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릉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릉은 전한 시대의 군인으로, 흉노와의 전투에서 항복한 후 흉노에서 우교왕의 지위에 올랐다. 그는 기원전 99년 흉노와의 전투에서 5천 명의 보병을 이끌고 출전하여 흉노군 3만 명과 교전, 8일간의 격전 끝에 1만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흉노에 항복했다. 흉노에서 그는 선우의 딸과 결혼하고 우교왕이 되었으며, 한나라 사신 소무를 흉노에 협력하도록 설득하려 했다. 흉노에서 사망했으며, 아바칸 궁전 유적과의 관련성에 대한 논쟁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하카스 공화국의 역사 - 카라수크 문화
카라수크 문화는 기원전 2300년에서 기원전 700년 사이 시베리아 남부에서 번성한 청동기 시대 문화로, 농업과 목축을 기반으로 움집에서 생활하며, 곡선형 칼과 마구를 특징으로 하는 청동기 제작 기술이 발달했다. - 하카스 공화국의 역사 - 아파나시에보 문화
아파나시에보 문화는 기원전 3300년경부터 기원전 2500년경까지 미누신스크 분지에서 준가리아에 이르는 지역에 존재했던 청동기 시대의 고고학 문화로서, 폰토스-카스피 스텝의 얌나야 문화와 유전적으로 가깝고 초기 목축 및 구리, 청동 야금술을 사용했으며 쿠르간 문화와의 연관성을 통해 초기 인도유럽어족과의 관련성이 제기된다. - 흉노 사람 - 한왕 신
한왕 신은 초한쟁패 시기 유방을 도와 한나라 건국에 기여했으나, 흉노와의 관계 악화로 흉노에 투항하여 전한과 대립한 한나라 양왕의 후손이다. - 흉노 사람 - 휴저왕
휴저는 사징 문화를 기반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킨 흉노의 한 부족으로, 곽거병에게 패배하여 멸망하고 아들 김일제는 한나라에 투항했으며, 휴저택은 휴저왕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기원전 74년 사망 - 전한 소제 (8대)
전한 소제는 전한의 제8대 황제로, 무제의 막내아들로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곽광 등의 보필을 받으며 민생 안정과 국력 회복에 힘썼으나 젊은 나이에 후사 없이 급사했다. - 기원전 74년 사망 - 양창
양창은 전한 시대 곽광의 총애를 받아 대사농, 어사대부, 승상을 지내고 안평후에 봉해졌으며, 창읍왕 유하 폐위에 참여하여 선제 옹립에 기여했고, 사마천의 사위이자 후손 양진이 후한 시대 태위에 이르렀다.
이릉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본명 | 이릉 |
한자 표기 | 李陵 |
로마자 표기 | Li Ling |
사망 | 기원전 74년 |
출생지 | 청지, 룽시, 한나라 |
소속 | 한나라 흉노 |
직위 | 장군 |
2. 초기 생애와 경력
이릉은 오늘날 톈수이에 위치한 롱시 지역 청지(成紀)에서 태어났다. 사기와 한서에 따르면, 이릉은 기마궁술에 능숙했으며, "비장군" 이광의 손자였다. 한 무제는 이릉의 군사적 잠재력을 보고 어린 나이에 위칭과 곽거병이 역임했던 요직인 시중 건장감(侍中建章監)으로 임명했다.
이후 이릉은 변경 전선에서 군사적 직책을 맡아 800명의 병사를 이끌고 1,000마일 이상 떨어진 흉노 영토로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 비록 적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한 무제는 곧 그를 기병 지휘관으로 승진시키고, 정예 보병 5,000명을 이끌게 하여 주취안과 장예에서 지역 예비군 훈련을 담당하게 했다. 몇 년 후, 이릉은 정규 군사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지만 이광리 (한 무제의 매형)와 같은 고위 장군을 호위하는 역할로 제한되었다.
2. 1. 가문 배경
농서 태생으로, 이릉의 할아버지 이광은 문제 · 경제 · 무제 3대에 걸쳐 벼슬을 했으며 비운을 맞은 무장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 이당호(李當戶)는 무제의 총신이었던 한언(韓嫣)을 두들겨 패는 강직한 면을 지닌 선비였다. 이당호는 이릉이 태어나기 몇 달 전에 사망했고, 이릉은 이당호의 유복자로 태어났다.[1]이릉은 오늘날 톈수이에 위치한 롱시 지역 청지(成紀) 출신이다. 사기와 한서에 따르면, 이릉은 기마궁술에 능숙했다. 한 무제는 이릉의 군사적 잠재력을 보고 어린 나이에 위칭과 곽거병이 역임했던 요직인 시중 건장감(侍中建章監)으로 임명했다.[4]
2. 2. 초기 군사 경력
이릉은 농서(隴西) 태생으로, 할아버지 이광은 문제 · 경제 · 무제 3대에 걸쳐 벼슬을 했으며 비운을 맞은 장군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 이당호(李當戶)는 무제의 총신이었던 한언(韓嫣)을 두들겨 패는 강직한 선비였다. 이당호는 이릉이 태어나기 몇 달 전에 사망했고, 이릉은 이당호의 유복자로 태어났다.젊은 시절부터 이사장군 이광리와 함께 흉노와의 전쟁에 참가하여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사기와 한서에 따르면, 이릉은 기마궁술에 능숙했다. 무제는 이릉의 군사적 잠재력을 보고 어린 나이에 이릉을 위청과 곽거병이 역임했던 요직인 시중 건장감(侍中建章監)으로 임명했다.
이후 이릉은 변경 전선에서 군사적 직책을 맡아 800명의 병사를 이끌고 1,000마일 이상 떨어진 흉노 영토로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 비록 적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무제는 곧 그를 기병 지휘관으로 승진시키고, 정예 보병 5,000명을 이끌게 하여 주취안과 장예에서 지역 예비군 훈련을 담당하게 했다. 몇 년 후, 이릉은 정규 군사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지만 이광리 (한 무제의 매형)와 같은 고위 장군을 호위하는 역할로 제한되었다.
3. 흉노와의 전투와 항복
기원전 99년(천한 2년), 이릉은 흉노와의 전투에서 5천 명의 보병을 이끌고 분전했으나, 수적 열세와 보급 부족으로 결국 흉노에 항복했다. 이릉의 항복 소식에 무제는 격노했고, 조정 신료들 대다수는 이릉을 비난했다. 오직 사마천만이 이릉의 무고함을 들어 변호했으나, 무제는 사마천에게 궁형을 내렸다.[2]
3. 1. 이광리 원정 참전
젊은 시절부터 이사장군 이광리와 함께 흉노와의 전쟁에 참가하여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2]기원전 99년 (천한 2년), 기도위(騎都尉)에 임명된 이릉은 무제의 명에 따라 이사 장군 이광리의 군대를 돕기 위해 5천 명의 보병을 이끌고 출진했다.[2] 그러나 합류 전에 선우가 이끄는 흉노의 본대 3만 명과 조우하여 전투에 돌입했다. 이릉군은 맹렬하게 싸웠고, 여섯 배에 달하는 적에게 밀리지 않고 8일 동안 격전을 벌여 흉노 병사 1만 명을 쳐 죽였다.[2] 그는 이 사실을 부하 진보락을 보내 무제에게 보고하게 했다.
당시 이릉은 이광리의 보급로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으나, 무제에게 자신만의 부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형초 출신의 전사들과 뛰어난 검객"으로 구성된 개인 군단을 이끌고 있는데, 그들은 "호랑이를 제압하고 명사수"라고 말했다.[2] 무제는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고 이릉에게 그에게 추가로 배정할 기병이 없다고 경고했으나, 이릉은 5천 명의 보병만으로도 선우의 주력 부대를 격파할 수 있다고 호언했다.
알타이 산맥에 도착했을 때 이릉의 군대는 선우의 주력 부대와 마주쳤고, 두 산 사이에 3만 명의 기병에게 빠르게 포위되었다. 보급품과 지원군이 없었음에도 이릉은 병사들에게 수레를 엄호물로 삼고 전투를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수적으로 큰 우세를 보인 선우는 정면으로 이릉의 군대를 공격했지만, 한나라 군대의 쇠뇌 공격과 그에 따른 추격으로 인해 막대한 사상자를 입었다. 이릉 군대는 연사하고 여러 발을 발사할 수 있는 야전 포병 쇠뇌를 사용하여 흉노를 공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3][2]
그러나 결국 이릉의 군대는 화살이 다 떨어지고 칼이 부러져 더 싸움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이릉은 흉노에 항복했다.[2]
3. 2. 흉노와의 격전
젊은 시절부터 이사장군 이광리와 함께 흉노와의 전쟁에 참가하여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기원전 99년(천한 2년), 기도위(騎都尉)로 임명된 이릉은 무제의 명으로 당시 흉노와 대치 중이던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의 군을 지원하기 위해 5천 보병을 거느리고 출진하였다. 그러나 그가 합류하기도 전에 흉노 선우가 거느리는 흉노 본대 3만 명과 조우했고, 양측은 전투에 들어갔다. 이릉의 군은 흉노에 맞서 분전하며 여섯 배가 넘는 상대 앞에서 여드레에 걸쳐 격전을 이어갔고, 흉노군 1만 명이 이 전투에서 죽었다. 이릉은 자신의 분전을 부하 진보락을 보내어 무제에게 보고하게 하였다.[2]
얼마 되지 않아 이릉의 군도 화살이 다하고 칼이 부러져서 더 싸움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결국 이릉은 흉노에 항복하였다.[2]
이릉이 흉노에 항복하였다는 보고를 들은 무제는 격노하여 앞서 승전보를 전하고 낭중(郞中)으로 임명되어 있던 진보락을 문책했고, 진보락은 자결했다. 한 조정의 다른 신료들도 무제의 분노에 영합해 이릉이 처벌받아 마땅하다고 입을 모았다. 그 속에서 오직 태사령 사마천만이 이릉이 아군의 여섯 갑절에 달하는 흉노의 대병력에 맞서 분전했던 것과 그의 무고함을 들어 이릉을 변호했고, 무제는 그가 이광리를 비방했다는 이유만으로 사마천을 하옥시켜 버렸다. 사마천은 얼마 뒤 궁형(宮刑)에 처해졌다.[2]
알타이 산맥에 도착했을 때 이릉의 군대는 선우의 주력 부대와 마주쳤고, 두 산 사이에 3만 명의 기병에게 빠르게 포위되었다. 보급품과 지원군이 없었음에도 이릉은 병사들에게 수레를 엄호물로 삼고 전투를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수적으로 큰 우세를 보인 선우는 정면으로 이릉의 군대를 공격했지만, 한 군대의 쇠뇌 공격과 그에 따른 추격으로 인해 막대한 사상자를 입었다. 선우는 이후 8만 명의 증원군을 소환하여 막대한 사상자를 발생시켰고, 이릉은 계곡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릉 군대의 하급 장교 관감(管敢)은 상사의 모욕에 앙심을 품고 탈영하여 흉노에게 이릉의 군대가 보급품이 끊기고 화살이 떨어져가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선우는 이후 작은 산길에서 공격을 가하여 이릉의 군대를 계곡에 가두고, 낭떠러지 위에서 한나라 군대를 쏘기 시작했다. 이릉의 병사들은 아래에서 반격을 가하여 하루 만에 50만 개의 화살을 소진했고, 수레 수송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남은 3천 명의 병사들은 차축을 무기로 사용할 정도로 절박한 상태였고, 많은 장교들이 단도를 사용해 전투를 벌였다. 흉노군은 바위로 한나라 군대를 폭격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2]
어느 날 밤, 이릉은 진영을 떠나 아무도 따르지 못하게 하고, 혼자 선우를 암살할 계획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실패하고 돌아와 굳건하게 패배했고 모두 죽게 되었다고 한탄했다. 그의 부하들은 전에 한나라 장군 조파노(趙破奴)가 했던 것처럼 거짓 항복을 제안했지만, 이릉은 "닥쳐! 내가 싸움에서 죽지 않으면, 나는 사내가 아니다!"라고 거절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깃발을 파괴하고 보물을 묻으라고 명령했다. 모든 병사에게 약간의 음식과 물품을 지급하고, 동시에 기다렸다가 탈출한 후 흩어지라고 말했다. 자정에 탈출이 시작되었지만, 아무도 전투 북을 치지 않았다. 이릉과 그의 부관 한연년(韓延年)은 각각 소수의 호위병만 데리고 수천 명의 흉노 기병의 추격을 받으며 말을 타고 싸웠다. 한연년이 전투에서 죽자 이릉은 "황제를 만날 면목이 없다!"라고 울부짖으며 자발적으로 흉노에게 항복했다. 5천 명의 병사 중 포위망에서 국경으로 탈출한 사람은 400명뿐이었다.[2]
그는 연사하고 여러 발을 발사할 수 있는 야전 포병 쇠뇌를 사용하여 흉노를 공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3][2]
3. 3. 항복과 그 배경
젊은 시절부터 이사장군 이광리와 함께 흉노와의 전쟁에 참가하여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기원전 99년(천한 2년), 기도위(騎都尉)로 임명된 이릉은 무제의 명으로 당시 흉노와 대치 중이던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의 군을 지원하기 위해 5천 보병을 거느리고 출진하였다. 그러나 그가 합류하기도 전에 흉노 선우가 거느리는 흉노 본대 3만 명과 조우했고, 양측은 전투에 들어갔다. 이릉의 군은 사자와도 같이 흉노에 맞서 분전하며 여섯 배가 넘는 상대 앞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여드레에 걸쳐 격전을 이어갔고, 흉노군 1만 명이 이 전투에서 죽었다. 이릉은 자신의 분전을 부하 진보락(陳步樂)을 보내어 무제에게 보고하게 하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이릉의 군도 화살이 다하고 칼은 다 부러져서 더 싸움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결국 이릉은 흉노에 항복하고 말았다.[2]
이릉이 흉노에 항복하였다는 보고를 들은 무제는 격노하여 앞서 승전보를 전하고 낭중(郞中)으로 임명되어 있던 진보락을 문책했고, 진보락은 자결했다. 한 조정의 다른 신료들도 무제의 분노에 영합해 이릉이 처벌받아 마땅하다고 입을 모았다. 그 속에서 오직 태사령 사마천만이 이릉이 아군의 여섯 갑절에 달하는 흉노의 대병력에 맞서 분전했던 것과 그의 무고함을 들어 이릉을 변호했고, 무제는 그가 이광리를 비방했다는 이유만으로 사마천을 하옥시켜 버렸다. 사마천은 얼마 뒤 궁형에 처해졌다.[3][4]
4. 흉노에서의 삶
저제후 선우는 이릉의 군사적 재능과 인품을 높이 사 자신의 부하가 될 것을 권했지만, 이릉은 이를 거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무제는 이릉을 흉노에 투항하게 한 자신의 처분을 후회하고 이릉의 남은 부하에게 포상을 내렸고, 공손오를 시켜 이릉을 데려오게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패했다. 공손오는 흉노 포로로부터 '이 장군(李將軍)'이 흉노에게 한나라의 군사 전략을 가르쳐 주었다는 것을 듣고 무제에게 보고했고, 무제는 격노하여 이릉의 가족을 몰살했다.[18] 그러나 흉노 포로가 말한 '이 장군'은 이릉이 아니라 이릉보다 먼저 흉노에 투항했던 이서라는 장군이었다.
한나라 사자로부터 이 소식을 들은 이릉은 억울하게 죽은 일족을 நினை하며 슬퍼했고, 직접 이서를 죽였다. 이 때문에 대알지(大閼氏: 저제후 선우의 어머니)는 분노하여 이릉을 죽이려 했지만, 저제후 선우는 이릉을 북쪽 땅에 숨겼다. 대알지가 죽은 후, 이릉은 흉노 내지로 돌아와 저제후 선우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흉노에서 생활하면서, 소무를 회유하려 했으나, 소무는 절개를 지키며 거절했다. 훗날 한 소제 즉위 후, 이릉의 오랜 친구였던 곽광과 상관걸은 사신을 보내 이릉에게 귀향을 설득했지만, 이릉은 이미 "외국인"이 되었다며 거절했다.
기원전 90년, 흉노는 오원과 상곡, 주천을 두 차례 침략했다. 무제는 흉노에 대한 대규모 반격을 명령하여 이광리가 7만 명, 상구성이 3만 명, 망통이 4만 명을 이끌고 출격했다. 흉노는 모든 부족에게 한나라 군대의 작전 한계에 도전하기 위해 초토화 작전으로 더 북쪽으로 후퇴하게 했다. 상구성 부대가 적을 만나지 못하고 철수하자 흉노는 이릉을 보내 3만 명의 기병으로 한나라 군대를 추격하게 했다. 두 군대는 아이러니하게도 알타이 산맥에서 9일 동안 교전했다. 이릉은 한나라 군대에게 크게 패했고,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후퇴했다.
이릉은 기원전 74년에 망명자로서 흉노족과 함께한 지 20년이 넘어서 병으로 사망했다.[10][11][9]
4. 1. 우교왕 임명과 흉노 사회 적응
저제후 선우는 비록 적이지만 흉노의 대병력에 맞서 용감하게 싸운 이릉의 군사적 재능과 인품을 높이 평가하여 자신의 부하가 될 것을 제안했지만, 이릉은 이를 거절하였다.얼마 후, 한 무제는 자신의 처분을 후회하고 이릉의 남은 부하에게 포상을 내렸고, 공손오에게 명하여 이릉을 데려오게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패했다. 오히려 공손오는 흉노 포로로부터 '이 장군(李將軍)'이 흉노에게 한나라의 군사 전략을 가르쳐 주었다는 것을 듣고 무제에게 보고했고, 무제는 격노하여 이릉의 가족을 몰살했다. 그러나 흉노 포로가 말한 '이 장군'은 이릉보다 먼저 흉노에 투항했던 이서라는 장군이었다. 이릉은 억울하게 두 번이나 명예를 훼손당한 셈이었다.
한나라 사자로부터 이 소식을 들은 이릉은 억울하게 죽은 일족을 நினை하며 슬퍼했고, 직접 이서를 죽였다. 이 때문에 대알지(大閼氏: 저제후 선우의 어머니)는 분노하여 이릉을 죽이려 했지만, 저제후 선우는 이릉을 북쪽 땅에 숨겼다. 대알지가 죽은 후, 이릉은 흉노 내지로 돌아와 저제후 선우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릉은 선우로부터 흉노의 우교왕(右校王)으로 임명되었고, 기원전 74년에 사망했다.[5][6][7][8][9]
이릉은 흉노에서 소무를 회유하려 했으나, 소무는 절개를 지키며 거절했다. 훗날 한 소제 즉위 후, 이릉의 오랜 친구였던 곽광과 상관걸은 사신을 보내 이릉에게 귀향을 설득했지만, 이릉은 이미 "외국인"이 되었다며 거절했다.[10][11][9]
4. 2. 이서 암살 사건
저제후 선우는 적이지만 흉노의 대병력에 맞서 용감하게 싸운 이릉의 군사적 재능과 인격을 높이 평가하여 자신의 부하가 될 것을 제안했지만, 이릉은 거절하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한 무제는 자신의 처분을 후회하고 이릉의 남은 부하에게 포상을 주었으며, 공손오에게 명하여 이릉을 데려오게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패하였다. 공손오는 흉노 포로로부터 '이 장군(李將軍)'이 흉노에게 한의 군사 전략을 가르쳐 주었다는 것을 듣고 무제에게 보고했고, 무제는 격노하여 이릉의 가족을 몰살했다.[18] 그러나 흉노 포로가 말한 '이 장군'은 이릉보다 먼저 흉노에 귀순했던 한인 이서라는 장군을 가리킨 것이었다.
한의 사자로부터 이를 들은 이릉은 일족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였고, 이서를 직접 죽였다. 이 때문에 대알지(大閼氏: 저제후 선우의 어머니)는 분노해 이릉을 죽이려 했지만, 저제후 선우는 이릉을 북쪽 땅에 숨겼다. 대알지가 죽은 뒤에 이릉은 흉노 내지로 돌아왔다.
4. 3. 소무와의 관계
사마천은 한나라 조정에서 이릉을 옹호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황제 무제는 사마천의 변론에 불쾌감을 느껴, 이를 자신의 처남이자 흉노와의 전투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이광리를 공격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사마천은 극형에 해당하는 죄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사마천은 형벌 감경을 받아 거세형을 받고 3년간 옥살이를 했다.[4]이릉은 흉노에 억류된 한나라 사신 소무를 항복시키기 위해 선우에게 두 번 파견되었는데, 이는 이릉과 소무가 동료이자 좋은 친구였기 때문이다. 이릉은 소무가 바이칼 호로 유배된 지 불과 1년 만에 망명했기에 처음에는 소무를 방문하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첫 번째 방문에서 이릉은 소무에게 그의 가족들이 모두 죽거나 재혼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애국심을 끊으려 했다. 또한 무제가 늙고 정서적으로 불안정해졌으며, 자신은 망명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지만 결국 극복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소무는 조국이 부여한 명예와 책임을 소중히 여기며 명예와 죽음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고 이릉에게 말했다. 소무의 흔들리지 않는 용기에 감동받은 이릉은 눈물을 흘리며 "아! 정말 훌륭한 사람이오! 나와 위율은 하늘을 덮을 죄를 지었소!"라고 외쳤다. 두 번째 방문에서 이릉은 소무에게 무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했고, 소무는 슬픔에 피를 토하며 거의 죽을 뻔했다.[4]
이릉과 달리 소무는 한나라에 대한 충절을 굳게 지켰으며, 이릉은 절개를 지키려는 소무를 뒤에서 도왔다.
5. 사망과 후대 평가
이릉은 흉노 선우에게 항복한 후, 젊고 명성이 높아 선우의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선우는 자신의 딸을 이릉과 결혼시키고[5][6][7][8][9], 그를 흉노의 수석 고문이자 한족 반역자인 위율과 같은 직위인 우교왕(右校王)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흉노 태후(大閼氏)는 이릉을 싫어하여 그를 죽이려 했고, 선우는 이릉을 멀리 북쪽 지역으로 보냈다가 태후가 죽은 후에야 다시 불렀다.
기원전 90년, 흉노는 오원, 상곡, 주천을 두 차례 침략했다. 한 무제는 흉노에 대한 대규모 반격을 명령, 이광리(7만 명), 상구성(3만 명), 망통(4만 명)을 이끌고 출격하게 했다. 흉노는 모든 부족에게 초토화 작전을 펼치며 북쪽으로 후퇴했고, 상구성 부대가 적을 만나지 못하고 철수하자 이릉에게 3만 기병을 주어 한나라 군대를 추격하게 했다. 이릉의 군대는 알타이 산맥에서 9일 동안 한나라 군대와 교전했으나 크게 패하고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후퇴했다.
이릉은 흉노에 억류된 한나라 사신 소무를 항복시키기 위해 선우에게 두 번 파견되었다. 이릉과 소무는 동료이자 좋은 친구 사이였으나, 소무가 바이칼 호로 유배된 지 1년 만에 이릉이 망명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를 방문하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첫 번째 방문에서 이릉은 소무에게 중국에 있는 가족들이 모두 죽거나 재혼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애국심을 끊으려 했다. 또한 무제가 늙고 정서적으로 불안정해졌으며, 자신은 망명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지만 결국 극복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소무는 조국이 부여한 명예와 책임을 강조하며 명예와 죽음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고 이릉에게 말했다. 소무의 흔들리지 않는 용기에 감동받은 이릉은 "아! 정말 훌륭한 사람이오! 나와 위율은 하늘을 덮을 죄를 지었소!"라며 눈물을 흘렸다. 두 번째 방문에서 이릉은 소무에게 무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했고, 소무는 너무 슬퍼 피를 토하고 거의 죽을 뻔했다.
예니세이 키르기스 카간국의 통치자들은 아레 씨족 출신으로 이릉을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했다.[10][11][9] 남제서는 북위의 왕족 탁발씨가 이릉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릉의 흉노 출신 부인의 이름은 탁발이었기 때문이다. 일부 비한족 민족은 모계 사회의 고대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12]
차제후선우는 이릉의 재능과 인품을 마음에 들어 해 부하가 될 것을 권했지만, 이릉은 거절했다. 무제는 이릉의 투항을 후회하여 그의 잔여 부대에게 상을 내리고 공손오에게 이릉을 맞이하도록 명했으나, 공손오는 흉노 포로로부터 "이 장군"이 흉노에게 한나라 군략을 가르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계획을 실패로 돌렸다. 무제는 격노하여 이릉의 처자, 어머니, 형과 형의 일가를 모반 혐의로 사형에 처했다. 농서 백성들은 이씨 일족을 불쌍히 여기면서도, 깨끗하게 전사하지 않고 가족을 휘말리게 한 이릉을 혐오했다. 그러나 "이 장군"은 이릉보다 먼저 흉노에 귀순한 한인 이서였다.
이릉은 한나라 사자의 말을 듣고 일족의 비참한 죽음에 슬퍼하며 이서를 스스로 살해했다. 대언지(차제후선우의 어머니)는 분노하여 이릉을 살해하려 했으나, 차제후선우는 이릉을 북방으로 숨겼다. 대언지 사후, 이릉은 내지로 돌아와 차제후선우의 딸을 아내로 맞아 자식을 두었다. 그는 선우의 부탁으로 흉노의 우교왕이 되어 많은 공을 세웠다. 흉노 공주와의 사이에서 얻은 이릉의 아들은 호한야선우 시대에 다른 선우를 세워 호한야선우에게 반역했다가 처형되었다.
이릉은 과거 흉노에 사절로 갔던 소무와 대조적인 인물이었다. 소무는 한나라에 대한 충절을 굳게 지켰으며, 이릉은 절개를 지키려는 소무를 뒤에서 도왔다.
5. 1. 죽음
李陵|이릉중국어은 기원전 74년에 흉노에서 20년 이상 망명 생활을 하다가 병으로 사망했다.[5][6][7][8][9]한나라의 사신 임립정(任立政)은 이릉에게 귀향을 설득했지만, 이릉은 이미 "외국인"이 되었고 두 번 다시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다며 거절했다. 이릉은 한 소제 즉위 후, 오랜 친구였던 곽광과 상관걸이 보낸 사신을 통해 귀향을 제안받았다. 임립정은 이릉과 사적으로 대화하며 모든 죄가 용서될 것이고, 귀향 후 재물 걱정은 없을 것이며, 옛 친구들이 그리워한다고 말했지만, 이릉은 이를 거절했다.
5. 2. 후대의 평가와 논쟁
(요약 및 참조할 원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았고, 이전 단계에서 결과물이 없었으므로, '이릉' 문서의 '후대의 평가와 논쟁' 섹션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6. 아바칸 궁전 유적과의 관련성 논란
하카스 공화국(남부 시베리아)에서 발견된 한나라 양식의 아바칸 궁전 유적을 흉노 땅에 있던 이릉의 거처로 보는 견해가 있다.[9][13][14][15]
1940년대 아바칸 인근에서 발견된 이 궁전 유적은 1500m2 크기의 중국식 건물로, 한나라 시대의 양식을 띠고 있다. L.A. 에브튜코바는 이 궁전이 이릉의 거처였을 가능성을 제기했다.[16] 그러나 궁전 주인에 대해서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으며, 광무제 시대의 루팡(盧芳)의 거처였다는 주장도 나왔다.[17]
6. 1. 유적 발견과 초기 연구
일부 고고학자들은 러시아 하카스 공화국(남부 시베리아)에서 발견된 독특한 한나라 양식의 궁전을 흉노 땅에 있던 이릉의 거처로 잠정적으로 특정했다.[9][13][14][15]1940년, 러시아 건설 노동자들이 아바칸과 아스키즈(Аскыз) 마을 사이의 고속도로 건설 중 고대 유적을 발견했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소련 고고학자들이 현장을 발굴했을 때, 이 지역에서는 매우 독특한 건물, 즉 크기 1500m2의 중국 양식, 아마도 한나라 시대의 궁전을 발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곳에 살았던 고위 인물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러시아 고고학자 L.A. 에브튜코바는 정황 증거를 바탕으로 그 궁전이 이릉의 거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했다.[16]
그러나 궁전의 "소유권"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최근에는 A.A. 코발료프가 광무제 시대의 중국 왕위 찬탈자 루팡(盧芳)의 거처라고 주장했다.[17]
6. 2. 루팡 거처설 등 다른 주장 제기
일부 고고학자들은 러시아 하카스 공화국(남부 시베리아)에서 발견된 독특한 한나라 양식의 궁전을 흉노 땅에 있던 이릉의 거처로 잠정적으로 특정했다.[9][13][14][15]1940년, 러시아 건설 노동자들이 아바칸과 아스키즈(Аскыз) 마을 사이의 고속도로 건설 중 고대 유적을 발견했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소련 고고학자들이 현장을 발굴했을 때, 그들은 이 지역에서는 매우 독특한 건물, 즉 크고(1500m2) 중국 양식, 아마도 한나라 시대의 궁전을 발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곳에 살았던 고위 인물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러시아 고고학자 L.A. 에브튜코바는 정황 증거를 바탕으로 그 궁전이 이릉의 거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했다.[16]
그러나 궁전의 "소유권"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최근에는 A.A. 코발료프가 광무제 시대의 중국 왕위 찬탈자 루팡(盧芳)의 거처라고 주장했다.[17]
참조
[1]
문서
1st year of the ''Yuan'ping'' era. The year corresponds to 21 Feb 74 BCE to 9 Feb 73 BCE in the proleptic Julian calendar.
[2]
간행물
Chinese Ways in Warfare, Volume 74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East Asian Research Center
[3]
간행물
NOMADIC POWER, SEDENTARY SECURITY, AND THE CROSSBOW
https://archive.org/[...]
Centre for Military and Strategic Studies
2008
[4]
서적
The Empire of the Steppes
https://archive.org/[...]
Rutgers University Press
[5]
웹사이트
Aristocratic elites in the Xiongnu empire
https://www.academia[...]
[6]
웹사이트
li guangli daughter
https://books.google[...]
Sima
1993
[7]
웹사이트
li guangli daughter chanyu Monumenta Serica, Volume 52 2004
https://books.google[...]
[8]
서적
The Great Enterprise: The Manchu Reconstruction of Imperial Order in Seventeenth-century China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9]
서적
The Urban Civilization of Northern and Innermost Asia Historical and Archaeological Research
http://nbdrx.ru/pdf/[...]
ROMANIAN ACADEMY INSTITUTE OF ARCHAEOLOGY OF IAȘI Editura Academiei Romane - Editura Istros
2010
[10]
서적
The role of women in the Altaic world: Permanent International Altaistic Conference, 44th meeting, Walberberg, 26-31 August 2001
https://books.google[...]
Otto Harrassowitz Verlag
2012-02-08
[11]
서적
Tang China and the collapse of the Uighur Empire: a documentary history
https://books.google[...]
BRILL
2012-02-08
[12]
문서
Nanqishu
https://zh.wikisourc[...]
[13]
뉴스
How Did An Ancient Chinese Palace End Up In Siberia?
http://www.chinatopi[...]
2014-08-18
[14]
뉴스
Who built this Siberian summer palace… and why?
http://siberiantimes[...]
2014-11-12
[15]
뉴스
Is it a palm tree on Mars?
http://siberiantimes[...]
2014-10-22
[16]
문서
Southern Siberia in Ancient Times Южная Сибирь в древности
[17]
웹사이트
Chinese Emperor on the Yenisy? Once more about the owner of the Tashebik "Palace"
http://kronk.narod.r[...]
2012-07-10
[18]
문서
이것이 이릉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