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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항일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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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북항일연군은 1936년 중국 공산당의 지휘 아래 만주 지역의 항일 무장 세력을 통합하여 창설된 군대이다. 코민테른의 통일 인민 전선 결성 호소에 따라 동북인민혁명군을 재편성하여 결성되었으며, 만주와 한반도에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고 민족 독립을 쟁취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공산주의자, 학생, 농민, 장쉐량의 옛 군대 출신, 산적 등 다양한 출신 성분으로 구성되었으며, 김일성, 최현, 김책 등 훗날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하는 인물들이 주요 지휘관으로 활동했다. 1930년대 후반 일제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인해 소련으로 이동하여 제88국제여단에 편입되었으며, 1945년 일본 패전 후 북한으로 귀환하여 권력을 장악했다. 한국에서는 항일 무장 투쟁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북한 정권 수립 주역이라는 점 때문에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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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항일연군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개요
동북항일연군 병사들
명칭동북항일연군
로마자 표기Dongbug hang-il yeongun
한자 표기東北抗日聯軍
중국어 간체 표기东北抗日联军
중국어 병음 표기Dōngběi Kàngrì Liánjūn
일본어 표기東北抗日聯軍
한국어 표기동북항일연군
영어 표기Northeast Anti-Japanese United Army, NAJUA
활동 기간
활동 기간1936년 ~ 1945년
소속
국가만주국
중국
소속 정당중국 공산당 (명목상), 코민테른
군사 정보
유형육군 경보병
역할게릴라전
주요 전투중일 전쟁
소련의 만주 침공
주요 지휘관양징위
리자오린
저우바오중
자오상즈
김일성
병력 규모약 30,000 명 (1937년)
이념
이념공산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반제국주의
반파시즘
기타
활동 지역만주
상위 단체중국 공산당
이후 단체제88독립보병여단
적대 국가일본 제국
만주국
관련 전투중일 전쟁
보천보 전투
만주 전략공세작전
협력 세력소비에트 연방
중국 공산당

2. 창설 및 활동 목표

193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통일 인민전선의 결성이 호소되자, 중국공산당은 모든 항일운동을 당 지도하에 통합하여 통일전선을 결성하기로 결정하였다.[6] 이를 계기로 1936년부터 만주 각지의 동북인민혁명군을 재편하여 동북항일연군을 창설했다.

동북항일연군은 공식적으로 중국 공산당이 지휘했지만, 옌안의 중국 공산당 중앙에 직접 보고하지는 않았다. 소련의 지원과 지시를 받았으며, 군복은 소련 적군 군복을 모방했다.

1930년대 전반, 만주국에서는 중국 공산당의 지도 하에 조선인중국인으로 구성된 항일 게릴라 부대인 동북인민혁명군이 조직되었으나, 민생단 사건 등으로 인해 조직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를 계기로, 만주에서도 “항일 반만”이라는 목표에 일치한다면 국민당 계열의 독립 무장 단체를 포함한 모든 단체와 협력하고 흡수하는 방침이 제시되었다.

1934년경부터 이미 국민당 계열의 마적이나 의용군까지 공산당 지도하에 통합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이들은 주로 부농, 부호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적 성격을 싫어하며 일제 측에 투항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공산주의적 색채를 최대한 희석시키려 노력하면서 동북인민혁명군은 소규모 마적과 독립 무장 단체들을 흡수하여 동북항일연군으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통화성 기반의 국민당 계열 항일 무장 단체인 왕봉각의 대도회와 만주에 남아 있던 조선인 민족주의 무장 단체인 조선혁명군의 우파는 동북항일연군에 집단으로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큰 세력이 되지는 못했다.

동북인민혁명군은 제1군, 제2군이 남만주에, 제4, 5, 7, 8, 10군이 동만주에, 제3, 6, 9, 11군이 북만주에 배치되어 있었다. 1936년 남만주의 군대가 우선 제1로군이 되었고, 1937년에는 동만주 군대가 제2로군, 1939년에는 북만주 군대가 제3로군이 되는 등 재편을 마쳤다.

2. 1. 창설 배경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게릴라 부대를 조직하여 항일 의용군에 합류, 관동군만주국군에 맞서 싸웠다. 중국 공산당은 이러한 부대들에 간부들을 파견하여 지도하고 조직화하려 했다.[3][4] 양정우, 주보중, 리자오린, 조상지, 최용건 등이 각지에서 게릴라 부대를 이끌거나 결성하는 데 참여했다.

1932년 6월, 중국 공산당은 상하이에서 "북방회의"를 열어 만주 지역의 "특수성"을 비판하고, 토지 혁명과 소비에트 정부 수립에 집중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에 따라 만주성위는 공산당 지도하의 게릴라 부대를 적군으로 재편성하고 독자적으로 싸울 것을 명령했다.[5]

1933년 1월, 중국 공산당의 코민테른 대표단은 "1월 26일 서한"을 통해 북방회의의 "좌경 문제"를 바로잡고, 반일 통일전선을 수립할 것을 제안했다. 적군은 동북 인민혁명군으로 개명되고 다른 반일 세력과 협력하라는 지시를 받았다.[5]

1934년 2월, 상하이의 중국 공산당 임시 정치국은 만주성 위원회의 "1월 26일 서한"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비판하며, 농민혁명 단계로 나아가는 슬로건을 제시할 것을 요구했다. 동시에 코민테른 대표단도 조직 내에서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6]

193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반파시즘 인민전선 결성이 제창되면서, 중국 공산당도 항일 통일전선을 추진하게 되었다.[2] 같은 해 6월, 코민테른에 파견된 중국 공산당 대표단은 만주 지역 당 조직에 "6월 3일 서한"을 발송하여, 당파, 계급, 민족을 불문하고 전면적인 대일 항일 통일전선을 구축해야 한다는 새로운 정책을 촉구했다.

1936년 2월, 양정우, 리자오린, 주바오중, 조상지, 왕덕태 등 공산당 지도자들은 "동북 항일 연군 통일 조직 선언"을 발표하고, 동북 인민혁명군을 동북 항일 연군으로 재편했다.[6]

1934년경부터 이미 국민당 계열의 마적이나 의용군까지 공산당 지도하에 통합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이들은 주로 부농, 부호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적 성격을 싫어하며 일제 측에 투항하는 경우가 많았다.

2. 2. 활동 목표 및 강령

193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7차 대회에서 통일 인민전선의 결성이 호소되자, 중국공산당은 모든 항일운동을 당 지도하에 통합하여 통일전선을 결성하기로 결정하였다.[6] 이를 계기로 1936년부터 만주 각지의 동북인민혁명군을 재편하여 동북항일연군을 창설했다.

1933년 1월, 중국 공산당의 코민테른 대표단은 중앙위원회 명의로 "1월 26일 서한"을 발표했다. 이 서한은 농민혁명에 집중하는 대신 반일 통일전선을 수립할 것을 제안했으며, 적군을 동북 인민혁명군으로 개명하고 다른 반일 세력과 협력하여 반일 통일전선을 수립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5]

1934년에는 국민당 계열의 마적이나 의용군까지 공산당 지도하에 통합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이들은 주로 부농, 부호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적 성격을 싫어하며 일제 측에 투항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공산주의적 색채를 최대한 희석시키려 노력하면서 동북인민혁명군은 소규모 마적과 독립 무장 단체들을 흡수하여 동북항일연군으로 재편되었다.

동북항일연군은 만주와 한반도에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고 민족 독립을 쟁취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또한 모든 반일 세력을 통합하여 항일 통일전선을 구축하고, 토지 개혁 등 사회 개혁을 통해 민중의 삶을 개선하고자 하였다.

3. 편성

동북항일연군은 처음 만들어졌을 때 제1군부터 제11군까지 편성되었으며, 각 군은 만주 지역에 분산 배치되었다. 제1군과 제2군은 남만주, 제4, 5, 7, 8, 10군은 동만주, 제3, 6, 9, 11군은 북만주에서 활동하였다. 이후 남만주의 군은 제1로군, 동만주의 군은 제2로군, 북만주의 군은 제3로군으로 재편성되었다.

이 군대는 공식적으로 중국 공산당이 지휘했지만,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연안의 중국 공산당 중앙에 직접 보고하지는 않았다. 연안의 중국 공산당과의 유일한 연락은 코민테른의 중국 공산당 대표인 강생왕밍을 통해 이루어졌다.

동북항일연군은 소련의 지원과 지시를 받았는데, 소련은 잠재적인 적국인 일본군의 전력을 묶어두기 위해 이 군대를 지원했다. 이들의 군복은 소련 적군 군복을 모방한 것이었다.

항일연합군 병기창의 기계 장비


군대는 다양한 출신 성분으로 구성되었지만, 목표는 하나였다. 만주에서 일본군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공산주의자, 학생, 농민, 장학량의 옛 군대 출신, 심지어 산적들까지 있었다. 옛 산적들은 산과 숲에서의 경험을 살려 게릴라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고위 및 중위 장교 대부분은 공산당원이었으며, 전직 산적 두목들도 포함되었다.

3. 1. 초기 편성 (1936년)

동북항일연군 통일 조직 선언


동북항일연군은 처음 창설될 때 제1군부터 제11군까지 편성되었으며, 각 군은 만주 지역에 분산 배치되었다. 제1군과 제2군은 남만주, 제4, 5, 7, 8, 10군은 동만주, 제3, 6, 9, 11군은 북만주에서 활동하였다.[3][4] 이후 남만주의 군은 제1로군, 동만주의 군은 제2로군, 북만주의 군은 제3로군으로 재편성되었다. 주요 지휘관으로는 양정우, 주보중, 조상지, 김일성, 최용건 등이 있었다.

1936년 2월, 양정우, 리자오린, 주바오중, 조상지, 왕덕태 등 공산당 지도자들은 "동북항일연군 통일 조직 선언"을 공동 발표하고, 동북인민혁명군을 동북항일연군으로 재편하였다.[6]

초기 편성은 다음과 같다.[8][9]

로군주요 지휘관
제1로군
(남만주)
제1군제1사
제2사
제3사
양정우
제2군제4사
제5사
제6사
왕덕태, 김일성
독립여제1단
제2단
교도단
최춘국
제2로군
(동만주)
제4군제1사
제2사
제5군제1사
제2사
제3사
최용건
제7군제1사
제2사
제3사
제8, 10군
제3로군
(북만주)
제3군제1사조상지
제6군
제9군
제11군김책


3. 2. 재편성 (1939년)

1939년,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은 다음과 같이 재편성되었다.

  • 제1로군: 남만주 지역에서 활동.
  • 총사령: 양정우
  • 제1군 군장: 양정우
  • 제2군 군장: 왕덕태
  • 제6사 사장: '''김일성'''
  • 제2로군: 동만주 지역에서 활동.
  • 총사령 겸 정치위원: 주보중
  • 제4군 군장: 이연평
  • 제5군 군장: 채세영
  • 제7군 군장: 이학복
  • 제8군 군장: 사문동
  • 제10군 군장: 왕아신
  • 제3로군: 북만주 지역에서 활동.
  • 총사령: 장수흠(이조린)
  • 제3군 군장: 허형식
  • 제6군 군장: 장수흠
  • 제9군 군장: 이화당
  • 제11군 군장: 기치중


이들은 소련의 지원과 지시를 받았으며, 군복은 소련 적군 군복을 모방했다.

동북항일연군은 최고 전성기에 1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일본군(IJA) 후방에서 게릴라전을 벌였다. 일본군은 만주군과 함께 1930년대 중반부터 항일연군 소탕 작전을 시작했다. 만주군에는 박정희, 백선엽, 정일권 등 한국인 장교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나중에 대한민국 육군 대장과 대한민국 정부 고위 관료가 되었다. 또한, 주로 한국인으로 구성된 특수 부대인 간도특설대()도 있었다.

일본군의 공세와 전향자들의 배신 등으로 항일연군은 큰 피해를 보고 만주에서 활동이 어려워졌다. 김일성은 자서전 ''세기와 더불어''에서 전 동료들의 전향이 가장 고통스러웠다고 회상했다. 중국 공산당(CCP)의 명령에 따라 항일연군은 소련으로 탈출, 소련군 제88국제여단으로 편입되었지만, 항일연군의 조직은 유지했다.[8]

4. 주요 활동

동북항일연군은 만주와 조선 국경 지대에서 일본 제국에 맞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초기에는 보천보 전투를 통해 김일성, 최현과 같은 인물들이 조선 내 신문에 보도되면서 알려졌다.[14] 일본은 이들에게 현상금을 걸기도 했으나, 당시 조선 언론은 일본의 검열로 항일 운동을 긍정적으로 보도하기 어려웠다.[14]

동북항일연군은 만주국과 일본군 관동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쳤다. 일본은 이들을 식민 통치의 장애물로 여겨 만주국의 경찰, 군대, 관동군을 동원해 게릴라 거점과 협력 촌락을 섬멸하고 집단 부락을 건설하여 활동을 고립시키는 등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16] 이로 인해 물자 공급이 어려워진 항일연군은 두메산골에서 게릴라전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소련과 중국 공산당은 동북항일연군에 제한적인 물자를 보급했다. 만주국 내부에서도 비밀리에 협력하거나 무기를 밀매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인원 보급과 혁명 과업 완수를 위해 만주 농가, 특히 조선인 부대는 북부 조선을 중심으로 사상 교육과 조직화에 힘썼다. 일부 연구자들은 물자와 인원 보급 수단이 비합법 게릴라와 큰 차이가 없다고 보기도 한다.[15]

1937년 보천보 전투는 언론에 보도되어 한국 내에도 알려졌다. 전성기 동북항일연군은 1만 명이 넘는 인원으로 일본 제국의 만주 및 중국 침략에 큰 장애가 되었고, 한반도 내 진공 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1939년부터 관동군과 만주국군은 대규모 소탕 작전을 전개하여 양징위, 이홍광, 허형식 등 많은 전사자를 냈고, 전광 등이 일본에 귀순했다.[25] 1940년 일제는 관동군을 76만 명으로 늘려 항일연군 토벌을 강화했다.[25] 저우바오중, 최용건, 김책, 김일성 등 남은 사람들은 물자 부족으로 활동을 지속하기 어려워져 소련 영토로 이동하여 소련의 지원하에 군사활동을 계속했다.[25] 1941년까지 항일연군 1~3로군의 지도부와 잔여 병력 상당수가 소련 영내로 이동했고,[25] 1942년까지 전사하거나 귀순하지 않은 구성원들은 소련으로 탈출하여 동북항일연군은 소멸했다.

동북항일연군은 공식적으로 중국 공산당이 지휘했지만, 지리적 거리 때문에 옌안의 중국 공산당 중앙에 직접 보고하지는 않았다. 옌안의 중국 공산당과의 유일한 연락은 코민테른의 중국 공산당 대표인 캉성왕밍을 통해 이루어졌다. 소련은 잠재적인 적국인 일본군의 전력을 묶어두기 위해 이들을 지원했고, 이들의 군복은 소련 적군 군복을 모방했다.

4. 1. 초기 활동 (1936~1937)

1936년 2월, 양정우, 리자오린, 주바오중, 조상지 등 공산당 지도자들은 "동북 항일 연군 통일 조직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에 따라 동북 인민혁명군은 동북 항일 연군으로 재편되었다.[6] 동북항일연군은 1936년부터 1937년까지 발전 단계에 있었다.

공식적으로 이 군대는 중국 공산당이 지휘했다. 하지만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옌안의 중국 공산당 중앙에 직접 보고하지는 않았다. 옌안의 중국 공산당과의 유일한 연락은 코민테른의 중국 공산당 대표인 캉성왕밍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들은 소련의 지원과 지시를 받았는데, 소련은 잠재적인 적국인 일본군의 전력을 묶어두기 위해 이 군대를 지원했다. 이들의 군복은 소련 적군 군복을 모방한 것이었다.

1934년 3월부터 1935년 2월까지 상하이에 있던 중국 공산당 임시 정치국은 여러 차례의 반공 운동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어 7월 활동을 중단했다. 당시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장정 중이었다. 그 결과, 1935년 상반기부터 만주 지역 당 조직들은 사실상 코민테른 대표단의 독자적인 지도 아래 있었다.

1935년 6월, 코민테른에 파견된 중국 공산당 대표단은 만주 지역 당 조직에 "6월 3일 서한"을 발송했다. 이 서한은 당파, 계급, 민족을 불문하고 전면적인 대일 항일 통일전선을 구축해야 한다는 새로운 정책을 촉구했다. 이 서한은 코민테른 제7차 세계대회에서 제안된 파시즘 반대 인민전선과 중국 공산당의 "8.1 선언"에서 강조된 광범위한 대일 항일 통일전선과 일치했다.[2]

이 군대에는 만주 지역의 조선인(중국 조선족)과 한국 반도 출신의 조선인을 포함하여 많은 수의 조선인이 참여했다. 1918년까지는 사실상 일본의 한국 식민 지배에 대한 조직적인 무장 봉기는 없었다. 이는 1919년 3·1 운동과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후 많은 조선인들이 고향에서의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할 장소로 만주를 선택하게 된 이유였다. 전설적인 八女投江|팔녀투강중국어 중 두 명은 조선족이었다. 이들은 13세에서 23세 사이의 여성 게릴라 부대였는데, 훨씬 더 큰 부대로 오인한 압도적인 일본군과의 장시간 교전 후 포로로 잡혀 고문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모두 강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김일성은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이 군대에서 고위 장교였으며, 1937년 만주-한국 국경을 넘어 보천보의 일본 경찰서를 공격하여 명성을 얻었다. 동아일보 등 한국 신문에 널리 보도되었고, 북부 지역에서 가장 저명한 항일 운동 지도자로 한국에서 유명해졌다. 전쟁 후 이 군대의 일부 조선인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초대 지도자 세대가 되었다. 김일성 외에도 안길, 김책, 최용건, 강건 등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 및 군사 세력의 일부가 된 인물들도 북만주 항일 연군의 조선인 장교들이었다.[7]

1936년, 남만주에서 제1로군이 창설되었을 당시, 중국 공산당은 장정 중이었지만, “항일 동정”을 내걸고 산서성에서 허베이성으로 진출하여 동쪽으로 향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제1로군 제1군의 최초 활동은 이에 연동하여 서정(西征)이었다.

제1차 서정은 제1사에 의해 수행되었다. 1936년 6월 하순, 본계와 안동성 펑청 현의 경계에 있는 화상모자산을 출발하여 랴오양을 거쳐 남만주 철도와 요하를 넘어 랴오시에서 러허에 이르려고 했다. 그러나 수암 산악 지대에서 만주국군에 포위되어 뚫고 도망쳤지만, 많은 탈영자와 전사자를 내고 돌아왔다.

제2차 서정은 제3사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번에는 모두 기병대가 되어 결행하게 되었고, 1936년 11월 하순, 흥경 현경계에서 기병으로 출발하여 만주국군의 추격을 받으면서 청원을 거쳐 철령을 넘어 요하 강변에 도달했다. 그러나 온난한 겨울로 인해 요하가 결빙되지 않아 한 달간의 행군으로 지쳐 결국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 기간 동안 400명의 대원이 110여 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제3사의 대원 수가 400명이었다면, 6개 사를 모두 동일수로 하는 단순 계산으로 제1로군 전체는 2400명 정도가 되며, 6000명이 넘는다는 것은 과장된 것이다.

이듬해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제1로군 제1군은 서정에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팔로군과의 연계를 희망하며 일본군의 후방을 위협할 목적으로 제3사 생존자를 중심으로 청원, 서풍, 개원에서 활동을 계속했고, 별동대가 심양, 복순 일대에 진출하는 등 소모전을 거듭했다.

1936년 제1로군 제2군은 장백 지역에 근거지를 만들려 하고 있었다. 제4사 사장 안봉학이 체포되어 투항하고, 제2군 군장 왕덕태가 포위되어 전사하는 등 상당한 희생을 치르면서, 먼저 김일성이 사장을 맡은 제6사가 근거지 개척에 성공했고, 1937년에는 제1로군 제1군 제2사와 제2군 제4사도 장백으로 근거지를 옮기고 있었다.

1932년 동북항일연군을 일으킨 것은 중국공산당 만주성위 판석현위였지만, 그 당초부터의 고참 조선인 멤버에 오성륜(전광) [12], 이상준(이동광)이 있었다. 오성륜은 제2군의 정치주임이었고, 이상준도 제2군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들은 민생단 사건의 반성을 바탕으로 정치위원 위정민의 지지를 얻어 조선인의 민족의식에 호소하려고 재만한인조국광복회를 조직할 방침을 내놓고 있었다. 장백으로의 침공은 이에 따른 것이었고, 제6사는 지지기반 구축 작업을 시작하여, 그 일환으로 압록강 건너편 조선반도 내 함경남도(현재 량강도) 갑산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박금철, 박달 등의 공산주의 단체(후의 조선노동당 갑산파)와 연락을 취했다.

1937년 6월, 제6사는 압록강을 건너 갑산군 부천면 보다리(구명, 부천보)를 습격(보천보 전투)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것은 갑산 그룹의 안내와 참가에 의해 성공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김일성은 조선은 물론, 단속하는 일본 측으로부터도 공비(공산당비적)로서 거물로 여겨지게 되었고, 후의 북한에서 김일성이 권력을 독점하는 데 유력한 기반이 되었다고도 한다.

전년부터 제6사는 장백에서 근거지 만들기를 진행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수십 명 규모의 소대가 김일성 부대를 자칭하며 무송이나 장백에 출몰하여 약탈을 반복하며 만주군 수비대와 충돌을 거듭하고 있었다. 또 이 해에 들어와서는 갑산 그룹의 활동도 활발해져 조선인 부호로부터 금품을 빼앗는 등의 사건도 있었다. 더 나아가 최현을 단장으로 하는 제4사 제1단이 두만강을 넘어 함경북도무산에 진입하기도 했다.

부천보 습격 전년부터 조선반도의 신문은 “김일성 부대”의 동향을 전하고 있었다. 1936년 9월 11일자 매일신보는 “혜산 건너편에 출몰하는 도적단은 150~160명으로, 3분의 1이 만주인이고 나머지는 조선인이며,…관헌과 같은 복장으로 소련식과 중국식 소·권총, 경기관총 두 정, 대포 한 문을 가지고 있다. 동북항일연군 계열로 장백현 방면에 파견된 이 부대의 수령은 김일성이다. 이들은 15~20개의 약탈반으로 조선인 마을에서 식량을 약탈하고 있다.”[13]고 상당히 정확하다고 보이는 정보를 싣고 있다. 그런데 이에 이은 경성일보 기사에서는 “비수 김일성(金一成) 일당”이라고 되어 있어 제6사가 “김일성 부대”를 자칭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37년 5월, 최현 부대가 무산에서 남하하여 혜산서 관내, 상흥경수의 고세조 재목 작업장을 습격했다. 금품 다수를 약탈한 위에 주임인 일본인 1명, 그 외 조선인 5명, 중국인 30명을 납치하여 건너편으로 도망쳐 몸값을 요구했다. 그에 이은 부천보 습격이다. 부천보는 300호 남짓한 마을로 일본인 26호, 중국인 2호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조선인이다. 거기서 무차별적으로 금품을 강탈하고, 관청, 소방회관, 우체국, 초등학교 등에 방화하여 도망쳤기에 충격을 받은 단속 측은 김일성과 최현에게 다액의 현상금을 걸고 수배했고, 조선일보동아일보도 크게 보도했다. 이들 신문의 논조는 그들을 비적이라고 비난하고 피해를 입은 주민에게 동정하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이 시기 조선에서는 관헌(조선총독부)에 의한 검열 때문에 항일 운동을 긍정적으로 보도하는 것은 어려웠다.[14]

4. 2. 일제의 탄압 강화와 항일연군의 고난 (1938~1940)

일본은 만주국과 일본군 관동군 등을 동원하여 게릴라 거점과 협력 촌락을 섬멸하고, 집단 부락을 건설하여 동북항일연군의 활동을 고립시키는 등 철저한 탄압을 가했다.[16] 특히 집단 부락 건설로 인해 물자 공급이 어려워진 항일연군은 두메산골에서 게릴라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1939년부터 관동군과 만주국군은 대규모 소탕 작전을 전개하여 양징위(楊靖宇), 이홍광, 허형식 등 많은 전사자를 냈고, 전광 등이 일본에 귀순하였다.[25] 1940년 일제는 관동군을 76만 명으로 늘려 항일연군 토벌을 강화했다.[25] 저우바오중, 최용건, 김책, 김일성 등 남은 사람들도 물자 부족으로 활동을 지속하기 어려워져 소련 영토로 이동하여 소련의 지원 하에 군사 활동을 계속했다.[25]

1937년 보천보 전투 이후, 함경남도 혜산 경찰서 경찰부대는 김일성 부대를 추격하다 매복에 걸려 7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에 함흥 보병 제74연대 김인욱 소좌가 혜산 수비대장에 임명되어 김일성 부대에 타격을 가했다. 이후 김일성 부대의 국경 침공은 없어졌지만, 갑산 그룹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일제는 갑산 측에서 162명, 장백현에서 59명을 검거했는데, 이것이 혜산사건의 시작이다. 1938년에는 박달을 포함한 279명이 추가 검거되어 재만 한국인 조국광복회와 갑산 그룹은 와해되었다.

1938년 초, 제1로군 주력 부대는 주로 집안현 산림 지대에 있었다. 총사령 양정우와 정치위원 위정민은 팔로군과의 연락을 위해 재차 서정을 계획했으나, 제1사 사장 정빈이 부대 전체를 이끌고 일만 토벌 부대에 투항했다. 이로 인해 서정은 중단되었고, 제1로군은 다음과 같이 편성 변경되었다.

  • '''제1로군''' 총사령 양정우, 정치위원 위정민, 군수처장 오성륜
  • *총사령부 경위여 여장 방진성 (500명)
  • *제1방면군 지휘 조아범 (250명)
  • *제2방면군 지휘 김일성 (350명)
  • *제3방면군 지휘 진한장 (300명 이상)


1939년 노몬한 사건 이후, 일본은 만주 국내 항일 세력에 대한 단속을 강화했다. 제2독립수비대 사령관 야부 후마사토 소장에게 만주국군 7개 여단, 경찰대 30개 대대가 배속되어 동북항일연군에 대처하게 되었다. 야부 토벌대는 군, 경찰, 행정기관, 민간 조직의 연락을 긴밀하게 하여 게릴라 활동을 봉쇄하고 민중으로부터 고립시키는 작전을 펼쳤다.[16]

토벌대 중 가장 유능하게 활동한 것은 정빈 등 항일연군에서 투항한 인물들이 구성한 경찰 부대였다. 1940년 초에는 경위여단장 방진성이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투항자가 잇따랐다. 총사령 양정우는 몽강현(현재의 정우현)에서 주민의 밀고로 투항을 거부하고 사살되었다.

양정우 사후 제1로군 지도자가 된 위정민은 제1방면군이 남만에서 파르티잔 활동을 계속하는 방침을 내놓았지만, 직후 지휘관 조아범이 대원에게 살해당하고 제1방면군은 내분으로 해체되었다.

김일성이 이끄는 제2방면군은 1940년 3월 안도현 대바가구 삼림경찰대를 습격하여 금품 23000JPY을 약탈하고 쿨리 약 140명을 유괴했다. 이후 마에다 부대의 추격을 받았지만, 매복 공격으로 마에다 부대에 큰 타격을 입혔다.

같은 해 가을부터 야부 토벌대의 활동이 다시 활발해지면서 제2방면군은 소부대로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김일성을 포함한 수십 명은 8월부터 10월경 소련 영토로 도망쳤다.

제3방면군은 1939년 제2로군 제5군과의 공동 작전에서 안도현 대사하진을 점령하기도 했지만, 그해 겨울부터 군 단위 활동이 불가능해져 1940년 말 지휘관 진한장은 전사한다. 최현 등은 소수로 나뉘어 소련으로 들어갔다.

제1로군 총사령부도 1940년 11월경 군의처장 서철이 소련으로 들어갔다. 만주에 남은 제1로군 수뇌부 중 1941년 1월 오성륜이 투항했고, 3월에는 위정민이 전사했다. 이로써 제1로군의 만주에서의 활동은 거의 끝났다.

4. 3. 소련으로의 이동과 재편 (1940~1942)

1940년 일제가 관동군을 76만 명으로 늘려 항일연군 토벌을 강화하면서, 저우바오중, 최용건, 김책, 김일성 등 남은 사람들은 물자 부족으로 활동을 지속하기 어려워져 소련 영토로 이동하여 소련의 지원하에 군사 활동을 계속했다. 항일연군 1~3로군의 지도부와 잔여 병력들의 상당수는 1941년까지 소련 영내로 이동했다.[25] 이들은 소련의 지원과 지시를 받았는데, 소련은 잠재적인 적국인 일본군의 전력을 묶어두기 위해 이들을 지원했다. 이들의 군복은 소련 적군 군복을 모방한 것이었다.

일본군의 공세가 거세지면서 항일연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많은 병사들이 사망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게다가 일본군 정보부는 항일연군 포로들을 회유하거나 고문하여 일본 측으로 전향시켰다. 전향자들은 일본군을 도와 전 동료들을 공격했다. 김일성은 그의 자서전인 ''세기와 더불어''에서 전 동료들의 전향이 치열한 일본군의 공세나 만주 지역의 혹독한 기후보다 더 고통스러웠다고 회상했다. 이러한 이유로 항일연군은 더 이상 만주에서 효과적으로 활동할 수 없었다. 중국 공산당(CCP)의 명령에 따라 항일연군은 소련으로 탈출했다.

1939년 노몬한 사건이 발생하여 일단 휴전은 되었지만, 일본 측의 경계는 고조되었고, 관동군에 의해 만주 국내의 항일 세력에 대한 철저한 단속이 시작되었다. 제2독립수비대 사령관인 야부 후마사토 소장에게 만주국군 7개 여단, 경찰대 30개 대대가 배속되어 동북항일연군에 대처하게 되었다.

야부 토벌대의 작전은 군, 경찰, 행정기관, 민간 조직의 연락을 밀접하게 하여 그물망을 치밀하게 짜서 게릴라 활동을 봉쇄하고 민중으로부터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일반 주민은 토벌대와 게릴라 부대가 번갈아 나타나는 상황에서 자신의 안전을 위해 양측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토벌대가 게릴라 부대를 몰아붙이고 약탈, 유괴, 협박을 막고 완전히 치안을 유지한다면 게릴라 부대의 보복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지고 적극적으로 토벌대에 협력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동북항일연군은 무인의 산림 지대에 몰리고 식량과 의류의 확보조차 어려워졌다.[16]

1940년 초 경위여단장 방진성이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투항자도 잇따랐다. 투항자들로부터 총사령 양정우의 동정이 알려지면서 단독 행동을 강요받게 되었다. 양정우는 몽강현(현재는 양정우의 이름을 따서 정우현으로 개칭되었다)에서 산일을 하던 주민과 접촉하여 밀고를 당하고 투항을 거부한 채 사살되었다.

김일성이 이끄는 제2방면군은 100~300명 정도의 집단 활동을 유지하며 습격, 약탈, 유괴를 성공시켰다. 1940년 3월에는 안도현 대바가구 삼림경찰대를 습격하여 사상자 각 2명의 피해를 입히고 금품 23000JPY을 약탈하고 쿨리 약 140명을 유괴했다.

의식주에 궁핍해지고 제1로군 중추인 위정민과도 연락이 끊어져 김일성을 포함한 수십 명은 8월부터 10월경 독자적인 판단으로 소련 영토로 도망쳤다. 소련 측과의 연락도 없이 갑작스러운 소련 입국이었기 때문에 김일성은 억류되어 한때 투옥되기도 했다.

1940년 1월, 주보중이 중심이 되어 소련 극동 당국과 제1차 하바롭스크 회의가 열렸고, 중국 공산당 중앙과 연락이 닿지 않는 상황에서 소련 극동 당 조직과 극동 방면군이 동북항일연군을 임시 지도하고 지원하는 것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1940년 11월, 주보중과 참모장 최용건은 사전에 소련 측의 연락을 받고 부대 전체가 소련으로 들어갔고, 살아남았던 2로군의 다른 대원들도 뒤따랐다. 투옥되었던 김일성의 신원을 보증한 사람도 주보중이었다.

1941년 시점에서, 1로군에서 소련으로 들어간 사람은 약 88명, 2로군에서는 약 110명으로, 총 200명 정도가 소련 영토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7] 1942년까지, 전사·귀순하고 있지 않는 구성원은 소련에 탈출하였으므로 동북항일연군은 소멸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공식적으로 소련군의 제88국제여단으로 편입되었지만, 항일연군의 조직을 유지했다. 소규모 부대는 만주에 남아 소련에서 잠입한 중국군과 함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싸웠다.

5. 소련 망명 이후

제88 특별 여단(교도 여단)에 편입된 동북항일연군 구성원들은 소련 망명 후에도 만주와 북부 조선에 잠입하여 정찰, 기습, 민중 조직화 등의 작전을 수행하였다.[18] 여단은 소규모 부대를 만주로 파견해 정찰 임무를 수행하고, 주민들 사이에 비밀 조직을 만들기도 하였다. 1943년 이후 이러한 활동은 급감하였고, 정찰 활동에 한해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여단의 임무는 일본의 패망 이후를 대비해 역량을 보존하는 데 집중되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동북항일연군 출신 조선인들은 귀국하여 북한 지역의 당, 군 요직을 차지하였다. 이들은 남로당, 연안파, 갑산파(보천보 전투 등에서 동북항일연군과 함께 싸우다가 조선으로 잠복한 사람)[19], 소련파(동북항일연군과는 별도로 소련으로부터 파견된 사람)를 숙청하고 북한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공식적으로 동북항일연군은 중국 공산당 지휘 하에 있었지만, 지리적 제약으로 연안의 중국 공산당 중앙에 직접 보고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소련의 지원과 지시를 받았으며, 군복도 소련 적군 군복을 모방했다.

2015년 중국의 대일 전승 70주년 기념식전에서는 동북항일연군 모범 부대가 행진했고,[20] 동북항일연군 참가자 최현의 아들 최룡해 조선로동당 서기(당시)가 북한을 대표하여, 동북항일연군과 대치했던 만주국군(중국 조선족 학자 주장에 따르면 간도특설대 소속[21]) 전 장교 박정희의 딸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사열한 것이 한국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22]

6. 해방 이후

1945년 일본 항복과 함께 소련군이 조선을 해방시키자, 김일성을 비롯한 동북항일연군 출신 조선인 대원들은 소련군 점령하의 북조선(38선 이북)으로 돌아왔다.[18] 이들은 북조선인민위원회, 조선공산당(후의 조선로동당), 조선인민군의 요직을 차지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에는 만주파(빨치산파)를 형성하여 권력을 장악했다.[19] 만주파는 남로당파, 연안파, 소련파, 갑산파 등 다른 정치 세력들을 숙청하고 권력을 독점했다.[19] 1967년 당의 지도 이념으로 유일사상체계를 채택했으며, 이후 북조선은 주체사상에 기반한 독자적인 사회주의국가로 나아가게 된다.[19]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자신의 조선인민혁명군이 동북항일연군에 편입되었던 사실은 인정했지만, 소련군과의 연합만을 강조하며 제88특별여단(교도여단)의 존재는 무시했다.[18]

대한민국에서는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평가가 복잡하게 나타난다. 항일 무장 투쟁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도 존재하지만, 이들이 북한 정권 수립의 주역이라는 점 때문에 논란이 있다. 특히, 만주국군 출신(예: 박정희, 백선엽 등)이 한국 현대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실은 이념적인 대립을 야기한다. 더불어민주당 등 진보 진영에서는 동북항일연군의 항일 투쟁을 높이 평가하고, 이들의 역사적 의의를 강조한다. 그러나 국민의힘 등 보수 진영에서는 이들의 공산주의 이념과 북한 정권과의 연관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7]

김일성은 1937년 만주-한국 국경을 넘어 보천보의 일본 경찰서를 공격하여 명성을 얻었다. 동아일보 등 한국 신문에 널리 보도되었고, 북부 지역에서 가장 저명한 항일 운동 지도자로 한국에서 유명해졌다. 전쟁 후 이 군대의 일부 조선인들은 북한의 초대 지도자 세대가 되었다. 김일성 외에도 안길, 김책, 최용건, 강건 등 이후 북한의 정치 및 군사 세력의 일부가 된 인물들도 북만주 항일 연군의 조선인 장교들이었다.

6. 1. 북한

1945년 일본 항복과 함께 소련군이 조선을 해방시키자, 김일성을 비롯한 동북항일연군 출신 조선인 대원들은 소련군 점령하의 북조선(38선 이북)으로 돌아왔다.[18] 이들은 북조선인민위원회, 조선공산당(후의 조선로동당), 조선인민군의 요직을 차지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에는 만주파(빨치산파)를 형성하여 권력을 장악했다.[19]

만주파는 남로당파, 연안파, 소련파, 갑산파 등 다른 정치 세력들을 숙청하고 권력을 독점했다.[19] 1967년 당의 지도 이념으로 유일사상체계를 채택했으며, 이후 북조선은 주체사상에 기반한 독자적인 사회주의국가로 나아가게 된다.[19]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자신의 조선인민혁명군이 동북항일연군에 편입되었던 사실은 인정했지만, 소련군과의 연합만을 강조하며 제88특별여단(교도여단)의 존재는 무시했다.[18]

6. 2. 남한

대한민국에서는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평가가 복잡하게 나타난다. 항일 무장 투쟁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도 존재하지만, 이들이 북한 정권 수립의 주역이라는 점 때문에 논란이 있다. 특히, 만주국군 출신(예: 박정희, 백선엽 등)이 한국 현대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실은 이념적인 대립을 야기한다. 더불어민주당 등 진보 진영에서는 동북항일연군의 항일 투쟁을 높이 평가하고, 이들의 역사적 의의를 강조한다. 그러나 국민의힘 등 보수 진영에서는 이들의 공산주의 이념과 북한 정권과의 연관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7]

김일성은 1937년 만주-한국 국경을 넘어 보천보의 일본 경찰서를 공격하여 명성을 얻었다. 동아일보 등 한국 신문에 널리 보도되었고, 북부 지역에서 가장 저명한 항일 운동 지도자로 한국에서 유명해졌다. 전쟁 후 이 군대의 일부 조선인들은 북한의 초대 지도자 세대가 되었다. 김일성 외에도 안길, 김책, 최용건, 강건 등 이후 북한의 정치 및 군사 세력의 일부가 된 인물들도 북만주 항일 연군의 조선인 장교들이었다.

7. 평가 및 논란



중국 본토에서는 동북항일연군을 높이 평가한다. 이 군대는 중국 공산당이 이끄는 항일 부대(抗日部隊)로 여겨진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 펑전(彭真)은 이 군대가 겪은 극심한 고난을 장정에 비유했다.

전설적인 지휘관 양징위(杨靖宇)와 조상지(赵尚志) 외에도 조이만(赵一曼) (1905~1936)이라는 여성 장교는 많은 중국인에게 국가 구원의 상징으로 존경받았다.

참조

[1] 뉴스 中央编译局: "抗日"不宜译成"anti-Japanese" http://www.xinhuanet[...] 2015-08-20
[2] 서적 东北抗联: 绝地战歌 中共党史出版社
[3] 서적 东北抗日联军史 解放军出版社
[4] 서적 东北抗日联军抗战纪实 人民出版社
[5] 논문 Northeast China and the Origins of the Counter-Japanese United Front
[6] 논문 中共驻共产国际代表团与中国抗日战争——以抗日民族统一战线的形成和发展为线索 http://www.cqvip.com[...] 2022-03-13
[7] 논문 Hero, Heroism, and Hero-worship: An Analysis of the Chinese Collective Memory of Yang Jingyu 2017-09-00
[8] 서적
[9] 서적
[10] 뉴스 【항일녀걸9】3군 재봉대 제2임 대장 장의숙 http://www.jlcxwb.co[...] 2015-05-07
[11] 웹사이트 夏云杰 http://www.chinamart[...] 中华英烈网 2020-10-23
[12] 서적
[13] 서적
[14] 서적
[15] 서적
[16] 서적
[17] 서적
[18] 서적 金日成回顧録―世紀とともに
[19] 서적
[20] 뉴스 英雄模範部隊隊列が観閲を受ける http://j.people.com.[...] 人民日報 2015-09-04
[21] 웹사이트 朴正煕・間島特設隊 寄稿掲載の<言葉>誌、提訴される http://www.searchnav[...]
[22] 뉴스 朴大統領、戦勝軍事パレードで金日成が属した東北抗日連軍も参観 http://japan.hani.co[...] 한겨레 2015-09-01
[23] 서적 日本の論点2004 文藝春秋 2003-11-10
[24] 간행물 东北抗日联军历史问题座谈会纪要
[25] 뉴스 만주 남아서 끝까지 ‘현장’서 무장투쟁 http://www.hani.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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