 김종영, 김종화
장녀김순남
사위김문평(金汶枰, 1905년 ~ 1987년 1월 27일) - 제헌국회의원[50]
차남김재열(金載烈) - 변호사
둘째며느리이필기
손자/손녀김종인(金鍾寅, 1940년 7월 10일 ~ ) - 전(前)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11·12·14·17·20대 국회의원[51], 김종은(金鍾恩), 김종현(金鍾賢)
삼남김재옥
셋째며느리김 씨(충북 김영구씨의 딸, 광산김씨)
손녀사위윤영철(尹永哲, 1937년 11월 25일 ~ ) - 전(前) 헌법재판소장[52], 이택돈(李宅敦, 1935년 1월 27일 ~ 2012년 5월 7일) - 변호사, 신민당 부총재, 8·9·10·12대 국회의원[53]



제헌국회의원인 김문평(金汶枰)은 사위이다.[1] 정치인 김종인(金鍾仁)은 손자이다.[2] 전 헌법재판소장 윤영철(尹永哲)과 정치인 이택돈(李宅敦)은 외손 사위이다.[3][4]

김인후(金麟厚)의 15대손이며, 같은 김인후(金麟厚)의 13대손인 김성수(金性洙)의 손자대에 해당한다.[5]

8. 학력

9.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실시년도직책정당득표수득표율순위당락비고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 선거1960년국회의원무소속17,244표44.60%2위낙선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선거1960년대통령무소속1표0.4%7위낙선


10. 같이 보기

참조

[1] 웹사이트 김문평(金汶枰) https://encykorea.ak[...] 2023-09-23
[2] 웹사이트 ‘보수·진보의 경계인’ 김종인 https://www.khan.co.[...] 2011-12-26
[3] 웹사이트 탄핵 열쇠 쥔 헌재 재판관 9인 면면(상보) https://n.news.naver[...] 2004-03-12
[4] 웹사이트 법(법)에 사는 사람들 「청렴(청렴)」을 신조(신조)로 김병로씨 (8) https://newslibrary.[...] 1984-10-02
[5] 웹사이트 [정경연의 풍수기행] 순창 복흥면 가인 김병로 생가, 강직한 성품처럼 기세 좋게 뻗은 용맥 http://www.joongboo.[...] 2019-10-09
[6] 뉴스 반민특위 발족서 와해까지 첫 정리 http://newslibrary.n[...] 한겨레 2012-02-22
[7] 뉴스 대법원장에김병로씨 자유신문 2012-02-22
[8] 뉴스 법이론적으로본보안법파동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2012-02-22
[9] 뉴스 6천8백명으로 광복절맞아유공자포상계획발표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2012-02-22
[10] 뉴스 3·1절에표창할 독립유공자육백70명선정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2012-02-22
[11] 뉴스 거리의선생의서거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2012-02-22
[12] 뉴스 가인·김병로 선생 사회장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2012-02-22
[13] 뉴스 김현우등사명 공판은이십삼일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2012-07-29
[14] 뉴스 연장되든 안창호공판 십이월구일로결정되여 해외○○운동의거두 중앙일보 2012-02-22
[15] 서적 한국사 이야기20(우리 힘으로 나라를 찾겠다) 한길사 2004-05-01
[16] 뉴스 폭탄과권총의대음모 김상옥사건의공판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2012-07-29
[17] 뉴스 발굴 한국 현대사 인물 76 항일 변론투쟁 벌인 사법부 독립 상징 http://newslibrary.n[...] 한겨레 2012-07-29
[18] 뉴스 ‘역사가 이들을 무죄로 하리라’…한국의 인권변호사 https://news.naver.c[...] 동아일보 2012-02-21
[19] 뉴스 신간회에서 량일간 - 회의를 열고 화전민사건 토의 신한민보 2012-02-22
[20] 뉴스 신간회위원삼씨 광주에서 활동중 총독부학무과에서도조사 고보생구명을석방 중외일보 2012-02-22
[21] 서적 조선일보 사람들 (일제시대 편) 랜덤하우스코리아 2004-12-22
[22] 서적 통일지향 우리 민족해방운동사 역사비평사 2000-09-01
[23] 서적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1(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인물과사상사 2009-06-12
[24] 서적 보수주의자의 삶과 죽음(우리가 몰랐던 한국 역사 속 참된 보수주의자들) 동녘 2010-07-27
[25] 서적 대한민국 임시정부 30년사 국학자료원 1999-04-25
[26] 뉴스 법전편찬회발족 자유신문 2012-02-22
[27] 뉴스 특재와 검찰장 김·권 양씨 결정 자유신문 2012-02-22
[28] 간행물 법률176호 반민족행위처벌법등폐지에관한법률 http://www.law.go.kr[...] 1951-02-14
[29] 뉴스 3차례 사법파동 ‘영욕의 56년’ https://news.naver.c[...] 문화일보 2012-02-21
[30] 뉴스 김선태의원석방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2012-02-22
[31] 뉴스 김병로대법원장 좌각절단수술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2012-02-22
[32] 뉴스 (동아광장/임채청 칼럼)“요즘 헌법 잘 계시는가” https://news.naver.c[...] 동아일보 2012-02-21
[33] 뉴스 <코메디닷컴 건강편지>거리의 범인 김병로 https://news.naver.c[...] KorMedi 2012-02-21
[34] 서적 보수주의자의 삶과 죽음(우리가 몰랐던 한국 역사 속 참된 보수주의자들) 동녘 2010-07-27
[35] 뉴스 명예법학박사학위 김대법원장에 수여 고대창립기념일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2012-02-22
[36] 웹사이트 가족법개정운동 http://100.nate.com/[...]
[37] 뉴스 金炳魯氏大法院長退官式擧行 不正보다 차라리餓死를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57-12-17
[38] 서적 한국정치론 오름 2004-10-08
[39] 서적 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 에디터 2000-12-20
[40] 뉴스 朝鮮法典編纂 豫算關係로遲延乎 자유신문 1947-11-16
[41] 뉴스 形法總則만完成 法典編纂委事務遲遲 자유신문 1949-09-06
[42] 뉴스 民主國家의새法律胎動 五大法典制定에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48-09-19
[43] 뉴스 전북출신 법조인 3인 동상 건립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1999-11-29
[44] 뉴스 '가인 김병로 평전' 재출간 https://news.naver.c[...] 한국경제 2001-03-23
[45] 뉴스 혼돈의 해방공간서 자유민주주의 초석을 놓다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09-09-24
[46] 뉴스 街人의 뜻 기리며… '가인(街人)연수관' 개관 http://www.lawtimes.[...] 법률신문 2010-07-03
[47] 뉴스 로스쿨생 법정변론대회 내달 시작 https://news.naver.c[...] 뉴시스 2009-08-30
[48] 뉴스 '가인 김병로'인간극장 방영 http://newslibrary.n[...] 한겨레 1995-06-09
[49] 뉴스 경향신문 1973-12-17
[50] 서적 내가 겪은 민주와 독재 선인 2001-11-30
[51] 뉴스 ‘보수·진보의 경계인’ 김종인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11-12-26
[52] 뉴스 탄핵 열쇠 쥔 헌재 재판관 9인 면면(상보) https://news.naver.c[...] 머니투데이 2004-03-12
[53] 뉴스 法(법)에 사는 사람들 <89> 「淸廉」을 信條로 金炳魯씨 (8)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84-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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