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 갈레아초 비스콘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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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는 14세기 후반 이탈리아의 유력한 귀족으로, 밀라노의 지배권을 찬탈하고 밀라노 공국을 건설했다. 그는 삼촌 베르나보 비스콘티를 축출하고 암살한 후 롬바르디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부터 밀라노 공작 작위를 받았다. 그는 용병을 활용한 군사력으로 영토를 넓히고, 학문과 예술을 후원하는 등 통치 스타일을 보였으나, 피렌체 정복에는 실패하고 페스트로 사망했다. 그의 사후 제국은 분열되었으며, 그는 이탈리아 통일을 꿈꿨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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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갈레아초 비스콘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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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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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 |
출생일 | 1351년 10월 16일 |
출생지 | 파비아, 이탈리아 |
사망일 | 1402년 9월 3일 |
사망지 | 멜레냐노, 밀라노 공국, 이탈리아 |
매장지 | 체르토사 디 파비아 |
작위 및 통치 | |
작위 | 밀라노 공작 |
재위 기간 | 1395년 9월 5일 – 1402년 9월 3일 |
대관식 | 1395년 9월 5일, 산탐브로조 대성당 |
후임 | 잔 마리아 비스콘티 |
작위 1 | 밀라노 영주 |
재위 기간 1 | 1385년 5월 6일 – 1395년 9월 5일 |
선임 1 | 베르나보 비스콘티 |
작위 2 | 파비아 영주 |
재위 기간 2 | 1378년 8월 4일 – 1395년 9월 5일 |
선임 2 | 갈레아초 2세 비스콘티 |
작위 3 | 피사 영주 |
재위 기간 3 | 1399년 2월 13일 – 1402년 9월 3일 |
선임 3 | 게라르도 아피아니 |
후임 3 | 가브리엘 마리아 비스콘티 |
가족 | |
배우자 | 이사벨 드 프랑스 (1360년 결혼, 1372년 사망) 카테리나 비스콘티 (1380년 결혼, 1402년 사망) |
자녀 | 발렌티나 비스콘티, 베르튀 백작부인 잔 마리아 비스콘티, 밀라노 공작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 밀라노 공작 가브리엘 마리아 비스콘티, 피사 영주 (사생아) (사생아) |
가문 | |
가문 | 비스콘티 |
아버지 | 갈레아초 2세 비스콘티 |
어머니 | 사보이아의 비안카 |
기타 | |
추가 정보 | 베로나, 크레모나, 베르가모, 브레시아, 벨루노, 피에베 디 카도레, 펠트레, 파비아, 노바라, 코모, 로디, 베르첼리, 알바, 아스티, 폰트레몰리, 토르토나, 알레산드리아, 발렌차, 피아첸차, 파르마, 레조 에밀리아, 비첸차, 비제바노, 보르고 산 도니노 및 발리 델 보이트의 영주였음 |
2. 생애
밀라노의 귀족으로서 가장 알려졌던, 잔 갈레아초는 파비아의 시뇨리아 직을 갖고있던 갈레아초 비스콘티 2세의 아들이었다. 1385년, 잔 갈레아초는 부정한 방법을 통해서 그의 삼촌인 베르나보를 몰아내고 밀라노의 지배권을 차지했다.[3] 그는 그의 삼촌을 수감시켰고, 곧 베르나보는 사망하였으며, 아마도 그의 명령에 의하여 독살된 것으로 추정된다.[4]
그의 첫 결혼은 그에게 샹파뉴의 덕의 백작(comte de Vertus)라는 칭호를 가져다준 발루아의 이사벨이였으며, 그의 생애 초기에는 이 칭호로서 알려졌다. 딸 발렌티나(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드 발루아의 아내이자 오를레앙 공작 샤를의 어머니)에게 헌신적이던, 잔 갈레아초는 딸의 사생활 때문에 프랑스에 전쟁 위협을 벌이기도 하였다. 비스콘티 성을 후원하는 동안 그는 비스콘티 도서관에 있는 과학 논문과 화려하게 삽화가 들어간 사본들의 소장품 증가에 기여했다.[2]
잔 갈레아초는 갈레아초 2세 비스콘티와 사보이의 비앙카의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파비아 시의 시뇨리아를 소유하고 있었다. 1385년 잔 갈레아초는 종교적 개종을 가장하고 밀라노에서의 종교 행렬 중에 그의 삼촌 베르나보를 기습함으로써 배신적인 방법으로 그를 몰아내고 밀라노의 통제권을 장악했다.[3] 그는 삼촌을 투옥했고, 삼촌은 곧 그의 명령으로 독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4]
갈레아초의 국무총리로서의 역할은 다른 형태도 취했다. 밀라노를 장악한 직후 그는 베로나, 비첸차, 그리고 파도바를 점령하여 각 도시의 시뇨레로 자리 잡았고, 곧 포 강 유역의 거의 전 지역을 장악했다. 1393년에는 피아첸차에서 이미 피아첸차 주변 계곡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콘팔로니에리 가문에 봉토의 권력을 부여했다. 그는 1390년 파도바가 프란체스코 노벨로 다 카라라에게 돌아가면서 파도바를 잃었다. 그는 1395년 10만 플로린에 로마 왕 벤체슬라스로부터 밀라노 공작 작위를 받았다.
잔 갈레아초는 만투아의 민초 강과 파도바의 브렌타 강의 흐름을 바꾸려고 시도하는 데 30만 금화 플로린을 사용했다. 이는 그의 무력 앞에 그 도시들을 무력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웅장한 제후의 저택인 파비아의 카스텔로에 있는 그의 도서관과 그의 많은 사본이 그의 정복의 결과물인 그의 풍부한 사본 소장품이 주목할 만하다. 1400년 잔 갈레아초는 공중 보건 개선을 맡은 많은 서기관과 부서를 임명했다. 이로써 확립된 새로운 행정 및 회계 시스템을 위해 그는 그의 재무장관 프란체스코 바르바바라의 도움을 받아 최초의 현대 관료제를 창설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5]
1378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밀라노 공국 서쪽 영토를 상속받았다. 동쪽 영토는 아버지의 동생 베르나보가 계승했지만, 그는 폭정을 일삼았기 때문에 1385년 장에 의해 감금 및 암살당했고, 장은 공식적으로 밀라노 전체를 계승하게 되었다.
이후 롬바르디아 지방으로 세력 확장을 시작했다. 그리고 1387년에는 베로나, 1399년에는 피사, 시에나 그리고 1402년에는 볼로냐를 차례로 정복했다. 더 나아가,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벤체슬라스에게 풍부한 자금을 바치고 그 대가로 제후의 신분을 샀다. 1395년에는 밀라노 공작이자 파비아 백작에 임명되어, 공식적으로 밀라노 공국을 건설했다.
장의 통치는 군사를 중시했기 때문에 군비에 따른 막대한 지출 등으로 압정을 펼칠 수밖에 없었지만, 밀라노는 당시 '흑사병'이라 불린 페스트의 피해가 극히 적었고, 장 자신이 문예 보호를 추진하고 밀라노 대성당 건축 등 문화 발전에 기여했기에 그의 통치 아래 밀라노는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롬바르디아를 거의 정복하는 과정에서 유일하게 피렌체와 두 차례 전투에서 패배하여, 그곳만은 결코 지배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장은 1402년 세 번째 원정을 계획했지만, 원정에 앞서 페스트에 걸려 급사했다.
장의 정복 사업이 대부분 성공한 배경에는 그가 용병을 돈으로 고용하여 병농 분리를 실시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당시로서는 개명되고 진보적인 독재 군주였다. 또한 야심가이기도 했던 장은 "카이사르의 재림"을 자처하며, 피렌체 정복 후 이탈리아 왕위에 오르려고 즉위에 대비하여 왕관과 홀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2. 1. 권력 장악
밀라노의 귀족으로서 가장 알려졌던, 잔 갈레아초는 파비아의 시뇨리아 직을 갖고있던 갈레아초 비스콘티 2세의 아들이였다. 1385년, 잔 갈레아초는 부정한 방법을 통해서 그의 삼촌인 베르나보를 몰아내고 밀라노의 지배권을 차지했다. 그는 그의 삼촌을 수감시켰고, 곧 베르나보는 사망하였으며, 아마도 그의 명령에 의하여 독살된 것으로 추정된다.그의 첫 결혼은 그에게 샹파뉴의 덕의 백작(comte de Vertus)라는 칭호를 가져다준 발루아의 이사벨이였으며, 그의 생애 초기에는 이 칭호로서 알려졌다. 1378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밀라노 공국 서쪽 영토를 상속받았다. 동쪽 영토는 아버지의 동생 베르나보가 계승했지만, 그는 폭정을 일삼았기 때문에 1385년 장에 의해 감금 및 암살당했고, 장은 공식적으로 밀라노 전체를 계승하게 되었다.
이후 롬바르디아 지방으로 세력 확장을 시작했다. 그리고 1387년에는 베로나, 1399년에는 피사, 시에나 그리고 1402년에는 볼로냐를 차례로 정복했다. 더 나아가,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벤체슬라스에게 풍부한 자금을 바치고 그 대가로 제후의 신분을 샀다. 1395년에는 밀라노 공작이자 파비아 백작에 임명되어, 공식적으로 밀라노 공국을 건설했다.
장의 통치는 군사를 중시했기 때문에 군비에 따른 막대한 지출 등으로 압정을 펼칠 수밖에 없었지만, 밀라노는 당시 '흑사병'이라 불린 페스트의 피해가 극히 적었고, 장 자신이 문예 보호를 추진하고 밀라노 대성당 건축 등 문화 발전에 기여했기에 그의 통치 아래 밀라노는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롬바르디아를 거의 정복하는 과정에서 유일하게 피렌체와 두 차례 전투에서 패배하여, 그곳만은 결코 지배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장은 1402년 세 번째 원정을 계획했지만, 원정에 앞서 페스트에 걸려 급사했다.
장의 정복 사업이 대부분 성공한 배경에는 그가 용병을 돈으로 고용하여 병농 분리를 실시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당시로서는 개명되고 진보적인 독재 군주였다. 또한 야심가이기도 했던 장은 "카이사르의 재림"을 자처하며, 피렌체 정복 후 이탈리아 왕위에 오르려고 즉위에 대비하여 왕관과 홀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2. 2. 통치와 확장
밀라노의 귀족으로서 가장 알려졌던, 잔 갈레아초는 파비아의 시뇨리아 직을 갖고있던 갈레아초 비스콘티 2세의 아들이였다. 1385년, 잔 갈레아초는 부정한 방법을 통해서 그의 삼촌인 베르나보를 몰아내고 밀라노의 지배권을 차지했다. 그는 그의 삼촌을 수감시켰고, 곧 베르나보는 사망하였으며, 아마도 그의 명령에 의하여 독살된 것으로 추정된다.그의 첫 결혼은 그에게 샹파뉴의 덕의 백작(comte de Vertus)라는 칭호를 가져다준 발루아의 이사벨이였으며, 그의 생애 초기에는 이 칭호로서 알려졌다. 딸 발렌티나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드 발루아의 아내이자 오를레앙 공작 샤를의 어머니)에게 헌신적이던, 잔 갈레아초는 딸의 사생활 때문에 프랑스에 전쟁 위협을 벌이기도 하였다.
1378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밀라노 공국 서쪽 영토를 상속받았다. 동쪽 영토는 아버지의 동생 베르나보가 계승했지만, 그는 폭정을 일삼았기 때문에 1385년 장에 의해 감금 및 암살당했고, 장은 공식적으로 밀라노 전체를 계승하게 되었다.
이후 롬바르디아 지방으로 세력 확장을 시작했다. 그리고 1387년에는 베로나, 1399년에는 피사, 시에나 그리고 1402년에는 볼로냐를 차례로 정복했다. 더 나아가,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벤체슬라스에게 풍부한 자금을 바치고 그 대가로 제후의 신분을 샀다. 1395년에는 밀라노 공작이자 파비아 백작에 임명되어, 공식적으로 밀라노 공국을 건설했다.
장의 통치는 군사를 중시했기 때문에 군비에 따른 막대한 지출 등으로 압정을 펼칠 수밖에 없었지만, 밀라노는 당시 '흑사병'이라 불린 페스트의 피해가 극히 적었고, 장 자신이 문예 보호를 추진하고 밀라노 대성당 건축 등 문화 발전에 기여했기에 그의 통치 아래 밀라노는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롬바르디아를 거의 정복하는 과정에서 유일하게 피렌체와 두 차례 전투에서 패배하여, 그곳만은 결코 지배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장은 1402년 세 번째 원정을 계획했지만, 원정에 앞서 페스트에 걸려 급사했다.
장의 정복 사업이 대부분 성공한 배경에는 그가 용병을 돈으로 고용하여 병농 분리를 실시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당시로서는 개명되고 진보적인 독재 군주였다. 또한 야심가이기도 했던 장은 "카이사르의 재림"을 자처하며, 피렌체 정복 후 이탈리아 왕위에 오르려고 즉위에 대비하여 왕관과 홀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2. 3. 프랑스와의 갈등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는 그의 딸 발렌티나의 사생활 문제로 프랑스와 전쟁 위협을 벌이기도 하였다.[6] 발렌티나는 프랑스 궁정에서 이자보 왕비의 책략으로 파리에서 추방당하기도 하였다.[6]앵게랑 7세는 프랑스가 제노바에 추가적인 간섭을 할 시 적대 행위로 간주할 것이라는 경고를 전달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 이후, 갈레아초는 십자군의 계획과 그들의 군대의 규모와 강점에 대해 오스만인들에게 정보를 제공했을 것이라는 강한 의심을 받았다.[6]
롬바르디아를 거의 정복하는 과정에서 피렌체와의 두 차례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1402년 세 번째 원정을 계획했지만, 원정에 앞서 페스트에 걸려 급사했다.
2. 4. 이탈리아 통일 시도와 죽음
잔 갈레아초는 파비아의 시뇨리아 직을 갖고있던 갈레아초 비스콘티 2세의 아들이었다.[7] 1378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밀라노 공국 서쪽 영토를 상속받았다. 동쪽 영토는 아버지의 동생 베르나보가 계승했지만, 그는 폭정을 일삼았기 때문에 1385년 잔 갈레아초에 의해 감금 및 암살당했고, 잔 갈레아초는 공식적으로 밀라노 전체를 계승하게 되었다.[7]이후 롬바르디아 지방으로 세력 확장을 시작했다. 1387년에는 베로나, 1399년에는 피사, 시에나 그리고 1402년에는 볼로냐를 차례로 정복했다.[7] 1395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벤체슬라스에게 풍부한 자금을 바치고 그 대가로 제후의 신분을 산뒤 밀라노 공작이자 파비아 백작에 임명되어, 공식적으로 밀라노 공국을 건설했다.[7]
잔 갈레아초는 북부 이탈리아 전체를 하나의 왕국, 부활한 롬바르드 제국으로 통일하겠다는 꿈을 꾸었다.[7] 그는 용병을 돈으로 고용하여 병농 분리를 실시하였기에, 그의 정복 사업은 대부분 성공하였다.[7] 그러나 볼로냐와 특히 피렌체가 장애물이었다. 1402년, 잔 갈레아초는 이 도시들을 공격했다. 전쟁은 양측 모두에게 엄청난 비용을 초래했지만, 밀라노가 승리할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믿음이었다. 피렌체 지도자들, 특히 총리 콜루치오 살루타티는 피렌체 시민들을 성공적으로 결집시켰지만, 피렌체는 기근, 질병, 빈곤으로 심한 세금을 부담하고 있었다. 갈레아초는 1402년 6월 26일에서 27일 사이에 카살레키오 전투에서 볼로냐군을 상대로 또 다른 승리를 거두었다.[7]
장의 통치는 군사를 중시했기 때문에 군비에 따른 막대한 지출 등으로 압정을 펼칠 수밖에 없었지만, 밀라노는 당시 '흑사병'이라 불린 페스트의 피해가 극히 적었고, 장 자신이 문예 보호를 추진하고 밀라노 대성당 건축 등 문화 발전에 기여했기에 그의 통치 아래 밀라노는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롬바르디아를 거의 정복하는 과정에서 유일하게 피렌체와 두 차례 전투에서 패배하여, 그곳만은 결코 지배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장은 1402년 세 번째 원정을 계획했지만, 원정에 앞서 페스트에 걸려 급사했다.[7] 그는 "카이사르의 재림"을 자처하며, 피렌체 정복 후 이탈리아 왕위에 오르려고 즉위에 대비하여 왕관과 홀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꿈은 1402년 8월 10일 멜레냐노 성에서 열병에 걸려 무산되었고, 그는 9월 3일에 사망했다. 그의 제국은 후계자들 간의 내분으로 밀라노가 파괴되면서 분열되었다.[7]
3. 통치 스타일과 업적
3. 1. 학문과 예술 후원
4. 가족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결혼은 1360년에 프랑스 왕 장 2세의 딸 이자벨 드 발루아(1348년-1372년)와 했다. 이 결혼으로 그는 샹파뉴 지방의 베르튀 백작(comte de Vertus) 작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어로는 ''Conte di Virtù''로 불렸다. 그는 초기 경력 동안 이 칭호로 알려졌다. 이자벨과의 사이에서는 다음 자녀들을 두었다.
- 잔 갈레아초(Gian Galeazzo, 1366년 3월 4일 파비아 출생 – 1376년 이전 사망)
- 아쪼네(Azzone, 1368년 파비아 출생 – 1381년 10월 4일 파비아 사망)
- 발렌티나(Valentina, 1371년 파비아 출생 – 1408년 12월 14일 블루아 성, 루아르-에-셰르 사망) - 1389년 8월 17일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오를레앙 공과 결혼
- 카를로(Carlo, 1372년 9월 11일 파비아 출생 – 1374년 파비아 사망)
1372년 이자벨이 출산 중 사망하자, 잔 갈레아초는 1380년 10월 2일에 사촌인 카테리나 비스콘티(Caterina Visconti, 베르나보의 딸)와 재혼하였다. 카테리나와의 사이에서는 다음 자녀들을 두었다.
- 조반니 마리아(Giovanni Maria, 1388년 9월 7일 – 1412년 5월 16일) - 2대 밀라노 공작
- 필리포 마리아(Filippo Maria, 1392년 9월 3일 – 1447년 8월 13일) - 3대 밀라노 공작
그 외에도 서자(庶子)가 있다.
- 비안카 마리아 비스콘티 - 필리포 마리아의 서자. 스포르차 가문 초대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아내.
4. 1. 첫 번째 결혼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는 1360년에 프랑스 왕 장 2세의 딸 이자벨 드 발루아(1348년-1372년)와 결혼했다. 이 결혼을 통해 그는 샹파뉴 지방에서 베르튀 백작(comte de Vertus) 작위를 얻었으며, 이탈리아어로는 ''Conte di Virtù''로 불렸다. 그는 초기 경력 동안 이 칭호로 알려졌다. 이자벨과의 사이에서 그는 발렌티나 비스콘티를 포함한 여러 자녀를 두었다. 발렌티나는 1389년 8월 17일에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오를레앙 공과 결혼했다. 그 외의 자식들로는 1366년에 태어나 1376년 이전에 사망한 잔 갈레아초, 1368년에 태어나 1381년에 사망한 아쪼네, 1372년에 태어나 1374년에 사망한 카를로가 있었다. 1372년 이자벨이 출산 중 사망하자, 잔 갈레아초는 1380년 10월 2일에 그의 사촌인 카테리나 비스콘티와 재혼했다.4. 2. 두 번째 결혼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는 1372년 아내 이자벨이 출산 중 사망하자, 1380년 10월 2일에 사촌인 카테리나 비스콘티와 재혼하였다. 카테리나는 베르나보 비스콘티의 딸이었다. 이 두 번째 결혼을 통해 잔 갈레아초는 잔 마리아 비스콘티와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 두 아들을 얻었다. 잔 마리아 비스콘티는 1388년 9월 7일에 태어나 1412년 5월 16일에 사망했고,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는 1392년 9월 3일에 태어나 1447년 8월 13일에 사망했다.5. 평가
5. 1.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의 평가 (참고)
참조
[1]
서적
A distant mirror : the calamitous 14th century
http://archive.org/d[...]
Knopf
[2]
서적
The Illuminated Tacuinum sanitatis Manuscripts from Northern Italy ca. 1380-1400: Sources, Patrons, and the Creation of a new Pictorial Genre
https://books.google[...]
Ashgate Publishing Ltd
[3]
서적
Art in Renaissance Italy
[4]
서적
A Distant Mirror
A.A.Knopf
[5]
서적
Renaissance in Italy: The age of despots
https://books.google[...]
Henry Holt and Company
2011-03-08
[6]
학술지
The Oxford Dictionary of Byzantium. Edited by Alexander P. Kazhda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1. 3 vols. xxxi + 2232 pp. $225.00.
http://dx.doi.org/10[...]
1992-06-00
[7]
웹사이트
Giangaleazzo Visconti, Duke of Milan
https://www.historyt[...]
2023-03-16
[8]
Find a Gr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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