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록고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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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록고선우는 기원전 96년에 즉위하여 기원전 85년에 사망한 흉노의 선우이다. 그는 좌현왕 출신으로, 선우가 되기 위해 동생에게 양보를 받았으며, 한나라와 대립하며 전쟁을 벌였다. 기원전 90년에는 한나라의 공격을 받아 보급품을 북쪽으로 옮기고 군대를 이동시켰으며, 이광리 장군이 항복하자 딸을 주고 우대했다. 이후 한나라와 화친을 시도했으나 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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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85년 사망 - 유벽강 (종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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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록고선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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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칭호 | 호록고 선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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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기간 | 기원전 96년–기원전 85년 |
이전 | 저제후 |
이후 | 호연제 |
왕조 | 묵돌 선우 |
아버지 | 저제후선우 |
사망일 | 기원전 85년 |
개인 정보 | |
이름 | 호록고선우 |
원래 이름 | 狐鹿姑單于 (Húlúgū Dānyú) |
작위 | 탱리고도선우 |
재위 기간 | 기원전 96년 - 기원전 85년 |
이전 | 저제후선우 |
이후 | 호연제선우 |
작위 2 | 좌도기왕 |
재위 기간 2 | ??-기원전 85년 |
이전 2 | ?? |
이후 2 | 좌대장 |
아버지 | 저제후선우 |
배우자 | 전거연지 |
자녀 | 좌현왕(허려권거선우?) 호연제선우 딸(이광리의 아내) |
흉노 통치자 | |
칭호 | 호록고 |
2. 생애
호록고선우는 아버지 저제후선우가 죽기 전 유언으로 선우가 될 예정이었으나, 병 때문에 흉노 귀인들이 동생 좌대장을 옹립하려 했다. 좌대장에게서 다음 선우 자리를 약속받고 즉위한 후, 좌대장을 좌현왕으로 삼았다. 그러나 좌현왕이 죽자 그의 아들 선현전을 일축왕으로, 자기 아들을 좌현왕으로 세웠다.
재위 6년과 7년, 흉노는 한나라의 상곡, 오원, 주천을 잇따라 공격하여 백성들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한나라는 이광리가 이끄는 7만 군(오원 출발), 상구성이 이끄는 3만여 군(서하 출발), 망통이 이끄는 4만여 군(주천 출발)으로 응징에 나섰다. 호록고선우는 모든 보급품을 북쪽 질거수(셀렝가강)까지 옮기고, 좌현왕에게 백성을 맡겨 여오수 너머로 보냈다. 자신은 정예 군대를 이끌고 안후(오르콘강)와 고저수(투이강)를 건넜다. 상구성과 망통과의 싸움은 불리했지만, 그들은 흉노 깊숙이 쳐들어오지 않고 후퇴했다.
이광리와의 싸움에서는 처음에 우대도위와 위율에게 5천 기를 주어 싸움을 걸었지만 격파당하고, 범부인성까지 한군이 진격하는 것을 허용했다. 그러나 이광리의 생질 유박을 태자로 세우려는 음모에 이광리의 사돈 유굴리 일족이 주멸되고 이광리의 일족이 체포되자, 궁지에 몰린 이광리는 공을 세우기 위해 서둘러 흉노 깊숙이 진격하여 질거수까지 올라왔다. 흉노의 좌대장과 2만 기가 한나라 2만 기와 싸워 좌대장은 전사하고 흉노의 피해가 컸지만, 한군 내에서 분열이 일어나 이광리는 속야오 연연산(항가이산맥 일대)까지 후퇴했다. 호록고선우는 직접 5만 기를 이끌고 며칠 간 피곤한 한나라 군대와 싸워 서로 많은 사상자를 내고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그러다 밤에 한나라 군대 앞에 구덩이를 파고 뒤를 급습하여 결국 이광리의 항복을 받아냈다(연연산 전투). 호록고선우는 항복한 이광리에게 딸을 주고, 먼저 투항한 위율보다 높이는 등 우대했다.
재위 8년, 호록고선우는 한나라에 편지를 보내 한나라를 약탈하지 않는 대가로 네 가지 요구를 했다.
요구 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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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시를 연다. |
한 황실의 여자와 혼인한다. |
술 만 석, 도정한 곡식 5천 곡, 비단 만 필을 흉노에 준다. |
이외에 옛 약속대로 지킨다. |
그러나 한나라에서 답하러 보낸 사자에게 무고의 옥을 들어 한나라를 비난했고, 한나라 사자는 흉노를 묵특 선우가 두만 선우를 죽이고 계모를 처로 삼는 짐승의 나라라고 맞받아쳐 3년 간 억류했다가 풀어주었다.
위율은 호록고선우가 이광리를 총애하는 것을 시기하여, 선우의 어머니 연지가 아프자 무당을 꾀어 이광리를 희생으로 바치게 했다. 이광리는 희생되면서 흉노를 망하게 하겠다고 저주했다. 이후 여러 달 동안 폭설로 가축이 죽고 역병이 돌고 농사도 되지 않는 등 심한 자연재해를 겪자, 이광리를 위한 사당을 세웠다.
연연산 전투로 한나라가 더 쳐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수십 년 간 지속된 전쟁으로 흉노도 피폐해져 한나라와 화친을 맺고자 했다. 호록고선우는 재위 12년 화친을 실행에 옮기려 했으나 병으로 죽었다.
2. 1. 즉위 과정
저제후선우 생전에는 흉노의 태자인 좌현왕이었는데, 아버지가 죽을 때 유언으로 선우가 되도록 했다. 그러나 병 때문에 흉노의 귀인들이 자신의 동생 좌대장을 세우려 했다. 좌대장은 자신이 죽으면 다음 선우로 삼는다는 조건으로 좌현왕에게 선우 자리를 양보했고, 좌현왕은 이를 받아들여 즉위할 수 있었다. 즉위 후 호록고선우는 좌대장을 좌현왕으로 삼았지만, 좌현왕이 죽자 좌현왕의 아들 선현전은 일축왕으로 삼고 자기 아들을 좌현왕으로 세웠다.태시 원년 (기원전 96년), 저제후선우(且鞮侯)가 죽자, 장자인 좌현왕이 즉위하여 호록고선우가 되었다. 호록고선우는 동생인 좌대장을 좌현왕으로 삼았지만, 몇 년 만에 병사했으므로 그의 아들 선현선을 일축왕으로 삼고, 호록고선우의 아들을 좌현왕으로 삼았다.
정화 3년 (기원전 90년), 흉노는 상곡・오원을 침략하여 백성을 죽이고 약탈했다. 그 해 흉노는 다시 오원・주천을 침략하여 양부도위를 살해했다. 이에 한나라는 이사 장군 이광리가 이끄는 병력 7만 명을 오원에, 어사대부 상구성이 이끄는 3만여 명의 병력을 서하에, 중합후 망통이 이끄는 4만 기병을 주천의 천여 리에 파병했다. 호록고선우는 한나라가 파병했다는 소식을 듣고 치중대를 조신성 북쪽 저거수에 옮기고, 좌현왕은 그 백성들을 몰아 여오수 6~700리를 건너 두함산에 배치했다. 호록고선우는 스스로 정예병인 좌안후를 이끌고 고차수를 건넜다. 상구성의 군대가 이를 추격했지만 찾지 못하고 돌아오자, 흉노는 대장과 이릉이 이끄는 3만여 기병으로 상구성 군대를 추격하게 하여 준계산에서 격전을 벌였다. 9일 동안의 전투 끝에 상구성의 병사들이 선전했고, 흉노군은 포노수에 이르러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철수했다. 망통의 군대가 천산에 이르자, 흉노는 대장 엄거와 좌우 호지왕이 이끄는 2만여 기병으로 한나라 군대를 요격하게 했지만, 한나라 군대의 강함을 보고 철수했다.
이광리가 변방을 나오자, 흉노는 우대도위와 위율이 이끄는 5천 기병으로 부양구산협에서 한나라 군대를 요격했다. 이광리는 속국을 보내 호 기병 2천 명과 전투를 벌였고, 사상자는 수백 명에 달했다. 한나라 군대는 승기를 타고 북쪽으로 추격하여 범부인성에 이르자 흉노는 도주했다. 이광리는 호군 장군 2만 기병을 보내 질거지수를 건너게 했다. 하루 뒤 좌현왕과 좌대와 마주쳐 흉노와 한나라 군대가 하루 동안 격전을 벌여 한나라 군대는 좌대장을 살해했다. 호록고선우는 한나라 군대가 지쳐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장수 5만 기병으로 이광리를 차단했다. 더욱이 밤에 한나라 군대가 참호를 파고 있는 곳을 습격하자, 한나라 군대는 크게 혼란에 빠져 패배했고, 결국 이광리가 항복했다. 호록고선우는 이광리가 귀신(貴臣)임을 알고 딸을 시집보냈으며, 먼저 항복한 위율보다 더욱 존중했다.
후년에 호록고선우는 한나라와 화친을 요청했지만 병에 걸렸다. 시원 2년 (기원전 85년), 호록고선우가 죽자, 후계자 문제로 갈등이 빚어진 끝에 아들인 좌곡려왕이 호연제선우가 되었다.
2. 2. 한나라와의 전쟁
정화 3년, 흉노는 상곡과 오원을 침략하여 백성을 죽이고 약탈했다. 그 해 흉노는 다시 오원과 주천을 침략하여 양부도위를 살해했다. 이에 한나라는 이광리를 이사장군으로 삼아 7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오원으로 출정시켰고, 상구성을 어사대부로 삼아 3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하로 출정시켰으며, 망통을 중합후로 삼아 4만 기병을 이끌고 주천으로 출정시켰다. 호록고선우는 한나라가 파병했다는 소식을 듣고 치중대를 조신성 북쪽 저거수에 옮기고, 좌현왕은 그 백성들을 몰아 여오수 6~700리를 건너 두함산에 배치했다. 호록고선우는 스스로 정예병인 좌안후를 이끌고 고차수를 건넜다. 상구성의 군대가 이를 추격했지만 찾지 못하고 돌아오자, 흉노는 대장과 이릉이 이끄는 3만여 기병으로 상구성 군대를 추격하게 하여 준계산에서 격전을 벌였다. 9일 동안의 전투 끝에 상구성의 병사들이 선전했고, 흉노군은 포노수에 이르러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철수했다. 망통의 군대가 천산에 이르자, 흉노는 대장 엄거와 좌우 호지왕이 이끄는 2만여 기병으로 한나라 군대를 요격하게 했지만, 한나라 군대의 강함을 보고 철수했다.이광리가 변방을 나오자, 흉노는 우대도위와 위율이 이끄는 5천 기병으로 부양구산협에서 한나라 군대를 요격했다. 이광리는 속국을 보내 호 기병 2천 명과 전투를 벌였고, 사상자는 수백 명에 달했다. 한나라 군대는 승기를 타고 북쪽으로 추격하여 범부인성에 이르자 흉노는 도주했다. 이광리는 호군 장군 2만 기병을 보내 질거지수를 건너게 했다. 하루 뒤 좌현왕과 좌대와 마주쳐 흉노와 한나라 군대가 하루 동안 격전을 벌여 한나라 군대는 좌대장을 살해했다. 호록고선우는 한나라 군대가 지쳐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장수 5만 기병으로 이광리를 차단했다. 더욱이 밤에 한나라 군대가 참호를 파고 있는 곳을 습격하자, 한나라 군대는 크게 혼란에 빠져 패배했고, 결국 이광리가 항복했다. 호록고선우는 이광리가 귀신(貴臣)임을 알고 딸을 시집보냈으며, 먼저 항복한 위율보다 더욱 존중했다.
2. 3. 한나라와의 화친 시도와 죽음
호록고선우는 아버지 저제후선우가 죽기 전 유언으로 선우가 될 예정이었으나, 병 때문에 흉노 귀인들이 동생 좌대장을 옹립하려 했다. 좌대장에게서 다음 선우 자리를 약속받고 즉위한 후, 좌대장을 좌현왕으로 삼았다. 그러나 좌현왕이 죽자 그의 아들 선현전을 일축왕으로, 자기 아들을 좌현왕으로 세웠다.재위 6년(기원전 91년)과 7년(기원전 90년), 흉노는 한나라의 상곡, 오원, 주천을 잇따라 공격하여 백성들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한나라는 이광리가 이끄는 7만 군(오원 출발), 상구성이 이끄는 3만여 군(서하 출발), 마통이 이끄는 4만여 군(주천 출발)으로 응징에 나섰다. 호록고선우는 모든 보급품을 북쪽 질거수(셀렝가강)까지 옮기고, 좌현왕에게 백성을 맡겨 여오수 너머로 보냈다. 자신은 정예 군대를 이끌고 안후(오르콘강)와 고저수(투이강)를 건넜다. 상구성과 마통과의 싸움은 불리했지만, 그들은 흉노 깊숙이 쳐들어오지 않고 후퇴했다.
이광리와의 싸움에서는 처음에 우대도위와 위율에게 5천 기를 주어 싸움을 걸었지만 격파당하고, 범부인성까지 한군이 진격하는 것을 허용했다. 그러나 이광리의 생질 유박을 태자로 세우려는 음모에 이광리의 사돈 유굴리 일족이 주멸되고 이광리의 일족이 체포되자, 궁지에 몰린 이광리는 공을 세우기 위해 서둘러 흉노 깊숙이 진격하여 질거수까지 올라왔다. 흉노의 좌대장과 2만 기가 한나라 2만 기와 싸워 좌대장은 전사하고 흉노의 피해가 컸지만, 한군 내에서 분열이 일어나 이광리는 속야오 연연산(항가이산맥 일대)까지 후퇴했다. 호록고선우는 직접 5만 기를 이끌고 며칠 간 피곤한 한나라 군대와 싸워 서로 많은 사상자를 내고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그러다 밤에 한나라 군대 앞에 구덩이를 파고 뒤를 급습하여 결국 이광리의 항복을 받아냈다(연연산 전투). 호록고선우는 항복한 이광리에게 딸을 주고, 먼저 투항한 위율보다 높이는 등 우대했다.
재위 8년(기원전 89년), 호록고선우는 한나라에 편지를 보내 한나라를 약탈하지 않는 대가로 네 가지 요구를 했다.
요구 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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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시를 연다. |
한 황실의 여자와 혼인한다. |
술 만 석, 도정한 곡식 5천 곡, 비단 만 필을 흉노에 준다. |
이외에 옛 약속대로 지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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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록고선우는 저제후선우의 뒤를 이어 한나라와 갈등 관계를 이어갔다. 기원전 91년과 90년, 흉노는 한나라의 상곡군, 오원군, 주천군을 공격해 백성을 살상하거나 포로로 잡았다. 한나라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대규모 원정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한나라에서 답하러 보낸 사자에게 무고의 옥을 들어 한나라를 비난했고, 한나라 사자는 흉노를 묵특 선우가 두만 선우를 죽이고 계모를 처로 삼는 짐승의 나라라고 맞받아쳐 3년 간 억류했다가 풀어주었다.
위율은 호록고선우가 이광리를 총애하는 것을 시기하여, 선우의 어머니 연지가 아프자 무당을 꾀어 이광리를 희생으로 바치게 했다. 이광리는 희생되면서 흉노를 망하게 하겠다고 저주했다. 이후 여러 달 동안 폭설로 가축이 죽고 역병이 돌고 농사도 되지 않는 등 심한 자연재해를 겪자, 이광리를 위한 사당을 세웠다.
연연산 전투로 한나라가 더 쳐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수십 년 간 지속된 전쟁으로 흉노도 피폐해져 한나라와 화친을 맺고자 했다. 호록고선우는 재위 12년(기원전 85년) 화친을 실행에 옮기려 했으나 병으로 죽었다.
3. 평가
4. 대외 관계
이광리는 7만 군사를 이끌고 오원에서, 상구성은 3만여 군사를 이끌고 서하에서, 마통은 4만여 군사를 이끌고 주천에서 각각 출진했다. 흉노는 보급품을 북쪽으로 옮기고 백성을 여오수 너머로 이동시켰다. 호록고선우는 정예군을 이끌고 안후(오르콘강)와 고저수(투이강)를 건너 한나라 군에 맞섰다. 상구성과 마통의 군대는 흉노에게 불리했으나, 깊숙이 침투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이광리 군과의 전투 초반, 흉노는 우대도위와 위율에게 5천 기병을 주어 싸움을 걸었으나 패하고 한나라 군이 범부인성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이광리의 생질 유박을 태자로 세우려는 음모, 이광리 사돈 유굴리 일족 주멸, 이광리 일족 체포 등으로 상황이 급변했다. 궁지에 몰린 이광리는 공을 세우고자 흉노 깊숙이 진격, 질거수까지 진출했다.
흉노 좌대장과 2만 기병이 한나라 2만 기병과 맞섰으나 좌대장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보았다. 한나라 군 내부에서도 무리한 진격에 대한 불만이 커져 분열되었고, 이광리는 속야오 연연산(항가이산맥 일대)까지 후퇴했다. 호록고선우는 5만 기병을 이끌고 지친 한나라 군과 며칠간 격전을 벌였으나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결국 밤에 한나라 군 앞에 구덩이를 파고 기습, 이광리의 항복을 받아냈다(연연산 전투). 호록고선우는 이광리에게 딸을 주고 우대했다.
기원전 89년, 호록고선우는 한나라에 평화 협상을 제안하며 관시 개방, 한나라 황녀와의 혼인, 술 1만 석, 정제된 곡식 5천 곡, 비단 1만 필, 이전 약속 준수를 요구했다. 그러나 한나라 사신과의 회담은 상호 비난으로 결렬되었고, 사신은 3년간 억류되었다 풀려났다. 호록고선우는 이광리를 총애했으나, 위율의 계략으로 이광리를 희생 제물로 바쳤다. 이광리는 죽으며 흉노를 저주했고, 이후 흉노는 폭설, 가축 떼죽음, 역병, 농사 실패 등 재앙을 겪었다. 흉노는 이광리 사당을 세워 저주를 풀고자 했다.
연연산 전투 이후 한나라는 흉노 공격을 중단했지만, 수십 년 전쟁으로 흉노 역시 피폐해졌다. 호록고선우는 한나라와 화친하려 했으나, 기원전 85년 병사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4. 1. 한나라
저제후선우 사후, 흉노는 한나라와 계속해서 갈등을 겪었다. 기원전 91년과 90년, 흉노는 한나라의 상곡군, 오원군, 주천군을 공격하여 백성들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이에 한나라는 흉노를 응징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군을 파견했다.
흉노는 이에 맞서 모든 보급품을 북쪽으로 옮기고, 백성들을 여오수 너머로 이동시켰다. 호록고선우는 정예 군대를 이끌고 안후(오르콘강)와 고저수(투이강)를 건너 한나라 군대에 맞섰다. 상구성과 마통의 군대는 흉노에게 불리한 전투를 벌였으나, 흉노 깊숙이 쳐들어오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광리의 군대와의 전투에서는 초기에 흉노가 우대도위와 위율에게 5천 기를 주어 싸움을 걸었으나 패배했고, 한나라 군대가 범부인성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이광리의 생질 유박을 태자로 세우려는 음모가 발생하고, 이광리의 사돈 유굴리 일족이 주멸되고 이광리 일족이 체포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궁지에 몰린 이광리는 공을 세우기 위해 흉노 깊숙이 진격하여 질거수까지 진출했다.
흉노의 좌대장과 2만 기가 한나라 2만 기와 맞섰으나, 좌대장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한나라 군대 내부에서도 무리한 진격에 대한 불만이 커져 분열이 일어났고, 결국 이광리는 더 진격하지 못하고 속야오 연연산(항가이산맥 일대)까지 후퇴했다. 호록고선우는 직접 5만 기를 이끌고 며칠 동안 지친 한나라 군대와 싸워 서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승패를 결정짓지 못했다. 결국 밤에 한나라 군대 앞에 구덩이를 파고 기습 공격을 가하여 이광리의 항복을 받아냈다(연연산 전투). 호록고선우는 항복한 이광리에게 딸을 주고 우대했다.
기원전 89년, 호록고선우는 한나라에 평화 협상을 제안하며 네 가지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
요구 조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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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시 개방 |
2. 한나라 황실 여인과의 혼인 |
3. 술 1만 석, 도정한 곡식 5천 곡, 비단 1만 필 제공 |
4. 이전의 약속 준수 |
그러나 한나라 사신과의 회담에서 서로 상대방을 비난하며 갈등이 심화되었고, 결국 사신은 3년간 억류되었다가 풀려났다. 호록고선우는 이광리를 총애했지만, 위율의 계략으로 이광리를 희생 제물로 바치게 되었다. 이광리는 죽으면서 흉노를 저주했고, 이후 흉노는 폭설, 가축 떼죽음, 역병, 농사 실패 등 심각한 자연재해를 겪었다. 흉노는 이광리를 위한 사당을 세워 그의 저주를 풀고자 했다.
연연산 전투 이후 한나라는 더 이상 흉노를 공격하지 않았지만, 수십 년간의 전쟁으로 흉노 역시 피폐해졌다. 호록고선우는 한나라와의 화친을 추진하려 했으나, 기원전 85년 병으로 사망하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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