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사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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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지사 선우는 기원전 126년 군신 선우의 동생으로, 조카 어단을 폐위하고 선우가 되었다. 그는 한나라 무제의 공격에 맞서 혼야왕과 휴저왕에게 대항하게 했으나, 이들의 잇따른 패배와 혼야왕의 투항으로 흉노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지사 선우는 곽거병과의 전투에서 2번이나 패배하고, 기원전 114년에 사망했으며, 아들 오유선우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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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사선우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인물 정보 | |
| 작위 | 탱리고도선우 |
| 재위 | 기원전 127년 - 기원전 114년 |
| 전임자 | 군신선우 |
| 후임자 | 오유선우 |
| 가계 | |
| 왕조 | 흉노 |
| 가문 | 연제씨 |
| 아버지 | 라오상선우 |
| 친인척 | 이손 악연구제선우, 도기선우, 윤진선우 |
| 기타 | |
2. 생애
노상선우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인 군신 선우가 기원전 161년 즉위하자 좌록리왕[4]에 봉해졌다.
기원전 126년, 형 군신 선우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이자 태자였던 어단(於單)을 몰아내고 스스로 선우 자리에 올랐다. 어단은 한나라로 망명하여 무제로부터 섭안후(涉安侯) 작위를 받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이지사 선우의 즉위 이후 흉노는 한나라 무제의 대대적인 공세에 직면하게 된다.
2. 1. 한나라와의 전쟁
기원전 126년 이지사 선우가 즉위한 후, 한나라 무제는 흉노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했다.기원전 125년, 흉노는 세 부대로 나뉘어 각각 기병 3만 명을 이끌고 한나라의 대군, 정양군, 상군 등을 침략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살상하고 약탈했다. 특히 우현왕[5]은 한나라가 오르도스를 점령하고 삭방에 장성을 쌓은 것에 불만을 품고 여러 차례 변경 지역을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10]
기원전 124년 봄, 한나라의 대장군 위청은 10만 명의 대규모 병력(주로 경기병)을 이끌고 흉노를 기습 공격했다. 방심하고 있던 우현왕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도주했으며, 한나라 군대는 이 전투에서 흉노의 소왕(小王) 10여 명과 남녀 1만 5천 명을 포로로 잡고 가축 100만 마리를 노획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해 가을, 흉노 기병 1만 명이 다시 대군에 침입하여 도위 주영을 살해하고 천여 명을 끌고 갔다.
기원전 123년 봄, 위청은 다시 10만 기병을 이끌고 흉노를 공격하여 정양 북쪽에서 1만 9천여 명을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한나라 장수 소건과 조신이 이끄는 3천 명의 별동대는 너무 깊숙이 진격했다가 흉노에게 포위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 소건은 탈출했지만, 원래 흉노 왕족 출신으로 한나라에 투항했던 조신은 다시 흉노에 포로로 잡혔다. 이지사 선우는 조신을 자차왕[7]에 봉하고 자신의 누이와 결혼시켜 책사로 삼았다. 조신은 이지사 선우에게 한나라 군대의 예봉을 피하고 더 깊은 초원으로 유인하기 위해 수도를 고비 사막 북쪽으로 옮길 것을 조언했다.[2]
기원전 122년, 흉노 기병 1만 명이 한나라의 상곡을 침략했다.
기원전 121년 봄, 표기장군 곽거병은 1만 기병을 이끌고 간쑤성의 연지산 서쪽을 공격하여 흉노 8천여 명을 사살하고, 흉노의 휴도왕(休屠王)이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사용하던 금인상(金人像)을 빼앗았다. 같은 해 여름, 곽거병은 다시 공손오와 함께 기련산맥 일대를 공격하여 흉노 3만 3천여 명을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무렵 흉노의 좌현왕[8]은 대군과 안문군을 약탈하고 있었으나, 이광과 장건의 반격을 받았다. 이광은 좌현왕의 4만 기병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처했으나, 장건의 구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이틀간 버텨내 흉노를 물리쳤다. 그러나 장건은 약속 시간에 늦었다는 이유로 처벌받아 평민으로 강등되었다.
잇따른 패배, 특히 서쪽 방면을 담당하던 혼야왕(昆邪王)과 휴도왕[10]의 군대가 큰 피해를 입자, 이지사 선우는 이들의 책임을 물어 처형하려 했다. 처벌을 두려워한 혼야왕은 휴도왕에게 함께 한나라에 투항하자고 제안했으나, 휴도왕이 망설이자 그를 살해하고 그의 무리 4만여 명을 이끌고 곽거병에게 투항했다. 이 사건은 흉노의 세력 약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기원전 120년, 흉노는 요서와 정양을 침입하여 1천여 명의 주민을 살해하고 약탈했다.
기원전 119년 여름, 한나라는 위청과 곽거병에게 각각 5만 기병과 수십만 보병, 14만 마리의 보급마를 주어 흉노의 본거지를 공격하게 했다. 위청 군대는 고비 사막 북쪽에서 이지사 선우의 주력군과 마주쳤다. 위청은 전차를 원형으로 배치하여 방어 진형을 갖추고 5천 기병으로 탐색전을 벌였다. 이지사 선우는 1만 기병으로 맞섰고, 해 질 녘까지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강한 바람이 불자 위청은 주력 기병을 투입하여 흉노군을 포위했다. 이지사 선우는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으나, 군대는 큰 타격을 입었다. 한편 다른 경로로 진격한 곽거병의 군대는 좌현왕의 군대를 격파하고 7만여 명을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았다. 이 모북 전투에서 흉노는 막대한 인명과 가축 손실을 입었으며, 특히 고비 사막 이남의 땅(막남, 내몽골)을 상실하고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한나라도 이 전투에서 군마 10만 마리를 잃어 기병 전력에 큰 타격을 입었다. 이지사 선우는 전투 후 서쪽으로 도주했는데, 잠시 우곡려왕[9]이 선우가 죽었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선우를 칭하는 일도 있었으나, 이지사 선우가 돌아오자 자리를 반납했다.
기원전 116년, 흉노는 량주를 침략했다.
이지사 선우는 즉위 13년 만인 기원전 114년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오유가 선우의 자리를 이었다.
2. 2. 통치 후반과 죽음
기원전 125년, 흉노는 3개 부대로 나뉘어 각 부대마다 기병 3만 명을 이끌고 대군, 정양군, 상군 등 중국의 여러 지방을 침략하여 수천 명을 끌고 갔다. 특히 우현왕[5]은 한나라가 오르도스를 빼앗고 삭방에 장성을 쌓은 것에 분노하여 여러 차례 변경을 공격하고 약탈을 자행했으며, 관리와 백성을 살상하거나 포로로 잡았다.기원전 124년 봄, 한나라는 위청을 대장군으로 삼아 6명의 장군과 10만여 명의 병력(주로 경기병)으로 흉노를 공격했다. 당시 우현왕은 한나라 군대가 오지 않으리라 예상하고 방심하고 있다가 야습을 받아 간신히 탈출했다. 이 전투에서 한나라는 우현왕 휘하의 남녀 1만 5천 명, 비소왕(부족장) 10여 명을 포로로 잡고 가축 100만 마리를 노획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해 가을, 흉노 기병 1만 명이 다시 대군에 침입하여 도위 주영을 살해하고 1천여 명을 끌고 갔다.
기원전 123년 봄, 위청은 다시 10만 기병을 이끌고 흉노를 공격하여 정양 북쪽에서 1만 9천여 명을 살상하거나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소건과 조신이 이끄는 별동대 3천 명은 너무 깊이 들어갔다가 흉노에게 포위되어 참패했다. 조신은 본래 흉노 왕족 출신으로 한나라에 투항했던 인물이었으나, 이때 다시 흉노에 투항했다. 이지사 선우는 조신을 자차왕[7]에 봉하고 누이와 결혼시켜 한나라에 대한 군사 고문으로 삼았다. 조신은 이지사 선우에게 한나라 군대의 예봉을 피하고 그들을 초원 깊숙이 유인하기 위해 수도를 고비 사막 북쪽으로 옮기도록 조언했다.[2]
기원전 122년, 흉노 기병 1만 명이 상곡을 침략했다.
기원전 121년 봄, 표기장군 곽거병은 1만 기병을 이끌고 연지산(오늘날 간쑤성) 서쪽에서 흉노 8,960명을 살상하고 휴도왕(휴저왕)을 격파하며 그가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사용하던 황금 우상(金人像)을 빼앗았다. 같은 해 여름, 곽거병은 공손오와 함께 다시 서쪽으로 진군하여 주천 남쪽의 기련산맥까지 진격하여 흉노 3만 3천 명을 살상하고 포로로 잡았다. 이 무렵 흉노의 좌현왕[8]이 대군과 안문군을 약탈하자 이광과 장건(박망후)이 추격에 나섰다. 이광은 좌현왕의 흉노 기병 4만 명에게 포위되었으나, 장건의 구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이틀간 격렬하게 저항하여 흉노를 물리쳤다. 그러나 장건은 약속된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처벌받아 평민으로 강등되었다.
거듭된 패배, 특히 곽거병에게 당한 두 차례의 참패로 휘하의 혼야왕과 휴도왕이 지키던 서방 영토에서 수만 명의 병력을 잃자, 이지사 선우는 크게 분노하여 두 왕을 소환하여 처형하려 했다. 처벌을 두려워한 혼야왕은 휴도왕에게 함께 한나라에 투항하자고 제안했으나, 휴도왕이 망설이자 그를 살해하고 그의 무리 4만여 명을 이끌고 곽거병에게 투항했다. 혼야왕의 투항은 흉노의 세력 균형을 한나라에 크게 유리하게 만들었으며, 흉노는 금성에서 하서, 남산을 거쳐 염택(鹽澤, 롭노르)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했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이 사건 이후 해당 지역에서 흉노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어 간혹 정찰병만 나타날 뿐이었다. 기원전 124년부터 119년까지 이어진 한나라의 공세로 흉노는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30만 명의 인명 손실을 입은 것으로 기록되었다.[3]
기원전 120년, 흉노는 요서와 정양을 침입하여 1천여 명을 살해하고 약탈했다.
기원전 119년 여름, 한나라는 위청과 곽거병에게 각각 10만 기병과 20만 보병, 그리고 14만 마리의 보급용 말을 동원하여 최대 규모의 공세를 펼쳤다. 모북 전투에서 위청은 전차를 원형으로 배치하여 방어 진형을 구축하고 5천 기병으로 탐색전을 벌였다. 이지사 선우는 1만 기병으로 맞섰으나, 저녁 무렵 강풍이 불자 위청은 주력 기병을 투입하여 흉노군을 포위했다. 이지사 선우는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으나 지휘 체계가 무너져 참패했다. 다른 경로로 진격한 곽거병 역시 좌현왕을 격파하고 7만 명을 섬멸하거나 사로잡았다. 이 전투로 흉노는 막남(漠南, 내몽골) 지역을 완전히 상실하고 사막 북쪽으로 밀려났다. 한편, 이지사 선우가 전사했다는 소문이 돌자 우곡려왕[9]이 잠시 스스로 선우를 칭했으나, 이지사 선우가 살아 돌아오자 선우 자리를 반납하는 일도 있었다. 모북 전투에서 한나라는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10만 마리에 달하는 막대한 말 손실을 입어 이후 한동안 기병 전력 운용에 어려움을 겪었다.
기원전 116년, 흉노는 량주를 침략하며 저항을 이어갔다.
거듭된 패배와 혼야왕의 투항 등으로 통치 기반이 크게 약화된 이지사 선우는 즉위 13년째인 기원전 114년에 사망했다. 그의 아들 오유가 뒤를 이어 선우의 자리에 올랐다.
3. 가족 관계
| 관계 | 이름 |
|---|---|
| 증조부 | 두만 선우 |
| 조부 | 묵돌 선우 |
| 부 | 노상 선우 |
| 형 | 군신 선우 |
| 본인 | 이지사 선우 |
| 아들 | 오유 선우 |
| 아들 | 구려호 선우 |
| 아들 | 저제후 선우 |
| 손자 | 아 선우 (오유 선우의 아들) |
4. 평가
이지사 선우는 형인 군신 선우 사후 조카 어단을 몰아내고 선우 자리에 올랐으나, 그의 통치기는 전한 무제의 강력한 공세와 맞물려 흉노에게 어려운 시기였다.[10] 그는 한나라의 공격에 맞서 번왕인 혼야왕과 휴저왕 등 휘하 세력을 동원했지만, 이들은 위청과 곽거병이 이끄는 한나라 군대에게 연이어 패배했다.[5][8]
특히 기원전 122년, 이지사 선우는 혼야왕과 휴저왕이 관리하던 서방 영토에서 수만 명의 병력을 한나라에 의해 잃자 이에 분노하여 두 왕을 소환하여 처형하려 했다. 이는 오히려 생명의 위협을 느낀 두 왕이 한나라에 투항하는 결과를 낳았다. 투항 과정에서 혼야왕은 망설이던 휴저왕을 살해하고 그의 무리를 이끌고 곽거병에게 귀순했다.[10] 이 사건은 이지사 선우의 리더십 부재와 상황 판단 착오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패배한 부하를 끌어안기보다 처벌하려 함으로써 흉노 내부의 결속력을 스스로 약화시켰고, 결과적으로 상당한 세력과 영토를 한나라에 넘겨주는 결정적인 실책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지사 선우는 계속된 군사적 패배와 혼야왕 투항 사건과 같은 내부 분열 관리 실패로 인해 오르도스와 막남 지역 등 중요한 영토를 상실했으며, 흉노 제국의 쇠퇴를 막지 못했다.[9]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겪었던 위기는 외부의 강력한 압박 속에서 지도자의 잘못된 판단이 국가에 얼마나 큰 위협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다.
참조
[1]
논문
"Phonological Notes on Hàn Period Transcriptions of Foreign Names and Words"
http://www.linguisti[...]
Institute of Linguistics, Academia Sinica
2014
[2]
서적
"Materials on Sünnu history"
Science, Moscow
1968
[3]
서적
"Collection of information on peoples in Central Asia in ancient times"
[4]
문서
左谷蠡王
[5]
문서
右賢王
[6]
문서
翕侯
[7]
문서
滝川氏の説
[8]
문서
左賢王
[9]
문서
右谷蠡王
[10]
문서
휴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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