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제후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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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저제후선우는 기원전 101년에 흉노의 선우가 되어 5년간 재위했다. 그는 형 구리호선우의 뒤를 이어 선우가 되었으며, 한나라와의 평화적인 관계를 모색하는 동시에 잦은 침략을 감행했다. 한무제가 보낸 사신 소무를 억류하고, 이광리가 이끄는 한나라 군대와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이릉이 흉노에 항복하자 그의 사위로 삼기도 했다. 기원전 96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뒤는 호록고선우가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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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제후선우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작위 | 탱리고도선우 |
재위 기간 | 기원전 101년 - 기원전 96년 |
휘 | 저제후 |
왕조 | 흉노 |
가문 | 연제씨 |
아버지 | 이지사선우 |
자녀 | 호록고선우, 좌대장 |
친척 | 형 구리호선우 |
칭호 | |
중국어 | 且鞮侯 (Qiědīhóu) |
2. 생애
저제후선우는 형 구리호선우 치세에 좌대도위를 지냈다. 기원전 101년, 형이 죽자 선우로 옹립됐다. 흉노는 정양, 운중, 장액, 그리고 주천을 침략했다.[3]
한 무제는 흉노와의 관계를 평화적인 협상을 통해 해결하려 했다.[3] 기원전 101년, 소무가 이끄는 사절단이 흉노로 향했으나, 저제후선우는 매우 오만했고, 충성에 대한 질문조차 제기되지 않았다.[3] 소무의 부관 장승(張勝)은 한나라 포로들과 반란을 모의했다.[3] 격노한 선우는 공모자들을 처형하고, 사절단 구성원들에게 죄를 인정하고 흉노 편으로 전향할 것을 촉구했다.[3] 소무는 조국을 배신하는 것을 거부했고, 바이칼 호로 보내져 19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다가 한나라로 돌아왔다.[3]
기원전 99년, 한나라의 이사장군 이광리가 천산에서 우현왕을 쳐서 만여 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혀갔다. 그러나 이광리를 포위하니 한나라 군대는 거의 탈출하지 못하고 6-7할의 손실을 입었다. 또 인우장군 공손오와 강노도위 노박덕은 헛수고만 했다. 한편 기도위 이릉의 보기 5천 명을 저제후선우 본인이 쳤는데, 만여 명의 인명 피해가 났으나 이릉이 고립돼 퇴각하자 포위해 이릉과 그의 병사들의 항복을 받아냈고 도망간 자는 4백여 명에 불과했다. 저제후선우는 이릉을 귀히 여겨 자기 딸을 주었다.
기원전 97년, 한나라의 이광리가 기병 6만과 보병 10만을 이끌고 삭방군에서 쳐들어왔다. 또 노박덕이 1만 명을 거느리고 이광리와 합류했고, 한열은 보기 3만 명으로 오원군에서, 공손오는 기병 만 명과 보병 3만 명으로 안문군에서 출진했다. 이에 처자와 재물은 여오수(톨 강) 북쪽으로 옮기고 10만 기를 거느리고 강 남쪽에서 이광리와 10여 일을 싸웠으며, 흉노에 전세가 기울어 한나라 군은 철수했다.
기원전 96년, 재위 5년 만에 죽었다. 전에 큰아들을 좌현왕, 작은아들을 좌대장으로 삼았는데, 좌현왕이 병이 있어 흉노 귀족들이 좌대장을 옹립했으나 좌대장이 좌현왕에게 양보해 좌현왕이 호록고선우로 뒤를 이었다.
2. 1. 즉위 전
2. 2. 즉위 및 한나라와의 관계
저제후선우는 형 구리호선우 치세에 좌대도위를 지냈다. 기원전 101년, 형이 죽자 선우로 옹립되었다. 즉위 후, 저제후선우는 한나라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며 억류하고 있던 한나라 사신들을 돌려보냈다.기원전 102년, 형인 구려호선우가 병사하면서 저제후선우가 즉위하였다.
기원전 101년, 흉노는 정양, 운중, 장액, 그리고 주천을 침략했다. 한 무제는 흉노와의 관계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소무를 사절로 보내 흉노를 회유하려 했으나, 저제후선우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3] 소무의 부관 장승은 흉노에서 반란을 모의했으나 발각되었고, 소무는 흉노에 억류되었다.[3]
기원전 99년, 한나라의 이사장군 이광리가 천산에서 우현왕을 쳐서 만여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이광리는 흉노에게 포위되어 큰 손실을 입었다. 기도위 이릉은 저제후선우에게 항복하고 그의 사위가 되었다.
기원전 97년, 한나라의 이광리가 삭방군에서 흉노를 공격했으나, 흉노에 전세가 기울어 한나라 군은 철수했다.
기원전 96년, 저제후선우는 재위 5년 만에 죽었다.
2. 3. 한나라와의 전투
저제후선우는 형 구리호선우 치세에 좌대도위를 지냈으며, 기원전 101년 형이 죽자 선우로 옹립되었다. 기원전 99년, 한나라 이사장군 이광리가 이끄는 3만 기병이 주천군에서 출격하여 천산에서 우현왕을 공격해 만여 명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흉노의 대규모 반격에 포위되어 한나라 군대는 6-7할의 병력을 잃었다. 같은 해, 기도위 이릉이 이끄는 보병 5천 명은 거연 북쪽 1천여 리에서 저제후선우와 직접 전투를 벌여 만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군량이 부족하여 퇴각하던 중 흉노에 포위되어 항복했다. 저제후선우는 이릉을 귀히 여겨 자신의 딸과 혼인시켰다.기원전 97년, 한나라는 다시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이사장군 이광리가 6만 기병과 10만 보병을 이끌고 삭방군에서 출격했고, 강노도위 노박덕은 1만 명, 유격 장군 한설은 3만 명, 인우 장군 공손오는 4만 명을 이끌고 각각 다른 지역에서 출진했다. 흉노는 여오수(오늘날의 톨 강) 북쪽으로 물러났고, 저제후선우는 10만 기병을 이끌고 이광리와 10여 일 동안 격렬하게 싸웠으나, 결국 한나라 군은 흉노에 전세가 기울어 철수하였다.
2. 4. 사망
형 구리호선우 치세에 좌대도위를 지냈다. 기원전 101년, 형이 죽자 선우로 옹립됐다.[4]기원전 99년, 한나라의 이사장군 이광리가 천산에서 우현왕을 쳐서 만여 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혀갔다. 그러나 이광리를 포위하니 한나라 군대는 거의 탈출하지 못하고 6-7할의 손실을 입었다.[4] 또 인우장군 공손오와 강노도위 노박덕은 헛수고만 했다. 한편 기도위 이릉의 보기 5천 명을 저제후선우 본인이 쳤는데, 만여 명의 인명 피해가 났으나 이릉이 고립돼 퇴각하자 포위해 이릉과 그의 병사들의 항복을 받아냈고 도망간 자는 4백여 명에 불과했다. 이릉을 귀히 여겨 자기 딸을 주었다.[4]
기원전 98년 가을, 안문군에 쳐들어갔고, 기원전 97년, 한나라의 이광리가 기병 6만과 보병 10만을 이끌고 삭방군에서 쳐들어왔다. 또 노박덕이 1만 명을 거느리고 이광리와 합류했고, 한열은 보기 3만 명으로 오원군에서, 공손오는 기병 만 명과 보병 3만 명으로 안문군에서 출진했다. 이에 처자와 재물은 여오수(톨 강) 북쪽으로 옮기고 10만 기를 거느리고 강 남쪽에서 이광리와 10여 일을 싸웠으며, 흉노에 전세가 기울어 한나라 군은 철수했다.[4]
기원전 96년, 재위 5년 만에 죽었다. 전에 큰아들을 좌현왕, 작은아들을 좌대장으로 삼았는데, 좌현왕이 병이 있어 흉노 귀족들이 좌대장을 옹립했으나 좌대장이 좌현왕에게 양보해 좌현왕이 호록고선우로 뒤를 이었다.[4]
3. 평가 및 영향
저제후선우는 한나라와의 관계에서 강온 양면 전략을 구사하며 흉노의 세력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이릉의 항복과 그 이후의 행적은 당시 흉노와 한나라 간의 복잡한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저제후선우 시기의 흉노와 한나라 간의 갈등은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현대 한국의 외교 안보 정책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참조
[1]
서적
'"Collection of information on peoples in Central Asia in ancient times"'
Moscow-Leningrad
1851
[2]
서적
Historical Notes
[3]
서적
'"Materials on Sünnu history"'
Science, Moscow
1968
[4]
서적
'"Collection of information on peoples in Central Asia in ancient times"'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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