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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포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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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임스 포튼은 1766년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나 1842년 사망한 미국의 기업가이자 노예 폐지 운동가이다. 돛 제작자였던 그는 사업 성공으로 부를 축적했으며, 흑인 시민권 획득을 위해 헌신했다. 1817년 미국 식민화 협회의 라이베리아 이주 계획에 반대하며 흑인들의 미국 내 권리 옹호에 앞장섰고, 언론 활동을 통해 노예제 폐지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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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포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포튼의 초상화, 1834년경, 아마도 로버트 더글러스 주니어 작품
포튼의 초상화, 1834년경, 아마도 로버트 더글러스 주니어 작품
출생일1766년 9월 2일
출생지필라델피아, 펜실베이니아 식민지, 영국령 아메리카
사망일1842년 3월 4일
사망지필라델피아, 펜실베이니아, 미국
배우자마사 비티
샬럿 밴딘
자녀9명, 포함: 마가레타 포튼, 해리엇 포튼 퍼비스, 새라 루이자 포튼 퍼비스
친척로버트 퍼비스 (사위), 샬럿 포튼 그림케 (손녀), 찰스 벌리 퍼비스 (손자), 해리엇 퍼비스 주니어 (손녀), 윌리엄 B. 퍼비스 (손자)
직업선원, 돛 제작자, 상인, 투자자, 사업가, 지주, 수필가, 노예 폐지론자

2. 어린 시절과 교육

제임스 포튼은 1766년 9월 2일,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토마스 포튼과 마가렛 포튼 사이에서 자유인 신분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필라델피아의 돛 제작자였으며, 스스로 자유를 얻은 노예의 손자였다.[2]

그러나 아버지 토마스 포튼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높은 곳에서 떨어져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 제임스는 일곱 살 때부터 어머니와 여동생을 부양하기 위해 일을 시작해야 했다. 처음에는 굴뚝 청소부로 일했고, 이후 식료품점 점원으로 일했다. 그는 또한 퀘이커 폐지론자인 앤서니 베네젯이 흑인 아이들을 위해 무료로 설립한 아프리카 학교에 다녔다. 어머니는 그가 학업을 계속하기를 바랐지만,[2] 아홉 살이 되자 포튼은 생계를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전업으로 일하게 되었다.

14세가 되던 해, 미국 독립 전쟁이 한창일 때 포튼은 사략선 '로열 루이스'에 승선하여 스티븐 디케이터 시니어 선장의 지휘 아래 복무했다. 그러나 '로열 루이스'는 영국 해군 군함에 나포되었다. 포튼을 포로로 잡은 영국 해군 대령 존 비즐리는 어린 포튼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포튼의 회고에 따르면, 비즐리 대령은 그에게 자신의 아들 헨리와 함께 영국에서 교육받을 기회를 제안했지만, 포튼은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포로가 되었으며, 결코 그녀의 이익을 배반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답하며 거절했다고 한다.[3] 대신 비즐리 대령은 그를 다른 '로열 루이스'호 승무원들과 마찬가지로 전쟁 포로로 대우하도록 조치했다.[4]

포로들은 모두 훗날 브루클린 해군 기지가 들어서는 월러바웃 만에 정박 중이던 HMS ''저지''로 이송되었다.[5]

포튼은 운 좋게도 7개월간의 억류 생활 끝에 포로 교환으로 석방될 수 있었다. 그는 전쟁에 다시 참여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 후 가석방되었다. 그는 브루클린에서 필라델피아까지 걸어서 어머니와 여동생에게 돌아갔다. 이후 영국으로 가는 상선에 승선하여 런던의 조선소에서 1년 넘게 생활하며 일했다.[4]

1790년, 포튼은 필라델피아로 돌아와 아버지의 옛 고용주이자 가족의 친구였던 돛 제작자 로버트 브리지스 밑에서 견습생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돛 제작 기술을 빠르게 습득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작업장의 감독으로 승진했다.[6]

3. 경력

1798년, 스승 로버트 브리지스의 은퇴 후 그의 돛 제작소를 인수하며 사업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6] 포튼은 사업을 성공적으로 운영하여 필라델피아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성장했다.[7]

3. 1. 돛 제조업

1798년, 로버트 브리지스가 은퇴하자 포튼은 그의 돛 제작소를 인수했다.[6] 그는 큰 돛을 효율적으로 다루기 위한 도구를 개발했고, 이를 바탕으로 1810년까지 필라델피아에서 가장 성공적인 돛 제작소 중 하나로 키워냈다. 특히 포튼은 흑인과 백인 노동자를 모두 고용하며 자신이 추구했던 사회적 가치를 사업장 내에서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사업적 성공과 안목 덕분에 포튼은 인종에 관계없이 필라델피아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7]

4. 결혼과 가족

제임스 포튼은 두 번 결혼했다. 그의 첫 번째 아내는 델라웨어 카운티 다비 타운십 출신의 마사 비테(Martha Bette 또는 Beatty)였으나, 1804년 결혼한 지 몇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1806년, 포튼은 샬럿 반다인(Charlotte Vandine, 1785–1884)과 재혼했다. 제임스와 샬럿 포튼 부부는 슬하에 아홉 명의 자녀를 두었다.[2]

이름비고
로버트 브리지스 포튼 (Robert Bridges Forten)아버지의 돛 제작 사업 계승, 강력한 반노예 폐지 활동가
마가레타 포튼 (Margaretta Forten)평생 교육자로 활동, 1845년 필라델피아 여성 반노예 협회 임원
해리엇 포튼 퍼비스 (Harriet Forten Purvis)노예 폐지론자 로버트 퍼비스와 결혼
사라 루이서 포튼 퍼비스 (Sarah Louisa Forten Purvis)노예 폐지론자 조셉 퍼비스(Joseph Purvis)와 결혼
샬로타 포튼 (Charlotta Forten)
윌리엄 디스 포튼 (William Deas Forten)노예 폐지론 교육기관인 오네이다 연구소에서 공부
메리 테레사 포튼 (Mary Theresa Forten)
토마스 윌링 프랜시스 포튼 (Thomas Willing Francis Forten)
제임스 포튼 주니어 (James Forten Jr.)아버지의 돛 제작 사업 계승



포튼의 자녀들은 성장하여 노예제 폐지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아버지의 옛 고용주이자 멘토의 이름을 딴 로버트는 강력한 반노예 활동가였다. 윌리엄은 노예 폐지론 교육기관인 오네이다 연구소에서 공부했다. 해리엇과 사라 루이서 자매는 각각 저명한 노예 폐지론자인 로버트 퍼비스와 조셉 퍼비스 형제와 결혼했다. 애머스트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은 퍼비스 형제는 영국 이민자 아버지와 자유 흑인 여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막대한 재산을 공공 봉사에 사용했다. 마가레타는 평생 교육자로 헌신했으며, 1845년 필라델피아 여성 반노예 협회의 임원이 되었다. 로버트와 제임스 주니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업인 돛 제작 사업을 물려받았다.[2]

포튼의 손녀인 샬럿 포튼 그림케는 시인, 일기 작가이자 교육자가 되었다. 그녀는 특히 남북 전쟁 이후 남부에서 해방된 자유민들과 그 자녀들을 가르쳤는데, 이때의 경험을 기록한 그녀의 일기는 널리 알려졌으며 1980년대에 학술적으로 재출판되기도 했다.[8]

5. 사회 운동

40대에 접어든 제임스 포튼은 당시 펜실베이니아를 비롯한 북부 주에서 만연했던 흑인에 대한 심각한 차별 현실에 맞서, 노예제 폐지와 흑인의 시민권 획득을 위한 전국적인 운동에 헌신하기 시작했다. 그는 투표권이나 배심원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재산을 아끼지 않았다.[9]

그의 사회 운동은 1801년 노예 무역 폐지와 도망 노예법 개정을 요구하는 의회 청원에 서명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9] 1813년에는 펜실베이니아 주의회가 흑인 이주민 등록을 의무화하려는 차별적인 법안을 추진하자, 이를 비판하는 팸플릿 Letters from A Man of Colour|유색 인종의 남자로부터의 편지eng를 익명으로 출판하여 법안 통과를 막는 데 기여했다.[10]

19세기 초 자유 흑인들을 아프리카 등으로 이주시키려는 미국 식민화 협회(ACS)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초기에는 폴 커피의 시도를 지지하기도 했으나,[9] 곧 입장을 바꾸어 강력한 반대 운동을 이끌었다. 특히 1817년 필라델피아 베델 AME 교회에서 3,000여 명의 흑인들과 함께 식민화 반대 결의를 다진 사건은 그의 활동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11] 그는 미국에서 태어난 흑인들이 마땅히 미국 시민으로서 완전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아이티 이주 제안에도 반대했다.

포튼은 젊은 백인 노예 폐지론자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과 긴밀히 협력하며 그의 노예제 폐지 신문 ''더 리버레이터'' 창간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직접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2] 그는 언론과 연설, 조직 활동을 통해 북부 전역의 흑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전기 작가 줄리 윈치는 그를 "참정권을 박탈당했을지 모르지만, 결코 목소리를 잃지 않았던" 인물로 평가했다.[2]

제임스 포튼 묘비 에덴 묘지


포튼은 노년까지 사업과 사회 운동을 병행하며 ''더 리버레이터''에 꾸준히 글을 쓰는 등 열정적인 활동을 이어가다 1842년 3월 4일,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에는 수천 명의 흑인과 백인이 참석하여 그의 헌신적인 삶을 기렸다.[2]

5. 1. 노예제 폐지 운동

40대에 접어들면서 제임스 포튼은 노예제 폐지를 위한 전국적인 운동과 흑인들의 시민권 획득을 위해 시간과 돈을 쏟았다. 당시 펜실베이니아를 포함한 북부 주에서도 흑인들은 심각한 차별을 겪었으며, 일반적으로 투표권이나 배심원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포튼은 이러한 사회 문제 해결에 앞장서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다. 1801년, 그는 노예 무역 폐지와 1793년 제정된 도망 노예법 개정을 요구하는 미국 의회 청원서에 서명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9]

1813년, 포튼은 펜실베이니아 주의회가 모든 흑인 이주민의 주 등록을 의무화하려는 법안을 추진하자, 이를 비판하는 팸플릿 "유색 인종의 남자로부터의 편지"를 익명으로 출판했다(많은 이들은 저자가 포튼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 팸플릿에서 자유 흑인을 백인과 다르게 취급하는 것에 항의하며, 해당 법안이 펜실베이니아 흑인들의 권리를 후퇴시키고 차별을 심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일부 입법자들은 자유 흑인들이 펜실베이니아로 이주하여 백인 노동자와 경쟁하는 것을 우려했고, 남부 노예 주와 인접한 펜실베이니아로 도망 노예들이 유입되는 상황도 경계했다. 포튼은 흑인 사회의 존경받는 시민들이 동등한 구성원으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그의 열정적인 호소 덕분인지 법안은 통과되지 않았고, 포튼은 이 팸플릿으로 더욱 명성을 얻게 되었다.[10]

19세기 초, 일부 미국인들은 자유 흑인들을 아프리카, 캐나다, 또는 아이티 등으로 이주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는 과거 영국이 미국 독립 전쟁 당시 왕실 편에 섰던 흑인 영국인과 검은 로열리스트들을 시에라리온프리타운 식민지로 재정착시킨 사례와 유사한 맥락이었다.[9] 1816년에는 미국 식민화 협회(ACS)가 서아프리카에 라이베리아 식민지를 설립하여 자유 흑인들의 자발적인 이주를 돕겠다는 명목으로 조직되었다. ACS에는 노예 폐지론자, 노예 소유주, 선교사 등 다양한 배경의 인물들이 참여했지만, 이들의 목표는 복합적이었다. 노예 소유주들은 자유 흑인이 노예제 유지에 위협이 된다고 보아 이들을 미국에서 내보내려 했고, 일부 북부 인사들은 흑인들이 아프리카에서 더 나은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선교사들은 아프리카 선교를 기대했다. 그러나 켄터키의 정치인 헨리 클레이와 같은 ACS 지도자들의 인종차별적인 발언은 많은 자유 흑인들에게 ACS가 사실상 강제 추방을 계획하고 있다는 두려움을 심어주었다.[11]

처음에 포튼은 보스턴의 조선업자 폴 커피가 1815년 38명의 자유 흑인을 시에라리온으로 이주시킨 것을 지지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 내 흑인들이 겪는 극심한 차별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아프리카 이주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하지만 지역 사회의 우려가 커지자, 포튼은 미국 감리교 아프리카 교회의 리처드 앨런 주교, 압살롬 존스, 제임스 글로스터 등 흑인 지도자들과 협력하여 1817년 1월 필라델피아의 베델 AME 교회에서 식민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대규모 회의를 조직했다. 이 회의에는 약 3,000명의 흑인 주민들이 참석하여 식민화에 대한 강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11]

회의에서 포튼은 참석자들에게 식민화 찬반 투표를 제안했다. 찬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반대 의사를 묻자 모든 참석자가 "반대!"를 외치며 미국을 자신들의 고향으로 여기고 완전한 시민권을 획득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이 회의는 포튼을 비롯한 흑인 지도자들이 ACS에 대해 확고한 반대 입장을 취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포튼은 이후 젊은 백인 노예 폐지론자인 보스턴의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에게도 식민화 계획의 문제점을 설득하여 그의 입장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포튼은 회의 결과를 바탕으로 대중의 정서를 담은 결의안 작성에 참여하여 펜실베이니아 의회 대표단에게 전달했으며, 8월에는 식민화 계획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필라델피아시와 카운티 거주자에게 보내는 연설"이라는 더 긴 문서를 발표했다.[11] 그는 대부분의 미국 흑인들이 이미 여러 세대에 걸쳐 미국에 뿌리내리고 있으며, 이 땅을 자신들의 고향으로 여긴다는 점을 강조했다.[9] ACS는 라이베리아를 기회의 땅으로 선전했지만, 실제로는 많은 이주민들이 질병으로 사망하고 불법 노예 상인에 의해 다시 노예가 될 위험에 처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1804년 아이티가 흑인 공화국으로 독립하자, 일부 미국 흑인들은 아이티 이주에 관심을 보였다. 1820년대 초 장피에르 보이예 대통령은 미국 자유 흑인들의 이주를 장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포튼은 아이티 이주 역시 반대했다. 그는 흑인들이 미국을 떠나기보다는 미국 사회 내에서 평등한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포튼은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이 1831년 노예제 폐지 운동 신문인 ''더 리버레이터''를 창간할 때 재정적으로 지원했으며, "필라델피아의 유색 인종"이라는 필명으로 종종 글을 기고했다. 개리슨 역시 ''더 리버레이터''를 통해 라이베리아의 열악한 현실을 폭로하며 식민화 계획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포튼과 개리슨은 ACS의 활동이 반드시 흑인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은 아님을 알리고자 노력했다.[2]

전기 작가 줄리 윈치는 포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1830년대까지 그의 목소리는 고향인 도시의 유색 인종뿐만 아니라 북부 전역의 수천 명에게도 가장 강력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목소리 중 하나였다. 그는 언론과 연설대를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동맹을 구축하는 방법, 물러서야 할 때와 그의 의제를 밀어붙여야 할 때를 알고 있었다. 그의 두드러진 성공, 권력과 권위의 본질에 대한 그의 이해,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들리게 하려는 그의 결심은 지역 사회 정치의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교훈이다. 그는 참정권을 박탈당했을지 모르지만, 결코 목소리를 잃지 않았다.[2]


제임스 포튼은 노년까지 돛 제작 사업을 운영하는 동시에 노예제 폐지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더 리버레이터''에 꾸준히 글을 기고했다. 그는 1842년 3월 4일, 75세의 나이로 필라델피아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장례식에는 수천 명의 흑인과 백인 조문객이 참석하여 그의 삶과 업적을 기렸다.[2]

5. 2. 미국 식민 협회 반대 운동

19세기 초, 일부 흑인과 백인 미국인들은 자유 흑인들을 아프리카 대륙, 캐나다, 또는 1804년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아이티로 "재정착"시키려는 운동을 지지했다. 미국 식민화 협회(American Colonization Society, ACS)는 1816년 12월, 서아프리카에 라이베리아 식민지를 설립하여 이러한 목적을 추구하고자 조직되었다. ACS는 노예 폐지론자, 노예 소유주, 선교사 등 다양한 동기를 가진 회원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자유 흑인과 새로 해방된 노예들의 자발적인 아프리카 이주를 통해 미국 사회 내 흑인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켄터키의 헨리 클레이와 같은 정치인들의 인종차별적인 발언은 많은 자유 흑인들에게 ACS가 자신들을 아프리카로 대량 추방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심어주었다.[11]

초기에는, 보스턴의 조선업자 폴 커피가 1815년 38명의 자유 흑인을 시에라리온으로 이주시켜 백인 인종차별로부터 벗어나 더 나은 삶을 찾도록 도왔을 때, 포튼은 이를 지지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 내 흑인에 대한 가혹한 차별로 인한 지속적인 문제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식민화 논의가 본격화되자, 포튼은 지역 사회의 우려를 해소하고 식민화의 가능성을 논의하기 위해 미국 감리교 아프리카 교회의 주교이자 미국 최초의 독립 흑인 교파 창시자인 리처드 앨런 주교, 압살롬 존스, 제임스 글로스터 등 필라델피아 흑인 지도자들과 협력하여 1817년 1월 베델 AME 교회에서 대규모 회의를 조직했다. 이 회의에는 필라델피아의 흑인 주민 약 3,000명이 참석했으며, 이는 식민화에 대한 공동체의 강력한 반대 의사를 확인시켜 주었고, 포튼을 비롯한 흑인 지도자들에게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11]

회의에서 포튼은 식민화에 대한 찬반 투표를 제안했다. 식민화에 찬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나, 반대 의사를 묻자 참석자들은 만장일치로 "반대!"를 외쳤다. 이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흑인들이 미국을 자신들의 조국으로 여기며 완전한 시민권을 획득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이 회의를 기점으로 포튼은 ACS에 대한 강력한 반대자로 돌아섰다. 그는 회의 결과를 바탕으로 식민화 반대 결의안 작성을 돕고 이를 펜실베이니아 의회 대표단에게 전달했으며, 8월에는 "필라델피아시와 카운티 거주자에게 보내는 연설"이라는 더 긴 문서를 출판하여 식민화 계획을 더욱 강하게 비판했다.[11] 그는 또한 젊은 백인 노예 폐지론자인 보스턴 출신의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에게 영향을 주어 그가 식민화 계획에 반대하도록 설득했다.

포튼은 대부분의 미국 흑인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미국에 살아왔으며, 따라서 미국 땅에 대한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9] 그는 ACS가 라이베리아를 자유 흑인에게 기회의 땅으로 선전했지만, 실제로는 식민지가 생존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많은 이주민들이 질병으로 사망하고 불법 노예 상인과 밀수업자에 의한 재노예화의 위험도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토착 아프리카인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않았다.[11]

1804년 아이티가 독립적인 흑인 공화국으로 설립되고, 1820년대 초 장피에르 보이예 대통령이 미국 자유 흑인들에게 아이티로 이주하여 국가 발전에 기여해달라고 호소했을 때도, 포튼은 미국 흑인들의 이민에 반대하는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흑인들이 미국을 떠나기보다는 미국 땅에서 평등한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한다고 굳게 믿었으며, 평등주의적인 미국 사회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포튼은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이 1831년 노예제 폐지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신문인 ''더 리버레이터''를 창간하는 데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종종 "필라델피아의 유색 인종"이라는 필명으로 이 신문에 편지를 기고하며 ACS의 문제점을 알리고 라이베리아의 열악한 생활 환경을 묘사하는 등 식민화에 대한 반대 여론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이를 통해 포튼과 개리슨은 ACS가 반드시 흑인 미국인들의 최선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고자 했다.[2]

5. 3. 언론 활동

40대에 접어들면서 제임스 포튼은 노예제 폐지를 위한 전국적인 운동과 흑인들의 시민권 획득을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했다. 펜실베이니아와 북부 주들에서 흑인들은 심각한 차별을 겪었으며, 투표권이나 배심원 참여가 일반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다. 그는 이러한 지역 사회 문제 해결에 기여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1801년, 그는 노예 무역 폐지와 1793년의 도망 노예법 개정을 요구하는 미국 의회 청원서에 서명했다.[9]

1813년, 포튼은 익명으로 Letters from A Man of Colour|유색 인종의 남자로부터의 편지eng라는 팸플릿을 출판했다. (많은 이들이 그의 저작임을 알고 있었다.) 이 팸플릿에서 그는 펜실베이니아 주 의회가 검토 중이던 법안을 비판했다. 이 법안은 모든 흑인 이주민이 주에 등록하도록 요구하는 내용으로, 자유 흑인을 백인과 다르게 취급하는 것에 항의했다. 일부 입법자들은 펜실베이니아로 이주하는 자유 흑인들이 백인 노동자들과 경쟁하는 것을 우려했으며, 도망 노예들이 펜실베이니아를 목적지나 다른 자유 지역으로 가는 경로로 이용하는 점도 인지하고 있었다. 포튼은 이 법안이 펜실베이니아 흑인들에게 퇴보적인 조치라고 믿었다. 그는 팸플릿에서 이 법안이 자유 흑인의 권리를 침해하고 인종 차별을 조장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흑인 사회의 존경받는 시민들이 인정받기를 원했다. 결국 이 법안은 통과되지 않았고, 포튼은 이 간결하고 열정적인 글로 인해 더욱 명성을 얻게 되었다.[10]

19세기 초, 일부 미국인들은 자유 흑인들을 아프리카, 캐나다, 또는 아이티로 "재정착"시키려는 운동을 지지했다. 미국 식민화 협회(ACS)는 1816년 서아프리카에 라이베리아 식민지를 설립하여 이러한 목적을 추구했다.[11] 포튼은 처음에는 1815년 38명의 자유 흑인을 시에라리온으로 이주시킨 보스턴의 조선업자 폴 커피를 지지하기도 했다. 이는 미국 내 흑인에 대한 가혹한 차별 때문에 더 나은 삶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9]

그러나 식민화 논의가 본격화되자, 포튼은 미국 감리교 아프리카 교회(AME)의 리처드 앨런 주교, 압살롬 존스, 제임스 글로스터와 협력하여 1817년 1월 필라델피아의 베델 AME 교회에서 대규모 회의를 조직했다. 이 회의에는 3,000명의 흑인 시민이 참석했다.[11] 이 자리에서 포튼은 식민화 찬반 투표를 제안했다. 찬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나, 반대 의사를 묻자 군중은 만장일치로 "반대!"를 외쳤다. 이는 미국 태생의 흑인들이 미국을 자신들의 고향으로 여기고 완전한 시민권을 얻기를 원한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 회의를 기점으로 포튼은 ACS에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으로 돌아섰으며, 젊은 백인 노예 폐지론자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에게도 식민화 계획에 반대하도록 설득했다. 회의 후 포튼은 대중의 정서를 담은 결의안 작성에 참여하여 펜실베이니아 의회 대표단에게 전달했으며, 8월에는 식민화를 비판하는 "필라델피아시와 카운티 거주자에게 보내는 연설"이라는 더 긴 문서를 출판했다.[11] 그는 대부분의 미국 흑인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미국에 살아왔으며 그 땅을 자신들의 것으로 주장한다는 점을 강조했다.[9] 또한 아이티로의 이민 제안에 대해서도 반대하며, 흑인들이 미국 내에서 평등한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포튼은 1831년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이 노예제 폐지 신문인 ''더 리버레이터''를 창간하는 데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종종 "필라델피아의 유색 인종(A Man of Colour of Philadelphia)"이라는 필명으로 이 신문에 편지를 기고했다. 개리슨 역시 라이베리아의 열악한 생활 환경을 묘사하며 식민화에 반대하는 글을 실어, ACS가 반드시 흑인 미국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은 아님을 알리고자 했다.[2]

그의 전기 작가 줄리 윈치(Julie Winch)는 포튼의 영향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1830년대까지 그의 목소리는 고향인 도시의 유색 인종뿐만 아니라 북부 전역의 수천 명에게도 가장 강력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목소리 중 하나였다. 그는 언론과 연설대를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동맹을 구축하는 방법, 물러서야 할 때와 그의 의제를 밀어붙여야 할 때를 알고 있었다. 그의 두드러진 성공, 권력과 권위의 본질에 대한 그의 이해,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들리게 하려는 그의 결심은 지역 사회 정치의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교훈이다. 그는 참정권을 박탈당했을지 모르지만, 결코 목소리를 잃지 않았다.[2]

포튼은 말년까지 돛대 공장을 운영하면서도 노예 폐지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더 리버레이터''에 꾸준히 글을 기고했다.[2]

6. 죽음

그는 1842년 3월 4일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사망했으며, 펜실베이니아주 콜링데일에 있는 에덴 묘지에 안장되었다.[12]

7. 유산과 평가

볼든은 제임스 포튼에 대해 "그가 사망했을 때, 모범적인 가족, 상당한 재산, 그리고 여러 세대의 필라델피아 흑인들에게 영감을 준 자선과 활동의 유산을 남겼다"고 평가했다.[9]

2001년, 학자 몰레피 케테 아산테는 제임스 포튼을 그의 저서 ''가장 위대한 흑인 미국인 100인'' 목록에 포함시키며 그의 역사적 중요성을 강조했다.[13]

2023년 2월, 필라델피아에 있는 미국 독립 혁명 박물관에서는 포튼의 생애와 가족을 기리는 첫 박물관 전시회인 ''흑인 창립자: 필라델피아의 포튼 가족''을 개최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14] 이는 그의 업적과 유산이 현대에도 여전히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참조

[1] 웹사이트 Portrait of James Forten http://www.libraryco[...] Library Company of Philadelphia 2017-07-20
[2] 서적 A Gentleman of Color: The Life of James Forten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3] 논문 James Forten, Revolutionary: Forgotten No More https://allthingslib[...] 2023-06-14
[4] 문서
[5] 웹사이트 HMS Jersey http://www.history.c[...]
[6] 웹사이트 James Forten http://pabook.librar[...] 2014-04-18
[7] 논문 Bank Ownership and Lending Patterns in New York and Pennsylvania, 1781-1831 https://doi.org/10.2[...] 2023-01-20
[8] 서적 The Journals of Charlotte Forten Grimke Oxford University Press
[9] 서적 James Forten John Wiley & Sons, Inc
[10] 서적 A Mighty Baptism: Race, Gender and the Creation of American Protestantism Cornell University Press
[11] 서적 The Problem of Slavery in the Age of Emancipation https://books.google[...] Alfred A. Knopf
[12] 뉴스 20140407_James_Forten_first_black_man_to_be_honored_as_hero_of_the_American_Revolution The Philadelphia Inquirer
[13] 서적 100 Greatest African Americans: A Biographical Encyclopedia Prometheus Books
[14] 웹사이트 Black Founders: The Forten Family of Philadelphia https://www.amrevm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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