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이드 패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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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플로이드 패터슨은 1935년 노스캐롤라이나에서 태어난 미국의 권투 선수로, 1952년 헬싱키 올림픽 미들급 금메달리스트이다. 프로로 전향하여 헤비급 챔피언에 올랐으며, 21세의 나이로 최연소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고, 역사상 최초로 헤비급 타이틀을 탈환한 선수이자, 소니 리스턴에게 패배하기 전까지는 예민하고 호감 가는 챔피언으로 여겨졌다. 잉게마르 요한손과의 세 차례의 경기, 소니 리스턴과의 두 차례의 경기, 무하마드 알리와의 경기를 포함하여 여러 차례의 중요한 경기를 치렀다. 은퇴 후에는 알츠하이머병을 앓았으며, 2006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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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이드 패터슨 | |
---|---|
기본 정보 | |
![]() | |
별칭 | 복싱의 신사 |
체급 | 라이트 헤비급 헤비급 |
신장 | 183cm |
리치 | 180cm |
출생일 | 1935년 1월 4일 |
출생지 |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웨이코 |
사망일 | 2006년 5월 11일 |
사망지 | 미국 뉴욕주 뉴팔츠 |
스타일 | 오소독스 |
전적 | |
총 경기 수 | 64 |
승리 | 55 |
KO 승리 | 40 |
패배 | 8 |
무승부 | 1 |
아마추어 경력 | |
올림픽 메달 | 올림픽 게임 금메달 (1952 헬싱키, 미들급) |
2. 유년 시절 및 아마추어 경력
플로이드 패터슨은 1935년 1월 4일 노스캐롤라이나주 웨이코의 가난한 가정에서 11남매 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7] 어려운 가정 환경으로 인해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무단 결석과 사소한 절도 등의 문제로 여러 차례 법정에 출두했다.[8][9] 10세 때 윌트윅 소년 학교(개혁 학교)에 보내졌으며, 이는 그의 삶의 전환점이 되었다.[9]
패터슨은 프로로 전향하여 꾸준히 랭킹을 올렸다. 초기 유일한 패배는 1954년 6월 7일 뉴욕 브루클린의 이스턴 파크웨이 아레나에서 전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 조이 맥심에게 8라운드 판정패를 당한 것이었다.
14세에 복싱을 시작하여 베드퍼드-스타이베선트 복싱 협회 체육관에서 훈련했다.[11]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미들급 금메달을 획득했으며, 전미 아마추어 미들급 챔피언십과 뉴욕 골든 글러브 미들급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12] 커스 다마토의 눈에 띄어 그래머시 체육관에서 훈련을 받았다. 그의 아마추어 전적은 40승(37KO) 4패였다. 스포츠 기자들은 패터슨의 스타일을 피커부 자세라고 불렀다.
3. 프로 경력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후 프로로 전향한 플로이드 패터슨은 선수 경력 초반에는 라이트헤비급으로 활동했지만, 매니저 커스 다마토와 함께 헤비급 챔피언을 목표로 했다.[14] 록키 마르시아노가 1956년 4월 27일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서 은퇴하자, 패터슨은 국제 복싱 클럽이 주최한 챔피언 결정 토너먼트에 참가했다.[15] 토미 "허리케인" 잭슨을 꺾고 올라간 패터슨은 1956년 11월 30일, 아치 무어와 공석이던 세계 헤비급 챔피언 자리를 놓고 대결을 펼쳤다.[15] 그는 5라운드 KO승을 거두며 21세 10개월 3주 5일의 나이로 최연소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으며,[15] 이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으로는 최초의 프로 헤비급 챔피언 등극이었다.
플로이드 패터슨은 변방의 도전자들과의 방어전을 치른 후, 1959년 6월 26일 스웨덴의 잉게마르 요한손과 첫 대결을 가졌다.[16] 요한손은 패터슨을 일곱 번이나 다운시키며 3라운드 TKO승을 거두었고, 스웨덴 최초의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다. 이 경기는 링 매거진 업셋 오브 더 이어에 선정되었다.
1960년 6월 20일, 패터슨은 재대결에서 5라운드 KO승으로 요한손을 꺾고, 역사상 최초로 헤비급 타이틀을 탈환한 선수가 되었다.[17] 이 경기는 링 매거진 파이트 오브 더 이어에 선정되었다.
1961년 3월 13일, 세 번째 대결에서 패터슨은 요한손을 6라운드 KO로 꺾고 타이틀을 방어했다.[17] 이 경기에서 패터슨은 두 번, 요한손은 한 번 다운되었다.
경기를 앞두고 리스턴이 도박 배당률에서 우위를 점했지만,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는 패터슨이 15라운드에서 이길 것이라고 예측했다.[20] 짐 브래독, 저지 조 왈콧, 에자드 찰스, 로키 마르시아노 및 잉게마르 요한손은 패터슨의 승리를 점쳤다. 이 경기는 또한 여러 사회적 의미를 담고 있었는데, 리스턴의 조직과의 연계는 잘 알려져 있었고, 전미 유색 인종 발전 협회(NAACP)는 리스턴이 세계 챔피언으로서 대중에게 노출되는 것을 우려하여 패터슨에게 리스턴과의 경기를 하지 말 것을 권유했다.[20] 패터슨은 존 F. 케네디 역시 그가 리스턴과 싸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21]
데이비드 렘닉은 패터슨을 "예민한" 챔피언이라고 묘사하며, 그는 경기에 임하기 전 자신의 두려움과 감정에 대해 매우 솔직하게 이야기했는데, 이는 복싱계에서 새로운 모습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는 매우 예의 바르고, 품위 있으며, 호감 가는 챔피언으로 여겨졌으며, 이는 조직과의 연계와 범죄 이력으로 인해 미디어가 쉽게 악당으로 묘사했던 리스턴과는 대조적이었다. 미디어에서 패터슨은 선한 인물로, 리스턴은 악당으로 묘사되었다.[22]
패터슨은 1962년 9월 25일 시카고에서 열린 경기에서 18,894명의 관중 앞에서 1라운드 KO로 리스턴에게 타이틀을 잃었다. 링에서 리스턴의 덩치와 힘은 패터슨의 교활함과 민첩함을 압도했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작가 길버트 로긴에 따르면, 패터슨은 충분히 펀치를 날리지 않았고, 자주 리스턴과 클린치를 시도했다.[23] 리스턴은 패터슨을 바디 샷으로 두들긴 다음 짧게 끊어 머리에 두 번의 더블 훅을 연결했다. 당시 그 결과는 복싱 역사상 세 번째로 빠른 KO였다.[23] KO를 당한 후, 패터슨은 시카고 코미스키 파크를 떠나 뉴욕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선글라스와 가짜 수염을 착용했다. 경기 후, 경기가 더 수익성 있는 재경기를 위해 조작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었다.[24] 패배에도 불구하고 패터슨은 17년에 걸쳐 지급되는 200만 달러를 받았다.[25]
재경기는 1963년 4월로 예정되었지만, 리스턴이 골프 클럽을 휘두르다 무릎 부상을 입어 경기가 3개월 연기되어 7월 22일에 열렸다. 이는 두 선수 모두 143만 4천 달러를 받은 최초의 백만 달러 규모의 대전이었다.[26] 그날 밤 라스베이거스에서 패터슨은 헤비급 타이틀을 세 번이나 획득한 최초의 복서가 되려 했지만, 리스턴은 다시 한 번 1라운드에서 그를 KO시켰다. 패터슨은 첫 번째 경기보다 4초 더 오래 버텼다. 리스턴과의 경기는 패터슨이 20년간의 프로 경력에서 실제로 카운트아웃된 유일한 경기였다.
패터슨은 무하마드 알리가 보유한 타이틀의 1위 도전자가 되었다. 1965년 11월 22일, 라스베이거스에서 세계 헤비급 타이틀을 세 번이나 획득한 최초의 선수가 되기 위한 또 다른 시도로 경기에 임했지만, 첫 라운드 이후 악화된 부상당한 천장관절로 인해 기동성이 크게 감소, 알리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경기에서 12라운드 TKO패를 당했다.[28][29][31][32] 알리는 패터슨이 자신을 무하마드 알리라고 부르기를 거부하고 흑인 무슬림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에 "엉클 톰"이라고 불렀다.[30] 당시 알리는 네이션 오브 이슬람 입교를 공표하며 미국 사회를 격렬하게 비판했고, 패터슨은 알리를 이슬람교 개종 후의 이름인 무하마드 알리로 부르는 것을 거부하고 옛 이름인 카시우스 클레이로 계속 불렀다. 경기 전 패터슨은 "이 경기는 흑인 이슬람교도에게서 타이틀을 되찾기 위한 성전"이라며 "가톨릭 신자로서 나는 애국적인 의무로서 클레이와 싸우고 있다. 나는 미국에 왕좌를 돌려줄 것이다"라고 말했다.[30]
1972년 9월 20일, NABF 북미 헤비급 챔피언이 된 무하마드 알리와의 재대결이 이루어졌다.[34] 알리의 펀치로 패터슨의 왼쪽 눈이 부어올랐고, 7라운드 인터벌 중 의사의 검진을 받은 후, 8라운드 시작을 레퍼리가 허락하지 않아 패터슨은 7라운드 TKO패를 당했다.[34] 패터슨은 은퇴 성명을 발표하지 않았지만, 이것이 현역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패터슨은 에디 매켄과 조지 추발로를 상대로 승리하며 재기했다. 특히, 조지 추발로와의 경기는 1965년 ''링 매거진'' 올해의 경기로 선정되었다.[27] 1966년에는 영국으로 건너가 헨리 쿠퍼를 4라운드 KO로 이겼다.
세계 권투 협회(WBA)는 무하마드 알리가 징병 거부로 타이틀을 박탈당하자 8인 토너먼트를 개최하여 후계자를 결정하고자 했다. 패터슨은 1967년 제리 쿼리와 무승부를 기록했고, 4개월 후 재대결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판정패를 당했다. 1968년에는 지미 엘리스와의 WBA 세계 헤비급 타이틀전에서 엘리스의 코를 부러뜨리고 다운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석연찮은 판정으로 패배했다.[34]
3. 1. 초기 경력
패터슨은 프로로 전향하여 꾸준히 랭킹을 올렸다. 초기 유일한 패배는 1954년 6월 7일 뉴욕 브루클린의 이스턴 파크웨이 아레나에서 전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 조이 맥심에게 8라운드 판정패를 당한 것이었다.
3. 2. 세계 헤비급 챔피언 등극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후 프로로 전향한 플로이드 패터슨은 선수 경력 초반에는 라이트헤비급으로 활동했지만, 매니저 커스 다마토와 함께 헤비급 챔피언을 목표로 했다.[14] 록키 마르시아노가 1956년 4월 27일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서 은퇴하자, 패터슨은 국제 복싱 클럽이 주최한 챔피언 결정 토너먼트에 참가했다.[15] 토미 "허리케인" 잭슨을 꺾고 올라간 패터슨은 1956년 11월 30일, 아치 무어와 공석이던 세계 헤비급 챔피언 자리를 놓고 대결을 펼쳤다.[15] 그는 5라운드 KO승을 거두며 21세 10개월 3주 5일의 나이로 최연소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으며,[15] 이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으로는 최초의 프로 헤비급 챔피언 등극이었다.
3. 3. 잉게마르 요한손과의 대결
플로이드 패터슨은 변방의 도전자들과의 방어전을 치른 후, 1959년 6월 26일 스웨덴의 잉게마르 요한손과 첫 대결을 가졌다.[16] 요한손은 패터슨을 일곱 번이나 다운시키며 3라운드 TKO승을 거두었고, 스웨덴 최초의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다. 이 경기는 링 매거진 업셋 오브 더 이어에 선정되었다.
1960년 6월 20일, 패터슨은 재대결에서 5라운드 KO승으로 요한손을 꺾고, 역사상 최초로 헤비급 타이틀을 탈환한 선수가 되었다.[17] 이 경기는 링 매거진 파이트 오브 더 이어에 선정되었다.
1961년 3월 13일, 세 번째 대결에서 패터슨은 요한손을 6라운드 KO로 꺾고 타이틀을 방어했다.[17] 이 경기에서 패터슨은 두 번, 요한손은 한 번 다운되었다.
3. 4. 소니 리스턴과의 대결
경기를 앞두고 리스턴이 도박 배당률에서 우위를 점했지만,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는 패터슨이 15라운드에서 이길 것이라고 예측했다.[20] 짐 브래독, 저지 조 왈콧, 에자드 찰스, 로키 마르시아노 및 잉게마르 요한손은 패터슨의 승리를 점쳤다. 이 경기는 또한 여러 사회적 의미를 담고 있었는데, 리스턴의 조직과의 연계는 잘 알려져 있었고, 전미 유색 인종 발전 협회(NAACP)는 리스턴이 세계 챔피언으로서 대중에게 노출되는 것을 우려하여 패터슨에게 리스턴과의 경기를 하지 말 것을 권유했다.[20] 패터슨은 존 F. 케네디 역시 그가 리스턴과 싸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21]
데이비드 렘닉은 패터슨을 "예민한" 챔피언이라고 묘사하며, 그는 경기에 임하기 전 자신의 두려움과 감정에 대해 매우 솔직하게 이야기했는데, 이는 복싱계에서 새로운 모습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는 매우 예의 바르고, 품위 있으며, 호감 가는 챔피언으로 여겨졌으며, 이는 조직과의 연계와 범죄 이력으로 인해 미디어가 쉽게 악당으로 묘사했던 리스턴과는 대조적이었다. 미디어에서 패터슨은 선한 인물로, 리스턴은 악당으로 묘사되었다.[22]
패터슨은 1962년 9월 25일 시카고에서 열린 경기에서 18,894명의 관중 앞에서 1라운드 KO로 리스턴에게 타이틀을 잃었다. 링에서 리스턴의 덩치와 힘은 패터슨의 교활함과 민첩함을 압도했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작가 길버트 로긴에 따르면, 패터슨은 충분히 펀치를 날리지 않았고, 자주 리스턴과 클린치를 시도했다.[23] 리스턴은 패터슨을 바디 샷으로 두들긴 다음 짧게 끊어 머리에 두 번의 더블 훅을 연결했다. 당시 그 결과는 복싱 역사상 세 번째로 빠른 KO였다.[23] KO를 당한 후, 패터슨은 시카고 코미스키 파크를 떠나 뉴욕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선글라스와 가짜 수염을 착용했다. 경기 후, 경기가 더 수익성 있는 재경기를 위해 조작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었다.[24] 패배에도 불구하고 패터슨은 17년에 걸쳐 지급되는 200만 달러를 받았다.[25]
재경기는 1963년 4월로 예정되었지만, 리스턴이 골프 클럽을 휘두르다 무릎 부상을 입어 경기가 3개월 연기되어 7월 22일에 열렸다. 이는 두 선수 모두 143만 4천 달러를 받은 최초의 백만 달러 규모의 대전이었다.[26] 그날 밤 라스베이거스에서 패터슨은 헤비급 타이틀을 세 번이나 획득한 최초의 복서가 되려 했지만, 리스턴은 다시 한 번 1라운드에서 그를 KO시켰다. 패터슨은 첫 번째 경기보다 4초 더 오래 버텼다. 리스턴과의 경기는 패터슨이 20년간의 프로 경력에서 실제로 카운트아웃된 유일한 경기였다.
3. 5. 무하마드 알리와의 대결
패터슨은 무하마드 알리가 보유한 타이틀의 1위 도전자가 되었다. 1965년 11월 22일, 라스베이거스에서 세계 헤비급 타이틀을 세 번이나 획득한 최초의 선수가 되기 위한 또 다른 시도로 경기에 임했지만, 첫 라운드 이후 악화된 부상당한 천장관절로 인해 기동성이 크게 감소, 알리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경기에서 12라운드 TKO패를 당했다.[28][29][31][32] 알리는 패터슨이 자신을 무하마드 알리라고 부르기를 거부하고 흑인 무슬림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에 "엉클 톰"이라고 불렀다.[30] 당시 알리는 네이션 오브 이슬람 입교를 공표하며 미국 사회를 격렬하게 비판했고, 패터슨은 알리를 이슬람교 개종 후의 이름인 무하마드 알리로 부르는 것을 거부하고 옛 이름인 카시우스 클레이로 계속 불렀다. 경기 전 패터슨은 "이 경기는 흑인 이슬람교도에게서 타이틀을 되찾기 위한 성전"이라며 "가톨릭 신자로서 나는 애국적인 의무로서 클레이와 싸우고 있다. 나는 미국에 왕좌를 돌려줄 것이다"라고 말했다.[30]
1972년 9월 20일, NABF 북미 헤비급 챔피언이 된 무하마드 알리와의 재대결이 이루어졌다.[34] 알리의 펀치로 패터슨의 왼쪽 눈이 부어올랐고, 7라운드 인터벌 중 의사의 검진을 받은 후, 8라운드 시작을 레퍼리가 허락하지 않아 패터슨은 7라운드 TKO패를 당했다.[34] 패터슨은 은퇴 성명을 발표하지 않았지만, 이것이 현역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3. 6. 기타 경기
패터슨은 에디 매켄과 조지 추발로를 상대로 승리하며 재기했다. 특히, 조지 추발로와의 경기는 1965년 ''링 매거진'' 올해의 경기로 선정되었다.[27] 1966년에는 영국으로 건너가 헨리 쿠퍼를 4라운드 KO로 이겼다.
세계 권투 협회(WBA)는 무하마드 알리가 징병 거부로 타이틀을 박탈당하자 8인 토너먼트를 개최하여 후계자를 결정하고자 했다. 패터슨은 1967년 제리 쿼리와 무승부를 기록했고, 4개월 후 재대결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판정패를 당했다. 1968년에는 지미 엘리스와의 WBA 세계 헤비급 타이틀전에서 엘리스의 코를 부러뜨리고 다운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석연찮은 판정으로 패배했다.[34]
4. 은퇴 이후
플로이드 패터슨은 은퇴 후 잉게마르 요한손과 좋은 친구 관계를 유지하며 매년 서로를 방문했다.[35] 뉴욕주 체육 위원회 위원장을 두 번 역임했다.[35] 1991년 국제 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36]
뉴욕주 뉴펄츠에서 두 번째 아내 재닛 시퀘스트와 함께 살았으며, 제니퍼와 자닌이라는 두 딸을 두었다.[37][38] 1982년과 1983년에는 잉게마르 요한손과 함께 스톡홀름 마라톤에 참가했으며,[39] 1983년 뉴욕 시티 마라톤을 3시간 35분 27초에 완주했다.[40]
그의 양아들 트레이시 해리스 패터슨은 1990년대 세계 챔피언 복서였으며, 플로이드는 그의 경력 일부를 훈련시켰다.[41] 이들은 복싱에서 세계 타이틀을 획득한 최초의 부자(父子)이다.[41] 플로이드는 또한 도노반 "레이저" 러독을 훈련시켜 그렉 페이지, 필 잭슨, 레녹스 루이스와의 시합을 준비시켰다.[42]
뉴펄츠 고등학교의 미식축구 경기장은 1985년에 "플로이드 패터슨 필드"로 명명되었다.[43]
말년에는 현역 시절의 데미지로 인해 알츠하이머병을 앓았고, 아내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의 기억 장애로 인해 체육 위원회를 사임했다.[51]
5. 사망
플로이드 패터슨은 만년에 알츠하이머병과 전립선암으로 투병했다.[44] 많은 격투 및 접촉 스포츠 참가자들과 관련된 만성 외상성 뇌병증과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2006년 5월 11일, 뉴욕주 뉴펄츠 자택에서 71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44] 뉴욕주 얼스터 군 뉴펄츠 농촌 묘지에 안장되었다.[45][46]
은퇴 후에는 뉴욕 주 체육 위원회의 커미셔너를 맡았지만, 현역 시절의 데미지로 인해 알츠하이머병을 앓게 되었고, 아내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의 기억 장애가 원인이 되어 체육 위원회를 사임했다[51]。
6. 어록
- "승리에서는 무엇이든 하기가 쉽다. 패배 속에서 한 인간은 자신을 드러낸다."[47]
- "사람들은 내가 가장 많이 다운된 복서라고 말했지만, 나는 또한 가장 많이 일어섰다."[48]
- "수백만 달러를 가지면, 수백만의 친구가 생긴다."[49]
- 복싱에 관하여: "그것은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같다. 그녀는 불성실할 수 있고, 못될 수 있으며, 잔인할 수 있지만, 상관없다. 당신이 그녀를 사랑한다면, 그녀가 당신에게 온갖 해를 끼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그녀를 원한다. 복싱도 나와 같다. 그것은 나에게 온갖 해를 끼칠 수 있지만, 나는 그것을 사랑한다."[50]
7. 프로 복싱 전적
플로이드 패터슨은 프로 복싱에서 통산 64전 55승(40KO) 8패 1무의 전적을 기록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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