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장공
1. 개요
정 장공은 춘추 시대 정나라의 군주로, 무공의 아들이자 무강의 아들이다. 그는 어머니 무강의 편애를 받지 못하고 동생 공숙단과의 갈등을 겪었으며, 공숙단의 난을 진압했다. 주 왕실과의 관계에서 주 평왕, 주 환왕과 갈등을 겪었고, 주변 제후국들과 외교 및 군사적 관계를 맺었다. 정 장공 사후, 여러 아들들 간의 권력 다툼이 벌어졌고, 정 여공이 최종적으로 정권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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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8세기 사망 -
진 평공
진 평공은 기원전 777년에 즉위하여 23년간 진나라를 다스린 군주로, 그의 뒤를 이어 아들인 진 문공이 즉위하였다. -
기원전 8세기 사망 -
제 장공 (12대)
제 장공은 기원전 795년에 제나라의 제후가 되어 64년간 재위했으며, 주 유왕 사후 주 평왕의 낙읍 천도 시기를 겪고 기원전 731년에 사망하여 아들 제 희공이 뒤를 이었다. -
기원전 8세기 출생 -
헤시오도스
헤시오도스는 기원전 8세기경 고대 그리스 시인으로, 『신통기』와 『일과 날』을 통해 신화, 우주론, 농업, 윤리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당대 사회상과 가치관을 반영했고, 농부이자 방랑 음유시인으로서의 삶과 경험을 작품에 녹여내 정의와 노동의 가치를 성찰하여 서구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
기원전 8세기 출생 -
제 희공
제 희공은 제나라의 제후로서 주변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송나라와 위나라 사이의 분쟁을 중재하며 북융의 침입을 격퇴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펼쳤으나, 말년에 후계 구도에 혼란을 야기하다가 재위 33년 만에 사망했다. -
정나라의 군주 -
정 환공
정 환공은 기원전 806년 정나라에 봉해지고 서주 사도가 되었으며, 견융의 침입 때 주 유왕을 보호하려다 전사했다. -
정나라의 군주 -
정 여공
정 여공은 춘추 시대 정나라의 군주로, 송나라의 옹립으로 즉위했으나 여러 차례 망명과 복위를 거듭하며 혼란스러운 정국을 이끌었고, 제나라 환공의 패권 다툼에 휘말리는 등 복잡한 외교 관계를 맺었다.
2. 사적
정 장공은 기원전 757년 정 무공과 무강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무강은 난산으로 인해 장공을 미워하고 동생 공숙단을 총애하여 태자를 동생으로 교체할 것을 요구했지만, 무공은 이를 거절했다.
기원전 745년 아버지 정 무공이 사망한 후 왕위를 계승했고, 무강의 요구로 공숙단에게 큰 영토를 주었다. 기원전 722년 공숙단은 어머니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으나, 정 장공은 이를 진압하고 공숙단을 추방했다. 무강은 성영으로 보내졌으나, 훗날 화해했다.
주 평왕과의 갈등으로 세자 홀을 주나라에 인질로 보냈으며, 주 환왕 즉위 후 주나라와 관계가 악화되어 기원전 707년 수거 전투에서 주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환왕에게 부상을 입혔다.
정 장공은 여러 제후들과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 송나라, 위나라와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노나라, 제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기도 했다.
기원전 701년 정 장공 사후, 제중이 세자 홀(정 소공)을 옹립했으나, 송 장공의 개입으로 공자 돌(정 여공)이 즉위하면서 후계 다툼이 벌어졌다.
2.1. 즉위 전
정 장공은 기원전 757년(무공 14년)에 무공과 신후의 딸 무강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태자가 되었다. 그는 거꾸로 태어났기 때문에 '오생'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어머니 무강은 난산으로 인해 오생을 미워하고, 그의 동생인 공자 단을 총애했다. 무강은 여러 차례 무공에게 오생 대신 공자 단을 태자로 삼을 것을 요구했지만, 무공은 이를 거절했다.
2.2. 공숙 단의 난
기원전 745년, 아버지가 죽자 정 장공은 정백의 자리를 이었다. 어머니 무강은 정 장공에게 3년간 정사를 신하들에게 맡길 것을 권했고, 정 장공은 이를 따랐다. 1년 후, 대부 변보가 정치에 나설 것을 청했으나 거절했다. 무강은 동생인 단에게 제읍(制邑)을 봉읍으로 줄 것을 청했으나, 정 장공이 거부하자 경성(京城)을 요구하여 이를 승낙하였다. 채중은 너무 큰 읍을 주었다고 간언했다. 단은 경성에 봉해진 후 경성대숙(京城大叔) 혹은 태숙단(太叔段)으로 불렸다.
정 장공은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나 왕위 계승을 준비했으나, 어머니 무강은 둘째 아들 단을 더 선호했다. 이는 정 장공을 낳을 때 극심한 고통을 겪었기 때문이다. 정 장공이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작위를 계승하자, 어머니는 공숙 단을 권좌에 앉히려 했다. 무강은 정 장공에게 공숙 단에게 단 지역을 봉토로 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단은 정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중요한 요새였다. 정 장공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에 대한 예의 때문에 동의했다.
무강은 단에게 성벽을 쌓고, 무기를 비축하며, 용병을 모집하도록 종용했다. 정 장공의 신하들은 이 소식을 정 장공에게 보고하며, 공숙 단에게서 단 지역을 되찾을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정 장공은 공숙 단에게 잘못이 없고,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으며, 자신의 동생을 상대로 무기를 들 수 없다고 말했다.
정 장공이 외교 문제로 낙양으로 간 사이, 무강은 단에게 편지를 써서 반란을 일으키라고 명령하며, 수도의 문을 열어주겠다고 했다. 공숙 단은 반란을 일으켜 수도 성벽 아래에 도달했다.
정 장공 22년(기원전 722년), 태숙 단이 무강과 함께 본국을 공격하려 하자, 정 장공은 군사를 일으켜 단을 쳤다. 경성 사람들이 단을 배반하여 단은 언(鄢)으로 도망갔고, 정 장공은 추격하여 언을 치고, 단은 다시 공(共)나라로 도망갔다. 이로써 단은 ‘공숙단(共叔段)’으로 불리게 되었다. 정 장공은 기원전 722년 5월 여름에 연(현재의 연령현 북쪽)에서 공숙 단을 격파했다. 5월 23일에 공숙 단은 공나라로 도망쳤다.
장공은 무강을 성영(城穎)으로 옮기고, “황천(黃泉, 저승)에 가기 전까지는 만나지 않겠다.”라고 맹세했다. 그러나 이를 후회했고, 이듬해 영고숙(穎考叔)이 황천(지하수)에서 만나면 된다고 진언하자 굴을 파서 어머니를 만나 화해했다.
한편, 단의 아들 공손활(公孫滑)이 위나라로 도망갔고, 위나라는 정나라의 늠연(廩延) 땅을 탈취했다. 정나라는 주(周)나라 천자의 군대인 왕사(王師)와 괵(虢)나라 군대를 거느리고 위나라를 쳤으며, 주(邾)나라에도 원군을 요청했다. 이듬해(기원전 721년), 위나라를 쳐 공손활의 난을 징계했다.
2.3. 주 왕실과의 관계
주 평왕(周 平王)이 괵공(虢公)에게 정 장공의 권한 반을 주려 하자, 장공과 평왕 사이에 틈이 생겨 주나라에서는 왕자 호를, 정나라에서는 세자 홀을 각기 인질로 내어주었다. 기원전 720년, 주 평왕이 죽자 주나라에서는 괵공에게 집정을 맡기려 했다. 이에 채족이 주나라를 침입하여 주나라 곡식을 취하게 해, 주나라와 정나라의 사이는 악화되었다.
기원전 717년, 정 장공은 처음으로 주나라에 조현했다. 주 환왕(周 桓王)은 정나라가 곡식을 노략질한 것에 분노하여 무례하게 대했다. 주공 흑견(周公 黑肩)은 주나라가 낙양으로 천도할 때 정나라가 보좌했으므로 잘 예우하기를 왕에게 권했다.
기원전 715년, 정 장공은 태산(泰山)의 제사에 쓰도록 정나라가 받은 노(魯)나라 경내의 월경지 탕목읍(湯沐邑)을, 정나라 경내에 있는 노나라의 시조 백금(伯禽)의 아버지 주공 단(周公旦)의 묘가 있는 허전(許田)과 맞바꾸었다. 이는 정나라가 더 이상 주 왕의 대리로서 태산의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 교섭은 4년 후, 정나라에서 벽옥을 얹어 줌으로 마무리되었다. 이해 8월에는 제 희공(齊 僖公)과 함께 주왕께 조현했다.
기원전 714년, 정 장공은 주나라의 좌경사로써 주 왕실에 실례한 송나라를 토벌했다.
기원전 712년, 주 환왕은 정나라의 네 고을을 취하고, 대신 소분생의 영지에서 열두 고을을 정나라에 주었는데, 이미 소분생이 배반한 탓에 그 고을들은 주왕이 줄 수도 없는 땅인지라 사실상 정나라 땅을 빼앗기만 한 셈이었다.
주 환왕은 정 장공의 정권을 빼앗았고, 정 장공이 원망하여 조현하지 않자 기원전 707년에 채나라, 위나라, 진나라와 함께 정나라를 정벌했다. 그러나 정 장공은 이를 막아내고 오히려 주왕의 군대를 패배시켰으며, 주왕은 축담(祝聃)의 화살을 맞아 어깨에 큰 부상을 입었다.
정 장공은 주 평왕에 의해 좌경으로 임명되었다. 주 평왕이 죽은 후, 다음 왕인 주 환왕은 그를 파면했다. 이 모욕에 대한 보복으로 정 장공은 환왕을 만나기 위해 수도로 가지 않았다. 이에 환왕은 기원전 707년 정 장공을 상대로 연합군을 이끌었고, 이는 수거 전투에서 정나라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정 장공의 군대는 왕을 굴욕적으로 만들었고, 왕의 군대를 격파하여 환왕의 어깨에 화살을 맞혔으며, 주 왕가의 위신을 더욱 떨어뜨렸다.
2.4. 제후들과의 관계
정 장공은 여러 제후들과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 기원전 720년 송 상공이 즉위하자, 전 임금의 아들 공자 빙이 정나라로 도망쳐 왔고, 정나라는 그를 도왔다. 위나라에서는 공자 주우가 위 환공을 암살하고 임금이 되었는데, 정나라가 위나라를 친 원한을 갚고 공자 빙을 우환거리로 여기는 송 상공과 연합했다. 진나라, 채나라도 위나라와 화목했기 때문에 이 네 나라는 정나라를 공격했다. 노나라도 끌어들여 다섯 나라 연합군은 정나라를 패퇴시켰다.
기원전 718년, 정 장공은 위나라에 보복하고, 송나라를 쳐서 보복했다. 기원전 717년에는 노나라와 우호를 맺고, 진나라를 쳤다. 기원전 716년에는 송나라, 진나라와 강화하고, 진나라와는 혼인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715년에는 제 희공의 주선으로 송나라, 위나라와 화해했다.
기원전 714년, 정 장공은 주왕의 군사를 거느리고 송나라를 쳤다. 기원전 713년에는 제 희공, 노 은공과 회견하고, 노나라와 함께 송나라를 공격하여 땅을 노나라에 주었다. 채나라, 위나라, 성나라가 정나라의 왕명 선포를 따르지 않고, 위나라는 오히려 송나라와 손잡고 정나라를 쳤다. 정 장공은 이들을 쳐 모조리 사로잡았다. 겨울에는 제나라와 손잡고 성나라를 쳤다.
기원전 713년, 제, 노와 연합하여 허나라를 쳐 멸망시키고, 허나라를 둘로 나누어 다스렸다. 같은 해 식나라를 대패시키고, 괵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송나라를 쳐 보복했다.
노나라에서 환공이 즉위하자, 정 장공은 환공과 우호를 맺었다. 기원전 712년, 송나라에서 상공이 시해당하는 변이 일어나자, 여러 제후들과 함께 이를 평정하고자 했으나, 모두 송나라의 뇌물을 받고 임금을 시해한 화독(華督)을 재상으로 세웠다.
기원전 707년, 제 희공과 함께 기나라를 치고자 했으나 들통났다. 기원전 706년, 북융이 제나라를 공격하자 구원병을 파견했다. 기원전 705년, 정 장공은 제나라, 위나라와 함께 맹(盟) · 향(向) 두 고을을 쳤다. 기원전 702년에는 제 희공, 위 혜공과 함께 노나라를 공격했다. 기원전 701년, 제나라, 위나라와 회맹했다.
2.5. 후계 문제
정 장공은 등만(鄧曼)과 혼인하여 태자 홀(忽)을 낳았으나, 궁중에 총애하는 여자가 많았고, 열한 명의 아들을 더 두었다. 이들 중 공자 돌(公子 突), 공자 미(公子 亹, 혹은 鄭子 亹), 공자 영(公子 嬰, 혹은 鄭子 嬰, 자는 子儀)이 특히 군위를 겨룰 만했다.
정 장공 43년(기원전 701년), 장공이 죽자 제중족(祭仲足)(혹은 祭足, 祭仲)이 세자 홀을 세웠으니 이가 바로 정 소공이다. 그러나 송 장공이 개입하여 공자 돌이 즉위하였고, 정 소공은 위나라로 달아났다. 즉위한 공자 돌이 바로 정 여공이 된다. 이후 정 소공, 정자영과 이를 세운 제중족, 정 여공(공자 돌), 정자미와 이를 세운 고거미 간의 싸움이 계속되었고, 결국은 제중족이 죽으면서 정 여공이 마지막으로 임금이 되었다.
정 장공은 11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아들은 홀(忽), 돌(突), 미(亹), 의(儀)였다. 홀은 상속자였고, 처음에는 정 소공으로 봉해졌지만, 곧 송 장공이 정나라의 계승에 간섭했고, 정나라의 대신 제중은 소공을 유배시키고 돌을 정 여공으로 옹립했다. 미와 의 역시 도망쳤다. 여공은 제중에게 통제받는 것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제중에 대항한 음모가 실패한 후 유배되었고, 소공이 복위했다. 그러나 3년 후, 미와 친분이 있었고 소공을 싫어했던 부대신 고거미가 제중이 부재중인 틈을 타 소공을 암살하고 미를 통치자로 옹립했지만, 제중의 지위는 변함이 없었다.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명성을 얻고 싶어했던 제 환공은 미와 고거미를 수지(壽止)로 초청하여 살해했다. 제중은 의를 공작으로 옹립하고 초나라에 소속될 것을 약속했으며, 유배된 여공 역시 복위를 계획했다. 17년 후, 여공은 제나라 군대를 이끌고 의를 격파하고 그의 두 아들을 죽인 후 권력을 되찾았다(기원전 680년). 이후 정나라의 공작들은 모두 여공의 후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