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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퀴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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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르주 퀴비에는 1769년 몽벨리아르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비교 해부학자이자 고생물학자이다. 그는 비교 해부학을 통해 동물을 분류하고 화석 연구를 통해 고생물학을 발전시켰으며, 멸종의 개념을 확립했다. 퀴비에는 '부분 상관의 원리'를 통해 뼈 하나만으로도 동물의 전체적인 모습을 추론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1817년에는 저서 『동물계』를 출판하여 동물 분류 체계를 제시했다. 그는 격변설을 지지하며 진화론을 비판했지만, 그의 연구는 근대 과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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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퀴비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조르주 퀴비에의 초상화
본명장 레오폴 니콜라 프레데리크 퀴비에
출생일1769년 8월 23일
출생지몽벨리아르, 뷔르템베르크 공국, 신성 로마 제국
사망일1832년 5월 13일
사망지파리, 프랑스 왕국
국적프랑스
분야박물학
고생물학
해부학
소속 기관국립 자연사 박물관
콜레주 드 프랑스
주요 업적동물계 저술
층서학 및 비교 해부학 분야 확립
화석 기록에서 동물군 계승의 법칙 발견
멸종을 과학적 현상으로 인정
진화론에 반대
격변설 대중화
저자 약칭 (식물학)Cuvier
저자 약칭 (동물학)Cuvier
발음 (영어)/ˈkjuːvieɪ/
발음 (프랑스어)[ʒɔʁʒ(ə) kyvje]
학력
출신 학교슈투트가르트 대학교
업적
퀴비에의 연구"동물계"를 구축
고생물학의 창시자화석 연구
비교 해부학의 창시자동물 기관 간의 관계 연구
격변설 주장지구 역사의 격변을 설명하는 이론 주장

2. 생애

프랑수아-앙드레 뱅상(François-André Vincent)이 그린 초상화, 1795년


조르주 퀴비에는 몽벨리아르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개신교 조상들은 종교 개혁 이후 그곳에 살았다.[9] 퀴비에의 어머니는 안 클레망스 샤텔이었고, 아버지 장-조르주 퀴비에는 스위스 근위대 중위이자 몽벨리아르 시의 부르주아였다.[10] 당시 몽벨리아르는 1793년 10월 10일에 프랑스에 합병될 뷔르템베르크 공국에 속해 있었다. 퀴비에는 김나지움과 슈투트가르트(Stuttgart)의 카롤리네 아카데미(Caroline Academy)에서 수학하며 뛰어난 학업 성취를 보였다. 특히, 독일 교육을 통해 아브라함 고틀로브 베르너(Abraham Gottlob Werner)의 해성설(Neptunism)을 접하며 과학 이론과 방법에 대한 모델을 확립했다.[13]

졸업 후, 퀴비에는 노르망디에서 에리시 백작(Comte d'Héricy)의 외아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일했다. 이 시기에 퀴비에는 앙리 알렉상드르 테시에(Henri Alexandre Tessier)를 만나 파리의 학자들과 교류하게 되었고, 이는 퀴비에의 학문적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795년 파리로 온 퀴비에는 자르댕 드 플랑트(Jardin des Plantes)의 동물 해부학(Animal Anatomy) 교수 장-클로드 메르트뤼드(Jean-Claude Mertrud)의 조수로 일하다가, 1802년 그의 사후 교수직을 이어받았다. 이후 비교 해부학(Comparative Anatomy) 교수로 이름을 바꾸었다.[16] 또한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French Academy of Sciences)의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팡테온 중앙 학교(École Centrale du Pantheon)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퀴비에는 고생물학과 비교 해부학 분야에서 중요한 연구들을 발표하며 명성을 얻었다.

퀴비에는 콜레주 드 프랑스(Collège de France)와 자르댕 드 플랑트(Jardin des Plantes)의 교수를 역임하고, 프랑스 학술원의 상임 서기로 활동했다. 왕립 학회(Royal Society),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Royal Swedish Academy of Sciences), 네덜란드 왕립 예술 과학 아카데미(Royal Netherlands Academy of Arts and Sciences),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American Academy of Arts and Sciences) 등 여러 학술 단체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17]

퀴비에는 학문적 업적 외에도 나폴레옹(Napoleon) 치하의 황제 평의원, 프랑스 부르봉 왕정 복고(Bourbon Restoration in France) 시기의 공교육 평의회 의장과 파리 대학교 총장(Chancellor of the University of Paris)을 역임했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 대장이자 프랑스 귀족이었으며, 루이 필립 1세(Louis Philippe I) 치하에서는 내무부 장관과 국무원 의장을 역임했다.[19] 그는 독실한 루터교(Lutheran) 신자였으며,[20] 종교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21]

파리 페르 라셰즈 묘지(Père Lachaise Cemetery)에 있는 퀴비에의 묘

2. 1. 유년기 및 교육



'''장 레오폴드 니콜라 프레데릭 퀴비에'''는 1769년 뷔르템베르크 공국(현재 프랑스 몽벨리아르)의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났다.[9] 퀴비에 가문은 쥐라 산맥 지역의 프랑스스위스 국경 지대에서 종교 박해를 피해 이주해 온 가문이었다. 그의 아버지 장 조르주 퀴비에는 스위스 근위대 중위였고, 어머니 안 클레망스 샤텔은 어린 퀴비에를 열성적으로 교육했다.[10]

어머니의 교육 덕분에 퀴비에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김나지움(Gymnasium) 시절, 그는 라틴어그리스어를 쉽게 익혔고, 수학, 역사, 지리에서 항상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11] 특히, 인류의 역사는 그의 주요 관심사였으며, 군주와 왕자들의 목록, 연대기적 사실들을 한번 기억하면 잊지 않았다고 한다.[11]

10세 때 김나지움에 입학한 직후, 퀴비에는 콘라트 게스너(Conrad Gessner)의 『동물지(Historiae Animalium)』를 접하고 자연사(natural history)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그는 친척 집에서 조르주-루이 르클레르 드뷔퐁 백작(Georges-Louis Leclerc, Comte de Buffon)의 『자연사(Histoire Naturelle)』를 빌려 읽으며, 12세 때 이미 동물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갖추게 되었다.[11]

퀴비에는 슈투트가르트(Stuttgart)의 카롤리네 아카데미(Caroline Academy)에서 4년간 수학하며 모든 과목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특히 독일어 습득에 뛰어나 9개월 만에 독일어 상을 수상했다.[13] 퀴비에는 독일 교육을 통해 아브라함 고틀로브 베르너(Abraham Gottlob Werner)의 해성설(Neptunism)을 접하며 과학 이론과 방법에 대한 모델을 확립했다.[13]

2. 2. 가정교사 시절과 테시에와의 만남

졸업 후, 학문적인 직책을 기다리는 동안 생활할 돈이 없었다. 그래서 1788년 7월, 노르망디(Normandy)의 피퀴빌(Fiquainville) 성에서 개신교 귀족인 에리시 백작(Comte d'Héricy)의 외아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일자리를 구했다. 1790년대 초, 그는 화석을 현존하는 형태와 비교하기 시작했다.[13] 퀴비에는 인근 발몽(Valmont) 마을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농업 관련 토론 모임에 참석했다. 거기서 그는 가짜 신분을 사용하고 있던 앙리 알렉상드르 테시에(Henri Alexandre Tessier)(1741–1837)와 알게 되었다. 그는 이전에 의사이자 유명한 농학자였으며, 파리의 테러(Reign of Terror)에서 도망쳤다. 테시에가 농업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퀴비에는 그를 『방법적 백과사전(Encyclopédie Méthodique)』의 농업 관련 기사의 저자로 알아보고 그에게 테시에 씨라고 불렀다.[14]

테시에는 놀라며 "나는 알려졌고, 따라서 망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퀴비에는 "망했습니다! 아닙니다; 당신은 이제부터 우리의 가장 간절한 보살핌의 대상입니다."라고 대답했다.[14] 그들은 곧 친밀해졌고 테시에는 파리의 동료들에게 퀴비에를 소개했다. "나는 노르망디의 거름 더미에서 진주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의 친구 앙투안 오귀스탱 파르망티에(Antoine-Augustin Parmentier)에게 편지를 썼다.[15]

2. 3. 파리에서의 활동과 학문적 업적

1795년, 테시에의 주선으로 파리에 온 퀴비에는 장-클로드 메르트뤼드(Jean-Claude Mertrud)(1728–1802)의 조수가 되었다. 메르트뤼드는 자르댕 드 플랑트(Jardin des Plantes)의 동물 해부학(Animal Anatomy) 교수였다. 1802년 메르트뤼드가 사망하자 퀴비에는 그를 대신하여 교수직을 맡았고, 교수직의 이름은 비교 해부학(Comparative Anatomy) 교수로 바뀌었다.[16]

같은 해 프랑스 학술원(Institut de France)이 설립되자,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French Academy of Sciences)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796년 4월 4일, 팡테온 중앙 학교(École Centrale du Pantheon)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같은 해 4월 국립 연구소(National Institute) 개소식에서 첫 번째 고생물학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는 1800년에 『현존하는 코끼리와 화석 코끼리 종에 대한 회고록(Mémoires sur les espèces d'éléphants vivants et fossiles)』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6] 이 논문에서 그는 인도와 아프리카 코끼리(elephant)의 골격 유적과 매머드(mammoth) 화석(fossil) 및 당시 "오하이오 동물"로 알려진 화석 골격을 분석했다. 1796년 두 번째 논문에서 파라과이(Paraguay)에서 발견된 큰 골격을 설명하고 분석했는데, '메가테리움(Megatherium)'이라고 명명했다.[6] 그는 이 골격이 또 다른 멸종 동물을 나타내며, 두개골을 나무에 사는 나무늘보와 비교하여 일종의 땅에 사는 거대 나무늘보라고 결론지었다.

이 두 편의 1796년 논문은 고생물학 역사(history of paleontology)와 비교 해부학(comparative anatomy)의 전환점이 된 중요한 사건이었다. 또한 퀴비에의 명성을 크게 높였고, 멸종(extinction)의 실재성에 대한 오랜 논쟁을 종식시켰다.

1799년, 루이-장-마리 도봉통(Louis-Jean-Marie Daubenton)의 뒤를 이어 콜레주 드 프랑스(Collège de France)의 자연사 교수가 되었다. 1802년, 자르댕 드 플랑트(Jardin des Plantes)의 명예 교수가 되었고, 같은 해 교육감을 동행하는 연구소의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803년 초, 아카데미의 물리 과학 부서의 상임 서기로 선출되어 이전 직책을 포기하고 파리로 돌아왔다.[17] 1806년, 왕립 학회(Royal Society)의 외국인 회원이 되었고, 1812년에는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Royal Swedish Academy of Sciences)의 외국인 회원이 되었다. 같은 해, 네덜란드 왕립 연구소(Royal Institute of the Netherlands)의 통신 회원이 되었고, 1827년 회원이 되었다.[18] 1822년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American Academy of Arts and Sciences)의 명예 외국 회원으로 선출되었다.[18]

1812년, 퀴비에는 암호 동물학자 베르나르 휘벨만스(Bernard Heuvelmans)가 "경솔한 말"이라고 부른, 큰 동물이 발견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발언을 했다. 그의 사후 10년 후인 1842년, 리처드 오언(Richard Owen)에 의해 "공룡(dinosaur)"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다.

퀴비에는 1817년, 『동물계(Le Règne Animal)』 초판을 출판하여 현생 및 화석 동물에 대한 연구 결과를 집대성했다.

1821년, 대형 포유류의 신종 발견은 더 이상 없을 것이라는 "성급한 선언"을 발표했으나, 이후에도 많은 신종이 발견되었다.

1825년, 『지구 표면의 혁명에 관한 논문(Discours sur les révolutions de la surface du globe)』을 출판하여 격변설을 주장했다.

1828년부터 1831년까지 아실 발랑시앵(Achille Valenciennes)과의 공동 작업으로 『어류의 자연사(Histoire naturelle des poissons)』를 출판했다.

2. 4. 공직 활동

퀴비에는 나폴레옹(Napoleon) 치하에서 황제 평의원을, 프랑스 부르봉 왕정 복고(Bourbon Restoration in France) 치하에서는 공교육 평의회 의장과 대학 총장을 역임했다.[19] 레지옹 도뇌르 훈장 대장이자 프랑스 귀족이었으며, 루이 필립 1세(Louis Philippe I) 치하에서는 내무부 장관과 국무원 의장을 역임했다.[19]

독실한 루터교도로서,[20] 평생 개신교 신앙을 유지하며 정기적으로 예배(church service)에 참석했다.[21] 1818년 파리 성서 협회(Bible society) 창립에 적극 참여하여 부회장을 역임했고,[21] 1822년부터 1832년 사망할 때까지 프랑스 대학의 개신교 신학부 학장을 맡았다.[22]

1808년, 나폴레옹에 의해 프랑스 제국 대학교 평의회에 임명되었으며, 1809년, 1811년, 1813년에는 프랑스에 합병된 알프스(Alps)와 라인(Rhine) 너머 지역의 고등 교육 기관 현황을 조사하고 중앙 대학교와의 연계 방안을 보고하는 위원회를 주재했다. 이와 관련하여 세 개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프랑스 학술원 종신 서기관으로서, 과학 아카데미의 사망한 회원들에 대한 여러 편의 ''역사적 찬사(éloges historiques)''를 작성했을 뿐만 아니라, 물리 및 자연 과학의 역사에 대한 여러 보고서를 저술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1810년에 출판된 ''1789년 이후 물리 과학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보고서(Rapport historique sur le progrès des sciences physiques depuis 1789)''이다.

나폴레옹 몰락(1814년) 이전 국무원에 입성했으며, 부르봉 왕가 복고 이후에도 그 지위를 유지했다. 대학교 총장으로 선출되어 공공 교육 평의회 임시 의장직을 수행했고, 루터교도로서 프로테스탄트 신학부를 감독했다. 1819년 내무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어 사망 시까지 재직했다.

1826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 대장이 되었고, 이후 국무원 의장에 임명되었다. 실용주의자(Doctrinaires)의 일원이었던 그는 1832년 초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같은 해 5월 콜레라로 사망했다.

3. 과학적 업적

퀴비에는 비교해부학을 기반으로 현존하는 동물을 분류하고, 화석과의 비교를 통해 고생물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그는 동물의 몸은 각 부분이 기능과 연결된 구조를 가지며, 서로 연관된 통일적인 체계를 갖는다고 보았다. 이러한 "부분 상관의 원리"를 통해 특정 기관이나 하나만으로도 그 동물의 전체 모습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56]

1800년, 퀴비에는 그림만으로 바이에른에서 발견된 화석을 최초로 비행 파충류로 정확하게 식별하여 출판하였고,[52] 1809년에 ''Ptero-Dactyle''(후에 프테로닥틸루스로 명명)이라고 이름 붙였다.[53] 이는 익룡의 최초 발견으로 알려져 있다. 1808년에는 마스트리흐트에서 발견된 화석을 거대한 해양 도마뱀, 즉 최초로 알려진 모사사우루스로 식별했다.[54]

퀴비에의 1834년 체코어판 ''Discours sur les revolutions de la surface du globe''에 나온 이크티오사우루스플레시오사우루스 삽화


퀴비에는 파충류포유류가 아닌 지배적인 동물이었던 시대가 있었다고 추측했다.[55] 이 추측은 이후 메리 애닝 등 영국의 지질학자들에 의해 이크티오사우루스, 플레시오사우루스, 공룡 화석이 발견되면서 사실로 확인되었다.

그는 몽마르트르파리 근교 뷔트 쇼몽[62] 등지의 에오세 지층의 멸종 포유류를 다룬 방대한 양의 화석 관련 연구 결과를 남겼다. 여기에는 하마, 팔레오테리움, 아노플로테리움, 유대류(퀴비에가 ''Didelphys gypsorum''으로 명명), 메갈로닉스, 메가테리움, 동굴하이에나, 익룡, 멸종 코뿔소 종, 동굴곰, 마스토돈, 멸종 코끼리 종, 매너티와 바다표범의 화석 종, 악어류, 거북류, 어류, 조류 등의 화석이 포함된다.

퀴비에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네발짐승 화석 뼈에 관한 연구''(1812년, 1821년, 1825년)와 ''지구 표면의 혁명에 관한 논고''(1825년)라는 두 저서를 통해 발표했다.

1828년판 ''동물계''의 도판


퀴비에의 가장 큰 업적은 ''동물계(Le Règne Animal)''(1817년 초판, 1829-1830년 개정판)이다.

3. 1. 비교 해부학과 분류

퀴비에는 파리 박물관에서 동물의 해부학적 분류에 대한 연구를 더욱 발전시켰다. 그는 분류가 기관들이 집합적으로 기능하는 방식에 기반해야 한다고 믿었는데, 이 개념을 그는 기능적 통합이라고 불렀다. 퀴비에는 해부학적 분류의 일부로 덜 중요한 신체 부위를 더 중요한 기관계에 종속시키는 개념을 강화했다.[57] 그는 이러한 아이디어를 1817년 저서 『동물계』에 포함시켰다.

그의 해부학적 연구에서 퀴비에는 기능이 분류학 분야에서 형태보다 더 큰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그의 과학적 신념은 부분의 상관관계와 존재 조건의 원리라는 개념에 기반했다. 전자의 원리는 기관의 기능과 유기체의 생존을 위한 실질적인 사용 사이의 연결을 설명한다. 후자의 원리는 주변 환경과 관련된 동물의 생리적 기능을 강조한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1800년에서 1805년 사이에 출판된 그의 과학적 논문, 『비교해부학 강의(Leçons d'anatomie comparée)』와 1817년의 『동물계』에 실렸다.[57]

퀴비에는 부분 상관 관계의 원리에 따라, 동물 몸의 모든 기관은 서로 깊이 상호 의존적이며, 종의 생존은 이러한 기관들이 상호 작용하는 방식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소화관이 고기를 소화하는 데 가장 적합하지만 몸은 식물을 찾아 먹는 데 가장 적합한 종은 생존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종에서 각 신체 부위의 기능적 중요성은 다른 부위와 상호 연관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종은 스스로를 유지할 수 없다.[56][57]

궁극적으로 퀴비에는 그의 분류학적 및 해부학적 연구에 기반하여 동물을 분류한 네 가지의 분류(embranchments)를 개발했다. 그는 나중에 각 범주를 세분화하여 동물을 척추동물과 무척추동물 그룹으로 분류하는 획기적인 작업을 수행했다. 예를 들어, 그는 무척추동물을 연체동물(Mollusca), 방사동물(Radiata), 절지동물(Articulata)을 포함한 세 가지 개별 범주로 세분화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는 또한 종이 이러한 범주를 넘어 이동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했는데, 이 이론은 종의 변형이라고 불린다.[57]

1798년, 퀴비에는 그의 첫 독립적인 저서인 『동물의 자연사 개요(Tableau élémentaire de l'histoire naturelle des animaux)』를 출판했는데, 이는 팡테온 학교에서 그의 강의 요약본이며, 그의 동물계 자연 분류의 기초이자 최초의 진술로 간주될 수 있다.

퀴비에는 달팽이, 조개, 오징어를 하나의 범주인 연체동물로 분류하였는데, 이는 하나의 분지(embranchment)이다. 그는 이 세 동물이 껍데기 모양과 식성 면에서 외형적으로 얼마나 다른지를 언급했지만, 전체적인 외관과 관련된 주목할 만한 패턴을 발견했다. 퀴비에는 노르망디에서 연체동물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시작했으며, 그의 논문은 1792년 초부터 출판되기 시작했다.[61]

3. 2. 부분 상관의 원리

퀴비에는 동물의 몸 각 부분이 기능적으로 연결된 구조를 이루며, 서로 연관된 통일된 체계를 갖는다고 보았다. 그는 "부분 상관의 원리"를 통해 특정 기관이나 뼈 하나만으로도 그 동물의 전체 모습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56]

예를 들어, 어떤 동물의 이빨이 고기를 먹기에 적합하다면, 소화 기관, 골격, 운동 기관, 심지어 감각 기관까지도 먹이를 사냥하고 잡는 데 능숙하게 배열되어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 퀴비에는 이러한 관계가 동물의 생존에 필수적이라고 보았다.[57]

이 원리는 화석 복원에 활용되어, 퀴비에가 고생물학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기는 데 기여했다. 대부분 화석은 조각난 상태로 발견되는데, 부분 상관의 원리를 통해 각 뼈의 기능과 다른 부분과의 관계를 파악하여 원래 모습을 추론할 수 있었다.[57] 또한, 이 원리는 멸종을 옹호하는 증거를 제시하는 데에도 활용되었다. 퀴비에는 화석화된 골격이 현존하는 종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여 멸종 개념을 뒷받침했다.

퀴비에는 자신의 해부학 원리가 아이작 뉴턴앙투안 라부아지에가 확립한 법칙처럼 자연사를 진정한 과학적 수준으로 끌어올릴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는 언젠가 해부학이 뉴턴의 물리 법칙처럼 단순하고 수학적이며 예측 가능한 법칙으로 표현될 것이라고 믿었으며, 자신의 원리가 그 중요한 단계라고 생각했다.[58]

부분 상관 원리는 퀴비에가 비교해부학고생물학을 발전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이 원리로 화석을 연구하고 멸종된 동물의 모습을 복원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3. 3. 고생물학

퀴비에는 화석 연구를 통해 멸종의 개념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파리 분지에서 발견된 화석들을 연구하면서, 이들이 현재 살아있는 동물들과는 전혀 다른, 이미 멸종된 종의 유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예를 들어, 퀴비에는 매머드와 마스토돈의 화석을 현생 코끼리의 골격과 비교하여 이들이 서로 다른 별개의 종이며, 현재는 멸종되었다는 것을 확인했다.[49] 또한, 메가테리움 화석을 현생 나무늘보와 비교하여, 메가테리움이 거대한 땅늘보의 일종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퀴비에가 1796년 논문에 포함시킨 아시아코끼리매머드의 턱뼈


이러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퀴비에는 지구 역사상 여러 차례의 격변적인 사건들이 발생하여 생물 종들이 멸종했다는 격변설을 주장했다.[49] 그는 단일한 재앙이 아니라 여러 차례의 재앙이 발생하여 서로 다른 동물상의 연속을 초래했다고 믿었다.

퀴비에는 자신의 격변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화석 기록을 증거로 제시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화석이 세계 최초의 파충류이며, 그 뒤를 이어 포유류와 인류가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1800년, 퀴비에는 바이에른에서 발견된 화석을 그림만으로 최초로 비행 파충류로 정확하게 식별하고, 1809년에 ''Ptero-Dactyle''(후에 프테로닥틸루스로 명명)이라고 명명했다.[52][53] 1808년에는 마스트리흐트에서 발견된 화석을 거대한 해양 도마뱀, 즉 최초로 알려진 모사사우루스로 식별했다.[54]

퀴비에는 파충류가 지배적인 동물상이었던 시대가 있었다고 추측했으며,[55] 이는 이후 메리 애닝 등의 영국 지질학자들에 의해 이크티오사우루스, 플레시오사우루스, 공룡 화석이 발견되면서 사실로 확인되었다.

퀴비에는 부분 상관 관계의 원리를 통해 화석 재구성에 기여했다. 그는 동물의 각 부분이 기능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흩어진 화석 조각들을 조합하여 원래의 모습을 복원했다. 예를 들어, 몽마르트르의 석고 채석장에서 발견된 유대류 화석의 골반뼈를 통해, 유대류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다른 뼈들도 존재할 것이라고 예측했다.[57]

퀴비에는 비교해부학을 기반으로 하여 현존하는 동물의 분류를 수행하고, 화석과의 비교를 통해 고생물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그는 동물의 몸은 각 부분이 기능과 연결된 구조를 가지며, 그것들이 서로 관련되어 통일적인 체계를 갖는다고 보았다. 거기에서 기관이나 하나만으로도 그 동물의 전체적인 모습을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퀴비에는 자신의 해부학 원리가 자연사를 진정한 과학적 수준으로 끌어올릴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는 언젠가 해부학이 뉴턴의 물리 법칙처럼 단순하고 수학적이며 예측 가능한 법칙으로 표현될 것이라고 확신했다.[58]

퀴비에는 멸종된 포유류와 관련된 방대한 양의 화석 연구 결과를 남겼다. 여기에는 하마의 화석 종, 팔레오테리움, 아노플로테리움, 유대류, 메갈로닉스, 메가테리움, 동굴하이에나, 익룡, 멸종된 코뿔소 종, 동굴곰, 마스토돈, 멸종된 코끼리 종 등이 포함된다.

퀴비에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네발짐승 화석 뼈에 관한 연구''와 ''지구 표면의 혁명에 관한 논고''라는 두 가지 저술 형태로 발표했다.

3. 4. 격변설

퀴비에는 자신이 조사한 대부분의 동물 화석이 멸종된 종의 유해라고 믿었다. 1796년 발표한 논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모든 사실들은 서로 일치하며 어떤 보고서에도 반대되지 않으므로, 저에게는 우리 세계 이전에 존재했던, 어떤 종류의 재앙으로 파괴된 세계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많은 자연 과학자들과는 달리, 퀴비에는 동물 멸종이 인간의 영향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대신 그는 인류가 화석 기록을 간접적으로 유지할 만큼 오랫동안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다양한 문화권의 기록을 분석하여 대홍수와 같은 격변을 검증하려 했다. 비록 대홍수에 대한 기록이 불분명한 점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지만, 그는 인류 역사의 끝자락에 그러한 사건이 발생했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퀴비에가 격변설의 지지자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격변설은 지구의 지질학적 특징과 생명의 역사가 격변적인 사건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이론이다. 퀴비에는 단일 재앙이 아닌 여러 차례의 재앙이 발생하여 서로 다른 동물군이 연속적으로 나타났다고 믿었다. 그는 1812년 출판된 ''Recherches sur les ossements fossiles de quadrupèdes'' (''사족류 화석 뼈에 대한 연구'')의 서론에서 이러한 생각을 자세히 설명했다.

퀴비에는 격변적인 사건에 대한 설명을 장-앙드레 델뤼와 데오다 드 돌로미외의 이론에서 가져왔다. 델뤼는 1만 년 전 대륙 붕괴로 해저가 상승하여 현재의 대륙이 되었다고 제안했고, 돌로미외는 거대한 쓰나미가 지구를 강타하여 대량 멸종을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퀴비에는 대홍수가 인류 역사에서 비교적 최근에 일어났으며, 지구의 역사가 무한하지 않고 유한하다고 믿었다.

퀴비에는 자신의 격변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화석 기록을 증거로 사용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화석이 세계 최초의 파충류이며, 이후 포유류와 인류가 연대순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구상 동물 역사의 순차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멸종과 새로운 동물 종 출현의 원인을 연구했다.

퀴비에는 알렉상드르 브롱니아르와 함께 파리 암석 순환을 분석했다. 층서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이 암석을 연구한 결과, 지구 역사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추론할 수 있었다. 이 암석에는 연체동물, 포유류 뼈, 조개껍데기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퀴비에와 브롱니아르는 지구 환경 변화가 갑작스러운 격변으로 발생했으며, 그 사이에 장기간 평온한 시기가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예비 논문'은 유명해져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었다. 1826년 퀴비에는 ''Discours sur les révolutions de la surface du globe'' (''지구 표면의 격변에 관한 논문'')이라는 제목으로 개정판을 출판했다.[49]

퀴비에 사후, 격변론은 찰스 라이엘 등이 옹호한 동일과정설에 밀려났다. 동일과정설은 지구의 지질학적 특징이 침식, 화산 활동과 같이 현재 관찰 가능한 힘이 장기간 점진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설명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대량 멸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퀴비에의 격변설은 재조명되었다.[50]

3. 5. 진화론에 대한 반대

퀴비에는 장바티스트 라마르크의 진화론에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생물의 형태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진적으로 변화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퀴비에는 생물 종이 불변하며, 각 종은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의 비교 해부학적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생물체의 각 부분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한 부분만 변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56]

그는 고생물이 시대에 따라 다른 것으로 구성됨을 밝혔지만, 이를 여러 차례의 극적인 지각변동에 의한 멸종과 그 후의 대체에 의한 것이라는, 소위 "격변설"을 주장하며, 진화에 의한 생물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았다.[81]

그러나 이것이 그의 생각이 보수적이었음을 보여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퀴비에는 당시 점차 인식되고 있던 실증주의적인 과학 방법에 따라, 그 범위 내에서는 종의 불변성이 명확했다. 따라서, 반대로 추측적인 연구에 기초하여 제시된 라마르크의 주장에는 납득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4. 유산 및 영향

퀴비에는 비교 해부학과 고생물학 분야의 선구자로, 그의 연구는 근대 과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라마르크와 조프루아 생틸레르가 제시한 진화 이론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퀴비에는 화석 자료를 바탕으로 생물 종이 점진적으로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그가 비교 해부학을 통해 정확한 분류 체계를 만들고자 했기 때문이다.[23] 캘리포니아 대학교 고생물학 박물관에 따르면, 퀴비에는 생물의 해부학적 변화가 생존을 불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믿어 진화를 부정했다.[24][25] 그는 이집트에서 가져온 미라화된 고양이와 따오기가 현생 동물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들어 생물이 진화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뒷받침했다.[24][25]

라마르크는 진화가 매우 느리게 일어나 관찰하기 어렵다고 반박했지만, 퀴비에는 라마르크 등이 "펜 한 번 긋는 것"으로 수십만 년을 도입하는 것을 비판하며, 짧은 시간 동안 변화가 없다면 긴 시간 동안에도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28] 또한 부분 상관의 원리에 따라 동물의 특정 부분만 점진적으로 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29] 퀴비에는 ''라마르크 옹에 대한 찬사''에서 라마르크의 진화 이론이 임의적인 가정에 근거한다고 비판했다.[30][31]

대신 퀴비에는 화석 기록에서 생물 형태가 갑자기 나타나 멸종할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격변설을 제시하고, 이를 성경과 조화시키려 했다.[32][33] 퀴비에의 주장은 이후 진화 비판가들이 창조론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34]

퀴비에는 "화석 유물 중에서 인간의 뼈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라고 언급했지만,[35] 이는 석화된 뼈에 한정된 이야기였다.[36] 그는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면 "화석 인간 석화의 예"를 인정하는 등 열린 태도를 보였다.[37] 그러나 그의 비판과 명성은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판하기 전까지 종의 점진적 변형에 대한 논의를 위축시키는 영향을 미쳤다.[38]

퀴비에는 프로테스탄트 신자로서 모든 인류가 성경 속 아담에서 유래했다는 일원론을 믿었지만, 그의 인종 연구는 과학적 인종주의에 영향을 미쳤다는 비판을 받는다.[64] 그는 인종을 코카소이드(백인), 몽골로이드(황인), 에티오피아인(흑인)으로 분류하고, 두개골의 아름다움과 문명의 질에 따라 각 인종의 특징을 평가했다.[64][65]

퀴비에는 남아프리카 코이코이족 여성 사라 바르트만을 대상으로 한 연구를 진행했는데, 이는 비윤리적인 연구 행태로 비판받는다.[66] 바르트만은 유럽에서 "호텐토트 비너스"라는 이름으로 전시되었고, 퀴비에는 그녀의 사망 후 시신을 해부하여 생식기, 둔부, 두개골 모양 등을 연구했다.[67][68] 퀴비에는 바르트만의 특징이 인간보다 원숭이에 가깝다고 결론 내렸으며,[68] 그녀의 유해는 1970년까지 인류박물관에 전시되었다가 2002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반환되었다.[69][70]

5. 주요 저서


  • 『동물의 자연사 기초편(Tableau élémentaire de l'histoire naturelle des animaux)』 (1798)
  • 『비교 해부학 강의(Leçons d'anatomie comparée)』 (1800-1805)
  • 『동물계(Le Règne Animal)』 (1817)
  • 『사족류의 화석 뼈에 관한 연구(Recherches sur les ossemens fossiles de quadrupèdes)』 (1812)
  • 『지구 표면의 혁명에 관한 논문(Discours sur les révolutions de la surface du globe)』 (1825)
  • 『어류의 자연사(Histoire naturelle des poissons)』 (1828-1831, 아실 발랑시앵과 공저)[76]
  • 『파리 근교 광물 지리학 에세이』(1811, 알렉상드르 브롱니아르와 공저)
  • 『연체동물의 역사와 해부학에 기여하는 회고록』(1817)
  • 『프랑스 왕립 과학원 회원들의 역사적 찬사』(1819-1827)
  • 『지구 이론』(1821)
  • 『1789년부터 현재까지 자연 과학의 진보 역사』(1826-1836)
  • 『모든 알려진 민족들 사이에서 기원부터 현재까지의 자연 과학의 역사』(1841-1845)
  • 『자연 과학 사전』(1816-1845) 편찬 참여
  • 『보편 인명 사전』(1843-18??) 편찬 참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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