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조선축구대회 (관서체육회)
1. 개요
전조선축구대회 (관서체육회)는 1925년부터 1942년까지 관서체육회가 주최한 축구 대회이다. 1921년부터 평양기독청년회가 주최한 대회가 있었으나, 관서체육회 주최 대회가 시작되면서 평양의 전조선축구대회는 1921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간주된다. 소학부, 중등부, 청년부, 실업부, 전문부 등 다양한 부문으로 나뉘어 진행되었으며, 1920년대에는 평양의 숭실중학교 운동장 등에서, 1926년 이후에는 기림리운동장에서 경기가 열렸다. 서울의 전조선축구대회와 함께 전국적 규모를 자랑하며 평양을 중심으로 한 관서지방 축구 발전에 기여했으며, 북한 축구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 명칭: 전조선축구대회 | |
| 명칭 (한자): 全朝鮮蹴球大會 | |
| 국가: 일제강점기 조선 | |
| 설립 연도: 1925년 (평양기독청년회 주최 1921년) | |
| 리그 폐지: | |
| 최다 우승: 평양축구단(7회)청년부(일반 성인팀) 기준, 전신인 무오축구단 기록 포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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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지된 축구 대회 -
경평대항축구전
경평대항축구전은 일제강점기 경성과 평양의 축구팀들이 벌인 대항전으로, 민족 단합과 극일 정신 고취에 기여했으나 남북 분단으로 중단되었고, 경평전의 주축 축구단들은 해방 이후 남북한 국가대표 축구팀의 모태가 되었다. -
폐지된 축구 대회 -
코파 데 오로 아르헨티나
코파 데 오로 아르헨티나는 1945년 FC 바르셀로나와 아틀레틱 빌바오 간의 단판 경기로, 바르셀로나가 5-4로 승리하여 우승을 차지했으며 세사르와 가모랄이 바르셀로나의 공격을, 우라, 자라, 파니조가 아틀레틱 빌바오의 득점을 이끌었다. -
일제강점기의 축구 대회 -
전조선축구대회
전조선축구대회는 조선체육회와 조선축구협회가 주최하여 1921년부터 1940년까지 열린 한국 최초의 전국 규모 축구 대회로, 한국 근대 축구의 시작을 알리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기여했다. -
일제강점기의 축구 대회 -
경평대항축구전
경평대항축구전은 일제강점기 경성과 평양의 축구팀들이 벌인 대항전으로, 민족 단합과 극일 정신 고취에 기여했으나 남북 분단으로 중단되었고, 경평전의 주축 축구단들은 해방 이후 남북한 국가대표 축구팀의 모태가 되었다. -
1942년 폐지 -
동북항일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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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폐지 -
네덜란드령 동인도
네덜란드령 동인도는 17세기 초부터 1949년까지 존재했던 네덜란드의 식민지로서, 현재의 인도네시아 영토를 포함하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지배와 강제 재배 제도, 일본 점령, 인도네시아 독립 투쟁을 거쳐 1949년 인도네시아의 주권 인정으로 종말을 맞이하였다.
2. 역사
평양기독청년회가 1921년부터 전조선축구대회를 주최했으나, 1925년부터 관서체육회 주최 대회가 새로 생기면서 평양에 같은 이름의 전국 규모 대회가 두 개나 있을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에 평양기독청년회 주최 대회는 제6회(1926)를 끝으로 폐지되었다. 실질적으로는 관서체육회에 대회 개최권을 넘긴 것이므로 두 대회는 1921년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25년 제1회 관서체육회 주최 전조선축구대회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 평양지국의 후원으로 성황리에 열렸다.
제18회(1942년) 대회는 조선체육진흥회평남지부 주최 서조선축구대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일제의 구기 종목 금지로 1942년 대회를 마지막으로 전조선축구대회는 폐지되었는데, 이는 서울의 전조선축구대회가 폐지된 1940년보다 2년 더 유지된 것이다.
2.1. 기원과 초기 발전 (1921-1926)
평양기독청년회는 1921년부터 1926년까지 전조선축구대회를 주최하였다. 1925년부터 관서체육회가 주최하는 전조선축구대회가 새로 생기면서, 평양에 같은 이름의 전국 규모 대회를 두 개나 둘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에 따라 평양기독청년회 주최 대회는 제6회를 끝으로 폐지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전조선축구대회의 개최권을 관서체육회에 넘긴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두 대회는 동일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으며, 결국 평양의 전조선축구대회는 1921년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25년 관서체육회 주최의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時代日報)의 평양지국이 후원하는 등 기존 평양기독청년회 주최의 대회를 한층 발전시키며 성황리에 열렸다.
2.2. 관서체육회 주최 시대 (1925-1942)
평양기독청년회가 주최하던 전조선축구대회는 1925년부터 관서체육회 주최로 변경되었다. 평양에 같은 이름의 전국 규모 대회가 두 개나 있을 필요가 없다는 의견에 따라 평양기독청년회 주최 대회는 제6회를 끝으로 폐지되었다. 실질적으로는 전조선축구대회의 개최권을 관서체육회에 넘긴 것이므로 두 대회는 1921년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25년 관서체육회 주최의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時代日報)의 평양지국이 후원하는 등 기존 평양기독청년회 주최의 대회를 한층 발전시키며 성황리에 열렸다.
마지막 대회인 제18회(1942년) 대회에서는 조선체육진흥회평남지부 주최 서조선축구대회로 주최와 명칭이 변경되었다. 하지만 일제의 구기 종목 금지로 1942년 대회를 마지막으로 전조선축구대회는 폐지되었는데, 이는 서울의 전조선축구대회가 폐지된 1940년보다 2년을 더 유지한 것이다.
2.3. 대회 폐지와 그 이후
평양기독청년회가 주최한 전조선축구대회는 1926년 제6회를 끝으로 폐지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관서체육회에 대회 개최권을 넘긴 것이었다. 따라서 평양의 전조선축구대회는 1921년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25년 관서체육회 주최의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의 평양지국이 후원하는 등 기존 평양기독청년회 주최의 대회를 발전시켜 성황리에 열렸다.
마지막 대회인 제18회(1942년) 대회에서는 조선체육진흥회평남지부 주최 서조선축구대회로 주최와 명칭이 변경되었다. 하지만 일제의 구기 종목 금지로 1942년 대회를 마지막으로 전조선축구대회는 폐지되었는데, 이는 서울의 전조선축구대회가 폐지된 1940년보다 2년을 더 유지한 것이었다.
3. 대회 구성 및 운영
전조선축구대회는 관서체육회가 주최하고 평양축구협회가 주관하여 진행된 종합 축구 대회였다. 이 대회는 다양한 연령대의 선수들이 참가할 수 있도록 여러 부문으로 구성되었으며, 주로 5월에 평양 내 여러 경기장에서 개최되었다. 이는 늦가을에 개최되던 서울의 전조선축구대회와는 다른 시기로, 1920년대 중반부터는 봄에는 평양에서, 가을에는 서울에서 전조선축구대회가 열리는 구도가 자리잡게 되었다.
3.1. 참가 부문
회차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었으나, 서울의 전조선축구대회와 마찬가지로 소학부, 중등부, 청년부(혹은 일반부) 등 연령대별로 대회가 구분되어 있었다. 소학부는 지금의 초등학교, 중등부는 지금의 중고등학교, 청년부는 지금의 성인팀에 해당한다. 한편 1930년 제6회 대회부터는 실업부가 신설되어 직장인 단위의 팀들이 참가하게 되었다. 1938년 14회 대회부터는 전문부가 신설되어 대학 팀끼리 맞붙게 되었다. 1942년 마지막 대회에서는 경평실업대항전이라는 부문이 따로 만들어져 평양과 서울의 실업팀 연합이 2경기를 치렀다.
3.2. 경기 장소 및 시기
1920년대 초에는 평양의 숭실중학교 운동장이나 광성고보 운동장에서 경기를 치렀으나, 1926년 기림리운동장(구 평양공설운동장, 현 김일성경기장)이 완공되면서 전조선대회를 비롯한 주요 스포츠 행사를 기림리운동장에서 치르게 된다. 시기는 서울의 전조선축구대회가 늦가을에 열렸던 것과 달리 주로 5월에 열렸다. 때문에 1920년대 중반부터는 봄 - 평양의 전조선축구대회, 가을 - 서울의 전조선축구대회 구도가 정착된다.
4. 의미와 영향
몇몇 지방에서 전조선축구대회라는 동일한 명칭을 가진 대회가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전국 규모를 가졌던 것은 서울의 조선체육회 주최 전조선축구대회와 평양의 관서체육회 주최 전조선축구대회 두 가지였다. 이 대회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관서 지방 축구 발전에 기여하였고, 광복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 발전에도 밑바탕이 되었으며, 1972년 생긴 공화국선수권대회(대한민국의 전국체육대회에 해당)의 축구 경기를 이 대회의 후신으로 볼 수도 있다.
4.1. 평양 및 관서 지방 축구 발전 기여
관서체육회 주최 전조선축구대회는 지방 체육회가 주최한 대회였지만, 서울의 조선체육회 주최 전조선축구대회와 쌍벽을 이루는 권위와 규모를 자랑하며 평양을 중심으로 한 관서 지방 축구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4.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와의 연관성
몇몇 지방에서 전조선축구대회라는 동일한 명칭을 가진 대회는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전국적 규모를 가졌던 것은 서울의 조선체육회 주최 전조선축구대회와 평양의 관서체육회 주최 전조선축구대회 두 가지였다. 비록 관서체육회 주최 전조선축구대회는 지방 체육회 주최의 대회였지만, 서울의 그것과 쌍벽을 이루는 권위와 규모를 자랑하면서, 평양을 중심으로 한 관서지방 축구발전을 위해 크게 기여하였다. 평양의 전조선축구대회는 1942년을 마지막으로 폐지되었지만, 광복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 발전에도 밑바탕이 되었으며, 1972년 생긴 공화국선수권대회(대한민국의 전국체육대회에 해당)의 축구경기를 이 대회의 후신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4.3. 한국 축구 역사에서의 위상
몇몇 지방에서 전조선축구대회라는 동일한 명칭을 가진 대회는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전국적 규모를 가졌던 것은 서울의 조선체육회 주최 전조선축구대회와 평양의 관서체육회 주최 전조선축구대회 두 가지였다. 비록 관서체육회 주최 전조선축구대회는 지방 체육회 주최의 대회였지만, 서울의 그것과 쌍벽을 이루는 권위와 규모를 자랑하면서, 평양을 중심으로 한 관서지방 축구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평양의 전조선축구대회는 1942년을 마지막으로 폐지되었지만, 광복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 발전에도 밑바탕이 되었으며, 1972년 생긴 공화국선수권대회(대한민국의 전국체육대회에 해당)의 축구 경기를 이 대회의 후신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