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도말리우스 달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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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 도말리우스 달로이는 1783년 리에주에서 태어난 벨기에의 지질학자, 정치인, 민족학자이다. 그는 파리에서 지질학을 공부하고 프랑스 북부의 지질학적 연구를 수행했으며,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하며 지질학 연구에 몰두했다. 달로이는 프랑스 지질도 제작에 기여했으며,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에 언급될 정도로 변형을 통한 강하에 대한 선구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벨기에 과학 아카데미 회장과 프랑스 지질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벨기에 상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주요 저서로는 '프랑스 북부 지질학 에세이', '벨기에 지질학 개관', '인류의 종 또는 민족지학의 기초' 등이 있으며, 1875년 브뤼셀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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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도말리우스 달로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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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출생 | 1783년 2월 3일 |
사망 | 1875년 1월 15일 |
국적 | 벨기에 |
직업 | 지질학자 |
상세 정보 | |
분야 | 지질학, 광물학 |
영향 받은 인물 | 장 앙드레 드 뤽 |
2. 초기 생애 및 교육
리에주에서 태어난 그는 고대 귀족 가문의 외아들이었으며, 그의 교육은 신중하게 지도되었다. 고향에서 고전 연구를 마친 후, 그는 1801년 부모에 의해 파리로 보내져 대도시의 사회적, 문학적 이점을 활용하도록 했다. 그러나 뷔퐁의 저작물에 의해 일깨워진 지질학에 대한 강한 관심은 그의 발걸음을 박물관과 식물원으로 이끌었다.
리에주에서 태어난 그는 고대 귀족 가문의 외아들이었으며, 그의 교육은 신중하게 지도되었다. 고향에서 고전 연구를 마친 후, 1801년 부모에 의해 파리로 보내졌다. 뷔퐁의 저작물에 영향을 받아 지질학에 대한 강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파리의 박물관과 식물원을 자주 찾았다.
그는 1803년과 1805년에 다시 파리를 방문했고, 이 기간 동안 푸르크루아, 라세페드, 조르주 퀴비에의 강의를 들었다. 그의 귀향길은 보통 북부 프랑스를 횡단하는 지질학 탐험을 위한 기회가 되었다. 그는 1808년에 이미 ''광산 저널(Journal des Mines)''에 ''프랑스 북부의 지질학 에세이(Essai sur la géologie du Nord de la France)''라는 제목의 논문을 기고했다. 그는 따라서 전국에 걸쳐 일련의 조사를 수행할 계획을 세웠다. 이는 군 복무 면제를 수반하는 제국 지질도 제작 위임으로 더욱 진전되었다.[1]
3. 지질학 연구
그는 1803년과 1805년에 다시 파리를 방문하여 푸르크루아, 라세페드, 조르주 퀴비에와 같은 당대 유명 학자들의 강의를 들었다. 귀향길에는 종종 북부 프랑스를 횡단하며 지질학 탐사를 수행했다. 1808년에는 ''광산 저널(Journal des Mines)''에 ''프랑스 북부의 지질학 에세이(Essai sur la géologie du Nord de la France)''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며 초기 연구 성과를 보였다. 이를 계기로 그는 프랑스 전역에 걸친 체계적인 지질 조사를 계획했고, 이는 군 복무 면제를 조건으로 제국 지질도 제작 임무를 맡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1]
3. 1. 프랑스 및 주변 지역 지질도 제작
달로이는 현대 지질학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특히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지질학적 지식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는 벨기에와 라인강 유역의 석탄기 지층, 그리고 파리 분지의 제3기 퇴적층에 대한 중요한 연구를 수행했다.
그는 지질 조사에 열정적으로 몰두하여 1813년까지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여 15,500마일(약 25000km) 이상을 여행했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그의 지질학적 활동에 대해 우려하며 탐험을 중단하도록 설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제작한 프랑스와 인접 지역의 지질도는 1822년에 출판되었으며, 이는 이후 아르망 듀프르누아와 엘리 드 보몽이 수행한 더욱 상세한 지질 측량의 기초가 되었다.[2]
1830년에는 진화론적 관점을 지지하며 에티엔 조프로이 생틸레르의 편에 서서 조르주 퀴비에의 고정주의적 견해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달로이가 그린 프랑스 지질도는 1841년 아미 부에가 서유럽 전체를 포함하는 새로운 지질도를 발표하기 전까지 해당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지질학적 자료로 활용되었다.
3. 2. 변형을 통한 강하(Descent with modification)
1861년에 출판된 종의 기원 세 번째 판에서 찰스 다윈은 '역사적 개요'를 추가하여, 종이 변형을 겪으며 기존 생명체로부터 유래한다는 변형을 통한 강하 개념을 먼저 제시한 자연학자들의 공로를 인정했다. 달로이 역시 이들 중 한 명으로 언급되었다.
다윈은 달로이가 1846년에 발표한 짧지만 중요한 논문('Bulletins de l'Acad. Roy. Bruxelles,' tom. xiii. p. 581)에서 새로운 종이 개별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변형을 통해 생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를 밝혔다고 소개했다. 다윈에 따르면, 달로이는 이러한 생각을 이미 1831년에 처음 발표했었다.[3]
3. 3. 벨기에 과학 아카데미 및 기타 학술 활동
그는 1816년부터 벨기에 과학 아카데미의 활발한 회원이었으며, 세 번이나 회장직을 역임했다. 같은 해 네덜란드 왕립 연구소의 국외 거주 1급 통신 회원이 되었다. 이 연구소가 네덜란드 왕립 예술 과학 아카데미(Koninklijke Nederlandse Akademie van Wetenschappennld)로 개편되자, 1851년에 외국인 회원으로 다시 합류했다.
1817년에는 파리 분지의 제3기 퇴적층을 자세히 연구하여 백악기 및 일부 더 오래된 지층의 범위를 확인했으며, 이를 지도에 처음으로 명확하게 묘사했다. 1852년에는 프랑스 지질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민족학자로서도 명성을 떨쳤으며, 90세에 가까운 나이인 1872년에는 브뤼셀에서 열린 선사 고고학 회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4. 정치 활동
1814년 디낭 아롱디스망의 부감독관을 시작으로, 1815년에는 리에주주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같은 해 나뮈르주 주지사로 임명되어 벨기에 혁명 이후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다. 1848년에는 벨기에 상원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851년에는 상원 부의장이 되었다.
정치가로서 달로이는 국민의 복지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공직 생활로 인해 지질학 연구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과학 분야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고 때때로 현장 연구에 참여하기도 했다. 학술 활동에도 참여하여 1816년 브뤼셀 학술원의 회원이 되었고, 1850년에는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말년에는 민족학과 철학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91세의 나이에도 과학 탐험을 직접 수행했으며, 이 탐험의 여파로 건강이 악화되어 1875년 1월 15일 브뤼셀에서 사망했다.
5. 만년 및 사망
나뮈르 주지사직을 벨기에 혁명 이후까지 유지했다. 1848년 벨기에 상원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851년에는 부의장이 되었다. 학술 활동도 활발히 하여 1816년 브뤼셀 학술원의 회원이 되었고, 1850년에는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정치가로서 달로이는 국민의 복지를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바쁜 공직 생활 중에도 평생의 관심사였던 지질학 연구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고 때때로 현장 연구에 참여했다. 만년에는 민족학과 철학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91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홀로 과학 탐험을 떠났는데, 이 탐험의 여파로 건강이 악화되어 1875년 1월 15일 브뤼셀에서 사망했다.
6. 주요 저서
- 1808 - ''프랑스 북부 지질학 에세이''
- 1823 - 프랑스 정부의 명령에 따라 작성된 프랑스 지질도. 1813년에 완성되었지만, 1822년에 출판되었다.
- 1828 - ''네덜란드 지질학적 묘사''
- 1831 - ''지질학의 기초''
- 1833 - ''지질학 입문''
- 1842 - ''벨기에 지질학 개관''
- 1843 - ''지질학 개론''
- 1845 - ''인류의 종 또는 민족지학의 기초'': 민족지학 실용 지침서 또는 인류 종에 대한 설명으로, 다양한 민족, 그들의 사회적 특징, 다양한 인류 종의 구분 및 세분화를 다루었다. 이 저서에서 달로이는 피부색에 따라 인종 분류를 확립했다.
- 1853 - ''지질학 개요''
- 1860 - ''광물학'', A. Jamar (브뤼셀). IRIS에서 온라인으로 텍스트 제공
- 1874 - ''변환론'', La Revue scientifique|라 레뷔 시앙티피크프랑스어, 1874년 1월 31일
이 외에도 ''물리학, 화학 및 자연사 저널'', ''프랑스 광산 연보'', ''파리 인류학회'' 회보, ''프랑스 지질학회'' 회보, 벨기에 왕립 과학 문학 예술 아카데미 회보 등 다수의 저널에 회고록 및 노트를 기고했다.
참조
[1]
서적
Mémoires
1828
[2]
간행물
Notice nécrologique dur Jean-Baptiste-Julien d'Omalius d'Halloy
https://www.annales.[...]
1878-04-25
[3]
문서
1861
[4]
웹사이트
Jean-Baptiste-Julien d' Omalius d'Halloy (1783 - 1875)
https://www.dwc.knaw[...]
Royal Netherlands Academy of Arts and Sci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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