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차공
1. 개요
장차공은 전한 무제 시기의 인물로, 젊은 시절 의종과 함께 도적질을 했다. 흉노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워 안두후에 봉해졌으나, 회남왕 유안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그의 딸 유릉과 간통한 죄로 작위가 박탈되었다.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에 기록이 남아있다.
-
전한의 공신후 -
신도가
신도가는 전한 시대의 무관 출신으로, 항우와의 싸움과 영포의 난에 참여하고 혜제 때 회양태수를 거쳐 승상에 올랐으며, 청렴한 성품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던 등통을 처벌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조조와의 갈등 끝에 죽음을 맞이하여 절후의 시호를 받았다. -
전한의 공신후 -
구독
구기(緱起)는 전한 시대에 기후(騎虎)에 봉해지고 태상(太常)을 역임한 인물로, 기원전 32년 사망 후 그의 아들 구숭(求崇)이 기후 자리를 계승했다. -
생몰년 미상 -
유급
유급은 전한 말기에 신양후에 봉해졌으나, 전한 멸망으로 작위를 잃은 유영의 아들이다. -
생몰년 미상 -
야스케
야스케는 16세기 일본에 기록된 최초의 아프리카인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혼노지의 변에서 함께 싸웠으나 이후 행적은 불확실하고,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소재로 활용된다. -
기원전 2세기 중국 사람 -
신도가
신도가는 전한 시대의 무관 출신으로, 항우와의 싸움과 영포의 난에 참여하고 혜제 때 회양태수를 거쳐 승상에 올랐으며, 청렴한 성품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던 등통을 처벌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조조와의 갈등 끝에 죽음을 맞이하여 절후의 시호를 받았다. -
기원전 2세기 중국 사람 -
사마천
사마천은 중국 전한 시대의 역사가, 천문학자, 역법가로서 중국 최초의 통사로 평가받는 『사기』를 저술하여 기전체를 확립하고 역사 서술과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이릉 변호 사건으로 궁형을 받는 고난을 겪었으며 태초력 제정에도 참여하는 등 천문학과 역법에도 업적을 남겼다.
2. 생애
젊어서 의종과 함께 도적질을 했었다.
원삭 원년(기원전 128년) 가을, 거기장군 위청은 기병 3만여 명을 이끌고 흉노를 쳐 수천 명의 수급을 얻었다. 흉노는 이듬해에 침공하여 요서태수를 죽이고 어양에서 노략질을 일삼았으나 한안국에게 패배하였고, 뒤이어 무제가 보낸 이식과 위청에게 격퇴되었다. 이때 교위 신분으로 종군한 장차공은 공로를 인정받아 안두후(岸頭侯)에 봉해졌다.
원삭 5년(기원전 124년) 봄, 무제는 위청에게 다시 출격을 명하였다. 장차공은 대행 이식과 함께 장군에 임명되어 우북평에서 출진하였다.
원수 원년(기원전 122년), 회남왕 유안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또 그의 딸 유릉(劉陵)과 간통한 죄로 작위가 박탈되었다.
2.1. 초기 활동
2.2. 흉노와의 전쟁
젊어서 의종과 함께 도적질을 했었다.
원삭 원년(기원전 128년) 가을, 거기장군 위청은 기병 3만여 명을 이끌고 흉노를 쳐 수천 명의 수급을 얻었다. 흉노는 이듬해에 침공하여 요서태수를 죽이고 어양에서 노략질을 일삼았으나 한안국에게 패배하였고, 뒤이어 무제가 보낸 이식과 위청에게 격퇴되었다. 이때 교위 신분으로 종군한 장차공은 공로를 인정받아 안두후(岸頭侯)에 봉해졌다.
원삭 5년(기원전 124년) 봄, 무제는 위청에게 다시 출격을 명하였다. 장차공은 대행 이식과 함께 장군에 임명되어 우북평에서 출진하였다.
2.3. 우북평 출진
2.4. 회남왕과의 관계 및 작위 박탈
젊어서 의종과 함께 도적질을 했었다. 원삭 원년(기원전 128년) 가을, 거기장군 위청은 기병 3만여 명을 이끌고 흉노를 쳐 수천 명의 수급을 얻었다. 흉노는 이듬해에 침공하여 요서태수를 죽이고 어양에서 노략질을 일삼았으나 한안국에게 패배하였고, 뒤이어 무제가 보낸 이식과 위청에게 격퇴되었다. 이때 교위 신분으로 종군한 장차공은 공로를 인정받아 안두후(岸頭侯)에 봉해졌다.
원삭 5년(기원전 124년) 봄, 무제는 위청에게 다시 출격을 명하였다. 장차공은 대행 이식과 함께 장군에 임명되어 우북평에서 출진하였다.
원수 원년(기원전 122년), 회남왕 유안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또 그의 딸 유릉(劉陵)과 간통한 죄로 작위가 박탈되었다.
3. 평가
장차공은 젊어서 의종과 함께 도적질을 했었다. 원삭 원년(기원전 128년) 가을, 거기장군 위청이 기병 3만여 명을 이끌고 흉노를 쳐 수천 명의 수급을 얻었을 때 교위 신분으로 종군하여 공로를 인정받아 안두후(岸頭侯)에 봉해졌다.
원삭 5년(기원전 124년) 봄, 무제는 위청에게 다시 출격을 명하였고, 장차공은 대행 이식과 함께 장군에 임명되어 우북평에서 출진하였다.
그러나 원수 원년(기원전 122년), 회남왕 유안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그의 딸 유릉(劉陵)과 간통한 죄로 작위가 박탈되었다.
4.1. 사마천의 《사기》
사마천의 《사기》 권111 위장군표기열전에 장차공에 관한 기록이 있다. 반고의 《한서》에도 관련 기록이 있는데, 권17 경무소선원성공신표와 권55 위청곽거병전에 등장한다.
4.2. 반고의 《한서》
반고의 《한서》에는 장차공에 대한 기록이 두 군데에 나타난다. 권17 경무소선원성공신표와 권55 위청곽거병전이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