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게마르 요한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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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게마르 요한슨은 스웨덴의 프로 권투 선수로, 1959년 플로이드 패터슨을 꺾고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올랐다. 1952년 프로 데뷔 후 유럽 헤비급 챔피언을 두 차례 획득했으며, 1958년 에디 매천을 1라운드 KO로 승리하며 세계 타이틀 도전 기회를 얻었다. 1959년 양키 스타디움에서 패터슨을 3라운드 TKO로 꺾고 챔피언이 되었으나, 이듬해 재대결에서 패하여 타이틀을 잃었다. 1961년 패터슨과의 세 번째 경기에서도 패배한 후, 1962년 유럽 챔피언 자리를 되찾았지만, 1963년 은퇴했다. 은퇴 후 영화 출연, 사업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으며, 2002년 국제 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09년 사망했으며, CTE를 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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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게마르 요한슨 | |
---|---|
기본 정보 | |
![]() | |
별칭 | 잉고 토르의 망치 |
체급 | 헤비급 |
신장 | 183 cm |
리치 | 178 cm |
출생일 | 1932년 9월 22일 |
출생 이름 | 옌스 잉에마르 요한손 |
출생지 | 예테보리, 스웨덴 |
사망일 | 2009년 1월 30일 |
사망지 | 쿵스바카, 스웨덴 |
스탠스 | 오소독스 |
통계 | |
총 경기 수 | 28 |
승리 | 26 |
KO 승리 | 17 |
패배 | 2 |
올림픽 메달 | |
종목 | 남자 아마추어 복싱 |
대회 | 올림픽 |
메달 | 은메달 |
연도 및 장소 | 1952 헬싱키 |
세부 종목 | 헤비급 |
2. 프로 경력
1952년 12월 5일, 4회 KO승으로 프로 데뷔했다.[7] 1956년 9월 30일, 이탈리아의 프랑코 카비치를 밀라노에서 13라운드 KO로 꺾고 EBU 유럽 헤비급 타이틀을 획득했다.[7]
요한슨은 랭킹 상위의 헤비급 선수들을 상대로 유럽 챔피언 타이틀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헨리 쿠퍼에게는 1957년 5월 19일 5라운드 KO승을, 조 어스킨에게는 1958년 2월 21일 13라운드 TKO승을 거두었다.[7] 1958년 9월 14일, 에디 매천과의 엘리미네이션 매치에서 1라운드에 넉아웃 승리를 거두며 세계 헤비급 타이틀에 도전할 기회를 얻었다. Ullevi 축구 경기장에 모인 53,615명의 팬들 앞에서 요한슨은 매천을 세 번이나 다운시켰고, 결국 1라운드 2분 16초에 펀치 세례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그 후 요한슨은 챔피언 플로이드 패터슨과의 경기에 서명했다.
1959년 6월 26일,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경기에서 그는 5 대 1의 열세로 링에 올랐다.[8] 3라운드에서 짧고 강력한 오른손 펀치를 날려 패터슨을 다운시켰다. 그 라운드에서 패터슨을 여섯 번이나 더 다운시켰고, 결국 심판 루비 골드스타인이 경기를 중단시켰다.[8][9] 1960년 6월 20일, 플로이드 패터슨에게 5회 KO로 패배하여 타이틀을 상실했다.[13] 펀치는 요한슨의 턱에 정확히 꽂혔고, 그는 쿵 소리와 함께 캔버스에 쓰러졌으며, 등에 완전히 닿기 전에 정신을 잃었다.[13] 입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멍한 눈으로 링 조명을 쳐다보며, 왼발이 경련을 일으키는 스웨덴 선수는 카운트 아웃되었다.[13]
1961년 3월 13일, 플로이드 패터슨이 보유한 세계 헤비급 타이틀에 도전했으나, 6회 KO로 패배했다.[13] 요한슨은 패터슨과의 세 번의 경기 중 최악의 신체 상태로 보였다.[13] 뉴요커에 글을 기고한 A. J. 리블링은 그 결과가 예정된 것처럼 보였고 요한슨은 싸움을 위해 다이어트를 하지 않고 크림 치킨, 딸기 쇼트케이크, 체리 치즈케이크를 먹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는 치열했다. 요한슨은 첫 번째 라운드에서 패터슨이 그에게 달려드는 것을 포착하여 다운시켰다. 그는 우위를 점하여 또 한 번의 다운을 기록했지만, 패터슨의 왼손 훅에 걸려 넘어졌다. 경기가 진행되면서 요한슨이 기진맥진해진 것이 분명해졌다. 요한슨이 다시 한 번 다운된 후 심판이 6라운드에 경기를 빠르게 중단시키면서 패터슨이 승리했다.
1962년 6월 17일, 딕 리처드슨을 8라운드 KO로 꺾고 EBU 유럽 헤비급 타이틀을 다시 획득했다. 1963년 은퇴했다.
2. 1. 초기 경력
잉게마르 요한슨은 19세의 나이에 1952년 하계 올림픽 헤비급 경기에서 최종 금메달리스트인 에드 샌더스를 상대로 소극적인 경기 운영으로 실격을 당했다.[5] 요한슨은 자신이 샌더스를 피한 것이 아니라 상대를 지치게 하려 했다고 주장했다.[5] 그는 10일간의 짧은 훈련 캠프를 가졌고, 신참 선수들과만 훈련했으며, 코치로부터 샌더스가 먼저 공격하도록 지시를 받았다고 말했다.[5] 그의 은메달은 부진한 경기력으로 인해 보류되었다가 1982년에야 수여되었다.[5] 요한슨은 같은 해 초, 결승전에서 상대를 1라운드에 KO시키며 스웨덴 전국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여 올림픽 출전 자격을 얻었다.[6]올림픽 이후 요한슨은 6개월 동안 은둔하며 권투를 그만둘까 고민했다. 그러나 그는 링으로 돌아와 스웨덴 출판사이자 권투 프로모터인 에드윈 알키스트의 지도를 받아 프로 선수로 전향하여, 처음 21번의 프로 경기에서 승리했다. 그는 에릭 옌센을 KO시키고 판정승을 거두어 스칸디나비아 프로 타이틀을 획득했다. 부러진 손과 1년간의 군 복무로 인해 1954년 말까지 링에 오르지 못했다. 1955년 8월, 그의 12번째 프로 경기에서 요한슨은 전 유럽 헤비급 챔피언 하인 텐 호프를 1라운드에 KO시켰다.[7] 그는 1953년 스칸디나비아 헤비급 타이틀을 획득했고, 1956년 9월 30일, 이탈리아의 프랑코 카비치를 밀라노에서 13라운드 KO로 꺾고 EBU 유럽 헤비급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7]
요한슨은 랭킹 상위의 헤비급 선수들을 상대로 유럽 챔피언 타이틀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헨리 쿠퍼에게는 1957년 5월 19일 5라운드 KO승을, 조 어스킨에게는 1958년 2월 21일 13라운드 TKO승을 거두었다.[7]
2. 2. 세계 헤비급 챔피언 등극
요한슨은 1958년 9월 14일, 상위 랭커 에디 매천과의 엘리미네이션 매치에서 1라운드에 넉아웃 승리를 거두며 세계 헤비급 타이틀에 도전할 기회를 얻었다. Ullevi 축구 경기장에 모인 53,615명의 팬들 앞에서 요한슨은 매천을 세 번이나 다운시켰고, 결국 1라운드 2분 16초에 펀치 세례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그 후 요한슨은 챔피언 플로이드 패터슨과의 경기에 서명했다.요한슨은 경기를 준비하면서 뉴욕에서 다채로운 인물이었다. 패터슨과 다른 선수들이 선호하는 엄격한 훈련 방식을 피하고, 요한슨은 캣스킬의 Grossingers 리조트에서 훈련했다. 그는 특히 열심히 훈련하는 것 같지 않았고, 매력적인 여자친구인 엘레인 슬론과 함께 밤늦게까지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다.
1959년 6월 26일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경기에서 그는 5 대 1의 열세로 링에 올랐다.[8] 3라운드에서 요한슨은 짧고 강력한 오른손 펀치를 날려 패터슨을 다운시켰다. 요한슨은 이 기회를 살려 그 라운드에서 패터슨을 여섯 번이나 더 다운시켰고, 결국 심판 루비 골드스타인이 경기를 중단시켰다.[8][9] 요한슨은 여자친구이자 미래의 아내인 비르기트 룬드그렌과 함께 승리를 자축했고, 다음 날 뉴욕 신문의 헤드라인은 "잉고 - 빙고!"였다.[10] 요한슨은 스웨덴으로 돌아와 헬리콥터를 타고 그의 고향인 예테보리의 메인 축구 경기장에 착륙했고, 20,000명의 사람들이 그를 환호했다.[15] 그는 ''Sports Illustrated''와 ''Life'' 잡지 표지에 등장했다.[9]
요한슨은 화려한 챔피언이었으며, "스윙잉 식스티즈"의 선구자였다. 한 출판물은 요한슨을 "복싱의 케리 그랜트"라고 불렀고, 1960년에는 앨런 래드와 시드니 포이티어와 함께 해병으로 영화 ''All the Young Men''에 출연했다. 미국이나 스웨덴 어디를 가든 그는 아름다운 여성을 옆에 두고 파파라치의 사진 세례를 받았다.[11]
그 시점에서, 링사이드에 앉아 요한슨이 패터슨을 넉아웃시키는 것을 지켜본 은퇴한 헤비급 챔피언 로키 마르시아노는 요한슨과의 챔피언십 경기를 위해 컴백을 고려했다. 그는 조용히 훈련 캠프에 들어갔지만, 이전의 컨디션을 회복할 수 없어 타이틀전을 치르기에는 너무 늙었다고 느껴 포기했다.[12]
2. 3. 패터슨과의 재대결
요한슨은 이집트를 방문한 후 1960년 4월에 여자친구 비르기트에게 청혼했다. 그 후 플로이드 패터슨을 상대로 타이틀 방어에 집중했다.[13] 두 사람은 1960년 6월 20일에 재대결 계약을 체결했다. 패터슨은 5라운드에서 레프트 훅으로 요한슨을 KO시키며 세계 무제한급 챔피언 타이틀을 되찾은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13] 펀치는 요한슨의 턱에 정확히 꽂혔고, 그는 쿵 소리와 함께 캔버스에 쓰러졌으며, 등에 완전히 닿기 전에 정신을 잃었다.[13] 입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멍한 눈으로 링 조명을 쳐다보며, 왼발이 경련을 일으키는 스웨덴 선수는 카운트 아웃되었다.[13] 카운트 후, 패터슨은 움직임이 없는 상대를 안아주며 요한슨에 대한 염려를 드러냈고, 두 번째 재대결을 약속했다.[13] 요한슨은 링으로 가져온 의자에 앉혀지기 전까지 5분 동안 캔버스에 엎드려 있었다.[13] 그는 KO 후 15분 동안 여전히 정신이 혼미했고 비틀거렸으며, 링 밖으로 나가는 것을 도와야 했다.[13]패터슨과 요한슨은 1961년 3월 13일에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13] 요한슨은 패터슨과의 세 번의 경기 중 최악의 신체 상태로 보였다.[13] 뉴요커에 글을 기고한 A. J. 리블링은 그 결과가 예정된 것처럼 보였고 요한슨은 싸움을 위해 다이어트를 하지 않고 크림 치킨, 딸기 쇼트케이크, 체리 치즈케이크를 먹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는 치열했다. 요한슨은 첫 번째 라운드에서 패터슨이 그에게 달려드는 것을 포착하여 다운시켰다. 그는 우위를 점하여 또 한 번의 다운을 기록했지만, 패터슨의 왼손 훅에 걸려 넘어졌다. 경기가 진행되면서 요한슨이 기진맥진해진 것이 분명해졌다. 요한슨이 다시 한 번 다운된 후 심판이 6라운드에 경기를 빠르게 중단시키면서 패터슨이 승리했다.
2. 4. 이후 경력 및 은퇴
29세였던 요한슨은 유럽으로 돌아왔다. 그는 1962년 6월 17일 딕 리처드슨을 8라운드 KO로 꺾고 유럽 챔피언 자리를 되찾았다. 이 무렵 소니 리스턴이 패터슨에게서 헤비급 챔피언 자리를 빼앗았고, 요한슨과 리스턴의 대결이 추진되었다.그러나 요한슨은 1963년 4월 21일, 논타이틀 12라운드 경기에서 저니맨 헤비급 선수인 브라이언 런던과 맞붙었다. 요한슨은 대부분의 라운드에서 우세를 보였지만, 7라운드에서 요한슨의 짧은 오른손 펀치로 런던이 휘청거린 것을 제외하고는 심각한 오른손 펀치를 거의 날리지 않았다. 12라운드, 경기 종료 4초를 남겨두고 런던이 요한슨에게 강력한 오른손 펀치를 날려 요한슨은 뒤로 넘어졌다. 요한슨은 4 카운트에서 일어났고, 바로 벨이 울려 경기가 종료되었다. 요한슨은 정신이 몽롱했지만, 판정승을 거두었다. UPI는 요한슨의 11-1 판정승으로 경기를 채점했다.
다음 날, 스톡홀름 신문 1면에는 밧줄을 붙잡고 어지러워하는 그의 사진과 함께 "일어나, 잉고 - 당신이 이겼어!"라는 제목이 실렸다. 이것을 본 그는 유럽 복싱 연합에 편지를 써서 타이틀을 반납하고 30세의 나이로 복싱에서 은퇴했다.
3. 은퇴 이후
잉게마르 요한슨은 은퇴 이후 스웨덴에서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한국 전쟁 영화 ''젊은이들''(1960)에서 해병으로 출연했다.[14] 1960년대에는 소니 리스턴을 포함하여 복싱 카드를 공동 프로모션했다. 1966년 4월 22일에는 유럽 헤비급 챔피언 카를 밀덴베르거와 5라운드 전시 경기를 치르기도 했다.[14] 그는 어선과 "잉고"라는 바를 소유하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플로리다주 폼파노 비치에 거주하며 호텔을 소유했고, 1980년대 중반까지 뉴욕 시티 마라톤[14]과 보스턴 마라톤을 포함하여 전 세계에서 마라톤을 뛰었다. 1985년에는 스톡홀름 마라톤을 완주했다.
1990년대 동안 요한슨은 플로이드 패터슨과 복싱 컨벤션에 참석하여 복싱 기념품에 사인을 했다. 그들은 알츠하이머병이 발병하여 둘 다 무력해질 때까지 계속 친구로 지냈다.[14] 현재는 그가 만성 외상성 뇌병증(CTE)을 앓았을 것으로 여겨진다.[14] 1990년대에 요한슨의 스웨덴 사업은 그의 펀치력을 기리기 위해 "해머"라는 스포츠 의류와 가벼운 라거 맥주를 포함했다.
2000년, 스웨덴 스포츠 아카데미는 요한슨을 비외른 보리와 잉에마르 스텐마르크에 이어 20세기의 스웨덴 세 번째 최고 운동선수로 선정했다. 2002년에는 국제 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알츠하이머병과 치매를 앓아온 그는 쿵스바카의 요양원에서 살았다.[19] 그는 2009년 1월 30일 폐렴 합병증으로 사망했다.[15][16] 사망 당시 그는 76세로 생존한 최고령 헤비급 챔피언이었다.[15][16] 요한슨은 세 번 결혼했고[15] 다섯 자녀를 두고 세상을 떠났다.[17]
2011년 1월, 1959년 조니 라이온의 노래 "잉게마르 요한슨"은 1959년 패터슨과의 경기를 연대순으로 기록한 곡으로, 컴필레이션 앨범 ''From The Vault: The Coed Records Lost Master Tapes, Volume 1''에 재발매되었다.[18]
4. 유산
잉게마르 요한슨은 플로이드 패터슨을 꺾고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올랐지만, 헤비급 역사에서 그의 위상은 높지 않다. 매우 뛰어난 오른손을 가진 평범한 선수로 평가받는 그는, 역사상 가장 약한 헤비급 챔피언 중 한 명으로 여겨지는 패터슨을 상대로 타이틀을 획득하는 행운을 얻었다. 당시 유럽 헤비급 선수가 미국에서 미국 챔피언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기에, 패터슨은 요한슨을 과소평가했을 가능성이 높다.
요한슨의 세계 타이틀 획득은 유럽 복싱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는 역사상 네 번째이자, 프리모 카르네라 이후 25년 만에 헤비급 챔피언이 된 유럽 선수였다. 1989년 프란체스코 다미아니가 초대 WBO 헤비급 챔피언이 되기 전까지 마지막 유럽 헤비급 챔피언이었으며, 레녹스 루이스가 1992년 WBC 타이틀을 획득하기 전까지 33년간 유럽은 헤비급 챔피언을 배출하지 못했다. 1999년 루이스가 에반더 홀리필드를 꺾고 통합 챔피언이 되기 전까지 요한슨은 40년 전 유럽 선수로서 유일한 통합 헤비급 챔피언이었다. 또한 요한슨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게리 코에체가 1983년 WBA 타이틀을 획득하기 전까지 헤비급 타이틀을 보유한 마지막 비(非) 미국인이었다.
타이틀 방어에는 실패했지만, 요한슨은 1950년대와 1960년대 두 시대에 걸쳐 헤비급 챔피언이었다. 그는 에자드 찰스 이후 챔피언이 되기 위해 이겼던 선수에게 타이틀을 잃은 최초의 헤비급 챔피언이었다. 이는 1978년 레온 스핑크스가 무하마드 알리에게 타이틀을 돌려주기 전까지 반복되지 않았다.
요한슨은 패터슨에게 타이틀을 빼앗긴 선수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패터슨과의 경기, 그리고 세 번째 대결에서의 패배를 제외하면 요한슨은 프로 선수로서 맞붙은 모든 선수에게 승리하고 은퇴한 네 명의 헤비급 챔피언 중 한 명이다. 다른 세 명은 로키 마르시아노, 진 터니, 레녹스 루이스이다.
패터슨을 상대로 한 승리 외에도, 1958년 무패의 미국 선수 에디 매켄을 1라운드 KO로 이긴 것은 그의 강력한 오른손을 보여주는 주목할 만한 승리였다. 요한슨은 또한 유럽 권투 연맹 헤비급 타이틀을 두 차례 획득했으며, 헨리 쿠퍼, 딕 리차드슨, 조 어스킨 등을 상대로 KO승을 거두었다.
5. 프로 복싱 전적
결과 | 전적 | 상대 | 타입 | 라운드, 시간 | 날짜 | 장소 | 비고 | |
---|---|---|---|---|---|---|---|---|
28 | 승 | 26–2 | 브라이언 런던 | 판정승 | 12 | 1963년 4월 21일 | ||
27 | 승 | 25–2 | 딕 리차드슨 | KO | 8 (15), | 1962년 6월 17일 | ||
26 | 승 | 24–2 | 빔 스노크 | KO | 5 (10), | 1962년 4월 15일 | ||
25 | 승 | 23–2 | 조 바이그레이브스 | TKO | 7 (12), | 1962년 2월 9일 | ||
24 | 패 | 22–2 | 플로이드 패터슨 | KO | 6 (15), | 1961년 3월 13일 | ||
23 | 패 | 22–1 | 플로이드 패터슨 | KO | 5 (15), | 1960년 6월 20일 | ||
22 | 승 | 22–0 | 플로이드 패터슨 | TKO | 3 (15), | 1959년 6월 26일 | ||
21 | 승 | 21–0 | 에디 매첸 | KO | 1 (12), | 1958년 9월 14일 | ||
20 | 승 | 20–0 | 하인츠 노이하우스 | TKO | 4 (12), | 1958년 7월 13일 | ||
19 | 승 | 19–0 | 조 에르스킨 | TKO | 13 (15) | 1958년 2월 21일 | ||
18 | 승 | 18–0 | 아치 맥브라이드 | 판정승 | 10 | 1957년 12월 13일 | ||
17 | 승 | 17–0 | 헨리 쿠퍼 | KO | 5 (15), | 1957년 5월 19일 | ||
16 | 승 | 16–0 | 피터 베이츠 | KO | 2 (10), | 1956년 12월 28일 | ||
15 | 승 | 15–0 | 프랑코 카비치 | KO | 13 (15), | 1956년 9월 30일 | ||
14 | 승 | 14–0 | 한스 프리드리히 | 판정승 | 10 | 1956년 4월 15일 | ||
13 | 승 | 13–0 | 조 바이그레이브스 | 판정승 | 8 | 1956년 2월 24일 | ||
12 | 승 | 12–0 | 하인 텐 호프 | KO | 1 (8), | 1955년 8월 28일 | ||
11 | 승 | 11–0 | 귄터 뉘른베르크 | KO | 7 (8) | 1955년 6월 12일 | ||
10 | 승 | 10–0 | 우베르 바칠리에리 | 8 | 1955년 4월 3일 | |||
9 | 승 | 9–0 | 알도 펠레그리니 | 5 (8) | 1955년 3월 4일 | |||
8 | 승 | 8–0 | 쿠르트 시글 | TKO | 5 (8), | 1955년 2월 13일 | ||
7 | 승 | 7–0 | 안셀 아담스 | 판정승 | 8 | 1955년 1월 6일 | ||
6 | 승 | 6–0 | 베르너 비강트 | 5 (8), | 1954년 11월 5일 | |||
5 | 승 | 5–0 | 레이먼드 데글리노첸티 | KO | 2 (6) | 1953년 12월 3일 | ||
4 | 승 | 4–0 | 에릭 옌센 | 판정승 | 6 | 1953년 3월 12일 | ||
3 | 승 | 3–0 | 로이드 바넷 | 8 | 1953년 3월 6일 | |||
2 | 승 | 2–0 | 에밀 벤츠 | KO | 2 (6), | 1953년 2월 6일 | ||
1 | 승 | 1–0 | 로버트 마송 | 4 (8), | 1952년 12월 5일 |
잉게마르 요한슨의 프로 복싱 전적은 28전 26승(17KO) 2패이다. 아마추어 복싱 전적은 71전 60승 11패이다.
6. 전시 복싱 전적
wikitable
결과 | 전적 | 상대 | 타입 | 라운드, 시간 | 날짜 | 장소 | 비고 | |
---|---|---|---|---|---|---|---|---|
1 | #넘겨주기 | 0–0 | 무하마드 알리 | #넘겨주기 | 3 | 1961년 2월 6일 |
참조
[1]
백과사전
Ingemar Johansson
http://www.britannic[...]
2015-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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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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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9
[3]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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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forvo.com/wo[...]
[4]
간행물
Ingemar Johansson 1932–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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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orts Illustrated
2009-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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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Ingemar Johansson: Boxer who beat Floyd Patterson to win the world heavyweight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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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ndependent
2009-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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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2015-06-24
[14]
뉴스
JOHANSSON FINDING A NEW CHALLENGE
https://www.nytimes.[...]
New York Times
1981-10-21
[15]
뉴스
Ingemar Johansson, Who Beat Patterson for Heavyweight Title, Dies at 76
https://www.nytimes.[...]
New York Times
2009-01-31
[16]
웹사이트
Ingemar Johansson Dies
https://web.archive.[...]
2015-06-24
[17]
뉴스
Boxing legend Ingemar Johansson dead
https://www.cbc.ca/s[...]
CBC News
2015-06-24
[18]
간행물
Lost and Found
Goldmine
2011-03
[19]
뉴스
北欧人ヘビー級元王者のヨハンソン氏死去
https://megalodon.jp[...]
日刊スポーツ
2009-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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