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2세 달브레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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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 2세 달브레 백작은 나바라의 카탈리나 여왕과 결혼하여 나바라 왕국의 왕이 되었으나,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의 침공으로 나바라 왕국 남부를 상실했다. 이후 나바라 왕국을 되찾으려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1516년 사망했다. 그의 사후 나바라 왕위는 프랑스 왕국에 병합되었으며, 그는 10명 이상의 자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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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2세 달브레 백작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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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장 달브레 |
| 프랑스어 | Jean d'Albret |
| 바스크어 | Joanes III.a Nafarroakoa |
| 통치 | |
| 작위 | 나바라 국왕 |
| 통치 형태 | 여왕 배우자 |
| 재위 기간 | 1484년 6월 14일 – 1516년 6월 17일 (카트린과 공동 통치) |
| 대관식 | 1494년 1월 12일 |
| 선임자 | 카트린 |
| 후임자 | 카트린 |
| 섭정 유형 | 공동 군주 |
| 섭정 | 카트린 |
| 섭정1 | 페르난도 2세 (1512년–1516년) |
| 섭정 유형1 | 경쟁자 |
| 가문 | |
| 가문 | 알브레 |
| 아버지 | 알랭 1세 달브레 |
| 어머니 | 페리고르 백작부인 프랑수아즈 |
| 결혼 및 자녀 | |
| 배우자 | 카트린, (1484년 결혼) |
| 자녀 | Infanta Anne 엔리케 2세 Infante Charles Isabella, Viscountess of Rohan |
| 출생 및 사망 | |
| 출생일 | 1469년 |
| 출생지 | 세귀르 |
| 사망일 | 1516년 6월 17일 |
| 사망지 | 모넹 |
| 매장지 | 레스카르 대성당 |
2. 나바라 왕 즉위
1484년, 장 3세는 오빠 프랑수아 푀뷔스의 뒤를 이어 나바라의 카탈리나와 결혼하여 나바라의 왕이자 푸아 백작이 되었다. 카탈리나와의 공동 통치는 카탈리나의 어머니 마들렌 드 발루아의 섭정과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의 압력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나바라의 보몽 당에 의해 지원되었다.
1494년 1월 10일 팜플로나에서 즉위식이 거행되었다.[1] 즉위식 직전, 레린 백작인 루이 드 보몽이 요새를 점령하고 약탈했지만,[1] 1493년 크리스마스에 국왕과 여왕의 수도 진입을 막았던 백작과의 평화 협정을 통해 즉위식이 진행되었다.[1]
2. 1. 카탈리나 여왕과의 결혼
1484년, 장 3세는 오빠 프랑수아 푀뷔스의 뒤를 이어 나바라의 카탈리나 (1470–1517)와 결혼하여 나바라의 왕이자 푸아 백작이 되었다. 카탈리나와의 공동 통치는 카탈리나의 어머니 마들렌 드 발루아의 섭정과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의 압력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나바라의 보몽 당에 의해 지원되었다.1494년 1월 10일 팜플로나에서 즉위식이 거행되었다.[1] 즉위식 직전, 레린 백작인 루이 드 보몽이 요새를 점령하고 약탈했지만,[1] 1493년 크리스마스에 국왕과 여왕의 수도 진입을 막았던 백작과의 평화 협정을 통해 즉위식이 진행되었다.[1] 즉위식 이후 일주일간의 축제에서 장 3세와 그의 아버지는 바스크어 구절에서 '라브리'로 언급되었는데, 이는 나바라에서 그들을 부르는 일반적인 이름이었다.[1] 1493년 올리테에서도 로망스어로 작성된 문서에서 동일하게 불렸다.[1]
2. 2. 나바라-바스크어 명칭
카트린과의 즉위식 이후 축제에서 장 3세와 그의 아버지는 바스크어 표현으로 '라브리(Labrit)'라고 불렸는데, 이는 나바라 왕국에서 그들을 부르는 일반적인 이름이었다. 1493년 올리테에서 작성된 로망스어 문서에도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3. 나바라 왕국 침공과 몰락
Jean d'Albret|장 달브레프랑스어 2세 백작과 관련된 나바라 왕국 침공과 몰락은 1512년에 시작되었다.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는 그의 두 번째 부인이자 카탈리나 여왕의 사촌인 푸아의 제르맹을 통해 나바라 왕위를 주장하며 카스티야-아라곤 연합군을 보내 나바라를 침공했다. 알바 공작이 이끄는 카스티야군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로어 나바르(바스나바르)로 진격하여 1512년 9월 10일 생장피에드포르를 점령하고 ''메린다드'' 전역에 큰 피해를 입혔다.
이 침공으로 인해 나바라 왕국은 피레네 산맥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할되었다. 피레네 산맥 남쪽의 나바라는 페르난도 2세에 의해 카스티야에 합병되었고, 나바라 왕가는 로어 나바르와 베아른 자작령으로 피신했다.[1]
3. 1. 카스티야-아라곤 연합군의 침공
1512년,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는 그의 두 번째 부인이자 카탈리나 여왕의 사촌인 푸아의 제르맹을 통해 나바라 왕위를 주장하며 카스티야-아라곤 연합군을 보내 나바라를 침공했다. 알바 공작이 이끄는 카스티야군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로어 나바르(바스나바르)로 진격하여 1512년 9월 10일 생장피에드포르를 점령하고 ''메린다드'' 전역에 큰 피해를 입혔다. 카스티야군은 생장피에드포르와 그 주변 지역을 확보했지만, 나바라의 존 3세와 카트린에게 충성을 다하는 영주들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했다.침공 이후, 피레네 산맥 남쪽의 나바라는 페르난도에 의해 자치 왕국(''aeque principalis'')으로 카스티야에 합병되었으며, 나바르의 법률과 제도를 존중하겠다는 맹세를 했다 (1515).
3. 2. 나바라 왕국의 분할과 저항
1512년,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가 보낸 카스티야-아라곤 연합군이 나바르를 침공했다. 페르난도 2세의 두 번째 부인은 푸아의 제르맹 (1490–1538)으로, 카트린 여왕의 사촌이었다. 알바 공작이 지휘하는 카스티야 군대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로어 나바르로 진격하여 1512년 9월 10일 생장피에드포르를 점령하고 ''메린다드'' 전역에 큰 피해를 입혔다. 카스티야군은 생장피에드포르와 그 주변 지역에서 나바르의 존 3세와 카트린에게 충성을 다하는 영주들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했지만, 생장피에드포르와 그 주변 지역을 확보했다. 침공 이후, 피레네 산맥 남쪽의 나바르는 승리한 페르난도에 의해 자치 왕국(''aeque principalis'')으로 카스티야에 합병되었으며, 나바르의 법률과 제도를 존중하겠다는 맹세를 했다 (1515).왕가는 로어 나바르와 인접한 왕실 피레네 영토이자 공국인 베아른 자작령으로 피신했다.[1] 1510년 나바르 의회와 베아른의 삼부회는 외부 침략에 대한 더 나은 방어를 보장하기 위해 연방을 창설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1] 베아른의 수도는 포였으며, 존 3세와 카트린은 마지막 시기에 오르테즈 및 타르브와 함께 이곳을 주요 기지로 삼았다.[1]
4. 나바라 왕국 복원 시도와 죽음
장 3세는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가 1516년 1월에 사망한 후, 소베르 드 베아른에서 나바라 망명자들과 베아른 등 자신의 영토에서 온 병사들로 군대를 소집했지만, 전체 전투 병력은 수백 명에 불과했다.[1] 페드로(나바라 원수)가 이끄는 두 부대가 진군했지만, 시스네로스 추기경에게 첩자들이 정보를 제공하여 피레네 산맥에서 카스티야 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 재정복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장 3세는 불리한 외교적 결과에 좌절하여 1516년 6월 14일 베아른의 모네인에 있는 에스구아라바크 성에서 치명적인 열병으로 사망했다.[1]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스페인으로부터 나바라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으며, 아내인 카타리나 여왕에게 카스티야의 코르테스에 대표를 보내 나바라 왕국의 복원을 요구하도록 촉구했다.[1] 그는 팜플로나 대성당에 묻히고 싶어했지만, 스페인의 영구적인 점령으로 인해 레스카르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4. 1. 복원 시도 실패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가 1516년 1월에 사망한 후, 장 3세는 소베르 드 베아른에서 나바라 망명자들과 베아른을 비롯한 그의 영토에서 온 병사들로 군대를 소집했지만, 전체 전투 병력은 수백 명에 불과했다.[1] 페드로(나바라 원수)가 이끄는 두 부대의 진군은 시스네로스 추기경에게 첩자들이 정보를 제공하여 피레네 산맥에서 카스티야 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 재정복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4. 2. 죽음과 유산
페드로(나바라 원수)가 이끄는 부대의 진군이 실패하고 불리한 외교적 결과에 좌절한 장 3세는 1516년 6월 14일 베아른의 모네인에 있는 에스구아라바크 성에서 치명적인 열병으로 사망했다.[1]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스페인으로부터 나바라를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아내인 카타리나 여왕에게 카스티야의 코르테스에 대표를 보내 나바라 왕국의 복원을 요구하도록 촉구했다.[1] 팜플로나 대성당에 묻히고 싶어했지만, 스페인의 영구적인 점령으로 인해 그럴 수 없었다. 그의 시신은 대신 그보다 몇 달 더 오래 산 카타리나 여왕과 함께 레스카르 대성당에 안치되었다.5. 가족
장 2세 달브레 백작과 카트린은 10명이 넘는 자녀를 두었다.
| 이름 | 출생 | 사망 |
|---|---|---|
| 앤 | 1492년 5월 19일 | 1532년 8월 15일 |
| 마그달레나 | 1494년 3월 29일 | 1504년 5월 |
| 카트린 | 1495년 | 1532년 11월 |
| 장 | 1496년 6월 15일 | 1496년 11월 |
| 퀴테리아 | 1499년 | 1536년 9/10월 |
| 사산아들 | 1500년 | 1500년 |
| 앙드레 포에부스 | 1501년 10월 14일 | 1503년 4월 17일 |
| 앙리 2세 | 1503년 4월 18일 | 1555년 5월 25일 |
| 부에나벤투라 | 1505년 7월 14일 | 1510/1511년 |
| 마르탱 | 1506년경 | 1512년 |
| 프랑수아 | 1508년 | 1512년 |
| 샤를 | 1510년 12월 12일 | 1528년 9월 |
| 이자벨 | 1513/1514년 | 1555년 |
참조
[1]
서적
Guía de la conquista de Navarra en 12 escenarios
Txertoa Argitaletxea
[2]
서적
バー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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