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평대항축구전
1. 개요
경평대항축구전은 일제강점기인 1929년 시작되어 1946년까지 서울과 평양을 대표하는 팀들이 겨룬 축구 경기이다. 조선일보 주최로 시작되었으며, 경성군과 평양군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이 경기는 두 도시 간의 경쟁 의식을 반영하며, 당시 축구 열기를 보여주는 중요한 이벤트였다. 1933년에는 경성 축구단과 평양 축구단이 창단되면서 정기적인 경기로 발전했고, 1942년 일제의 구기 종목 금지로 중단되었다가 해방 후 1946년에 한 차례 더 열렸다. 경평전은 이후 남북 분단으로 인해 중단되었으나, 1990년과 2002년 남북통일축구대회로 그 맥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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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경평대항축구전 |
|---|---|
| 로마자 표기 | Gyeong-Pyeong Daehang Chukgujeon |
| 한글 | 경평대항축구전 |
| 한자 | 京平蹴球對抗戰 |
| 유형 | 리그 |
| 관련 대회 | 조선 컵 대회 |
| 시작 | 1929년 |
| 종료 | 1946년 |
| 국가 | 일본 제국 |
| 지역 | 일제강점기 조선 |
| 참가 팀 수 | 2 |
| 최근 우승 팀 | 평양 축구단 (1946) |
| 최다 우승 팀 | 평양 축구단 (9회) |
| 중계 방송국 | 경성방송국 |
| 다른 이름 | 해당 없음 |
|---|---|
| 첫 번째 경기 | 선발팀 간 경기: 1929년 10월 8일 경성 XI 1–1 평양 XI 클럽 간 경기: 1933년 4월 6일 평양 FC 2–3 경성 FC |
| 마지막 경기 | 1946년 3월 27일 경성 FC 1–3 평양 FC |
| 참가 팀 | 경성 FC 평양 FC |
| 최다 출전 선수 | 해당 없음 |
-
서울특별시의 축구 -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1990년대 중반 대한민국 정부 주도로 프로축구 활성화를 위해 추진된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은 서울 연고 구단들을 지방으로 이전시켜 서울을 연고 공동 지역으로 만들었으나, 경쟁력 약화와 팬심 이탈을 초래하여 2004년 FC 서울의 복귀로 사실상 철폐되었다. -
폐지된 축구 대회 -
코파 데 오로 아르헨티나
코파 데 오로 아르헨티나는 1945년 FC 바르셀로나와 아틀레틱 빌바오 간의 단판 경기로, 바르셀로나가 5-4로 승리하여 우승을 차지했으며 세사르와 가모랄이 바르셀로나의 공격을, 우라, 자라, 파니조가 아틀레틱 빌바오의 득점을 이끌었다. -
폐지된 축구 대회 -
전조선축구대회 (관서체육회)
1925년부터 관서체육회 주최로 시작된 전조선축구대회는 평양기독청년회 대회를 계승, 발전시켜 서울의 전조선축구대회와 함께 한국 축구 발전에 기여했으며, 일제강점기 말 서조선축구대회로 변경되어 개최되다 광복 후 북한 축구의 토대가 되었다. -
일제강점기의 축구 대회 -
전조선축구대회
전조선축구대회는 조선체육회와 조선축구협회가 주최하여 1921년부터 1940년까지 열린 한국 최초의 전국 규모 축구 대회로, 한국 근대 축구의 시작을 알리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기여했다. -
일제강점기의 축구 대회 -
전조선축구대회 (관서체육회)
1925년부터 관서체육회 주최로 시작된 전조선축구대회는 평양기독청년회 대회를 계승, 발전시켜 서울의 전조선축구대회와 함께 한국 축구 발전에 기여했으며, 일제강점기 말 서조선축구대회로 변경되어 개최되다 광복 후 북한 축구의 토대가 되었다.
2. 명칭
1929년 제1회 대회 관련 당시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조선일보주최 경성평양대항축구 제일회전", "승부를 결하지 못한 경평대항축구전은"과 같이 경평대항축구전이라는 문구가 나오고 있다. 한편 1933년 대회 관련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전경성군 대 전평양군의 축구대항전", "경성대평양축구대항전 제삼일"과 같이 경평축구대항전이라는 문구가 나오고 있다.
이처럼 경평대항축구전과 경평축구대항전이라는 명칭이 당시에 혼용되었다. 그러나 당시 모든 기사를 종합하여 검토해보면 경성평양대항축구전을 줄인 경평대항축구전이란 명칭이 더 많이 사용되었으며, '대항(對抗)'이란 단어는 국어사전에서 일부 명사 뒤에 쓰여 그것끼리 서로 겨룸(예: 학교 대항 축구 경기, 각 도 학생 대항 연극 공연)이란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경평대항축구전이 국어 어법에도 부합하며, 당시 대회의 취지인 경성과 평양 두 도시가 겨루는 축구 경기라는 의미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당시 다른 종목에서도 "경평대항빙상경기", "경평대항농구전"과 같이 "경평대항"이란 용어가 널리 사용되었다. 전조선도시대항축구대회, 3지방대항축구전과 같이 '전조선도시대항', '3지역대항' 등의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당시 사람들에게 '대항(對抗)'이란 단어는 지역 혹은 도시들이 겨룬다는 의미로 널리 쓰이던 표현이었다. 따라서 경평대항축구전이 보편타당한 명칭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후대에는 경평대항축구전보다 경평축구대항전이라는 명칭이 더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당시부터 현재까지 줄여서 경평축구전 혹은 더 줄여서 경평전이라는 명칭 역시 많이 사용되고 있다.
3. 역사
1910년대 한국에서 축구 붐이 일면서 많은 축구 클럽과 학교 팀이 만들어졌고, 1921년에는 전조선 축구대회(대한민국 FA컵의 전신)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 조선 축구단, 불교청년회 축구단, 건강구락부와 같은 서울 기반 클럽들이 무오 축구단과 같은 평양 클럽들과 경기를 치렀다.
1929년 조선일보 주최로 서울에서 제1회 경평 축구전이 개최되었으며, 각 도시의 연합팀이 참가했다. 경기 당일 대부분의 상점들이 문을 닫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흥분한 팬들 간의 난동으로 인해 이 경기는 자주 중단되었고, 결국 1930년 이후 완전히 폐지되었다.
1933년 평양 FC와 경성 FC가 공식적으로 창단되면서 연례 경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1936년 이후에는 다른 도시의 많은 클럽들이 참가하는 다른 컵 경기로 대체되었다. 경평전은 종말을 맞았지만, 두 클럽은 남북 분단 전까지 여러 대회에서 가끔씩 서로 만났다. 1946년 일제강점기 종결 이후 서울운동장에서 경평전이 열렸으나, 38선으로 남북 통행이 금지되면서 무기한 중단되었다.
3.1. 배경 (조선 시대)
조선 시대 대한민국의 한양(현재의 서울)은 수도였고, 평양은 두 번째로 큰 도시였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평양을 포함한 평안도에 대한 차별적인 분위기를 조성했고, 두 도시 사이에는 깊은 갈등이 있었다. 이들은 한국의 역사적 배경 때문에 경쟁 관계를 형성했다.
3.2. 창설 (1929년)
조선일보 주최로 1929년 10월 8일 첫 경기가 개최되었다. 당시 조선일보 10월 8일 자 사설은 "부지중에 민중적 차원으로 화합하자는 데"에 취지가 있다고 했고, 조선일보 부사장 안재홍은 개회사에서 "경기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역량을 과시하는 기회"로 승화해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경평전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단합과 극일의 저항정신을 키운 본보기로 평가받았다.
당시에는 '팀' 대신 군(軍)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전경성군(全京城軍), 전평양군(全平壤軍)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경성군은 당시 축구 명문 경신중학 중심으로, 평양군은 일본 최강팀 와세다 대학을 7:0으로 꺾어 이름을 날리던 숭실학교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평양팀은 25세 이상 청장년, 경성팀은 연희와 보성 전문 선수 등 20~23세 대학생이 주축이었다.
제1회 대회는 10월 8일 서울 원서동 휘문고등학교 운동장에서 7천여 관중이 열광하는 가운데 개최되었으며, 경기 결과는 다음과 같다.
결과적으로 평양팀이 2승 1무로 우승했으며, 평양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3.3. 재개 (1933년)
1933년 조선축구협회의 주선으로 경성과 평양 대표자들이 모임을 갖고, 경성 축구단 및 평양 축구단의 창단을 기념하여 봄, 가을 두 차례 경성과 평양을 오가며 경기를 재개하기로 결정하였다.
1933년 재개된 경평전은 다음과 같다.
| 횟수 | 날짜 | 홈 팀 | 결과 | 원정 팀 | 경기장 |
|---|---|---|---|---|---|
| 7 | 1933년 4월 6일 | 평양 FC | 2–3 | 경성 FC | 기림리 경기장, 평양 |
| 8 | 1933년 4월 8일 | 평양 FC | 2–2 | 경성 FC | 기림리 경기장, 평양 |
| 9 | 1933년 4월 10일 | 평양 FC | 3-0 | 경성 FC | 기림리 경기장, 평양 |
| 10 | 1933년 9월 20일 | 경성 FC | 3–2 | 평양 FC | 배재고등보통학교, 경성 |
| 11 | 1933년 9월 21일 | 경성 FC | 2–3 | 평양 FC | 배재고등보통학교, 경성 |
| 12 | 1933년 9월 22일 | 경성 FC | 1-1 | 평양 FC | 배재고등보통학교, 경성 |
| 13 | 1933년 10월 23일 | 평양 FC | 1–1 | 경성 FC | 기림리 경기장, 평양 |
| 14 | 1933년 10월 24일 | 평양 FC | 1–1 | 경성 FC | 기림리 경기장, 평양 |
| 15 | 1933년 10월 25일 | 평양 FC | 2–1 | 경성 FC | 기림리 경기장, 평양 |
3.4. 해방 이후 (1946년)
1946년 일제강점기 종결 이후 서울운동장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평전이 열렸다. 1942년 일제의 구기종목 금지 이후 4년 만에 열리는 대회였기에 서울 시민들의 큰 관심과 열광적인 응원 하에 열렸으며, 그 열기가 지나쳐 3월 26일 열린 2차전에서는 관중 난동이 벌어져 경찰이 공포탄을 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38선으로 남북통행이 금지되면서 평양 선수들은 경비망을 뚫고 어렵게 내려왔던 것이었으며, 돌아갈 때는 육로가 위험해 뱃길을 택해야만 했다. 그리고 다음 해에 서울 선수들을 초청하겠다는 그들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한 채 경평전은 무기한 중단되었다.
| No. | 날짜 | 대회 | 홈 팀 | 점수 | 원정 팀 | 득점 (홈) | 득점 (원정) | 경기장 | 참고 |
|---|---|---|---|---|---|---|---|---|---|
| 20 | 1946년 3월 25일 | 자유신문 경평 축구 시리즈 | 서울 FC | 2–1 | 평양 FC | 미상 | 동대문운동장, 서울 | ||
| 21 | 1946년 3월 27일 | 서울 FC | 1–3 | 평양 FC | 미상 | ||||
4. 의미
수도와 제2의 도시이자 지역 의식이 남달랐던 기호 지방과 관서 지방을 대표하는 양대 대도시 서울과 평양에 당시 조선의 최고 빅클럽들이 형성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한 양강 구도가 이루어지면서 이들 최고의 클럽들 대결에 조선 전체가 열광하는, 흡사 지금의 유럽 프로축구 리그처럼 자연스러운 방향으로 클럽 축구가 발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전통을 살리지 못하고 80년대 프로축구 출범 후 대도시에 연고 구단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그 후 기형적인 서울연고공동화정책 등으로 대도시 연고지 빅클럽 구조에서 중소도시 연고지 빅클럽 구조로 바뀌고 부산, 대구, 인천, 광주 같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도시들에 시민구단들이 들어선 점은 아쉬운 점이다.
한편 경평전의 주축이었던 경성 축구단과 평양 축구단은 해방 이후 각각 남한과 북한 국가대표 축구팀의 모태가 되었다. 가난한 신생 독립국에 불과하던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각각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본선 및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8강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남북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이들 간의 교류는 쉽게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경평전 역시 그 명성만이 남은 채 재개되지 못하였다. 월드컵이나 올림픽 등의 지역 예선에서 남북이 마주치기는 했으나 국가대표로서 만난 것이었으며, 경평전과 같이 남북을 대표하는 도시 간의 정기적 경기는 부활되지 못하였다. 물론 1990년 10월 11일에는 평양에서, 10월 23일에는 서울에서 남북통일축구대회라는 명칭으로, 2002년 9월 5일과 8일에는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2002 남북통일축구경기라는 이름으로 경평축구의 맥을 잇는 축구대표팀 경기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5. 역대 전적
경평대항축구전의 역대 전적은 다음과 같다.
| No. | 날짜 | 대회 | 홈 팀 | 점수 | 원정 팀 | 득점 (홈) | 득점 (원정) | 경기장 | 참고 |
|---|---|---|---|---|---|---|---|---|---|
| 1 | 1929년 10월 8일 | 제1회 조선일보 경평 축구 시리즈 | 경성 XI | 1–1 | 평양 XI | 최성손 | 김정식 | 휘문고등보통학교, 경성 | |
| 2 | 1929년 10월 9일 | 경성 XI | 3–4 | 평양 XI | 거복준 최성손 | 이정식 박의현 | |||
| 3 | 1929년 10월 10일 | 경성 XI | 2–4 | 평양 XI | 정원순 최성손 | 이정식 강기대 ? | |||
| 4 | 1930년 11월 28일 | 제2회 조선일보 경평 축구 시리즈 | 경성 XI | 3–2 | 평양 XI | 이영민 최성손 | 김재신 한영택 | 경성운동장, 경성 | |
| 5 | 1930년 11월 29일 | 경성 XI | 3–5 | 평양 XI | 이정우 최성손 | 한영택 박영철 김재신 고정환 | |||
| 6 | 1930년 12월 1일 | 경성 XI | 5–1 | 평양 XI | 김원겸 최성손 이영민 | 한영택 | |||
| 7 | 1933년 4월 6일 | 경성 vs 평양 축구 시리즈 | 평양 FC | 2–3 | 경성 FC | ? 김성간 | 박영환 강영필 | 기림리 경기장, 평양 | |
| 8 | 1933년 4월 8일 | 평양 FC | 2–2 | 경성 FC | 박의현 김영근 | 강기순 최성손 | |||
| 9 | 1933년 4월 10일 | 평양 FC | 3–0 | 경성 FC | 이정식 이정현 | — | |||
| 10 | 1933년 9월 20일 | 조선체육회 경평 축구 시리즈 | 경성 FC | 3–2 | 평양 FC | 배종호 강영필 | 김영근 이치순 | 배재고등보통학교, 경성 | |
| 11 | 1933년 9월 21일 | 경성 FC | 2–3 | 평양 FC | 강영필 채금석 | 한영택 | |||
| 12 | 1933년 9월 22일 | 경성 FC | 1–1 | 평양 FC | 김일배 | 이정식 | |||
| 13 | 1933년 10월 23일 | 제1회 경평 정기 축구전 | 평양 FC | 1–1 | 경성 FC | 미상 | 기림리 경기장, 평양 | ||
| 14 | 1933년 10월 24일 | 평양 FC | 1–1 | 경성 FC | 박영환 | 강영필 | |||
| 15 | 1933년 10월 25일 | 평양 FC | 2–1 | 경성 FC | 이정식 박영환 | 최성손 | |||
| 16 | 1934년 4월 6일 | 제2회 경평 정기 축구전 | 경성 FC | 1–2 | 평양 FC | 최성손 | 박의현 이정식 | 배재고등보통학교, 경성 | |
| 17 | 1934년 4월 7일 | 경성 FC | 2–2 | 평양 FC | 한갑석 최성손 | 김성간 이정식 | |||
| 18 | 1935년 4월 13일 | 제3회 경평 정기 축구전 | 경성 FC | 0–0 | 평양 FC | — | — | 경성운동장, 경성 | |
| 19 | 1935년 4월 15일 | 경성 FC | 0–1 | 평양 FC | — | 한영택 | |||
| 20 | 1946년 3월 25일 | 자유신문 경평 축구 시리즈 | 서울 FC | 2–1 | 평양 FC | 미상 | 동대문운동장, 서울 | ||
| 21 | 1946년 3월 27일 | 서울 FC | 1–3 | 평양 FC | 미상 | ||||
경평대항축구전 외에 전조선축구대회 등 다른 대회에서의 경성 FC와 평양 FC 간의 전적은 다음과 같다.
| 날짜 | 대회 | 홈 팀 | 점수 | 원정 팀 | 득점 (홈) | 득점 (원정) | 경기장 | 참고 |
|---|---|---|---|---|---|---|---|---|
| 1935년 5월 14일 | 조선 축구 선수권 대회 | 경성 FC | 1–0 | 평양 FC | 배종호 | — | 경성운동장, 경성 | |
| 1939년 11월 10일 | 조선 축구 협회 3개 지역 리그 | 경성 FC | 5–0 | 평양 FC | 김성간 황정하 김용식 | — | 경성운동장, 경성 | |
| 1939년 11월 12일 | 경성 FC | 1–3 | 평양 FC | 송창엽 | 양원보 현효섭 | |||
| 1939년 11월 13일 | 경성 FC | 3–1 | 평양 FC | 김성간 김인모 | 양원보 |
경평 양 팀간의 시리즈 및 경기 결과는 다음과 같다.
| 팀 | 시리즈 | 경기 | |||||||||
|---|---|---|---|---|---|---|---|---|---|---|---|
| 경기 | 승 | 무 | 패 | 경기 | 승 | 무 | 패 | 득점 | 실점 | 득실차 | |
| 경성 FC | 8 | 1 | 3 | 4 | 25 | 8 | 7 | 10 | 47 | 47 | 0 |
| 평양 FC | 8 | 4 | 3 | 1 | 25 | 10 | 7 | 8 | 47 | 47 | 0 |
대회 횟수와 전적에 대한 논란은 '대회 횟수와 전적 논란' 하위 섹션에서 다루고 있다.
5.1. 대회 횟수와 전적 논란
경평대항축구전의 제1회 대회를 조선일보 주최의 1929년 대회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나, 1929년과 1930년처럼 경성과 평양의 선발팀 성격이 아닌, 1933년 경성 축구단과 평양 축구단이 공식적으로 창단된 이후 양 축구단의 창단을 기념하여 1933년 4월 6일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벌어진 대회부터를 1회 대회로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이와 같이 대회 횟수와 전적이 공식적으로 명확하게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회 횟수가 각각 다르게 기재되고 있다. 여기서는 최대한 당시 언론에서 기재한 대회 횟수를 반영하여 1929년 10월, 1930년 11월, 1933년 9월에 개최된 대회와 1933년 10월부터 정식으로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합의하여 개최되기 시작한 경평대항축구전을 분리하여 정리하였다. 또한 1933년 4월의 대회는 아직 합의 전 평양 축구단이 주최한 일종의 친선경기라는 견해가 있기 때문에 역시 분리하였다.
전적에 있어서는 1929년부터 1935년까지 6년 동안 평양 축구단 기준으로 19전 7승 8무 4패라는 기록의 기사가 있는데, 이는 아래 기재한 전적에서 1935년까지의 전적인 19전 8승 7무 4패와 거의 근접한 기록이다.
또한 한겨레의 '29년 첫 경평축구 개최'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면 총 23전 경성 6승 7무 10패, 평양 10승 7무 6패의 종합전적이 나오고 있으며, 세계일보 (이동윤, 1990년 9월 20일자 11면)의 '기록으로 본 경평축구 - 11승 7무 7패로 평양이 우세'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면 총 25차례 경기가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이렇게 문헌마다 다른 기록이 나오고 있는 이유는 정기전 성격의 경평대항축구전 이외에 전조선축구대회, 전조선도시대항축구대회, 3지방대항축구전 등의 대회에서 경성과 평양의 대진 기록을 포함한 것으로 추정되며, 완벽한 전적 기록을 찾기 위해서는 축구계의 확인 작업이 필요해 보인다.
5.2. 전적 총계 (정기전만 포함)
6. 상세
경평대항축구전은 1929년부터 1946년까지 서울과 평양을 연고로 하는 축구단 간에 벌어진 친선 경기이다. 초창기에는 조선일보 주최로 시작되었으며, 이후 여러 단체의 주최 및 후원으로 진행되었다.
| # | 날짜 | 대회명 | 홈 팀 | 스코어 | 원정 팀 | 골 (홈) | 골 (어웨이) | 장소 | 비고 |
|---|---|---|---|---|---|---|---|---|---|
| 1 | 1929년 8월 8일 | 제1회 조선일보 주최 경평축구전 | 경성군 | 1–1 | 평양군 | 최성손 | 김정식 | 서울 원서동 휘문고등학교 운동장, 조선일보 | |
| 2 | 1929년 8월 9일 | 경성군 | 3–4 | 평양군 | 거복준, 최성손 | 이정식, 박의현 | |||
| 3 | 1929년 10월 10일 | 경성군 | 2–4 | 평양군 | 정원순, 최성손 | 이정식, 강기대 | |||
| 4 | 1930년 11월 28일 | 제2회 조선일보 주최 경평축구전 | 경성군 | 3–2 | 평양군 | 이영민, 최성손 | 김재신, 한영택 | 경성운동장 | |
| 5 | 1930년 11월 29일 | 경성군 | 3–5 | 평양군 | 이정우, 최성손 | 한영택, 박영철, 김재신, 고정한 | |||
| 6 | 1930년 12월 1일 | 경성군 | 5–1 | 평양군 | 김원겸, 최성손, 이영민 | 한영택 | |||
| 7 | 1933년 4월 6일 | 평양 축구단 주최 친선경기 조선축구협회 주선 | 평양 축구단 | 2–3 | 경성군 | 김성간 | 박영환, 강영필 | 평양공설운동장 | |
| 8 | 1933년 4월 8일 | 평양 축구단 | 2–2 | 경성군 | 박의현, 김영근 | 강기순, 최성손 | |||
| 9 | 1933년 4월 10일 | 평양 축구단 | 3–0 | 경성군 | 이정식, 이정현 | — | |||
| 10 | 1933년 9월 20일 | 제3회 조선체육회, 조선체육계사 공동 주최 경평축구전 조선중앙일보 후원 | 경성 축구단 | 3–2 | 평양 축구단 | 배종호, 강영필 | 김영근, 이치순 | 서울 배재중학교 운동장 | |
| 11 | 1933년 9월 21일 | 경성 축구단 | 2–3 | 평양 축구단 | 강영필, 채금석 | 한영택 | |||
| 12 | 1933년 9월 22일 | 경성 축구단 | 1–1 | 평양 축구단 | 김일배 | 이정식 | |||
| 13 | 1933년 10월 23일 | 제1회 경성-평양 대항 정기 축구전 (평양 축구단 주최) | 평양 축구단 | 1–1 | 경성 축구단 | Unknown | 평양공설운동장 | ||
| 14 | 1933년 10월 24일 | 평양 축구단 | 1–1 | 경성 축구단 | 박영환 | 강영필 | |||
| 15 | 1933년 10월 25일 | 평양 축구단 | 2–1 | 경성 축구단 | 이정식, 박영환 | 최성손 | |||
| 16 | 1934년 4월 6일 | 제2회 경성-평양 대항 정기 축구전 (경성 축구단 주최) 조선중앙일보 후원 | 경성 축구단 | 1–2 | 평양 축구단 | 최성손 | 박의현, 이정식 | 서울배재중학교 운동장 | |
| 17 | 1934년 4월 7일 | 경성 축구단 | 2–2 | 평양 축구단 | Han Gab-seok, 최성손 | 김성간, 이정식 | |||
| 18 | 1935년 4월 13일 | 제3회 경성-평양 대항 정기 축구전 (경성 축구단 주최) | 경성 축구단 | 0–0 | 평양 축구단 | — | — | 경성운동장 | |
| 19 | 1935년 4월 15일 | 경성 축구단 | 0–1 | 평양 축구단 | — | 한영택 | |||
| 20 | 1946년 3월 25일 | 자유신문사 주최 경평축구전 | 서울 축구단 | 2–1 | 평양 축구단 | Unknown | 동대문운동장 | ||
| 21 | 1946년 3월 27일 | 서울 축구단 | 1–3 | 평양 축구단 | Unknown | ||||
7. 양 구단에서 활약하였던 선수
* 김용식 (경성: 1933-1937 / 평양: 1940-1942 / 경성: 1946-19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