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광리는 전한 무제 시기의 장군으로, 대완 정벌과 흉노와의 전쟁에서 활약했다. 무제의 명을 받아 이사장군으로 대완을 두 차례 원정했으나, 첫 번째 원정은 실패하고 두 번째 원정에서 한혈마를 얻는 데 성공했다. 이후 흉노 정벌에 나섰으나, 유굴리와 함께 창읍왕 유박을 옹립하려 했다는 혐의로 가족이 처형되자 흉노에 투항했다. 흉노에서 위율의 모함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기원전 88년 사망 - 유박 (창읍애왕)
유박은 전한 무제의 아들이자 창읍애왕으로, 무제의 총애를 받았으나 태자가 되지 못하고 창읍왕에 봉해졌으며, 외척과 결탁하여 태자 옹립을 시도하다 실패했고, 그의 아들 유하가 왕위를 계승했다. - 기원전 88년 사망 - 프톨레마이오스 10세 알렉산드로스 1세
프톨레마이오스 10세 알렉산드로스 1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일원으로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클레오파트라 3세의 아들이며, 권력 다툼 속에서 파라오가 되었지만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과 여러 사건을 겪고 암살당했다. - 한나라의 장군 - 반초
반초는 후한 시대의 군인이자 외교관으로,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서역 경영에 크게 기여하고 실크로드를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 한나라의 장군 - 장건
장건은 한나라의 외교관이자 탐험가로, 한무제의 명을 받아 흉노 견제를 위한 대월지 동맹을 추진하며 서역에 파견되어 실크로드 개척의 계기를 마련하고 중국과 서역의 교류를 촉진하는 데 기여했다. - 인신공희 - 입다
입다는 사사기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판관으로,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맹세로 인해 딸을 제물로 바쳤고, 뛰어난 능력으로 지도자가 되었지만 에브라임 지파 학살을 저지르는 등 승리와 비극, 윤리적 논쟁을 야기하는 인물이다. - 인신공희 - 이도메네우스
이도메네우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크레타 왕가의 인물로, 아게노르 가문, 에우로페 납치, 미노타우로스 퇴치 등 크레타 관련 신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직접적인 전승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이광리 | |
---|---|
기본 정보 | |
한자 표기 | 李廣利 |
간체자 표기 | 李广利 |
로마자 표기 | Lí Guǎnglì |
웨이드-자일스 표기 | Li Kuang-li |
다른 이름 | 貳師將軍 (이사장군) |
인물 정보 | |
직업 | 장군 |
소속 왕조 | 한나라 |
생애 | |
활동 시기 | 한무제 시대 |
주요 활동 | 대완 원정 |
가족 관계 | |
자매 | 한무제의 후궁 이부인 |
조카 | 이연년 |
기타 | |
관련 인물 | 이광 |
2. 생애
이광리는 젊은 시절 정해진 직업 없이 제멋대로인 인물이었다.[2] 기원전 104년(태초 원년), 무제는 총애하는 이부인(이광리의 여동생)을 위해 이광리를 이사장군으로 봉하고, 병력 수만 명을 이끌고 한혈마를 얻기 위해 대완 정벌에 나섰다.[2]
무제 때 서역과 흉노와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운 이광리는 대완의 한혈마를 얻고자 하는 무제의 명을 받아 대완 원정에 나섰다. 태초 4년(기원전 104년), 이사장군(貳師將軍) 칭호를 받고 속국의 기병 6천 명과 불량배 수만 명을 이끌고 1차 원정을 떠났으나 실패하고 옥문관이 봉쇄되기도 하였다.[1] 이후 무제는 지원병을 보내 이광리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었고, 두 번째 원정에서는 6만 명, 소 10만 두, 말 3만여 필, 나귀·노새·낙타 만 필에 달하는 대군을 거느리고 원정에 성공하여, 좋은 말 수십 필과 중하급 말 암수 3천여 필을 얻고 대완의 귀족으로 친한파인 매채(昧蔡)를 새 왕으로 세웠다.[1]
대완 정벌을 마친 이광리는 이후 흉노와의 전쟁에 동원되었다. 기원전 99년(천한 2년), 이릉은 흉노 정벌에 나선 이광리를 지원하기 위해 5천의 병력을 받았으나, 흉노 3만 군세와 싸우다 병력 차이와 지원 부족으로 항복했다.
기원전 90년(정화 3년), 이광리는 다시 황제의 명을 받아 흉노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이광리가 범부인성에 이르렀을 때, 승상 유굴리와 함께 자신의 생질 창읍왕을 태자로 세우려 한 사실이 드러나 정치적 위기에 처했다. 흉노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워 위기를 모면하려 했으나, 결국 흉노에 투항하였고,[9] 이 원정에서 돌아온 이는 천 명에 한두 명에 불과했다.[8]
이광리는 호록고선우에게 중용되었으나, 위율보다 높은 대우를 받자 위율의 질투를 샀고, 결국 위율의 모함으로 처형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배경
이광리는 젊은 시절에는 정해진 직업 없이 제멋대로인 인물이었다.[2] 기원전 104년(태초 원년), 무제는 총애하는 이부인(이광리의 여동생)을 위해 이광리를 이사장군으로 봉하고, 병력 수만 명을 이끌고 한혈마를 얻기 위해 대완의 이사성 공략에 나섰다.[2]2. 2. 대완 원정 (1차, 2차)
무제 때 서역과 흉노와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운 이광리는 대완의 한혈마를 얻고자 하는 무제의 명을 받아 대완 원정에 나서게 되었다. 당시 한나라는 장건을 파견하여 서역을 세력권에 두고 있었는데, 대완에는 한혈마라는 명마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무제는 이를 얻고자 대완의 수도 이사성(貳師城)으로 사신을 파견하였으나, 대완 왕 무과는 이를 무시하였다. 이에 무제는 대완을 원정하려 하였고, 대완에 사신으로 간 요정한은 대완 군이 취약하여 소수 강노병으로도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무제는 애첩 이부인에게 작위를 주고 싶어, 태초 4년(기원전 104년), 이부인의 작은오빠인 이광리에게 이사성을 무찌를 장수라 하여 이사장군(貳師將軍)이란 칭호를 붙이고 속국의 기병 6천 명과 불량배 수만 명을 파견하였다.[1]이광리의 첫 원정은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인근 소국들은 군량을 주지 않았고, 대완 변경의 욱성(郁成)에 도착했지만, 풍토병으로 인해 군사들이 죽었으며, 대완의 성은 쉽사리 깨지지 않았다. 이광리는 돈황으로 귀환했는데 남은 병사가 2할도 채 안 됐다. 이에 보급을 얻고자 복귀하려 하였으나, 무제는 크게 노하여 옥문관을 봉쇄하고 이광리를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1]
이후 무제는 죄수들을 사면하고 기병과 불량배들을 더 많이 모아 만든 지원병을 보내 이광리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었다. 이 두 번째 원정에서 이광리는 6만 명, 소 10만 두, 말 3만여 필, 나귀·노새·낙타 만 필에 달하는 더 큰 대군을 거느리고 돈황을 떠났으며, 이사성을 함락한 후 좋은 말을 선별할 집구교위 2명도 데리고 갔다. 이번에는 한나라의 대군을 보고 소국들이 군량을 내어주었고, 군량을 주지 않는 윤두(侖頭)는 함락하고 도륙했다. 시간을 끌다가 대완의 계략을 당할까봐 욱성을 우회해 대완을 직접 공격해, 이사성으로 통하는 물길을 돌리고 포위 공격하여 외성을 함락하고 전미(煎靡)를 포로로 잡았다. 이에 대완의 귀족들이 모의해 무과를 죽이고 그 머리를 가지고 한나라 진영으로 가서 무과의 머리와 좋은 말을 주는 조건으로 화약을 청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말을 다 죽이고 강거와 연합해 싸우겠다고 협박했다. 당시 강거는 아직 진군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광리는 대완에 있는 중국인들이 우물을 파주고, 강거가 대완과 연합하면 이기지 못할 것을 염려해 화약을 맺고, 좋은 말 수십 필과 중하급 말 암수 3천여 필을 얻고 대완의 귀족으로 친한파인 매채(昧蔡)를 새 왕으로 세웠다. 그래서 대완의 내성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원정군을 파하고 돌아왔다.[1]
별군을 이끌고 욱성에 이른 교위 왕신생(王申生)과 전 홍려 호충국 등 천여 명이 욱성의 공격으로 지고 왕신생과 호충국은 전사했으며, 일부 병력만이 살아서 도망쳐 본대로 왔다. 이에 수속도위 상관걸에게 욱성을 치게 하니, 욱성의 왕이 강거로 달아났다. 상관걸은 강거까지 추격했고, 대완이 졌다는 소식을 듣자 강거에서 욱성의 왕을 상관걸에게 내어주었다. 상관걸은 욱성의 왕을 이광리에게 보냈으나, 호송병 중 조제가 욱성의 왕을 죽였고, 조제와 상관걸은 함께 이광리에게 돌아왔다.[1]
2. 3. 흉노와의 전쟁
대완 정벌을 마친 이광리는 이후 흉노와의 전쟁에 동원되었다. 기원전 91년(정화 2년)과 기원전 90년(정화 3년)에 걸쳐 상곡·오원과 오원·주천군으로 쳐들어오자, 어사대부 상구성, 중합후 마통과 함께 흉노 원정에 나섰다. 상구성과 마통은 각각 작은 공적을 세우고 물러났고, 이광리는 7만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서 흉노의 우대도위와 위율의 5천 기병을 속국 기병 2천 명을 보내 격파했다.[9]기원전 99년(천한 2년), 이릉은 흉노 정벌에 나선 이광리를 지원하기 위해 5천의 병력을 받았으나, 흉노 3만 군세와 싸우다 병력 차이와 지원 부족으로 항복했다. 이 일로 이릉 일족은 처형당했고, 사마천은 궁형에 처해졌다.
기원전 90년(정화 3년), 이광리는 다시 황제의 명을 받아 흉노 정벌을 위해 오원으로 출병했다. 그 전날 밤, 이광리는 인척이자 승상이었던 팽후 유굴모(유승의 아들)와 창읍왕 유박을 황태자로 추대해 달라는 밀담을 나눴다. 이광리는 위교까지 전송한 유굴모에게 "귀공께서 창읍왕을 황태자로 세우도록 폐하께 청원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창읍왕이 황위에 오르신다면, 귀공께서는 이후 근심하실 일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2. 3. 1. 연연산 전투
정화 2년(기원전 91년)과 3년(기원전 90년), 이광리는 흉노와의 전쟁에 동원되었다. 상구성, 마통과 함께 흉노 원정에 나섰으나, 상구성과 마통은 작은 공적을 세우고 물러났다. 이광리는 7만 군사를 거느리고 흉노의 우대도위와 위율의 5천 기병을 격파했다.[9]그러나 이광리가 범부인성(달란짜가디의 동북쪽에 있는 성)에 이르렀을 때, 승상 유굴리와 함께 자신의 생질 창읍왕을 태자로 세우려 한 사실이 드러나 유굴리가 요참에 처해지고 처자식도 연루되어 구금되는 정치적 위기에 처했다. 이광리는 흉노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워 위기를 모면하려 했으나, 질거수(셀렝게 강)까지 북진했다가 휘하 장수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장사와 결휴도위 휘거후 뇌전이 이광리를 사로잡으려 모의했으나, 이광리는 장사를 죽이고 후퇴하여 연연산에 이르렀다.[9]
호록고 선우는 한나라 군대가 피로한 틈을 타 5만 기를 거느리고 이광리 군을 공격했다. 10여 일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 흉노는 한나라 군대 앞에 깊은 구덩이를 파고 뒤에서 공격했고, 한나라 군대는 크게 혼란에 빠져 이광리는 투항했다. 이 원정에서 돌아온 이는 천 명에 한두 명에 불과했다. 태의령 수단(隨但)은 이광리에게 가족이 주멸됐다고 거짓말을 해 이광리가 흉노에게 투항하게 한 죄로 체포되었고, 이광리의 일족은 주멸됐다.[8] 호록고는 이광리를 사위로 삼는 등 크게 예우하였다.[9]
2. 4. 흉노 투항과 최후
정화 4년(기원전 89년), 호록고가 한나라 사신에게 태자가 반란을 일으킨 것을 비난하자, 사신은 흉노 선우 묵특이 아버지 두만을 죽인 일을 언급하며 맞받아쳤다. 이로 인해 사신은 3년간 흉노에 억류되었다가 풀려났다.[9]한편, 이광리보다 먼저 흉노에 투항한 위율은 이광리를 시기하였다. 호록고의 어머니가 병에 걸리자, 위율은 무당을 시켜 호록고에게 이사장군을 제물로 바치라고 부추겼다. 호록고는 무당의 말을 따라 이광리를 체포했고, 이광리는 "나는 결국 흉노 놈들에게 죽는 것인가!"라고 한탄하며 제물로 바쳐졌다. 이광리가 죽은 후, 흉노에는 몇 달 동안 비와 눈이 내려 가축이 죽고 백성들은 역병에 시달렸으며, 곡식도 거두지 못했다. 호록고는 두려움에 빠져 이광리의 사당을 세웠다.
이광리가 흉노를 추격하며 승기를 잡고 있을 때, 내자령(600석의 관료) 곽양이 "유굴리의 부인이 남편이 무제의 질책을 받은 탓에 저주를 하고, 이광리와 함께 창읍왕을 황제의 자리에 앉히기 위한 기도를 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 보고로 인해 무제는 유굴리를 요참형에 처하고, 그의 처자식 또한 참수했다. 이광리의 처자식도 연좌되어 처형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광리는 실의에 빠져 흉노에 투항했다.
이광리는 호록고선우에게 중용되었으나, 위율보다 높은 대우를 받자 위율의 질투를 샀고, 결국 위율의 모함으로 처형되었다.
3. 평가
이광리는 한나라 무제 때 흉노 정벌에 여러 차례 참전한 장수였지만, 그의 군사적 업적과 개인적 행실에 대해서는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
긍정적인 평가로는, 기원전 104년과 기원전 102년에 걸쳐 대완을 정벌하고 한혈마를 획득하여 한나라의 위상을 높인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두 번째 원정에서는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대완을 굴복시켜 3천여 마리의 한혈마를 얻는 성과를 거두었다.[1]
그러나 부정적인 평가도 적지 않다. 기원전 99년 흉노 정벌 당시 이릉이 흉노에 항복하게 된 배경에는 이광리의 지원 부족이 있었고, 이로 인해 이릉의 일족이 처형되고 사마천이 궁형에 처해지는 비극이 발생했다.[1] 또한 기원전 90년에는 자신의 여동생의 아들인 창읍왕 유박을 황태자로 만들기 위해 유굴모와 모의한 사실이 드러나 정치적 야망을 추구했다는 비판을 받는다.[2]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이광리 자신은 물론 그의 가족까지 처형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광리는 흉노에게 투항한 후 호록고선우에게 중용되었으나, 결국 다른 한나라 출신 투항자인 卫律|위율중국어의 질투로 인해 참언을 당해 처형되었다.[3] 이는 그의 무책임한 선택이 초래한 비극적인 결말이었다.
3. 1. 긍정적 평가
기원전 104년(태초 원년), 한나라 무제는 대완의 명마 한혈마를 얻기 위해 이광리를 이사장군으로 임명하고 수만 명의 병력을 주어 이사성을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원정은 실패했고, 이광리는 둔황에서 2년간 머물렀다.[1]기원전 102년 (태초 3년), 무제는 다시 이광리에게 정예병 6만 명을 포함한 대규모 병력을 주어 대완을 공격하게 했다. 이광리는 40여 일간 대완성을 포위 공격하여 대완을 항복시키고 3천여 마리의 한혈마를 얻는 데 성공했다. 비록 이 과정에서 많은 병력 손실이 있었지만, 이광리는 한혈마 획득이라는 군사적 업적을 달성하여 해서후에 봉해졌다.[1]
3. 2. 부정적 평가
기원전 99년(천한 2년), 흉노 정벌에 나선 이광리를 지원하기 위해 이릉에게 5천의 병력이 주어졌다. 그러나 이릉은 이광리와 합류하기 전에 흉노 3만 군세와 싸우다 병력 차이와 지원 부족으로 인해 항복하고 만다. 이 일로 이릉 일족은 처형당했고, 그를 변호한 사마천은 궁형에 처해졌다.[1]기원전 90년(정화 3년), 이광리는 다시 황제의 명을 받아 흉노 정벌을 위해 오원으로 출병했다. 그 전날 밤, 이광리는 자신의 인척이자 승상이었던 팽후 유굴모(무제의 조카이자 유승의 아들)와 밀담을 나누었다. 이 자리에서 이광리는 자신의 여동생이자 무제의 총애를 받던 이부인의 아들 창읍왕 유박을 황태자로 추대해 달라고 부탁했다. 유굴모에게 "귀공께서 창읍왕을 황태자로 세우도록 폐하께 청원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창읍왕이 황위에 오르신다면, 귀공께서는 이후 근심하실 일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드러냈다.[2]
이후, 내자령(600석의 관료) 곽양이 "유굴리의 부인이 남편이 무제의 질책을 받은 탓에 저주를 하고, 이광리와 함께 창읍왕을 황제의 자리에 앉히기 위한 기도를 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 때문에, 무제는 유굴리를 체포하여 요참형에 처했으며, 처자식 또한 참수형에 처했다. 또한 이에 연좌되어 이광리의 처자식도 처형되었다.[2]
이때, 이광리는 승세를 타고 흉노를 추격하고 있었지만, 이 소식을 듣고 실의에 빠져 흉노에게 투항했다. 이는 자신의 안위와 권력욕을 위해 국가와 백성을 저버린 무책임한 행동이었다.[2]
이광리는 흉노의 군주인 호록고선우에게 중용되었지만, 같은 한나라 투항자였던 卫律|위율중국어의 상관으로 취급받았기 때문에, 위율의 질투를 받아, 후에 그의 참언으로 처형되었다.[3]
4. 가계
참조
[1]
문서
Li Guangli's biography in ''Book of Han'' indicate that he surrendered to the Xiongnu in the 3rd year of the ''Zheng'he'' era of Emperor Wu's reign (90 BCE). Vol. 94 part 1 of ''Book of Han'' indicate that Li stayed with the Xiongnu for about a year before he was sacrificed. Vol.22 of ''Zizhi Tongjian'' also indicate that he died in the 4th year of the ''Zheng'he'' era, which corresponds to 7 Feb 89 BCE to 25 Jan 88 BCE in the proleptic Julian calendar.
[2]
서적
Records of Han Administration
Psychology Press
[3]
서적
Records of Han Administration
Psychology Press
[4]
서적
The Empire of the Steppes
https://archive.org/[...]
Rutgers University Press
[5]
간행물
Han and Xiongnu a Reexamination of Cultural and Political Relations (Ii)
https://www.jstor.or[...]
2004
[6]
서적
秦漢史
https://books.google[...]
Wunan Publishing
[7]
문서
도홍경, 《진고》 권15
[8]
문서
반고: 《한서》 권97 상 외척전제67 상 중 효무이부인
[9]
서적
한서 외국전 역주 상
동북아역사재단
2009-04-1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