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부
1. 개요
일리부는 청나라의 관료로, 아편 전쟁 시기 흠차대신으로 임명되어 군사 작전을 지휘하고, 난징 조약 체결에 참여했다. 1801년 진사가 된 후 국자감 교장, 운남부 남관 통판 등을 역임하며 지방관으로 활동했다. 아편 전쟁 발발 후 절강성 연해의 군사 작전을 책임졌으나, 영국군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후 난징 조약 체결에 참여했으며, 광저우 장군을 거쳐 흠차대신으로 광저우에서 전후 처리를 담당하다가 쇠약해져 사망했다. 사후 태자태보로 추증되고 문민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 이름 | 이리부 |
|---|---|
| 출생 | 1772년 |
| 사망 | 1843년 |
| 직책 | 문연각 대학사 |
|---|---|
| 임기 시작 | 1838년 |
| 임기 종료 | 1841년 |
| 양강총독 | 양강총독 |
| 임기 시작 | 1840년 |
| 임기 종료 | 1841년 |
| 전임자 | 등정정 |
| 후임자 | 린칭 (대리) |
| 운귀총독 | 운귀총독 |
| 임기 시작 | 1835년 |
| 임기 종료 | 1840년 |
| 전임자 | 롼위안 |
| 후임자 | 등정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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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 조약 -
헨리 포팅어
헨리 포팅어는 동인도 회사에서 복무하며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탐험하고 아편 전쟁 당시 중국 전권 대사 및 홍콩 총독을 역임하며 난징 조약을 통해 홍콩을 영국에 할양했으며, 이후 케이프 식민지 총독과 마드라스 총독을 거쳐 몰타에서 사망했다. -
아이신기오로 할라 -
푸쥔
푸쥔은 청나라 말기 서태후에 의해 잠시 옹립되었다가 폐위된 광서제의 6촌 조카로, 보경제로 옹립 후 폐위되었으며, 선통제 섭정과 중화민국 총통부 참의를 역임하고 만성 간부전으로 사망하여 그의 삶은 서태후의 정치적 계략과 청나라 몰락의 격동기를 반영한다. -
아이신기오로 할라 -
시버오치피양구
시버오치피양구는 건주여진 가문 출신으로 건주좌위지휘사를 세습했으며, 그의 아들 푸만은 흥조로 추숭되었고, 누르하치의 고조부이다. -
1843년 사망 -
로버트 사우디
로버트 사우디는 1774년 잉글랜드에서 태어나 시인, 작가, 역사가로 활동했으며, 프랑스 혁명을 지지하다 보수주의로 전향하여 계관 시인으로 임명되었고, 넬슨 제독의 전기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
1843년 사망 -
노아 웹스터
미국의 언어학자, 사전 편찬자, 교육자, 저술가이자 연방주의자였던 노아 웹스터는 미국 영어 표준화에 헌신하며 『영어 문법 연구소』와 『미국 영어 사전』을 통해 미국 교육에 큰 영향을 미쳤고 미국식 철자법 대중화에 기여했다.
2. 생애
일리부는 1801년(가경 6년)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했다. 여러 지방 관직을 거치며 경력을 쌓았고, 아편 전쟁 때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나, 전쟁 결과와 난징 조약 체결 과정에서 논란의 중심에 섰다. 난징 조약 체결 이후 광저우에서 전후 처리를 담당하다 사망했다.
그의 생애는 초기 관직 생활, 아편 전쟁과 난징 조약 체결, 그리고 난징 조약 이후의 활동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2.1. 초기 생애 및 관직 생활
1801년(가경 6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국자감 교장직을 받았다. 운남부 남관 통판, 징강 지부, 등충 지주를 역임했다. 현지 토사와 좋은 관계를 구축하여 운귀총독 백린으로부터 추천받았다. 1821년(도광 원년), 운귀총독 경보(킨바오)를 따라 영북(永北)에서 소수 민족의 반란을 진압하여 영창 지부를 대행했다. 안휘 태평부 지부, 산서성 기녕도대(冀寧道台), 절강 안찰사, 호북, 절강 포정사 등 지방 관직을 역임했다. 1825년(도광 5년) 산서 순무로 승진, 산동과 운남 순무를 역임하며 청렴함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1833년(도광 13년), 운귀 총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1838년(도광 18년), 협변대학사(協弁大學士) 직함을 받았다.
2.2. 아편 전쟁과 난징 조약
1838년 협변대학사(協弁大學士) 직함을 받았고, 이듬해 양강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아편 전쟁 때 흠차대신에 임명되어 절강성 연해 군사 작전 책임을 맡았다. 기선, 유겸 등과 전투를 결정하지 못했고, 일리부도 점령된 해정의 영국군을 대면했으나, 적극적으로 출격하지는 않았다. 1841년 정월, 청나라 정부는 일리부에게 해정 공격을 명령했지만, 영국군은 홍콩을 점령했기 때문에 해정에서 철수했다. 일리부는 해정을 수복했다고 상소를 올렸으나, 책임을 피하기 위해 "기선과 함께 병력과 대포가 아직 모이지 않았다는 구실로 공격을 늦추었는데 적선이 도망갔다"고 덧붙였다. 일리부는 협변대학사 직함을 박탈당하고 양강 총독에 유임된 유겸에게 군 지휘권을 넘겨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겸은 일리부가 장희를 파견해 영국군과 무단으로 거래하고 교전하지 않기로 밀약했다고 탄핵했고, 일리부는 직무 박탈 후 수감되었다.
1841년(도광 21년) 10월 영국군은 해정, 영파 등을 점령했고, 유겸은 전사했다. 1842년 3월, 뒤를 이은 양위장군 혁경마저 패하자 청나라 정부는 다시 일리부를 기용하여 영국군과 싸우는 기영을 지원하게 했다. 기영은 일리부에게 자포진 방어를 명했다. 일리부는 영국군과 접촉하기 위해 장희를 파견했지만, 영국군은 이후 오송구(呉淞口)를 공격하고 장강을 따라 올라가 남경에 도착했다. 위기를 느낀 청나라 정부는 기영과 일리부를 파견하여 영국과 협상하게 했고, 결국 난징 조약에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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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난징 조약 이후
난징 조약 체결 이후 일리부는 흠차대신 겸 광저우 장군에 임명되어 광저우에서 전후 처리를 담당했다. 그러나 일리부의 부임은 광저우 민심의 불만을 야기했고, 영국의 압력 또한 거세어졌다. 결국 일리부는 쇠약해져 사망했다.
사후 일리부는 태자태보로 추증되었고, 문민(文敏)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3. 평가
현재 일리부에 대한 평가 정보는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