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인국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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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인국민회는 1909년 2월 1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와 하와이의 합성협회가 통합하여 설립된 단체이다. 초기에는 하와이와 미국 본토의 한국 단체들이 1908년 친일 외교관 암살 사건 이후 재미 한인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협력하면서 결성되었다. 이후 북미, 하와이, 시베리아, 만주 등으로 확장되었으며, 1912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중앙총회를 설립하여 조직을 강화했다. 대한인국민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재외 한인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승만의 하와이 지방총회 장악, 박용만의 피살, 안창호의 투옥 등 내부 갈등과 외부의 어려움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지속했으며,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참여하여 광복을 맞이했다. 1960년 이승만 하야 이후 순수 교민 단체로 변모했으며, 현재는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구 본부 건물이 한국 독립 기념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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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 | |
---|---|
기본 정보 | |
이름 | 대한인국민회 |
한자 | 大韓人國民會 |
로마자 표기 | Daehanin Gungminhoe |
설립일 | 1909년 2월 1일 |
설립자 | 안창호 |
위치 |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 (1936년 이전)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 미국 (1936년 이후) |
산하 단체 | 대한인국민군단 윌로우스 한인 비행학교 |
역사 | |
미국 내 한인 독립운동 | 미국 내 한인 독립운동 단체 |
조직 및 활동 | |
활동 목표 | 한국의 독립 |
주요 활동 | 독립 자금 모금 외교 활동 독립군 양성 |
조직 형태 | 정치 조직 |
관련 인물 | |
주요 인물 | 안창호 이승만 박용만 정재관 민찬호 |
기타 | |
관련 문서 | 대한인국민회 창립총회록 |
참고 자료 | 미국 내 한인 독립운동 |
2. 역사
1905년 일한협약 이후, 일본의 식민 정책에 반대하는 여러 한국 단체들이 하와이, 캘리포니아 등 미국 각지에서 생겨났다. 1908년 3월 23일, 친일 외교관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가 두 명의 한국 이민자에 의해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하와이와 미국 본토의 한국 단체들은 이들의 권리 보호를 위해 협력했다. 이러한 사건과 애국적 노력 통합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1908년 10월 30일 샌프란시스코의 상호부조회(MAS)와 하와이의 대한협회는 통합을 논의하기 위한 회합을 가졌다. 하와이 대표 7명과 미국 본토 대표 6명이 합의를 이루었고, 1909년 2월 1일 두 단체는 공식적으로 합병하여 대한인국민회를 설립했다.[2]
대한국민회는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에 두 개의 지역 본부를 두고 시작하여, 다른 지역에 대표를 파견하여 지부를 설립하며 활동을 확장했다. 1911년까지 북미, 하와이, 시베리아, 만주 등 4개 주요 지역으로 확장되었다.[3] 조직이 확장됨에 따라 전국대한국민회(All Korea Korean National Association)로 이름을 바꾸었다. 각 지역 본부는 여러 지역 지부를 관할했으며, 조직이 가장 번성했을 때는 하와이에 38개, 북미에 73개 지부를 포함하여 거의 130개에 달하는 지부가 있었다.[4]
1912년 11월 8일, 각 지역 본부 대표들이 샌프란시스코에 모여 전국 한국인 회의를 열고 대한국민회 중앙 본부를 설립했다. 이는 모든 지부의 규칙을 통일하고 한국 독립 운동을 지휘하는 중앙 행정 사무소 역할을 했다.[2] 안창호와 박용만이 각각 회장과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1] 안창호는 대한국민회 지역 지부를 조직하고 조직을 강화, 통합하는 일을 계속했다. 그러나 하와이와 북미의 주요 지도자들 사이에는 여전히 갈등이 있었는데, 이승만은 교육과 외교를 통한 해방을, 박용만은 군사 행동을 각각 추구했다. 안창호는 이 갈등을 중재하려 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
대한국민회는 한국인의 이익과 복지를 위한 통치 기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1914년 6월 13일 캘리포니아주 헤멧의 살구 농장에서 일하던 한국계 미국인들이 지역 주민들에게 공격받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대한국민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처음에는 일본 영사관이 중재에 나섰지만, 한국계 미국인 사회는 이에 분노했다. 대한국민회 북미 지부장 데이비드 리는 미국 국무장관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에게 일본 정부가 더 이상 한국인을 대표하지 않도록 요청하는 전보를 보냈다. 브라이언은 대한국민회의 편을 들었고, 이후 한국 이민자나 유학생 관련 문제는 대한국민회가 처리하게 되었다.[5]
2. 1. 창립 (1909-1912)
1909년 2월 1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공립협회와 하와이의 합성협회가 통합하여 샌프란시스코에 '''국민회'''가 조직되었다. 안창호, 박용만, 이승만 등이 참여하였다.[10]1910년 2월 10일 샌프란시스코의 대동보국회와 '''국민회'''가 통합하여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Korean National Association)로 개편되었다.[11] 대한인국민회는 미주에는 북미지방총회를, 하와이에는 하와이지방총회를 조직하였다.[12]
1911년 3월 29일 대한인국민회 지방총회들을 대표하는 기관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설립되었다. 회장에 최정익, 부회장에 한재명이었다.[11][12][16] 1911년 10월 20일 시베리아지방총회를 설치하고 16개 지방에 지방회를 구성하여 회원이 1,150여 명에 달하였다.[12][17] 1911년 11월 13일 만주지방총회를 설립하고 8개처에 지방회를 구성하였다. 회장은 탁공주였다.[12][18]
1912년 11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제1차 대표원의회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북미, 하와이, 시베리아, 만주 등 각 지방총회의 대표자들이 모여 중앙총회를 정비하고 임원을 선임하기 위한 자리였다. 제1차 대표원의회에 참석한 대표원은 다음과 같다.
지방총회 | 대표원 |
---|---|
북미지방총회 | 이대위, 박용만, 김홍균 |
하와이지방총회 | 윤병규, 정원명(유고부진), 박상하 |
수청지방총회 | 강영대, 김병룡(유고부진), 유국주(유고부진) |
만주지방총회 | 안창호, 강영소, 홍언 |
시베리아지방총회는 당시 정식 인준을 받지 못하여 대표원을 공선하지 못하였다. 중앙총회 회장 후보자는 윤병규, 부회장 후보자는 한재명이었다.[12][19]
이로써 대한인국민회는 재외 한국인의 권익을 대변하는 최고기관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2. 2. 이승만의 하와이 지방총회 장악 (1914-1919)
1914년부터 1918년까지 대한인국민회는 큰 혼란을 겪었다. 1915년 중순부터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회장은 안창호, 부회장은 박용만이었으나, 동아시아 정세 변화로 연해주와 만주의 대한인국민회가 쇠약해졌다. 하와이에서는 이승만과 박용만의 갈등이 심해졌고, 안창호의 지도력에도 문제가 있어 3·1 운동 이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실질적인 기반은 미국 서해안과 멕시코에 국한되었다.1914년 6월 10일, 박용만은 하와이 오아후섬에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하고 한인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반면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일본과의 군사적 대결은 무고한 백성의 희생만 초래할 뿐 실익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류 양심과 여론에 호소하여 미국 등 서구 국가들이 한국 독립을 지지하도록 외교활동을 펼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과적으로 하와이 한인사회는 이승만파와 박용만파로 나뉘었고, 교회까지 분열되었다.[20]
1915년 초,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장 김종학의 회관 신축 관련 재정 비리 의혹이 불거졌다. 대한인국민회는 호놀룰루 밀러 가(街)에 새 회관을 건축하여 이사했지만, 뒤늦게 건축비 부정 사실이 드러났다.[21] 그해 1월 개최된 지방총회 대의원 총회에서 공금 횡령 사실이 지적되었다.[21]
사법 당국에 소송을 제기하면 범법자들을 처벌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유용한 금액을 환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한인 사회의 비난과 모멸을 피할 수 없었다. 따라서 범법자들을 용서하고 일정 기일 내에 유용 금액을 환불하도록 조치하고 사건을 종결지었다.[21] 이승만은 이 대의원 총회의 처사가 부당하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자신이 발행하는 월간지 태평양잡지에 게재하였다.[21]

이에 대한인국민회 기관지 국민보는 이승만이 조리 없는 이론과 불법적 행동을 서슴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21] 그러나 한인 2세들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하와이 동포들은 이승만을 더 지지하기 시작했고, 결국 대한인국민회에 보내는 공금을 이승만에게 보내겠다는 운동이 일어났다.[21]
이승만은 하와이 지방총회를 혁신하겠다며 임시의회 소집을 건의했고, 와히아와 지방회 의원 3인이 이에 응답해 임시의회 소집청원서를 총회장에게 보냈다.[22]
1915년 5월 1일부터 수 차례 임시의회가 열리고 회계장부도 조사되었다. 그 결과 총재무 홍인표가 1544.67USD을, 하와이 지방총회장 김종학이 1345.64USD을 횡령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김종학과 지도부 일동이 파면되었다.
1915년 6월 10일경, 신규 하와이 지방총회장 선거에서 홍한식이 당선됐다. 이날 이홍기, 김규섭, 김윤배, 이정건은 대의원과 참의원 등에 당선됐다.[22]
1915년 6월 17일경, 이승만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 온 공소장을 본 즉시 의회에서 김종학을 사회 법률로 처단하기로 결정하고, 의회 의원들을 한인중앙학원에 불러 "어찌하여 죄인 김종학을 징역시키지 않고 공회 재판으로 처치한다 하는가? 그와 같이들 하려면 다 본디 방식으로 돌아가라"라고 호통쳤다.[22] 1915년 6월 25일경, 김종학 등은 홍한식 등에게 선거 무효 소송을 걸었다가 3개월 만인 9월 29일 소송을 취하하였다.[23]
1918년 1월 15일,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 제10차 대의회에서 하와이 지방총회장 안현경 지도부에 재정 비리 의혹이 제기되었다. 2년 반 전에 박용만파가 받았던 혐의를 이번에는 이승만파가 받았다. 박용만파 대의원들이 이승만에게 따지자, 이승만은 국민보에 해명 글을 기고했다.[24] 해명에도 불구하고 2월 11일 재정 문제를 논의하던 중 난투가 벌어졌다. 안현경은 호놀룰루 경무청에 신고해서 박용만파 유동면, 김성렬, 이찬숙, 김한경 4명을 지목, 체포케 했다. 1918년 2월 15일, 폭동 혐의로 유동면 등 4명에 대해 체포영장이 발부됐다.[25] 2월 27일, 고등재판소에서 배심 재판이 열렸다. 이승만은 당시 현장에 없었기 때문에 고발인 신분으로만 재판정에 출석하였다.[26] 3월 8일, 재판 결과 박용만파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27]
그 직후에도 다툼은 계속됐다. 1918년 3월 11일, 이승만파 안현경은 박용만파 유동면 등을 경찰에 체포시켰고, 3월 15일 안현경은 유동면 등을 고발하였다. 같은 날 안현경은 김순기를 경찰에 체포시켰다.[28] 이에 3월 23일, 김순기는 자신이 안현경에게 누명을 쓰고 체포당해 5000USD의 손해를 봤다며 안현경을 고소했는데, 안현경은 "I am going to kill you"라는 살해 협박을 받아서 경찰에 신고한 것이라고 반박했다.[29] 1919년 2월 28일, 재판 결과 원고 측 김순기가 오히려 협박 혐의로 체포 영장을 발부받았고, 피고 측 안현경에게 재판 비용까지 물어줬다.[30]
이후 박용만파는 1918년 7월 1일, 하와이 지방총회에 대항하기 위해 '임시중앙연합회'(갈리히연합회)를 결성했다. 이후 하와이 한인사회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와 갈리히연합회로 양분되어 중앙총회의 위상도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에 중앙총회장 안창호까지 나서서 갈리히연합회의 해산을 권고했으나, 갈리히연합회는 기관지 《태평양시사》를 창간하여 이승만의 《태평양잡지》와 여론전을 펼쳤다. 1920년 초, 하와이 지방총회장 이승만파 이종관 등과 박용만파 손창희 등의 선거 불복 관련 법정 다툼도 이승만파가 승리하였다.[31]
이후로도 박용만파와의 갈등은 끊이지 않았지만, 이승만파는 언론을 통해 비폭력 저항을 상세히 설명하는 태도로 한인 사회의 평판을 얻기 시작했고, 점차 한인 사회를 장악했다. 한인 사회로부터 YMCA 한인 지부를 위한 대규모 기부금을 성공적으로 모금하자 미국 감리교 선교부와의 갈등도 해소되었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1919년 파리 강화 회담에 보낼 특사로 이승만을 신뢰했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하와이로 귀환했을 땐 한인 사회의 광범위한 축복을 받았다. 중립적인 인사들은 그의 추종자가 되었고, 반이승만파 중 일부조차 이승만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승만은 반대자가 많았지만, 지지자들에게서는 숭배에 가까운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대한인국민회는 분쟁 속에서도 독립 기부금은 잘 걷혀 1915년 1523USD에서 해마다 늘어나 1918년에는 3775USD를 기록했다.[32]
2. 3.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과 분열 (1919-1924)
1919년 3·1 운동은 한국계 미국인들의 민족 정신을 다시 일깨웠다. 3월 중순 시위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자,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KNA)가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대한인국민회는 이승만을 포함한 3인 대표단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려 했으나, 필요한 여행 서류를 얻지 못했다. 그 후 대한인국민회는 필립 제이슨(서재필)이 이끄는 한국 정보 사무소를 설립하고, 그와 이승만을 필라델피아로 파견하여 같은 해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열린 "한국인 대회"를 주도하게 했다. 이 대회에는 미국과 멕시코의 27개 단체를 대표하는 150명의 한국인이 참석하여 미래 대한민국의 청사진을 만들기 시작했다.[6] 모든 단체는 민주주의 원칙에 기반한 대한민국을 지지하고 상하이에 새로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약속했다. 당시 상하이에 있던 안창호는 4월 13일 임시정부 수립과 초기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6]임시정부 수립 후, 이승만은 대한인국민회가 그 목표를 달성했으므로 망명 정부가 그 사업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대한인국민회의 이름을 한국 거류민회로 변경할 것을 제안했지만, 대한인국민회 회원들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이로 인해 분파가 생겨났고, 이승만과 그의 지지자들에 의해 하와이에 대한인동지회가 설립되었다.[7] 1924년 이승만을 위시한 외교독립론자들이 대한인국민회를 탈퇴하여 대한인동지회에 합류하였다.[36]
내부 갈등에도 불구하고 대한인국민회의 활동은 1920년대 중반까지 계속되었으나, 독립 운동의 열기가 식으면서 1937년 중일 전쟁 때까지 활력을 되찾지 못했다.[8] 그러나 대한인국민회는 계속 독립 기금을 조성하여 수십 년 동안 한국 이민자들로부터 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와 반일 활동을 지원했다.[2]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발표한 교민단령(僑民團令)에 따라 1922년 3월 22일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가 '하와이 대한인교민단'으로 개편되었다.[33] 같은 시기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북미 대한인교민단'으로 개편되었다.[34] 1924년 9월에 로스앤젤레스에서 'LA 대한인교민단'이, 12월에 뉴욕에서 '뉴욕 대한인교민단'이 각각 조직되었다.[35]
2. 4. 박용만 피살과 안창호 투옥 (1928-1938)
1928년 10월 16일, 박용만은 군자금 모금을 위해 중국 톈진에 머무르던 중, 의열단원 이구연, 박인식, 이규서 등이 독립운동 자금으로 1천원을 요구했으나 이를 거절하다가 암살당했다.1930년 7월 16일, 이승만은 호놀룰루에서 동지미포대표대회를 열어 하와이 대한인동지회와 하와이 대한인교민단의 통합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승만과 김원용의 갈등으로 인해 통합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두 사람 간의 불화는 법정 다툼으로까지 번졌다.[37]
1932년 1월 16일, 교민단 총단장 손덕인과 국민회 총회장 이정건의 주도로 하와이 대한인교민단은 대의원회에서 교민단 해체와 국민회 복설을 결의했다.[37]
1933년 1월 3일, '하와이 대한인교민단'이 '하와이 대한인국민회'로 복설되었다.[38]
1932년 4월 29일, 일본 제국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제1차 상하이 사변 승전 기념 및 천장절 행사를 열었다. 이날 윤봉길 의거(훙커우 공원 사건)가 일어나 윤봉길은 시라카와 요시노리를 비롯한 일본군 고관들을 살해했다.
1932년 4월 30일 오후 1시, 일본영사관 경찰의 요청을 받은 상하이 프랑스 조계 당국은 이춘산(이유필)의 집을 찾았으나, 이춘산이 외출 중이어서 귀가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안창호가 이춘산의 집을 방문했고, 당국은 안창호를 이유필로 오인하여 일본영사관에 넘겼다.[39] 안창호의 변호인들은 안창호가 1923년 중국으로 귀화한 중국 시민이므로 중국 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일제 측은 '귀화를 해도 본래 국적을 완전히 잃는 것은 아니다', '(귀화 시) 본국의 허가를 받은 적이 없다. 그 허가는 중국으로의 귀화가 효력을 갖기 위해 필요하다'라며 반박했다.[40]
1932년 6월 2일, 안창호는 조선으로 비밀리에 압송되었다.[41]
1935년 5월 10일, 안창호는 대전형무소에서 가출옥되었다.[42]
1938년 3월 10일, 안창호는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했다.
2. 5. 대조선독립단과의 갈등과 통합 (1934-1941)
대조선독립단은 이승만 세력과 대립·갈등하던 박용만을 중심으로 하는 하와이 한인들에 의해 1919년 3월 결성되었다. 대조선독립단은 3·1 운동 이후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와 여러 차례 크고 작은 분쟁을 일으키면서 하와이 한인 사회를 양분시켰다.[43] 1928년 박용만이 중국에서 피살당한 뒤 활동이 침체되어, 1934년 10월 대조선독립단은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와 공식적으로 합동하였다. 그러나 대조선독립단이 대한인국민회와 합동한 후에도 대조선독립단의 일부는 통합에 반대하여 그 활동과 조직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이들은 대조선독립단이라는 단체명을 그대로 사용하며 대조선독립단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법정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였다.[43]1935년 대한인국민회와 대조선독립단 간의 부동산 소유권 분쟁이 있었다. 1935년 12월 초 대조선독립단 단장 김영배가 대한인국민회에 부동산을 양도한다는 증서를 썼는데, 대조선독립단 측이 이를 번복하려 하자 1936년 2월 19일 대한인국민회가 대조선독립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1936년 10월 29일 쟁점이 된 부동산은 김영배의 소유, 즉 대조선독립단의 소유로 되돌리되 기타 은행 잔고는 대한인국민회와 대조선독립단이 분할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44]
끝까지 통합에 반대하던 대조선독립단 세력들은 1941년 4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해외한족대회에 재미 한족 9개 단체의 하나로 참여하였다. 이때 대조선독립단의 대표는 강상호였다.[43]
2. 6.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참여와 광복 (1941-1945)
1941년 4월 20일부터 4월 27일까지 8일 동안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가 개최되었다. 해외 한족 대표들이 모여 새로운 국제정세 변화에 대비하여 우리 독립운동의 진로를 협의하였다.[45]1941년 4월 29일 해외한족대회에서 독립전선의 통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 봉대(奉戴), 군사운동, 대미 외교기관 설치 문제, 미국 국방 공작 후원 방침, 독립금 재정 방침, 연합기관 설치에 관한 것 등 7개 안을 결의하였고, 이 결의안에 따라 각 단체의 연합기관으로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참여한 단체와 대표는 아래와 같았다.[46]
단체 | 대표 |
---|---|
대한인동지회 | 안현경, 리원슌, 도진호 |
한국독립당 하와이총지부 | 림셩우 |
북미 대한인국민회 | 한시대, 김호, 송죵익 |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 안원규, 김현구, 김원용 |
중한민중동맹단 | 차신호 |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련합회 | 권도인 |
대조선독립단 | 강샹호 |
하와이 대한부인구제회 | 심영신, 민함나 |
대한인국민회는 중앙총회, 지방총회, 지방회라는 세 단계의 조직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1909년 2월 1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와 하와이의 합성협회가 통합하여 '''국민회'''가 조직되었다. 안창호, 박용만, 이승만 등이 참여하였다.[10]
1945년 광복 후 이승만이 귀국한 뒤에는 임병직, 이원순 등을 통해 대한인국민회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960년 이승만이 하야한 뒤에는 특별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지도자 없이 순수 교민 단체로 변모하였다.
3. 조직 구조
1911년 3월 29일 설립된 중앙총회는 각 지방총회를 대표하는 기관으로, 회장과 부회장을 두었지만 초기에는 완전한 조직 구성을 갖추지 못했다.[11][12][16] 1912년 11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제1차 대표원의회에서 중앙총회가 정비되고 임원이 선임되면서, 대한인국민회는 재외 한국인의 권익을 대변하는 최고 기관으로 활동하게 되었다.[12][19] 중앙총회는 모든 지부의 규칙을 통일하고 한국 독립 운동 활동을 지휘하는 중앙 행정 사무소 역할을 수행했다.[2]
지방총회는 지역별 조직으로, 1910년 대한인국민회로 개편되면서 미주에는 북미지방총회, 하와이에는 하와이지방총회가 조직되었다.[12] 1911년에는 시베리아지방총회(서백리아)와 만주지방총회(만주리아)가 설립되었다.[12][17][18] 시베리아지방총회는 치타, 이르쿠츠크, 수청 등 16개 지방에 지방회를 두었고, 만주지방총회는 8개 지역에 지방회를 설치했다.[12][17][18]
지방회는 지방총회 산하의 가장 기초적인 조직 단위였다. 1912년 10월 6일에는 멕시코시티에 멕시코지방회(묵경지방회)가 인준되었고, 멕시코에는 프론테라, 와하께냐, 산타페, 코아트사코알코스 등 여러 지방회가 있었다.[13][14] 1921년 6월 14일에는 쿠바 지방회가 조직되었다.[15] 대한인국민회는 조직이 가장 번성했을 때 하와이에 38개, 북미에 73개 등 거의 130개에 달하는 지방회를 거느렸다.[4]
1914년 6월 13일 캘리포니아주 헤멧에서 발생한 한국계 미국인 노동자 피습 사건은 대한인국민회가 한국인의 이익과 복지를 위한 대표 기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한인국민회 북미 지부장 이대위는 미국 국무장관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에게 일본 정부가 한국인을 대표하지 않도록 요청했고, 브라이언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한국 이민자 관련 문제는 대한인국민회가 처리하게 되었다.[5]
4. 주요 활동
1910년 2월 10일 샌프란시스코의 대동보국회와 '''국민회'''가 통합하여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Korean National Association)로 개편되었다.[11] 대한인국민회는 미주, 하와이, 시베리아, 만주 등지에 지방총회를 두고 각 지역에 지방회를 설치하여 조직을 확장했다.[12] 1912년 10월 6일 멕시코시티에 멕시코지방회(묵경지방회)가 인준되었고,[13][14] 1921년 6월 14일에는 쿠바 지방회가 조직되었다.[15]
1911년 3월 29일에는 각 지방총회를 대표하는 기관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설립되었으나, 분과와 임원을 완비한 완전한 조직 구성을 완료하지는 못했다.[11][12][16] 같은 해 10월 20일에는 시베리아지방총회가 설치되어 1,150여 명의 회원을 확보했고,[12][17] 11월 13일에는 만주지방총회가 설립되었다.[12][18]
1912년 11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제1차 대표원의회가 개최되어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정비하고, 재외한국인의 권익을 대변하는 최고기관으로 활동하게 되었다.[12][19]
1915년 이대위 목사가 인터탑입한글 식자기를 발명하여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인 《신한민보》를 발간하고 국내외에 배포함으로써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대한국민회(KNA)는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에 두 개의 지역 본부를 두고 시작하여, 1911년까지 북미, 하와이, 시베리아, 만주 등 4개 주요 지역으로 확장했다.[3] 각 지역 본부는 여러 지역 지부를 관할했으며, 조직이 가장 번성했을 때 하와이 38개 지부와 북미 73개 지부를 포함하여 거의 130개에 달하는 지부가 있었다.[4]
1912년 11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전국 한국인 회의(All Koreans Conference)를 열고 대한국민회 중앙 본부를 설립하여, 각 지부의 규칙 통일성을 보장하고 한국 독립 운동 활동을 지휘하는 중앙 행정 사무소 역할을 수행했다.[2] 안창호와 박용만이 각각 회장과 부회장으로 선출되었으나,[1] 하와이와 북미의 주요 지도자들 사이에는 갈등이 존재했다. 이승만은 교육과 외교를 통한 해방을 추구한 반면, 박용만은 군사 행동을 선호하여 갈등이 발생했고, 안창호는 중재를 위해 노력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
1936년, 대한인국민회는 본부를 로스앤젤레스로 이전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고 한국인을 대표하여 미국 정부와 소통했다.
4. 1. 독립운동
1919년 3·1 운동은 재미 한국인들의 민족 정신을 다시 일깨웠다. 3월 중순 시위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자,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KNA)는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대한인국민회는 이승만을 포함한 3인 대표단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려 했으나, 필요한 여행 서류를 얻지 못했다.[6] 이후 대한인국민회는 서재필(필립 제이슨)이 이끄는 한국 정보 사무소를 설립하고, 그와 이승만을 필라델피아로 파견하여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열린 "한국인 대회"를 주도하게 했다. 이 대회에는 미국과 멕시코의 27개 단체를 대표하는 150명의 한국인이 참석하여 미래 대한민국의 청사진을 만들기 시작했다.[6] 모든 단체는 민주주의 원칙에 기반한 대한민국을 지지하고 상하이에 새로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KPG)에 대한 지지를 약속했다. 당시 상하이에 있던 안창호는 4월 13일 임시정부 수립과 초기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시정부 수립 후, 이승만은 대한인국민회가 그 목표를 달성했으므로 망명 정부가 그 사업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대한인국민회의 이름을 한국 거류민회로 변경할 것을 제안했지만, 대한인국민회 회원들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이로 인해 분파가 생겨났고, 이승만과 그의 지지자들에 의해 하와이에 동지회가 설립되었다.[7]
내부 갈등에도 불구하고 대한인국민회의 활동은 1920년대 중반까지 계속되었으나, 독립 운동의 열기가 식으면서 1937년 중일 전쟁 때까지 활력을 되찾지 못했다.[8] 그러나 대한인국민회는 계속 독립 기금을 조성하여 수십 년 동안 한국 이민자들로부터 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와 반일 활동을 지원했다.[2]
1915년 이대위 목사가 인터탑입한글 식자기를 발명하였다. 이를 이용해서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인 《신한민보》를 발간하여 국내외에 배포함으로써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1936년, 대한인국민회는 본부를 로스앤젤레스로 이전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고 한국인을 대표하여 미국 정부와 소통했다. 같은 해, 대한인국민회는 가장 큰 한국 이민자 정치 조직이자 저항과 정치적 권한 강화의 주요 원천이 되었는데, 주로 한국 이민자들의 노력을 통합하고 연합국 정부에 로비 활동을 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러나 대한인국민회의 하와이와 북미 지부는 내부 갈등으로 인해 점점 분열되고 있었다. 대한인국민회 회장 찰스 김(Charles Kim)의 내부 개혁과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 이후에야 대한인국민회 지부들이 동지회와 같은 다른 단체들과 연합하여 한국 통일 위원회를 결성했다. 이 연합은 계속해서 한국 임시 정부(KPG)[1]를 지원하고 한국 임시 정부를 한국 정부로 공식 승인받는 것을 목표로 했다.
4. 2. 교육 및 문화 활동
1915년 이대위 목사가 인터탑입한글 식자기를 발명하였다. 이를 이용해서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인 《신한민보》를 발간하여 국내외에 배포함으로써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9]
1910년 2월 10일, 국민협회(KNA)는 주간 신문인 《신한민보》(Sinhan Minbo, The New Korea)를 발행하였다. 매주 수요일 독립 운동을 장려하고 한국 국민의 이익을 옹호하는 기사를 실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주간 발행을 이어오다가 1974년 9월 김운하에게 인수된 후 월간으로 발행 방식을 변경하였다.[9]
4. 3. 동포 권익 보호
1914년 6월 13일, 캘리포니아주 헤멧의 살구 농장에서 일하던 한인들이 지역 주민들에게 공격받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대한국민회의 역할이 주목받게 되었다.[5] 초기에는 일본 영사관이 재미한인들을 대신하여 미국 정부에 중재에 나섰지만, 이는 재미한인 사회에서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5]
이에 대한국민회 북미 지부장 데이비드 리는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미국 국무장관에게 전보를 보내 일본 정부가 더 이상 한국인을 대표하지 않도록 요청했다.[5] 워싱턴 D.C.의 일본 외교관들은 이러한 움직임에 압력을 가했지만, 브라이언 국무장관은 대한국민회의 요청을 받아들였다.[5] 이후 한국 이민자나 유학생 관련 문제는 대한국민회가 담당하게 되었다.[5]
5. 역대 중앙총회장
대수 | 이름 | 임기 |
---|---|---|
1 | 최정익 | |
2 | 윤병구 | |
3 | 안창호 | |
4 | 윤병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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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대한인국민회관
1935년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하였던 대한인국민회 주변 지역에 Bay Bridge 건설이 진행되었고 이에 따라 대한인국민회관은 철거되었다.[1]
1938년 대한인국민회가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였고 이곳에 대한인국민회관이 준공되었다.[2]
1974년 대한인국민회관은 LA한인연합장로교회에 매각되었다.[3]
2003년 대한인국민회관을 대한인국민회 기념관으로 복원하였고 개관한 것이 현재에 이른다.[4] 대한인국민회 기념관은 일반인도 방문이 가능하다.[4]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후, 재미한족연합위원회(KNA)는 구호 활동을 통해 대한민국을 지원하는 노력을 계속하면서 한국계 미국인 공동체에서 문화, 교육, 종교 활동을 장려했다.[5] 이 단체는 1988년 해체될 때까지 미국 내 한국계 미국인 공동체에 봉사했다.[5] 이후 복원 작업을 거쳐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KNA의 구 본부 건물은 한국 독립 기념관으로 개조되어 한국계 미국인 역사와 이 단체의 활동을 대중에게 알리고 있다.[5] 1991년 로스앤젤레스 시는 한국계 미국인 역사를 형성하는 데 기여한 점을 인정받아 이 건물을 역사적 랜드마크로 선포했다.[5]
7. 상징
참조
[1]
웹사이트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in the United St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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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Asian American History and Culture: An Encyclopedia
(출판사 정보 없음)
[3]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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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encykorea.aks[...]
[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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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적
Asian American: A Reader
[6]
웹사이트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in the United St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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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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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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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웹사이트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in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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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웹인용
賀國民會成立(국민회 성립을 하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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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민보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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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국민국가 수립론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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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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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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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3]
웹인용
지방회 설립 및 폐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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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데이터베이스
[14]
웹인용
묵경지방회(墨京地方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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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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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이민과 대한인국민회의 조직과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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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데이터베이스
[16]
웹인용
在美 國民會中央總會는 會長에 崔正益을 副會長에 韓在明을 선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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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데이터베이스
1911-03-29
[17]
웹인용
露領 수청에 大韓人國民會 시베리아地方總會(회장 양주륜)를 설립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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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데이터베이스
1911-10-20
[18]
웹인용
大韓國民會 만추리아地方總會가 하르빈석도하자횡도하자목능黑河해합리만주리아삼성을 관할로 하여 하르빈에서 조직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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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데이터베이스
1911-11-13
[19]
웹인용
중앙총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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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민보
1912-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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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와 한인 교회 앞장서 광복운동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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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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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紀를 넘어서 : 海史 李元淳 自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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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총회에 온 하와이 대의원의 공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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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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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학 대 홍한식 소송사건(소송취하) (Discontinu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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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통진보, [백년전쟁] 이렇게 조작! 역사의 진실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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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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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렬 등에 대한 하와이주 기소사건(사건설명서) (instructions requested by defenda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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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할 하와이 한인의 재판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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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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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렬에 대한 하와이주 기소사건(평결) (verdi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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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연합회 공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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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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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기 대 안현경의 소송(피고측 답변 및 원고측 사건설명 요청서) (answer and demand for trial by j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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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기 대 안현경의 소송(피고측 변호인 철회안 및 평결) (verdict and judg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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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관 대 손창희 소송사건(판결문) (judg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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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끝나지 않은 역사 앞에서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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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대한인국민회(北美大韓人國民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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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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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한인교민단(─韓人僑民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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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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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대한인교민단(─大韓人僑民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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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폭탄투척사건 발생 후 韓國革命黨 영수 安昌浩 피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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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체포된 안창호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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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5) 安昌浩 조선으로 압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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島山 安昌浩出獄 上海에서 잡혀 三年間 獄生活 今日 大田發 京城一泊[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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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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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선독립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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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한민족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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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국민회 대 대조선독립단 소송사건(결정서 및 평결) (decision and dec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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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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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외한족대회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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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04-20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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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해외한족대회 결의안
http://db.history.go[...]
1941-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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