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이데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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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이데코는 빠른 템포와 싱코페이션 리듬이 특징인 음악 장르로, 아코디언과 워시보드를 중심으로 블루스, R&B, 카주 음악 등의 요소를 포함한다. "자이데코"라는 용어는 프랑스어 표현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1960년대 맥 코맥에 의해 표준 철자로 굳어졌다. 19세기 루이지애나 크리올 공동체에서 시작되어, 20세기 초 아메데 아르도앵에 의해 자이데코 음악이 녹음되었고, 클리프턴 셰니어는 "자이데코의 왕"으로 불리며 이 장르를 널리 알렸다. 1980년대 록킨 시드니의 "My Toot Toot" 히트 이후 부흥기를 맞았으며, 1990년대 보 조크와 같은 아티스트에 의해 펑크, 힙합 요소가 추가되었다. 현재도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활동하며, 그래미상 부문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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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데코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자이데코 |
다른 이름 | Zarico zodigo 르 뮤지크 크레올 (le musique Creole) |
어원 | 프랑스어 ("콩")에서 유래, 케이준과 자이데코 노래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구절 |
스타일적 기원 | |
음악적 기원 | 블루스 케이준 음악 컨트리 크리올 음악 아메리카 원주민 음악 리듬 앤 블루스 |
문화적 기원 | |
발생 시기 | 20세기 초 |
발생 장소 | 루이지애나 주, 미국 |
악기 | |
사용 악기 | 피아노 아코디언 케이준 아코디언 워시보드 일렉트릭 베이스 일렉트릭 기타 드럼 세트 |
파생 장르 | |
파생 장르 | 해당 없음 |
하위 장르 | |
하위 장르 | 해당 없음 |
융합 장르 | |
융합 장르 | 해당 없음 |
지역적 장면 | |
지역적 장면 | 해당 없음 |
로컬 장면 | |
로컬 장면 | 해당 없음 |
기타 주제 | |
기타 주제 | 해당 없음 |
사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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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특징
자이데코 음악은 일반적으로 빠른 속도로, 싱코페이션이 강한 리듬을 기반으로 연주되며,[3] 블루스, 록 음악, 소울 음악, R&B, 카주, 초기 크리올 음악의 요소들을 포함한다. 자이데코 음악은 아코디언을 중심으로 하며, 아코디언이 밴드의 다른 악기를 이끌고, 베스트 프로트와르라고 불리는 특수한 빨랫판이 두드러진 타악기로 사용된다. 자이데코에서 사용되는 다른 일반적인 악기로는 일렉트릭 기타, 베이스, 키보드, 드럼 세트가 있다.[4] 노래가 있다면, 주로 영어나 프랑스어로 부른다.[9] 많은 자이데코 연주자들이 자이데코 창작곡을 만들지만, 블루스 표준곡, R&B 히트곡, 전통 카주 곡을 자이데코 스타일로 편곡하는 것도 일반적이다.[5]
"자이데코(zydeco)"라는 용어의 기원은 불확실하다. 한 가지 설에 따르면, 이 용어는 프랑스어 구문 Les haricots [ne] sont pas salés|레 아리코 [네] 송 파 살레프랑스어[6]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직역하면 "강낭콩이 짜지 않다"는 뜻이며, 어려움을 표현하는 관용구로 사용된다.[7][8]
자이데코는 싱코페이션이 강한 빠른 속도의 리듬을 기반으로 하며, 아코디언이 중심이 되는 크리올 음악이다.[3] 블루스, 록 음악, 소울 음악, R&B, 카주 등 다양한 장르의 영향을 받았다.[4] 베스트 프로트와르라는 빨래판이 주요 타악기로 사용되며, 일렉트릭 기타, 베이스, 키보드, 드럼 세트도 일반적인 악기이다.[4] 노래는 주로 영어 또는 프랑스어로 불린다.[9] 많은 자이데코 연주자들이 창작곡을 만들지만, 블루스, R&B, 전통 카주 곡을 자이데코 스타일로 편곡하기도 한다.[5]
3. 용어의 기원
초기에는 "zarico"와 "zodico"를 포함하여 여러 가지 철자가 존재했다.
1960년, 음악학자인 맥 코맥(Mack McCormick)은 편집 앨범인 ''A Treasury of Field Recordings''의 라이너 노트에서 "zydeco"라는 철자를 사용했다. 코맥은 휴스턴에서 이 단어를 표준 철자로 홍보하기 시작했다. 클리프턴 체니어(Clifton Chenier) (1955년에 "Zodico Stomp"을 녹음했던)도 그의 녹음 "Zydeco Sont Pas Salés"에서 이 용어를 사용했다. 체니어는 나중에 이 철자를 만들었다고 주장했다.[9]
자이데코의 또 다른 어원은 서아프리카의 "음악 연주"를 의미하는 단어일 수 있다. 앨런 로맥스(Alan Lomax)와 존 로맥스(John Lomax)가 초기 루이지애나 녹음을 기반으로 한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 용어와 전통은 아프리카 기원일 가능성이 있다. 노예 무역의 영향을 받은 부족들의 서아프리카 언어는 자이데코의 기원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 아프리카 문화권의 최소 12개 언어에서 "za", "re", "go"라는 음절은 종종 춤과/또는 음악 연주와 관련이 있다.[10][3] 원래 언어에 익숙하지 않은 프랑스어-크리올어 사용 세대가 낯선 단어들을 지역 언어의 음성적으로 유사한 구문으로 바꾸면서 les haricots|레 아리코프랑스어로 진화했을 가능성도 있다.[11]
"자이데코(zydeco)"라는 단어는 음악 장르, 춤 스타일 또는 음악이 연주되는 사교 모임을 가리킬 수 있다.[4]
4. 역사
자이데코는 18세기부터 아카디아인(Acadian) 후손인 백인들이 연주해 온 전통적인 춤 음악인 케이준 음악(Cajun music)을 기반으로, 아프리카계 후손인 크리올 흑인들이 20세기에 R&B와 블루스 요소를 가미하여 발전시켰다.
크리올 전통 댄스 음악을 기반으로 발전한 알드완 패밀리와 같은 유형과, 로큰롤과 블루스를 아코디언으로 연주하며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클리프턴 셰니어와 같은 유형이 공존한다. 오늘날에는 힙합이나 펑크 등 새로운 음악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젊은 자이데코 아티스트들이 등장하고 있다. 자이데코와 케이준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 왔으며, 웨인 튜프스처럼 양쪽의 크로스오버적인 사운드를 추구하는 아티스트도 존재한다.
4. 1. 초기 역사 (18세기~19세기)
17세기 후반, 프랑스의 섭정 필리프 도를레앙이 파견한 프랑스 초기 정착민들이 루이지애나에 도착했다. 그들은 식민지로 주장한 '라 루이지애나'(루이지애나 준주)에 정착하기 위해 왔다. 일곱 척의 배를 타고 뉴올리언스에 도착한 정착민들은 곧 바이유와 늪지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프랑스 문화는 오랫동안 그 지역에 거주해 온 스페인인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문화와 융합되었다.
1720년, 독일 가톨릭 신자들이 세인트 존 침례교구에 두 번째 유럽인 영구 정착촌을 세웠는데, 이 지역은 나중에 독일 해안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8세기 후반에는 더 많은 독일과 아일랜드 이민자들도 이 지역에 정착했다.[12]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노예들을 노동자로 수입하거나 획득했고, 그들은 곧 주요 사탕수수 농장 및 기타 농장에서 백인보다 수적으로 우세해졌다. 수십 년 동안 모든 민족이 점차 섞였다.
150년 동안 루이지애나 크리올들은 고립된 생활 방식을 누리며 번영했고, 정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 교육을 받았으며, 흑인법전에 따라 보이지 않는 공동체를 건설했다. 프랑스는 1724년 노예로 삼은 아프리카인들의 처우에 대한 규칙을 설정하기 위해 흑인법전을 제정했다. 또한 점점 더 많아지는 자유 유색인종인 '젠 드 끌뢰르 리브르'에 대한 제한과 권리를 설정했는데, 그들은 종종 프랑스 백인 남성과 흑인 아프리카 여성 또는 혼혈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토지를 소유할 권리가 있었는데, 당시 미국 남부의 소수 흑인이나 유색인종만이 누릴 수 있었던 권리였다.
루이지애나 크리올 공동체의 붕괴는 미국이 루이지애나 매입을 하고 미국인들이 특히 남동부에서 이주해 오면서 시작되었다. 새로운 정착민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이 온 곳에서 흔히 있었던 노예 사회에서 만연했던 이분법적인 인종 체계만을 인식했다. 미국 각 주는 노예 계급과의 강한 연관성 때문에 대부분의 눈에 보이는 아프리카계 후손의 2등 시민 지위를 가정한 법률을 제정했다.
남북 전쟁이 끝나고 남부 전역에서 흑인 노예들이 해방되자 전쟁 전에 자유를 누렸던 루이지애나 크리올들은 재건 시대 동안 종종 지도자의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나 루이지애나의 인종 분리주의 민주당원들은 크리올들을 흑인으로 분류하거나 해방 노예와 같은 지위를 부여했다. 19세기 말까지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기타 전 연방 국가들은 새로운 헌법과 법률을 제정하여 대부분의 흑인과 많은 가난한 백인들의 참정권을 박탈했는데, 이는 (미국 헌법 수정 조항 15조)에도 불구하고 흑인의 투표를 억압하기 위해 고안된 규칙에 따른 것이었다. 크리올들은 새로운 사회에서 협상을 하면서 교육과 발전을 위해 계속 노력했다.
자이데코의 시골 출신과 시작 당시의 만연한 경제 상황은 노래 제목, 가사, 블루지한 보컬에 반영되어 있다. 이 음악은 전통적인 크리올 음악, 일부 카준 음악의 영향, 그리고 R&B, 블루스, 재즈, 가스펠을 포함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전통의 종합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종종 프랑스 음악이나 "라-라"로 알려진 '르 뮤직 크리올'이라고 불렸다.
루이지애나 남서부의 크리올 음악을 녹음한 두 번째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가인 아메데 아르도앵은 1929년에 첫 녹음을 했다.[13] 이 크리올 음악은 나중에 자이데코로 알려지게 된 음악의 기초가 되었다. 원래는 지역 사회의 가정 파티에서 연주되었던 이 음악은 결국 크리올들이 대부분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 지역 사회 센터에서, 그리고 시골 댄스홀과 나이트클럽에서도 연주되었다.
4. 2. 20세기 초: 아메데 아르도앵과 자이데코의 탄생
자이데코는 전통적인 크리올 음악, 일부 카준 음악의 영향, 그리고 R&B, 블루스, 재즈, 가스펠을 포함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전통의 종합으로 나타났으며, 노래 제목, 가사, 블루지한 보컬에 시골 출신과 시작 당시의 만연한 경제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르 뮤직 크리올''이라고 불린 "라-라"로도 알려진 프랑스 음악이다.
아메데 아르도앵은 루이지애나 남서부의 크리올 음악을 녹음한 두 번째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가로, 1929년에 첫 녹음을 했다.[13] 이 크리올 음악은 나중에 자이데코로 알려지게 된 음악의 기초가 되었다. 원래는 지역 사회의 가정 파티에서 연주되었던 이 음악은, 크리올들이 대부분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 지역 사회 센터와 시골 댄스홀, 나이트클럽에서도 연주되었다.
4. 3. 1950년대: 부주 셰이비스와 클리프턴 셰니어
1954년 부주 셰이비스(Boozoo Chavis)는 〈Paper in My Shoe〉를 녹음하여 루이지애나 주 일대에서 큰 히트를 기록했다.[28] 베이스와 드럼을 포함한 밴드 형식의 자이데코로서는 최초의 히트곡이었다. 그러나 셰이비스는 히트곡에 비해 큰 로열티를 얻지 못했고, 이후 음악 사업에 실망하여 한때 은퇴하기도 했다.
1965년, 클리프턴 셰니어(Clifton Chenier)는 지역 음악계에 등장하여 〈Les Haricots Sont Pas Salés〉 (콩은 짜지 않다)라는 노래로 히트를 쳤다.[14][15] 이 곡의 제목 "Les Haricots" ("르자리코"로 발음됨)가 자이데코(zydeco 또는 zodico)라는 음악 장르 자체를 지칭하게 된다. 클리프턴 셰니어는 색소폰을 포함한 밴드 스타일뿐 아니라, 기존에 전통적인 버튼식 아코디언 대신 건반식 아코디언을 도입하여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건반식 아코디언을 통해 당시 유행하던 블루스 코드를 재현할 수 있게 되었고, 주로 셔플과 3연 블루스를 연주했다. 또한, 크리올어 억양이 섞인 영어로 노래했다는 점이, 그 전까지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크리올어 노래가 주류였던 상황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로써 "자이데코의 왕"이라는 칭호는 클리프턴 셰니어에게 돌아갔다.
최초의 자이데코 베스트 프로트와(vest frottoir)는 1946년 클리프턴 셰니어가 그의 형제 클리블랜드와 함께 텍사스 주 포트 아서(Port Arthur, Texas)의 정유 공장에서 일하던 중에 디자인되었다.[16] 셰니어는 같은 정유 공장에서 일하던 용접공이자 제작자인 윌리 랜드리에게 이 악기 제작을 의뢰했다. 랜드리가 만든 최초의 프로트와는 스미소니언 협회(Smithsonian Institution)의 상설 전시품으로 소장되어 있다.
4. 4. 1960년대 ~ 1970년대: 자이데코의 확장
클리프턴 셰니어(Clifton Chenier)는 "자이데코의 왕"으로 불리며, 블루스 스타일과 키보드 아코디언 연주로 지역 라디오 방송에서 자이데코를 알렸다. 1950년대 중반, 셰니어의 인기는 자이데코를 미국 주류 음악의 변두리로 이끌었다. 그는 리틀 리처드(Little Richard)와 샘 쿠크(Sam Cooke)를 대중에게 처음 소개한 스페셜티 레코드(Specialty Records)와 계약했다. 현대 자이데코의 설계자로 여겨지는[14][15] 셰니어는 최초의 주요 자이데코 아티스트가 되었다. 그의 초기 히트곡 중에는 "Les Haricots Sont Pas Salés" (Les Haricots Sont Pas Salés|콩이 짜지 않아프랑스어) — 가수가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를 살 형편이 안 될 정도로 가난하다는 것을 의미 — 가 있다.
최초의 자이데코 베스트 프로트와(vest frottoir)는 1946년 클리프턴 셰니어(Clifton Chenier)가 그의 형제 클리블랜드와 함께 텍사스주 포트 아서(Port Arthur, Texas)의 정유 공장에서 일하던 중에 디자인되었다. 셰니어는 같은 정유 공장에서 일하던 용접공이자 제작자인 윌리 랜드리에게 이 악기를 제작 의뢰했다. 랜드리가 만든 최초의 프로트와는 스미소니언 협회(Smithsonian Institution)의 상설 전시품으로 소장되어 있다.[16]
1950년대~1970년대의 테하노 음악(Tejano music) 연주자들, 예를 들어 리틀 조와 프레디 펜더(Freddie Fender)는 자이데코의 뿌리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텍사스 남부(South Texas)에서 주류 컨트리 음악(country music) 내에서 이 스타일을 대중화하는 데 기여했다.[17][18]
1978년, 클리프턴 셰니어는 자이데코가 국내외에서 얼마나 인기를 얻고 있는지 확인했다. 그는 젊은 크리올/랄라 아코디언 연주자 퍼네스트 아르세노(Fernest Arceneaux)에게 아코디언을 다시 연주하도록 설득했다. 아르세노는 1960년대에 기타를 연주하기 위해 아코디언을 그만두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퍼네스트 앤 더 선더스(Fernest and the Thunders)로 국제 투어를 시작했다.[19]
4. 5. 1980년대: 자이데코의 부흥
1980년대는 자이데코 음악이 크게 부흥한 시기이다. 록킨 시드니(Rockin' Sidney)는 1980년대 중반 그의 히트곡 "My Toot Toot"으로 자이데코 음악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20] 클리프턴 셰니어(Clifton Chenier), 록킨 시드니, 퀸 아이다(Queen Ida)는 이 시기에 모두 그래미상을 수상하며, 전통을 이어갈 신예 아티스트들에게 문을 열어주었다.[20][21] 록킨 돕시(Rockin' Dopsie)는 폴 사이먼(Paul Simon)의 앨범 ''그레이스랜드''에서 함께 녹음했고,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을 맺기도 했다.[20][21]
존 델라포스(John Delafose)는 지역적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부주 샤비스(Boozoo Chavis), 로이 캐리어(Roy Carrier), 자이데코 포스(Zydeco Force), 네이선 앤 더 자이데코 차 차스(Nathan and the Zydeco Cha Chas), 샘 브라더스(Sam Brothers), 테란스 시미언(Terrance Simien), 처비 캐리어(Chubby Carrier) 등 많은 아티스트들이 새로운 사운드와 스타일을 음악과 융합하여 전국적인 무대에 등장하며 음악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자이데코 슈퍼스타 버크윗 자이데코(Buckwheat Zydeco)는 이미 경력이 쌓인 상태였지만, 1980년대 중반에 아일랜드 레코드(Island Records)와 계약을 맺었다.[20]
크리올과 케이준 음식의 전국적인 인기와 뉴올리언스를 배경으로 한 인기 영화 ''빅 이지''와 결합되어 자이데코 음악은 부흥기를 맞이했다. 새로운 아티스트들이 육성되었고, 음악은 더욱 혁신적인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자이데코는 주류 음악에서 인기가 높아졌다.
C.J. 셰니어 (클리프턴 셰니어의 아들), 처비 캐리어 (로이 캐리어의 아들), 제노 델라포스(Geno Delafose) (존 델라포스의 아들), 테란스 시미언, 네이선 윌리엄스 등 활동적인 자이데코 음악가들은 1980년대에 국제 투어를 시작했다.[9]
4. 6. 1990년대: 보 조크와 새로운 흐름
보 조크(Beau Jocque)는 1990년대에 강력한 비트와 베이스 라인을 자이데코에 불어넣은 혁신적인 송라이터이자 혁신가였으며, 펑크, 힙합(hip-hop), 랩(rap) 요소를 추가했다.[9] 크리스 아르도인(Chris Ardoin), 키스 프랭크(Keith Frank), 코리 아르세노(퍼네스트 아르세노의 증손자), 자이데코 포스 등 젊은 연주자들은 사운드를 베이스 드럼 리듬에 연결하여 백비트를 더욱 강조하거나 싱코페이션했다. 이 스타일은 때때로 "더블 클러칭(double clutching)"이라고 불린다.[9]
부주 샤비스(Boozoo Chavis)도 복귀하여 새로운 자이데코 운동을 이끌었다. 보 조크는 1999년 요절했고, 보 조크에게 세 번째 "자이데코의 왕"이라는 칭호가 수여되었다. 보 조크는 허스키한 목소리와 큰 체격, 펑크의 영향을 받은 댄스 사운드로 데뷔했으며, 버튼식 아코디언으로 바꾼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이는 미국의 동화 정책에 대한 반발과 더불어, 원래의 케이준 문화를 되살렸다고 여겨지기도 하면서 인기를 얻었다.
수백 개의 자이데코 밴드가 미국 전역과 유럽, 일본, 영국, 호주에서 음악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조숙한 7세 자이데코 아코디언 연주자 길랜드 레데이는 2006년 음악과 젊은이들에 관한 HBO 다큐멘터리에 출연했다.[22]
4. 7. 2000년대 이후: 현재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록킨 돕시(Rockin' Dopsie)[29]와 버크윗 자이데코(Buckwheat Zydeco)[30] 등의 아티스트들이 블루스에서 유래한 자이데코가 아닌, 강한 백비트의 소울 음악에서 유래한 자이데코를 연주했다. 이들은 미국 전역에서 일어난 흑인 민권 운동에 동조하듯, 백인의 케이준 음악과는 확연히 다른 음악임을 주장했다.
1980년대에는 록과 팝 음악의 쇠퇴와 함께 루츠 음악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1985년 록킨 시드니(Rockin' Sidney)의 "My Toot Toot"는 자이데코 곡으로는 드물게 소히트를 기록했다.
1990년대에는 크리올계 보 조크(Beau Jocque)가 허스키한 목소리와 큰 체격, 펑크의 영향을 받은 댄스 사운드로 데뷔했다. 보 조크는 버튼식 아코디언을 사용했는데, 이는 미국의 동화 정책에 대한 반발이자 원래의 케이준 문화를 되살린 것으로 여겨져 큰 인기를 얻었다. 한때 은퇴하여 경주마 목장을 경영하던 부주 샤비스(Boozoo Chavis)도 복귀하여 새로운 자이데코 운동을 이끌었다. 보 조크는 1999년 요절했고, 세 번째 "자이데코의 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자이데코는 크리올 전통 댄스 음악을 기반으로 발전한 알드완 패밀리와 같은 유형과, 로큰롤과 블루스를 아코디언으로 연주하며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클리프턴 셰니어(Clifton Chenier)와 같은 유형이 공존한다. 오늘날에는 힙합이나 펑크 등 새로운 음악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젊은 자이데코 아티스트들이 대거 등장하여 기존의 루츠나 크리올 루트와는 차별화된 음악을 선보이고 있다.
자이데코가 성행하는 주요 도시는 다음과 같다.
5. 주요 아티스트
- 아메데 알도원
- 크리스 알도원
- 클리프턴 셰니어
- 벅위트 자이데코
- 로지 레젯트
- 지노 데라포스
- 브즈 체이비스
- 보 적
- C. J. 셰니어
- 록킨 돕시
- 록킨 시드니
- 퀸 아이다
- 존 델라포스
- 로이 캐리어
- 처비 캐리어
- 테란스 시미언
- 네이선 윌리엄스
- 키스 프랭크
- 앙드레 티에리
- 드웨인 돕시
6. 자이데코와 케이준 음악, 테하노 음악의 관계
자이데코는 18세기부터 아카디아인(Acadian) 후손인 백인들이 연주해 온 케이준 음악을 기반으로, 아프리카계 후손인 크리올 흑인들이 20세기에 R&B와 블루스 요소를 가미하여 발전시킨 음악이다.[28]
1970년대에는 로킹 두프시[29]와 백윗 자이데코[30] 등의 아티스트들이 블루스에서 유래한 자이데코가 아닌, 강한 백비트의 소울 음악에서 유래한 자이데코를 연주하면서, 백인의 케이준 음악과는 확연히 다른 음악임을 주장했다.
자이데코와 케이준 음악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 왔으며, 오늘날에는 웨인 튜프스(Wayne Toups)처럼 양쪽의 크로스오버적인 사운드를 추구하는 아티스트도 존재한다.
텍사스 주의 플라코 히메네스, 스티브 조던(에스테반 조던) 등이 연주하는 것은 "테하노 음악/텍스멕스"라고 구분한다.
참조
[1]
웹사이트
Zydeco
https://www.encyclop[...]
2018-05-29
[2]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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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heafricanam[...]
[3]
논문
Zydeco/Zarico: Beans, Blues and Beyond
Columbia College Chicago
[4]
논문
Zydeco: A Musical Hybrid
https://www.jstor.or[...]
1981
[5]
웹사이트
Zydeco Music 101: The Music of Louisiana Creoles
https://www.liveabou[...]
[6]
사전
zydeco
[7]
웹사이트
Zydeco Music 101
https://web.archive.[...]
[8]
뉴스
An Evening In a Cajun Dance Hall: A Letter from Baton Rouge
https://www.baltimor[...]
1993-01-31
[9]
서적
The Kingdom of Zyde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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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백과사전
Cajun and Zydeco Music Tradi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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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논문
Zydeco/Zarico: Beans, Blues and beyond
https://www.jstor.or[...]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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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History of the Cajuns - Cajuns in the 18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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