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형 (1875년)
1. 개요
이준형은 1875년 안동 임청각에서 태어났으며, 3대에 걸쳐 9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집안에서 성장했다. 을미의병 당시 아버지 이상룡의 비서 역할을 했고, 대한협회 안동지회 결성, 학교 설립 등을 통해 신학문 보급과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만주로 망명하여 경학사 설립에 참여하고, 부민단, 한족회 등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며 군자금 마련을 위해 노력했다. 이후 중국 공산당에서 활동하다가 1942년 태평양 전쟁에서 일제의 우세를 비관하여 자결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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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룡 -
김동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김동삼은 협동학교 설립으로 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서간도 망명 후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참여, 서로군정서와 정의부 참모장 등을 역임하며 무장 독립운동을 이끌었으며, 1931년 체포 후 복역 중 순국하여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
이상룡 -
신흥무관학교
신흥무관학교는 1910년대 일제강점기 서간도에 설립되어 독립군을 양성하고 항일 무장 투쟁을 지원했으며, 서로군정서의 모태가 되었고 졸업생들은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
고성 이씨 -
이기백 (1931년)
대한민국의 육군 대장 출신 군인이자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정치인인 이기백은 아웅산 묘역 폭탄 테러 당시 합동참모본부 의장으로 생존, 평화의 댐 건설을 주도했으나, 금강산댐 과장 보도 논란과 5·18 민주화운동 관련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활동으로 비판받았으며, 군 주요 직책과 합동참모본부 의장을 거쳐 예편 후 보수 정당에서 정치 활동을 했다. -
고성 이씨 -
이희성 (1924년)
이희성(1924년~2022년)은 대한민국의 군인, 정무직공무원으로,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군수사령부 정보참모, 사단장, 국방부 기획국장, 군단장, 육군참모차장, 중앙정보부 부장서리,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등을 지냈으며, 12·12 군사반란 당시 신군부 세력에 협조하여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는 등 신군부 집권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
1942년 사망 -
올레크 로세프
올레크 로세프는 1903년 러시아에서 태어나 1942년 사망한 과학자이며, 접촉식 수정 검출기 연구와 탄화 규소 다이오드에서 빛 방출 현상을 발견하여 LED 연구에 기여했으며, 음저항 다이오드를 활용한 고체 전자 공학 분야에서도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
1942년 사망 -
윌리엄 헨리 브래그
윌리엄 헨리 브래그는 X선 분광기를 발명하고 X선 결정학을 창시하여 1915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으며, 과학 발전과 교육에 기여한 영국의 물리학자이다.
2. 생애
이준형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며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942년 일제가 태평양 전쟁에서 우세를 점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독립이 요원함을 비관하여 자결했다.
2.1. 초기 생애와 계몽 운동 (1880년 ~ 1910년)
이준형은 3대에 걸쳐 9명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된 집으로 유명한 경상북도 안동 임청각에서 출생했다. 을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부친 이상룡 곁에서 연락책과 비서 역할을 맡았다. 1907년에는 안동 최초의 근대식 중등 교육기관인 협동학교 설립에 참여해 교사로 일했다. 1908년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결성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도동서숙(道東書塾), 보문의숙(普文義塾), 동화학교(東華學校) 등을 설립해 신학문 보급과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했다.
2.2. 만주 망명과 무장 독립운동 (1911년 ~ 1932년)
1911년 1월 5일,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상실하자 이준형은 부친 이상룡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 동삼성으로 망명했다. 이들은 유하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에 정착하여 경학사(耕學社) 설립에 참여했다. 경학사가 재정난을 겪자, 이준형은 이상룡의 지시로 국내에 잠입, 예천의 이규홍(李圭洪)에게서 군자금을 지원받았다. 또한 종가인 안동 임청각을 매각하여 마련한 자금을 만주로 가져갔다.
1914년, 이상룡이 부민회 회장을 맡았을 때, 이준형은 잦은 외지 출장으로 자리를 비우는 이상룡을 대신해 실무를 담당했다. 1919년에는 부민회를 확대 발전시킨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1958 한족회](韓族會) 조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같은 해 11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가 구성되자 교육과 군사훈련을 담당했다. 1925년 1월에는 정의부(正義府) 설립에 참여, 길림성(吉林省) 화전현(樺甸縣)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1923년 8월, 이준형은 이재섭(李在燮)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이광민(李光民), 김응섭(金應燮) 등과 함께 한족노동당을 창립하고 간부로 활동했다. 1928년에는 중공당(中共黨) 만주성위원회(滿洲省委員會) 반석현책임자(磐石縣責任者)가 되었다. 1932년 이상룡 서거 후, 이준형은 부친의 반혼제(返魂祭)를 위해 귀향하여 국내에서 구국운동을 이어갔다.
2.3. 중국 공산당 활동과 귀국 (1923년 ~ 1942년)
1923년 8월 이재섭(李在燮)이란 이명을 쓰면서 이광민, 김응섭(金應燮) 등과 함께 한족노동당을 창립하고 간부로 활동했다. 1928년에는 중공당(中共黨) 만주성위원회(滿洲省委員會) 반석현책임자(磐石縣責任者)가 되었다. 1932년 이상룡이 서거하자 부친의 반혼제(返魂祭)를 드리기 위해 귀향한 후 국내에서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3. 최후
이상룡이 서거하자 부친의 반혼제(返魂祭)를 드리기 위해 귀향한 후 국내에서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1942년 일제가 태평양 전쟁에서 우세를 점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독립이 요원함을 비관해 자결했다.
4. 사후
1932년 부친 이상룡이 서거하자 반혼제(返魂祭)를 드리기 위해 귀향한 후 국내에서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1942년 일제가 태평양 전쟁에서 우세를 점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독립이 요원함을 비관해 자결했다.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며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5. 저서
* 동구유고: 1996년 손자 이항증이 한문본을 발간하였고, 2017년 국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