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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소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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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 소공은 춘추 시대 정나라의 군주로, 정 장공의 아들이자 등만의 장남이다. 그는 위나라의 침략을 격퇴하고 제나라를 구원하는 등 군사적 활약을 펼쳤으나, 제나라와의 혼인을 거절하는 등 신중한 면모를 보였다. 정 장공 사후 즉위했으나 송나라의 압력으로 위나라로 망명했다가 정 여공이 망명한 틈을 타 복위했다. 이후 고거미에게 살해당하며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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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소공
기본 정보
이름소공 희홀
다른 이름정 소공 홀
희(姬)
정(鄭)
홀(忽)
만백(曼伯)
통치 정보
작위백작
호칭
왕조
재위 기간기원전 701년, 기원전 696년 - 기원전 695년
도읍신정
시호소공(昭公)
생애
생년불상
몰년기원전 695년
가족 관계
아버지정 장공
어머니등만
부인진규
기타
주석4대, 6대 군주

2. 생애

기원전 718년, 위나라가 남연나라 군대를 이끌고 정나라를 쳐들어오자, 아우 공자 돌과 함께 제읍의 군대를 거느리고 적의 배후를 공격하여 남연 군을 크게 무찔렀다.[3]

기원전 706년, 북융이 제나라를 공격하자, 태자 홀(훗날의 정 소공)이 제나라를 구원하여 북융을 크게 무찌르고 대량(大良)과 소량(小良)을 베어 제나라에 바쳤다.[4]

기원전 701년, 아버지 정 장공이 사망하자 채족의 추대로 정나라 군주에 즉위했다.[6] 그러나 송 장공의 압력으로 동생인 공자 돌에게 왕위를 내주고 위나라로 망명했다.[5][6]

기원전 697년, 정 여공채나라로 망명하자 소공은 다시 정나라 군주로 복귀했다.[5][7] 그러나 기원전 695년, 고거미에게 살해당했다.[5][9]

2. 1. 어린 시절과 태자 시절

정 소공은 정 장공(莊公)과 등만(鄧曼)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으로, 태자로 책봉되었다.

기원전 718년, 위나라가 남연나라 군대를 이끌고 정나라를 쳐들어오자, 정 소공은 아우 공자 돌과 함께 제읍의 군대를 이끌고 적의 배후를 공격하여 남연 군을 크게 무찔렀다.[3]

태자 시절, 북융을 격퇴하고 제나라 희공의 혼인 제안을 거절하는 등의 사건을 겪었다.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단 참조)

2. 1. 1. 북융 격퇴

기원전 706년, 북융이 제나라를 공격하자, 태자 홀(훗날의 정 소공)이 제나라를 구원하여 6월에 북융을 크게 무찌르고 대장 대량(大良)과 소량(小良)을 베어 제나라에 바쳤다.[4] 이 공으로 제나라는 정 소공에게 혼인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4]

2. 1. 2. 제나라 희공과의 혼인 거절

기원전 706년, 북융[1]이 제나라를 침공하자, 당시 태자였던 홀(정 소공)은 제나라를 구원하고 북융을 격퇴하는 큰 공을 세웠다.[4] 이에 제나라 희공은 태자 홀에게 자신의 딸과 혼인할 것을 제안했으나, 태자 홀은 "우리 나라는 작은 나라이며, 제나라와 균형을 이룰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혼인을 거절했다.[4]

태자 홀의 신하 채족은 혼인을 통해 강력한 제나라의 지원을 받는 것이, 아버지 정 장공이 총애하는 다른 부인들의 아들들과의 왕위 경쟁에서 유리할 것이라며 혼인을 권유했으나,[5][6] 태자 홀은 끝내 혼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5][6]

이러한 정 소공의 혼인 거절은 당시 정나라와 제나라 간의 국력 차이를 보여주는 동시에, 정 소공의 신중한 성격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된다.

2. 2. 즉위와 망명

기원전 701년, 아버지 정 장공이 사망하자 채족의 추대로 정나라 군주에 즉위했다.[6] 그러나 송 장공의 압력으로 동생인 공자 돌에게 왕위를 내주고 위나라로 망명했다.[5][6]

2. 2. 1. 송나라의 압력

기원전 701년, 정 장공이 죽자 채족의 추대로 정 소공이 즉위했다.[6] 그러나 송 장공은 채족을 협박하여, 송나라 여자 옹길의 아들인 공자 돌을 정나라 왕으로 세우도록 했다.[5][6] 채족은 이를 승낙했고, 결국 소공은 그해 가을 9월에 위나라로 망명해야 했다. 이는 춘추시대 국가 간의 복잡한 관계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2. 3. 복위와 죽음

기원전 697년, 정 여공채나라로 망명하자 소공은 다시 정나라 군주로 복귀했다.[5][7] 그러나 기원전 695년, 고거미에게 살해당했다.[5][9]

2. 3. 1. 고거미의 반란

기원전 695년, 고거미가 소공을 시해했다. 소공은 정 장공이 고거미를 경으로 삼으려 했을 때 반대했었다. 고거미는 소공이 자신을 죽일까 두려워하여, 10월 신묘일에 소공을 시해했다.[5][9]

참조

[1] 문서 北の異民族
[2] 문서 춘추시대에는 즉위한 다음 해에 기원하기 때문에 대개 즉위년을 포함하지 않지만, 정 소공은 즉위하고 한 해도 넘기지 못하고 쫓겨났다.
[3] 서적 춘추좌씨전
[4] 서적 춘추좌씨전
[5] 서적 사기
[6] 서적 춘추좌씨전
[7] 서적 춘추좌씨전
[8] 서적 춘추좌씨전
[9] 서적 춘추좌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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