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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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약칭 베헤이렌)은 1965년 미국군의 베트남 북부 폭격에 반대하여 결성된 일본의 시민 단체이다. 쓰루미 슌스케가 이끄는 연구 그룹의 지원을 받아 '누구나 가입 가능한 비이데올로기적' 조직을 표방하며, 반전 데모, 뉴욕 타임스 등 해외 매체에 반전 광고 게재, 탈영 미군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70년 미일안보조약 자동 갱신 반대 시위를 주도했으나, 1974년 미국 철군 발표와 함께 해산되었다. 해산 이후에는 KGB와의 연루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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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비폭력 조정 위원회(SNCC)는 1960년 미국에서 설립된 시민권 운동 단체로, 비폭력 시위와 보이콧, 유권자 등록 운동 등에 참여하며 인종차별에 저항했으나, 내부 갈등과 외부 압력으로 1970년대 초 해체되었다. - 베트남 전쟁 반전 단체 - 민주사회학생회
민주사회학생회는 1960년대 미국 학생 운동 단체로, 포트 휴런 선언을 통해 사회 비판과 새로운 좌파 운동을 제시하고 시민권 운동에서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으로 확장했으나, 이념 갈등으로 1969년 해체 후 2006년 재건되었다. - 남베트남-일본 관계 -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1951년 일본이 주권을 회복하고 국제 사회에 복귀하도록 한 평화 조약이나, 전후 처리 과정의 이견과 냉전으로 일부 국가가 배제되었고 영토 및 배상 문제에 대한 모호한 조항들이 동아시아 분쟁 요소로 남아 대한민국이 불리한 입장에 놓였다. - 남베트남-일본 관계 - 전차 투쟁
전차 투쟁은 1972년 사가미하라시에서 베트남 전쟁에 사용될 전차 수송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차량 제한령을 근거로 전차 이동을 막으며 시작된 시민 저항 운동으로, 일본 사회 운동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 대리전 - 베트남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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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잠비크 내전은 1977년부터 1992년까지 프렐리모 정부와 레나모 간에 벌어진 분쟁으로, 사회주의 정책, 부족 사회 갈등, 외부 세력 지원 등이 원인이 되어 약 100만 명의 사망자와 500만 명 이상의 난민을 발생시키고 경제적 파탄을 초래했으며, 1992년 평화 협정 체결 후에도 불안정한 평화가 이어지고 있다.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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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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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및 해산 | |
창립자 | 쓰루미 슌스케 다카하타 미치토시 오다 마코토 |
설립일 | 1965년 4월 24일 |
해산일 | 1974년 1월 |
단체 정보 | |
단체 종류 | 임의 단체 |
활동 지역 | 일본 |
주요 인물 | 쓰루미 슌스케 다카하타 미치토시 오다 마코토 |
활동 내용 | 베트남 전쟁의 반전 운동 미군 탈주병 지원 활동 |
기타 | |
관련 항목 | 일본의 신좌파 |
2. 결성 배경 및 역사
쓰루미 슌스케가 이끄는 "사상과학(Science of Thought)" 연구 그룹은 "구좌익(Old Left)" 정당 및 단체의 지도 없이 "자발적"으로 조직되어 "풀뿌리" 항의 운동을 형성할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자주적인 일본 "시민"(shimin)을 만들고자 했다. 이들은 1960년 안보 투쟁(미일안보조약(U.S.-Japan Security Treaty) 갱신 반대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조직한 "목소리 없는 목소리 협회"(Koe Naki Koe no Kai)를 모델로 삼아, "누구나 가입할 수 있는" "비이데올로기적" 조직인 베헤이렌을 결성했다.[12]
1965년 3월, 정치학자 다카바타케 미치토시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일본의 개입에 항의하기 위해 쓰루미에게 새로운 조직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쓰루미는 동의했고, 오다 마코토를 새로운 그룹의 공식 대변인으로 초빙했다. 1965년 4월 24일, 베헤이렌은 기존의 목소리 없는 목소리 협회의 분파로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
오다 마코토는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국내외 운동을 홍보하기 위해 일본과 세계를 광범위하게 여행했다. 그는 일본 시민들에게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 "피해자" 의식에서 벗어나, 베트남 전쟁을 지원하며 경제적 이익을 얻는 "가해자"로서의 역할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0년, 베헤이렌은 미일안보조약 자동 갱신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주도했지만, 사토 에이사쿠 총리 정부는 조약을 그대로 유지했다. 베헤이렌은 1974년 미국의 남베트남 철군 발표 때까지 활동을 계속했으며, 같은 해 1월 26일 해산했다.
2. 1. 결성 배경
1965년 2월 7일 미국군의 베트남 "북부 폭격"으로 민간인 사망자가 증가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각지에서 반전 운동이 일어났다.[9]같은 해 3월, 다카바타케 미치토시는 쓰루미 슌스케에게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일본의 개입에 항의하기 위해 새로운 조직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12] 쓰루미는 오다 마코토를 초대하여 신바시의 과일 파르페 가게에서 새로운 단체의 초안을 만들었다.[12]
1965년 4월 3일, “목소리 없는 목소리의 모임”, 일본전몰학생기념회(와다쓰미회), 기독교평화회 등 10개 단체가 혼고의 학사회관에 모여 4월 24일에 실시할 첫 번째 반전 데모에 대해 논의했다. 4월 15일, 오다 등 21명은 연명으로 24일 데모를 알렸다. 호소인에는 카이코 켄, 호리타 요시에, 타카하시 카즈미, 요시다 기시게, 시노다 마사히로, 사토 타다오 등이 이름을 올렸다.
1965년 4월 24일, “베트남에 평화를!”이라는 슬로건 아래, 도쿄도 지요다구 시미즈가야 공원에서 신바시까지 시민 1500명이 데모 행진을 했다. 데모에는 키노시타 준지, 하니 신, 쿠노 오사무 등도 참가했다. 그리고 이날, “목소리 없는 목소리의 모임”을 모체로 오다를 대표로 하여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문화단체 연합'''”이 정식으로 발족했다. “베평련”이라는 약칭은 다카바타케가 생각해 냈다.[13]
같은 해, 요시카와 유이치가 사무국장이 되었다. 일본 공산당에서 제명된 요시카와와 마찬가지로 공산당과 대립 후 탈당한 마르크스주의 신좌파 파벌 “공노당(공산주의노동자당)” 사람들도 합류했다. 베평련과 공노당을 겸한 멤버에는 이다 모모, 요시카와 유이치, 쿠리하라 유키오, 무토 이치요, 하나자키 코헤이 등이 있었다.
무당파의 반전 운동을 기치로 “오는 자는 거절하지 않고, 떠나는 자는 쫓지 않는다”는 자유 의사에 따른 참여가 원칙이었다. 노동조합이나 학생 운동 단체 등 다양한 좌익 시민 단체와 그것을 지지하는 학생, 사회인, 주부, 우익 단체 겐요샤 등 비좌파도 운동에 참여했다.[14] “묵어라 사건”으로 유명한 전 육군성 군무국장 사토 켄료도 반미의 입장에서 베평련 토론회에 참가했다.[15] 오다는 “베트남에 평화를!”에 공감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진지한 집단”, “정치 집단”, “가짜 시민”으로 연결된 운동이라고 불렀다.[16][17]
1966년 10월 16일 명칭을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으로 개칭했다.
2. 2. 결성 과정
1965년 2월 7일, 미국군이 북부 폭격을 시작하면서 민간인 사망자가 늘어나자, 각지에서 반전 운동이 일어났다.같은 해 3월, 정치학자 다카바타케 미치토시는 쓰루미 슌스케에게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일본의 개입에 항의하기 위해 새로운 조직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12] 쓰루미는 오다 마코토를 초대하여, 신바시에서 새로운 단체의 초안을 만들었다.[12]

같은 해 4월 3일, “목소리 없는 목소리의 모임”, 일본전몰학생기념회(와다쓰미회), 기독교평화회 등 10개 단체가 혼고의 학사회관에 모여 4월 24일에 실시할 첫 번째 반전 데모에 대해 논의했다. 4월 15일, 오다 등 21명은 연명으로 24일 데모를 알렸다. 호소인에는 카이코 켄, 호리타 요시에, 타카하시 카즈미, 요시다 기시게, 시노다 마사히로, 사토 타다오 등이 이름을 올렸다.
같은 해 4월 24일, “베트남에 평화를!”이라는 슬로건 아래, 도쿄도 치요다구 시미즈가야 공원에서 신바시까지 시민 1500명이 데모 행진을 했다. 데모에는 키노시타 준지, 하니 신, 쿠노 오사무 등도 참가했다. 그리고 이날, “목소리 없는 목소리의 모임”을 모체로, 오다를 대표로 하여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문화단체 연합'''”이 정식으로 발족했다. “베평련”이라는 약칭은 다카바타케가 생각해 냈다.
같은 해, 요시카와 유이치가 사무국장이 되었다. 요시카와 유이치와 마찬가지로 일본 공산당에서 탈당한 신좌파 파벌 공노당의 이다 모모, 쿠리하라 유키오, 무토 이치요, 하나자키 코헤이 등도 합류했다.
노동조합, 학생 운동 단체 등 다양한 좌익 시민 단체와 학생, 사회인, 주부, 우익 단체 겐요샤 등 비좌파도 운동에 참여했다. 사토 켄료도 반미의 입장에서 베평련 토론회에 참가했다.
1966년 10월 16일 명칭을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으로 개칭했다.
2. 3. 주요 활동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베헤이렌)은 1965년 4월 24일 쓰루미 슌스케, 다카바타케 미치토시, 오다 마코토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다.[22] 1960년 안보 투쟁 당시 '목소리 없는 목소리회'를 모델로 삼아, "누구나 가입할 수 있는" 비이데올로기적 조직을 표방했다.
오다 마코토는 일본과 세계를 돌며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을 홍보했다. 그는 일본 시민들에게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 "피해자" 의식에서 벗어나, 베트남 전쟁을 지원하며 경제적 이익을 얻는 "가해자"로서의 역할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0년, 베헤이렌은 미일안보조약 자동 갱신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주도했지만, 사토 에이사쿠 총리 정부는 조약을 그대로 유지했다. 베헤이렌은 1974년 미국의 남베트남 철군 발표 때까지 활동을 계속했으며, 같은 해 1월 26일 해산했다.
베헤이렌은 주로 다음과 같은 활동을 했다.
- 반전 시위 및 광고: 도쿄의 주일 미국 대사관 앞에서 데모를 하고,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에 반전 광고를 게재했다.[22]
- 탈영 미군 지원: "JATEC"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탈영 미군을 숨겨주고 소련을 거쳐 스웨덴으로 망명하도록 도왔다.[24][25][26]
- 일주주주 운동: 미쓰비시중공업과 소니 등 전쟁 관련 기업에 대해 항의 활동을 했다.[28][30]
2. 3. 1. 반전 시위 및 광고
1965년 4월,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은 발족 직후 도쿄의 주일 미국 대사관으로 데모 행진을 시작으로 미국 정부와 미국군, 일본 정부를 규탄하는 많은 데모를 진행했다.[22] 같은 해 11월에는 작가 카이코 켄의 제안으로 미국의 유력 일간지인 『뉴욕 타임스』에 전면 반전 광고를 게재했고, 1967년 4월에는 화가 오카모토 타로가 쓴 “殺すな(살해하지 마라)”라는 큰 글씨 아래 영어 메시지를 디자인한 반전 광고를 『워싱턴 포스트』에 게재했다.[22]1969년 10월 21일 국제 반전 데이에 맞춘 데모에서는 도로에 바리케이드를 쌓는 행위 등이 행해졌다. 도쿄도 공안 위원회는 이를 이유로 같은 해 11월 16일에 예정되어 있던 사토 에이사쿠 수상 방미 항의 데모 신청을 불허했다.[23]
2. 3. 2. 탈영 미군 지원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베이핑련)은 "JATEC"("반전 탈영 미군 지원 일본 기술 위원회"의 약자)이라는 별도 조직을 통해 미군 탈영병 지원 활동을 했다.
1967년 10월, 미국 해군 에식스급 항공모함 인트레피드가 요코스카 해군 시설에 정박했을 때, 마이클 앤서니 린드너 등 4명의 수병이 탈영했다. 베이핑련은 이들을 숨겨주고, 소련을 거쳐 스웨덴으로 망명할 수 있도록 도왔다.[24][25][26] 이들은 본국에서 "Intrepid Four" (인트레피드 4인)라고 불렸다.
하지만 1968년, 미국 정보기관 요원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탈영병으로 위장하여 JATEC에 잠입했고, 그 결과 탈영병 제럴드 메이어스가 체포되어 미국 해군에 인도되었다.[34] JATEC은 이후 방침을 바꿔 탈영병의 국내 은닉, 선전 활동, 주일미군 기지 주변에서의 반전 운동 지원 등으로 활동 방향을 전환했다.
JATEC은 미일 법 체계의 맹점을 이용해 탈영병의 국외 도피를 도왔지만, 실제로 성공한 사례는 많지 않았고, 대부분의 탈영병은 미군으로 복귀했다.[27]
2. 3. 3. 일주주주 운동
1971년, 방위산업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미쓰비시중공업(三菱重工)에 대해 “반전 일주주주 운동(反戦一株株主運動)”을 대대적으로 조직했다. 11월 30일 주주총회를 앞두고 약 250명이 데모 행진을 벌인 후[28] 회의장에 입장했으나, 미쓰비시중공업 측은 약 500명의 주주총회꾼(총회屋)과 극우단체원들을 동원해 “반전 주주”들에게 대응했다.[29]같은 해 소니(ソニー)가 남베트남 진출을 발표하자 “일본의 재침략을 용납하지 않는다(日本の再侵略を許すな)”며 데모를 벌였다.[30]
2. 4. 70년 안보 투쟁과 해산
1970년, 베헤이렌은 베트남에서 싸우는 미군이 일본에 주둔할 수 있도록 허용한 미일안보조약의 자동 갱신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17] 그러나 사토 에이사쿠 총리의 보수적인 정부는 조약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결정했고, "1970년 안보 투쟁"은 자동 갱신을 막지 못했다.[17]베헤이렌은 미국이 1974년 남베트남에서 철군한다고 발표할 때까지 활동을 계속했다. 1974년 1월 26일 도쿄에서 최종 폐막식이 열렸다. 쓰루미 슌스케는 폐회사에서 약 1,000명의 활동가들에게 베헤이렌은 해산되지만, "다른 날, 저는 베헤이렌이 아니더라도 베헤이렌이 다시 등장하고 싶어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베헤이렌은 해산됩니다. 베헤이렌 만세!"라고 말했다.
1971년 이후 베헤이렌은 미쓰비시 그룹, 도시바 등 남베트남 진출 기업, 히타치 제작소 등 방위산업에 대한 항의 활동, 나리타 국제공항 건설 반대 미사토 투쟁 등 베트남 전쟁 관련 투쟁을 전개했다. 신좌익 구성원 간의 내부 폭력에도 어려움을 겪었으며, 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의 가타오카 도시아키 등도 활동에 참여했다.
1973년 1월 27일, 남베트남과 북베트남, 미국 등이 파리협정에 서명하여 평화가 성립되었다. 이에 따라 당시 시민운동의 관심이 반오염·반개발 등의 주제로 변화하면서 베헤이렌은 존재 의의를 상실했고, 1974년 1월 협의 끝에 해산하였다.[20][21]
이후 과거 주요 멤버들 사이에서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캄보디아 폴 포트 정권에 대한 견해[16]가 갈라지기도 했다.
3. 소련과의 관계 논란
소련의 붕괴 이후 공개된 소련 공산당 기밀문서에 따르면, 베트남 평화 연대(베평연)와 소련 국가안전위원회(KGB)의 관계는 베평연 사무국장 요시카와 유이치가 KGB 대표에게 자금 지원을 요청하면서 시작되었다.[18] 당시 KGB 의장 유리 안드로포프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베평연 지도부와 KGB의 비밀 접촉을 통해 반미 선전 활동을 확대하고, 일본에서 제3국으로 미군 탈영병의 불법 수송을 지원할 것을 제안했다.[18] 안드로포프는 이 보고서에서 KGB가 일본 베평연 지도부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소련의 이익을 위해 이 관계를 활용할 수 있는 비공식적 수단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18]
이 시기부터 보수, 비좌파, 중도 성향의 많은 사람들이 베평연에서 탈퇴했고, 결성 초기에 큰 역할을 했던 카이코도 1967년 이후 운동에서 멀어졌다.[19] 이시하라 신타로는 베평연이 KGB의 자금 및 물자 지원을 받아 이념적 색채가 짙어졌다고 평가했다.[6]
1991년 소련 붕괴로 공개된 소련 측 자료에 따르면, KGB는 비밀리에 베평연과 접촉했으며, 1968년 초 베평연 측에서 탈영병 지원을 위한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32] KGB는 반미 선전 활동 확대와 탈영 미군 병사 지원을 위해 필요하다면 물질적 지원을 하겠지만, 소련의 수단을 이용해 탈영병을 이동시킬 수는 없다고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제안했다.[33]
오다 마코토, 타카하시 등을 중심으로 한 베평연 간부 및 JATEC 구성원은 주일 소련 대사관원을 가장한 KGB 요원의 지원을 받아 소수의 탈영병을 여러 차례 일본에서 스웨덴 등의 중립국으로 탈출시켰다.[34][35] 요시카와 유이치는 교도통신 기자 하루나 미키오와의 인터뷰에서 "(소련 대사관의) 참사관이나 일등 서기관을 만났지만, 아마 모두 KGB 요원이었을 것이다", "탈영병의 일본 탈출에 사실상 지원을 해줄 곳이라면, KGB든 스파이든 협력하고 싶었다"고 말했다.[34]
러시 존슨의 스파이 활동으로 소련 루트가 파괴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KGB가 점차 "중요 기밀 부서에서 일하던 병사만 받아들인다"는 태도를 보이면서 협력 관계가 결렬되었다.[22] 요시카와 유이치와 소련의 관계는 1963년 당시부터 문제시되었다. 후지와라 테츠조는 저서에서 요시카와가 소련과 내통하여 비밀 공작을 시작했다고 비난했다.[36] 요시카와는 베평련 사무국장 취임 후인 1966년, 시가 요시오 등의 "일본의 목소리"에 참가했다.[3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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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i-Vietnam War 'Beheiren' activism remembered 50 years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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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추정. Harvnb 템플릿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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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추정. Harvnb 템플릿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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声なき声:2 市民が次々と列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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鶴見良行私論(11)│庄野 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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学問と市民運動つないで 政治学者・高畠通敏さんを悼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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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の巨人たち」 第2回 ひとびとの哲学を見つめて~鶴見俊輔と「思想の科学」~(2014年7月12日放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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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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