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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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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차 투쟁은 1972년 8월,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일본 사가미 종합 보급창에서 M48 전차 수송을 막으면서 시작된 시위이다. 무라사메 다리에서 트레일러 통행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으며, 차량 제한령을 근거로 전차 수송을 막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일본 사회당, 일본 공산당 등 정당과 시민 단체들이 참여했으며, 미일 안보 조약 위반, 소음 및 분진 문제 등 다양한 이유로 투쟁이 벌어졌다. 일본 정부는 처음에는 전차 수리 부문 축소를 제시하며 사태를 수습하려 했으나, 결국 차량 제한령을 개정하여 전차 수송을 재개했다. 이 투쟁은 미일 안보 조약, 일본국 헌법 제9조 등과 관련하여 논의되며, 관련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 당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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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 투쟁
명칭
명칭전차 투쟁
전체베트남 전쟁 반전운동
일본어 명칭, , , , ,
주요 정보
사건의 주요 현장이었던 [[사가미 종합보급창]]
사건의 주요 현장이었던 사가미 종합보급창
날짜1972년 8월 5일 ~ 1972년 11월 8일
지역가나가와현 사가미하라시 사가미 종합보급창 및 요코하마시 가나가와구
원인베트남 전쟁
목적불명
종류가두 시위
결과미군의 전차 수송 100일 간 중단
관련 세력
시위대불명
미국주일 미군
일본 정부
주요 인물불명
인원불명
피해 상황
사상자불명
사망자불명
부상자불명
체포자불명

2. 역사적 배경

1972년 8월 5일, M48 전차를 실은 트레일러 5대가 사가미 종합 보급창에서 출발하여 요코하마 노스독으로 향하던 중, 무라사메 다리에서 베트남 전쟁 반대 시민들의 연좌 농성으로 통행이 막혔다. 이 사건은 일본 내 베트남 전쟁 반대 여론, 미군 기지 문제, 미일 안전 보장 조약 관련 논란을 촉발시킨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당시 일본은 미일 안전 보장 조약에 의거, 미군에 기지를 제공했고, 사가미 종합 보급창은 베트남 전쟁에 투입될 전차 수리의 핵심 거점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일본 내에서는 베트남 전쟁 반대 여론이 거셌고, 전차 수송은 일본의 전쟁 간접 참여로 인식되어 큰 반발을 샀다.

이런 상황에서 아스카타 카즈오 요코하마 시장(당시)과 카와즈 마사루 사가미하라 시장(당시) 등은 차량 제한령을 근거로 전차 수송 저지를 시도했다. 일본 사회당 탄지 에이조 사가미하라 시의원(당시)은 무라사메 다리에서 20톤 이상 차량 통행 금지를 지적하며, M48 전차는 물론 M113 장갑차도 중량 및 폭 제한을 초과한다고 주장했다.[2]

이 투쟁에는 일본 사회당, 일본 공산당 등 정당뿐 아니라, 중핵파, 혁마르파 등 과격파, 베평련 같은 학생 및 시민 운동가들도 동참했다. 이들은 텐트 설치 및 연좌 농성 등 적극적인 항의 활동을 펼쳤다.

2. 1. 투쟁의 발단

1972년 8월 5일, M48 전차를 싣고 사가미 종합 보급창을 출발한 트레일러 5대가 요코하마 노스독 직전 무라사메 다리에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연좌 농성, 즉 "전차 저지 행동"으로 인해 통행이 막히면서 투쟁이 시작되었다. 8월 7일 밤, 트레일러는 보급창으로 되돌아갔다.[1]

보급창 정문 앞에는 텐트가 설치되어 감시, 연좌 농성, 숙식 농성 등 항의 활동이 이어졌고, 언론에도 크게 보도되었다. 사가미하라역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 덕분에 수천 명의 활동가와 시민들이 모였다. 기동대가 배치되어 데모, 투석 등 격렬한 항의가 발생했다.

저지된 전차는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M48, M113 장갑차 등이었다. 아스카타 카즈오 요코하마 시장(당시)과 카와즈 마사루 사가미하라 시장(당시) 등의 노력과, 다리에서 일정 중량·폭 이상 차량 통행을 금지하는 차량 제한령이 법적 근거가 되었다. 일본 사회당의 탄지 에이조 사가미하라 시의원(당시)은 "무라사메 다리의 경우, 20톤 이상 차량은 허가 없이 통행할 수 없다. (...) M113은 9.75톤, 트레일러 자체 중량은 11.3톤으로 차량 제한령 위반"이라고 항의했다.[2] (M48은 물론, M113도 중량 및 폭 제한 초과).

8월 이전부터 전차 수송 항의 활동이 있었고, 5월 25일에는 M48 전차 5대가 실력 행사에 의해 일시 정지되기도 했다. "피케대는 트레일러 앞에 막아서서 운전자를 설득하고, 적재함에 올라 전차에 손을 흔들었다."[3]

텐트촌에는 일본 사회당, 일본 공산당 등 정당 외에, 중핵파, 혁마르파 등 과격파, 지구로에 베평련 등 학생 운동가, 시민 운동가들이 텐트와 현수막을 설치하고 항의 활동을 벌였다. 수송 저지에 모인 사람들의 생각은 다양했다. 반전 의식, 수송 소음 및 분진 문제 개선, 주일 미군 기지가 베트남 전쟁에 관여하는 것이 미일 안전 보장 조약 범위를 넘는다는 문제 제기 등이었다.

6월에는 수리·수송 차량 중 미군 소속 별 마크가 없는 남베트남 병력 수송차가 많다는 보도가 나와 미일 안전 보장 조약 위반 논란이 일었다.

두뇌 경찰의 PANTA가 간토 가쿠인 대학 시절 투쟁에 참여했다고 밝혔다.[4]

2. 2. 투쟁의 전개

1972년 8월 5일, M48 전차를 실은 트레일러 5대가 요코하마 노스독 직전 무라사메 다리에서 베트남 전쟁 반대 시민들의 연좌 농성으로 통행이 금지되면서 투쟁이 시작되었다. 8월 7일 밤, 트레일러는 사가미 종합 보급창으로 되돌아갔다.[1] 보급창 정문 앞에는 텐트가 설치되어 감시, 연좌, 숙식 농성 등 항의 행동이 이어졌고, 언론에도 크게 보도되었다. 사가미하라역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 덕분에 수천 명의 활동가와 시민들이 모였다. 기동대가 배치되어 데모, 투석 등 격렬한 항의가 발생했다.

투쟁은 약 100일간 지속되었으며, 저지된 전차는 미군 및 남베트남군의 M48, M113 장갑차 등이었다. 아스카타 카즈오 요코하마 시장(당시)과 카와즈 마사루 사가미하라 시장(당시) 등의 노력과 차량 제한령이라는 법적 근거가 있었다. 일본 사회당의 탄지 에이조 사가미하라 시의원(당시)은 "무라사메 다리의 경우, 20톤 이상 차량은 허가 없이 통행 금지. (...) M113은 9.75톤, 트레일러 자체 중량은 11.3톤으로 명백한 차량 제한령 위반"이라고 항의했다.[2] (M48은 물론, M113도 중량 및 폭 제한 초과).

실제 전차 수송 항의 활동은 8월 이전부터 있었다. 5월 25일에도 M48 전차 5대가 실력 행사로 멈춰졌다. "피케대는 트레일러 앞에 가로막고 운전석에 매달려 운전자를 설득, 적재함에 올라 전차에 손을 흔들었다."[3]

텐트촌에는 일본 사회당, 일본 공산당 등 정당 외에 중핵파, 혁마르파 등 과격파, 지구로에 베평련 등 학생 운동가, 시민 운동가들이 텐트와 현수막을 걸고 항의했다. 수송 저지에 모인 사람들의 심정·신조는 다양했다. 반전 의식, 수송 소음 및 분진 문제 개선, 주일 미군 기지의 베트남 전쟁 관여가 미일 안전 보장 조약 범위를 넘는다는 문제 제기 등이었다.

6월에는 수리·수송 차량 중 미군 소속 별 마크가 없는 남베트남 병력 수송차가 많다는 보도가 나와 안보 조약 위반 논란이 일었다.

두뇌 경찰의 PANTA 등 많은 저명인사들이 투쟁에 참여했다.[4]

주일 미군 기지 이용, 보급창 내 3500명 일본인 종업원의 전차 수리[5] 등 일본은 실질적으로 베트남 전쟁을 지원(가담)했다.[6] 9월 12일, 일본 정부는 "베트남 반출은 없다. 보급창 전차 수리 부문 축소" 방침을 제시, 사가미하라시, 요코하마시도 전차 트레일러 통행을 허가했다. 18일 밤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수천 명의 항의, 기동대 및 살수차에 의한 배제, 텐트 철거 후 M113 장갑차가 반출되었다. 10월 17일, "차량 제한령은 미군과 자위대 차량에 적용 안 함" 정령 개정 각의 결정 후, 안보 조약 위반 문제는 깊이 논의되지 않은 채, 무라사메 다리 보강 공사 후 11월 8일 밤부터 M48 전차 포함 전투 차량 수송이 재개[7]되며 투쟁은 수습되었다.

본 투쟁은 미일 지위 협정, 미일 안보 조약, 오키나와 후텐마 비행장 이전 문제, 대미 종속론 관련 논의에서 자주 언급되며, 일본국 헌법 제9조와 관련하여 언급되기도 한다.

당시 뉴스 영상과 기록 영화(『다큐멘터리 사가미하라 72 "전차를 멈추는 투쟁"』)로 투쟁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2018년 영화 『"더 오모이아리" 파트 2』, 2020~2021년 다큐멘터리 영화 『전차 투쟁』[8][9]에서 당시 증언을 볼 수 있다.

2. 3. 투쟁의 결과

1972년 8월부터 약 100일 동안 이어진 전차 투쟁은 미국베트남 전쟁에 사용하기 위해 사가미 종합 보급창에서 전차를 수송하는 것을 막으려는 시민들의 저지 운동이었다. 이 투쟁은 법적 근거와 시민들의 반전 의식, 그리고 지역 주민들의 피해 개선 요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아스카타 카즈오 요코하마 시장과 카와즈 마사루 사가미하라 시장 등은 차량 제한령을 근거로 전차 수송을 막았다. 일본 사회당의 탄지 에이조 사가미하라 시의원은 무라사메 다리에서 20톤 이상 차량의 통행이 금지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M113 장갑차의 무게와 폭이 제한을 초과한다고 주장했다.[2]

일본 사회당, 일본 공산당 등 정당, 중핵파 및 혁마르파 등 과격파, 베평련 등 학생 및 시민 운동가들이 텐트를 치고 항의 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일본이 베트남에 전차를 보내는 것에 반대하고, 수송 소음과 분진 문제 등의 피해 개선을 요구했으며, 미일 안전 보장 조약의 범위를 넘어서는 주일 미군 기지 사용을 문제 삼았다.[3]

9월 12일, 일본 정부는 "베트남으로의 반출은 하지 않는다. 보급창의 전차 수리 부문을 축소한다"라는 방침을 제시했고, 사가미하라시와 요코하마시는 전차 트레일러의 통행을 허가했다. 10월 17일에는 "차량 제한령은 미군과 자위대의 차량에는 적용하지 않는다"라는 정령 개정 각의 결정이 내려졌다.[7] 결국 무라사메 다리의 보강 공사를 거쳐 11월 8일부터 전차 수송이 재개되면서 투쟁은 마무리되었다.

이 투쟁은 미일 지위 협정, 미일 안보 조약, 오키나와 후텐마 비행장 이전 문제, 대미 종속론과 관련하여 오늘날에도 자주 언급되며, 일본국 헌법 제9조와 관련해서도 논의된다.

3. 투쟁의 의의와 영향

1972년 일본에서 벌어진 전차 투쟁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미군 전차 수송을 저지한 사건이다. 이 투쟁은 단순한 반전 운동을 넘어, 미일 안전 보장 조약과 일본의 전쟁 가담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가미 종합 보급창에서 요코하마 노스독으로 향하던 미군 전차 트레일러는 무라사메 다리에서 시민들의 연좌 농성에 부딪혔다.[1] 이들은 차량 제한령을 근거로 전차 통행을 막았는데, 이는 미일 안전 보장 조약의 범위를 벗어나는 행위라는 문제 제기로 이어졌다.[2]

투쟁에는 반전 운동가, 지역 주민, 학생, 노동자, 그리고 일본 사회당, 일본 공산당 등 정당 관계자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이유로 전차 수송에 반대하며 참여했다.[4]

일본 정부는 "베트남으로의 반출은 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제시하며 사태를 수습하려 했지만,[7] 결국 "차량 제한령은 미군과 자위대의 차량에는 적용하지 않는다"는 정령 개정을 통해 전차 수송을 재개했다.[7]

이 투쟁은 미일 지위 협정, 미일 안보 조약, 오키나와 후텐마 비행장 이전 문제 등과 관련하여 오늘날까지도 논의되고 있으며, 일본국 헌법 제9조와 관련해서도 언급되곤 한다. 당시 기록 영화와 2018년, 2020~2021년에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 투쟁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8][9]

4. 관련 작품

전차 투쟁과 관련된 작품은 다음과 같다.


  • 다큐멘터리 영화 『다큐멘트 사가미하라 72 "전차를 멈추는 투쟁"』[10]
  • 그림책 『전차는 멈췄다 시민의 힘 - 1972년 사가미하라의 100일』 (니시오 켄지 글, 야마다 히로미 그림, 아고라 사가미하라 출판, 2002년 8월)[11]
  • 포크송 『전차는 움직일 수 없어』 (요코이 쿠미코 가창, 카도쿠라 사토루 작사, 아오야마 요시히사 작곡)
  • 다큐멘터리 영화 『더・오모이야리 파트 2 ~희망과 행동편~』 (릴란 바클리 감독, 2018년)[12] (배려 예산에 관한 작품, 요코이 쿠미코 등 출연)
  • 다큐멘터리 영화 『전차 투쟁 (영화)』 (츠지 토요시 감독, 코이케 카즈히로 프로듀서, 이즈미야 시게루 내레이션, 당사자, 연구자, 운동가, 배제된 기동대, 전차를 운반한 운송업자, 주변 주민 등 54명 인터뷰)[13][14]
  • 연극 「아카시아의 비가 내릴 때」 (작・연출: 코가미 쇼지, 작중에 본 사건에 관한 묘사 있음)

4. 1. 영화


  • 다큐멘터리 영화 『다큐멘트 사가미하라 72 "전차를 멈추는 투쟁"』[10]
  • 그림책 『전차는 멈췄다 시민의 힘 - 1972년 사가미하라의 100일』 (니시오 켄지 글, 야마다 히로미 그림, 아고라 사가미하라 출판, 2002년 8월)[11]
  • 포크송 『전차는 움직일 수 없어』 ( 요코이 쿠미코 가창, 카도쿠라 사토루 작사, 아오야마 요시히사 작곡)
  • 다큐멘터리 영화 『더・오모이야리 파트 2 ~희망과 행동편~』 (릴란 바클리 감독, 2018년)[12] (배려 예산에 관한 작품, 요코이 쿠미코 등이 출연)
  • 다큐멘터리 영화 『전차 투쟁 (영화)』 (츠지 토요시 감독, 코이케 카즈히로 프로듀서, 이즈미야 시게루 내레이션) (당사자, 연구자, 운동가, 배제된 기동대, 전차를 운반한 운송업자, 주변 주민 등 54명 인터뷰)[13][14]
  • 연극 「아카시아의 비가 내릴 때」 (작・연출: 코가미 쇼지) (작중에 본 사건에 관한 묘사가 있음)

4. 2. 기타


  • 다큐멘터리 영화 『다큐멘트 사가미하라 72 "전차를 멈추는 투쟁"』[10]
  • 그림책 『전차는 멈췄다 시민의 힘 - 1972년 사가미하라의 100일』 (니시오 켄지 글, 야마다 히로미 그림, 아고라 사가미하라 출판, 2002년 8월)[11]
  • 포크송 『전차는 움직일 수 없어』 ( 요코이 쿠미코 가창, 카도쿠라 사토루 작사, 아오야마 요시히사 작곡)
  • 다큐멘터리 영화 『더・오모이야리 파트 2 ~희망과 행동편~』 (릴란 바클리 감독, 2018년)[12] (배려 예산에 관한 작품, 요코이 쿠미코 등 출연)
  • 다큐멘터리 영화 『전차 투쟁 (영화)』 (감독 츠지 토요시, 프로듀서 코이케 카즈히로, 내레이션 이즈미야 시게루) (당사자, 연구자, 운동가, 배제된 기동대, 전차를 운반한 운송업자, 주변 주민 등 54명 인터뷰)[13][14]
  • 연극 「아카시아의 비가 내릴 때」 (작・연출: 코가미 쇼지) (작중에 본 사건에 관한 묘사가 있음)

참조

[1] 서적 戦車の前に座り込め-1972年相模原闘争、そして- さがみ新聞労働組合発行 1979
[2] 서적 戦車の前に座り込め-1972年相模原闘争、そして- さがみ新聞労働組合発行 1979
[3] 서적 戦車の前に座り込め-1972年相模原闘争、そして- さがみ新聞労働組合発行 1979
[4] 웹사이트 頭脳警察オフィシャルサイト 自分史COLUM 2017年11月17日 オレの通った、金沢八景にある https://www.brain-po[...]
[5] 서적 戦車は止まった 市民の力-1972年相模原の100日 アゴラさがみはら出版 2002-08
[6] 뉴스 「戦争証跡博物館」で、日本もかかわった「あの戦争」を知る【ホーチミン旅行記】 https://tabizine.jp/[...]
[7] 서적 戦車の前に座り込め-1972年相模原闘争、そして- さがみ新聞労働組合発行 1979
[8] 뉴스 さがみはら南区版掲載号:2019年4月25日号「戦車闘争」を映画化へ https://www.townnews[...] タウンニュース
[9] 뉴스 アメリカの戦争に加担するなんて許せない…ドキュメンタリー「戦車闘争」予告公開 https://natalie.mu/e[...]
[10] 뉴스 市民運動の芽生えが… 戦車闘争40年展開催/相模原 https://www.kanaloco[...] カナロコ
[11] 웹사이트 国立国会図書館サーチ 戦車は止まった : 市民の力-1972年相模原の100日 https://iss.ndl.go.j[...]
[12] 웹사이트 ドキュメンタリー映画「ザ・思いやり」パート2 公式サイト https://zaomoiyari2.[...]
[13] 뉴스 48年前の神奈川で人々はどうやって米軍の戦車を止めたのか 安保の矛盾問う映画 https://mainichi.jp/[...] 毎日新聞 2020-08-05
[14] 웹사이트 映画『戦車闘争』公式ページ https://sensha-tou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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