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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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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흥무관학교는 1910년대 일제강점기 서간도에 설립된 독립군 양성 군사학교이다. 1911년 신흥강습소로 시작하여 1919년 신흥무관학교로 개칭되었으며,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 등지로 활동 무대를 옮기면서 설립되었다. 이상룡을 비롯한 민족운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되었으며, 군사 훈련을 통해 항일 무장 투쟁을 위한 독립군을 양성했다. 신흥무관학교는 서로군정서의 모태가 되었으며, 졸업생들은 의열단 활동, 청산리 전투 참여 등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광복 후에는 신흥전문학원으로 시작하여 신흥대학교를 거쳐 현재의 경희대학교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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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녕은 대한제국 시기 개화 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독립협회, 신민회, 서전의숙, 신흥무관학교, 《대동신문》, 한국독립당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국권 회복과 독립 운동에 헌신하며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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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 - [지명]에 관한 문서

2. 배경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조선에서는 일본 제국의 침략에 맞서 항일 의병 전쟁과 같은 저항이 있었다. 을사늑약 체결 전후와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의병 활동이 활발했으나,[2] 일제의 남한 대토벌 작전과 같은 잔혹한 진압으로 한반도 내 의병 활동은 어려워졌다.[3] 1910년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독립운동가들은 만주와 연해주 등지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4]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립된 권업회, 동간도의 간민회 등 독립운동 단체가 활동했고, 독립군 기지는 흥개호 부근 봉밀산, 왕청현 라자구 등 여러 곳에 세워졌다. 신흥무관학교는 서간도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1]

2. 1. 항일 의병 전쟁과 국외 독립운동 기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조선에서는 일본 제국의 침략에 맞서 항일 의병 전쟁과 같은 저항이 있었다. 특히 을사늑약 체결 전후와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에 의병 활동이 활발하였다.[2] 그러나 일제는 민간인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우는 남한 대토벌 작전과 같은 잔혹한 진압작전을 도입하여 한반도 내에서의 의병 활동이 점차 어려워지게 되었고,[3] 1910년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만주와 연해주 등지로 활동무대를 옮기게 되었다.[4]

1910년대 국외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는 러시아와 만주의 국경지역인 흥개호 부근 봉밀산, 동간도 왕청현의 라자구 등 여러 곳에 세워졌다. 당시 독립운동 단체로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립된 권업회, 동간도의 간민회 등이 있었다. 신흥무관학교는 서간도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1]

3. 설립

1911년 서간도로 이주한 민족운동가들은 그해 5월(음력 4월) 삼원포 대고산에서 군중대회를 열어 경학사 조직을 결의했다.[5] 같은 해 6월 10일(양력), 이상룡을 주축으로 윤기섭, 이시영, 이회영 형제와 김형선, 이장녕, 이장직, 이동녕 등 군인 출신이 중심이 되어 중국 지린성 류허현 삼원포에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다.[7][8] 신흥강습소는 일제의 눈을 피하고 중국 당국의 양해를 얻기 위해 만든 이름이었으나, 초기부터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군사학교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신흥'이란 이름은 신민회의 '''신'''자와, 부흥을 의미하는 '''흥'''자를 합쳐 만든 것이다.[9]

1919년 삼일운동 이후 조선의 젊은이들이 몰려와 수용한계를 넘자 유하현 대두자(大肚子)로 학교를 옮기고 '''신흥무관학교'''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대두자가 본교, 기존의 합니하는 분교 형태를 띠게 되었다. 대두자 학교터에서는 2~3,000여 명(추산)의 학생이 교육을 받았다.[11]

3. 1. 경학사와 신흥강습소

1911년 5월(음력 4월) 서간도 삼원포 대고산에서 군중대회를 열어 경학사 조직을 결의했다.[5] 경학사는 서간도 이주민을 위해 농업 등 실업과 교육을 장려하고 장차 군사훈련을 시키기 위해 만든 결사(結社)조직이었다. 같은 해 6월 10일(양력),[6] 이상룡을 주축으로 윤기섭, 이시영, 이회영 형제와 김형선, 이장녕, 이장직, 이동녕 등 군인 출신이 중심이 되어 중국 지린성 류허현 삼원포에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다.[7][8] 일제의 눈을 피하고 중국 당국의 양해를 얻기 위해 신흥강습소란 이름을 내걸었으나 초기부터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군사학교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신흥'이란 이름은 신민회의 '''신'''자와, 부흥을 의미하는 '''흥'''자를 합쳐 만든 것이다.[9]

통화현(通化縣) 제6구 합니하(哈泥河)에는 중학교 과정과 군사과를 두어 군인을 양성했다. 이 때문에 학생들은 합니하 학교를 ‘신흥 중학교’ 또는 ‘신흥 무관 학교’로 부르거나 인식하기도 했다. 공식 명칭은 어디까지나 ‘신흥 강습소’였다.[10]

3. 2. 신흥무관학교로 개칭

이상룡, 윤기섭, 이시영, 이회영 형제, 김형선, 이장녕, 이장직, 이동녕 등 군인 출신이 중심이 되어 1911년 6월 10일(양력) 중국 지린성 류허현 삼원포에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다.[7][8] 신흥강습소는 일제의 눈을 피하고 중국 당국의 양해를 얻기 위해 만든 이름이었으나, 초기부터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군사학교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신흥'이란 이름은 신민회의 '''신'''자와, 부흥을 의미하는 '''흥'''자를 합쳐 만든 것이다.[9]

통화현 제6구 합니하에는 중학교 과정과 군사과를 두어 군인을 양성했다. 이 때문에 학생들은 합니하 학교를 ‘신흥 중학교’ 또는 ‘신흥 무관 학교’로 부르거나 인식하기도 했다. 공식 명칭은 '신흥 강습소'였다.[10] 1919년 삼일운동 이후 조선의 젊은이들이 몰려와 수용한계를 넘자, 유하현 대두자로 학교를 옮기고 '''신흥무관학교'''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대두자가 본교, 기존의 합니하는 분교 형태를 띠게 되었다. 대두자 학교터에서는 2~3,000여 명(추산)의 학생이 교육을 받았다. 학교터는 현재 마을 뒷산의 밭으로 변해 있다.[11]

3. 3. 이상룡과 신흥무관학교

1911년 5월(음력 4월), 민족운동가들은 삼원포 대고산에서 군중대회를 열어 경학사 조직을 결의했다.[5] 이상룡은 안동 유림의 명문가 출신으로 양기탁, 이시영신민회 운동가의 권유에 따라 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심하고 서간도로 이주하였다. 그는 노비문서를 불태워 자신의 노비들을 해방시킨 뒤 가산을 모두 정리하여 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이주하였으며, 경학사를 조직하여 서간도에 정착촌을 건설하였다.[12]

같은 해 6월 10일(양력),[6] 이상룡을 주축으로 윤기섭, 이시영, 이회영 형제와 김형선, 이장녕, 이장직, 이동녕 등 군인 출신이 중심이 되어 중국 지린성 류허현 삼원포에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다.[7][8] 일제의 눈을 피하고 중국 당국의 양해를 얻기 위해 신흥강습소란 이름을 내걸었으나 초기부터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군사학교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신흥이란 이름은 신민회의 '''신'''자와, 부흥을 의미하는 '''흥'''자를 합쳐 만든 것이다.[9] 이상룡은 신흥무관학교 초대 교장을 역임하였고, '신흥'은 곧 독립군 무관 양성 기지로 떠올랐다.[12] 그는 후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역임하기도 하였다.[13]

4. 교육과 훈련

(신흥무관학교 문서의 '교육과 훈련' 섹션은 원본 소스에 해당 내용이 없어 작성할 수 없습니다.)

4. 1. 6대 정신


  • 임무에 희생한다.
  • 체련에 필승한다.
  • 간고에 인내한다.
  • 사물에 염결한다.
  • 건설에 창의한다.
  • 불의에 항거한다.[14]

4. 2. 교가



여러 만만 자손 업어 기르고

동해 섬 중 어린 것들 품에 다 품어

젖 먹여 기른 이 뉘뇨

우리 우리 배달나라의

우리 우리 조상들이라

그네 가슴 끓는 피가 우리 핏줄에

좔좔좔 걸치며 돈다.[14]

백두산 밑 비단 같은 만리 낙원은

반만년 래 피로 지킨 옛 집 이거늘

남의 자식 놀이터로 내어 맡기고

종설움 받는 이 뉘뇨

우리 우리 배달나라의 우리 우리 자손들이라.

가슴 치고 눈물 뿌려 통곡하여라

지옥의 쇳문이 온다[14]

칼 춤 추고 말을 달려 몸을 단련코

새론 지식 높은 인격 정신을 길러

썩어지는 우리 민족 이끌어 내어

새 나라 세울 이 뉘뇨

우리 우리 배달나라의

우리 우리 청년들이라

두 팔 들고 고함 쳐서 노래하여라.

자유의 깃발이 떴다[14]

5. 항일 무장 투쟁

신흥무관학교는 항일 무장 투쟁의 중요한 기반이었다. 특히, 1920년 서로군정서 창립의 모태가 되었으며,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는 데 기여했다.[11] 의열단 등 많은 독립운동 단체와 김좌진 장군과 같은 독립운동가들이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다.[13]

5. 1. 서로군정서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서로군정서 창립의 모태가 되었다. 서로군정서는 경학사의 후신인 한족회의 독자적인 정치 군사 조직이었다. 다음은 님 웨일즈의 저서 《아리랑》에 나오는 김산의 서로군정서에 대한 발언이다.[13]

> 조선인들은 자기들의 인민 정부와 재판소를 가지고 있었으며, 진정한 자치제를 실시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서로군정서는 독립운동의 대의를 위해 임시정부에 합류하기로 하고 윤기섭을 상해로 파견하였다.[13] 서로군정서는 후일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여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다.[11]

5. 2. 졸업생들의 활약

의열단의 많은 단원들이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다.[13] 일제에 의해 신흥무관학교가 폐교된 이후 졸업생들은 김좌진, 홍범도 부대를 찾아가 합류하였고, 청산리 전투를 함께 치렀다.

6. 광복 이후

광복 후 1947년 서울 종로에 신흥무관학교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한 '''신흥전문학원'''이 설립되었고, 1949년 '''신흥초급대학'''으로 인가받았다.[15] 1960년대에 '신흥대학교'였던 교명을 현재의 '''경희대학교'''로 바꾸었다.[16]

6. 1. 신흥대학과 경희대학교

광복 후 1947년 서울 종로에 신흥무관학교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한 '''신흥전문학원'''(新興專門學院)이 설립되었고, 1949년 '''신흥초급대학'''(新興初級大學)으로 인가받았다.[15] 1952년에 4년제인 '''신흥대학'''(新興大學)으로 전환되었고, 1955년에는 종합대학인 '''신흥대학교'''(新興大學校)로 승격되었다. 교사를 서울 회기동(현 경희대학교 서울캠퍼스)으로 이전한 후, 1960년대에 '신흥대학교'였던 교명을 현재의 '''경희대학교'''로 바꾸었다.[16] 참고로 민족무예인 택견을 국가무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시키고 본인도 제1호 택견 무형문화재가 된 신한승은 신흥대학(新興大學) 체육학과 1기생이다.

6. 2. 택견과의 연관성

경희대학교의 전신인 신흥대학 체육학과 1기생 신한승은 택견을 국가무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되도록 하였고, 본인도 제1호 택견 무형문화재가 되었다.[16]

참조

[1] 서적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역사비평사 2006
[2] 서적 다시 찾는 우리 역사 경세원 2008
[3] 서적 다시 찾는 우리 역사 경세원
[4] 서적 다시 찾는 우리 역사 경세원
[5] 서적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2 휴머니스트 2003-04-28
[6] 백과사전 신흥무관학교 두산백과
[7] 서적 신흥무관학교 교육과학사 1996-10-25
[8] 웹사이트 신흥무관학교 약사 (1911년 신흥강습소 설립) http://www.sh100th.o[...]
[9] 서적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역사비평사
[10] 웹사이트 신흥강습소 http://contents.hist[...]
[11] 서적 간도역사의 연구 국학자료원 2006
[12] 웹사이트 신흥강습소 개교 - 1911년 6월 10일 http://www.sh100th.o[...]
[13] 간행물 이상룡, 만주 땅에 해방구를 일군 초대 국무령 서해문집 2007
[14] 서적 한국독립운동사
[15] 백과사전 신흥무관학교 두산백과
[16] 백과사전 신흥무관학교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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