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 (제1차 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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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 (제1차 개조)는 1973년 11월 25일부터 1974년 11월 11일까지 존속한 일본의 내각이다. 다나카 가쿠에이가 내각총리대신을 맡았으며, 미키 다케오가 부총리 겸 환경청 장관을 역임했다. 주요 각료로는 오히라 마사요시(외무대신, 대장대신 겸임), 후쿠다 다케오(대장대신), 나카소네 야스히로(통상산업대신) 등이 있었다. 내각은 1974년 참의원 선거에서 여당의 패배와 주요 각료들의 사임으로 위기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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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은 다나카 가쿠에이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며 고도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를 이루었으나, 정치자금 비리 의혹, 환경 문제, 사회적 불평등 심화, 석유파동 등으로 비판받으며 다나카의 퇴진으로 막을 내렸다.
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 (제1차 개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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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제1차 개조내각 | |
기본 정보 | |
내각 이름 | 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제1차 개조내각 |
일본어 | 第2次田中角栄第1次改造内閣 |
대수 | 65 |
수상 이름 | 다나카 가쿠에이 |
성립 연도 | 1973년 |
성립 월일 | 11월 25일 |
종료 연도 | 1974년 |
종료 월일 | 11월 11일 |
여당 | 자유민주당 |
선거 | 제10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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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단 | 내각 명단 |
2. 배경
1973년 10월에 제4차 중동 전쟁으로 인한 오일 쇼크가 발생하여 일본 국내에 에너지 위기와 물가 급등 문제가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1월 23일 아이치 기이치 대장대신이 현직에서 급서했다.[1]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는 경제 정책 전환을 위해 주요 각료들을 교체하는 내각 개조를 단행했다.[1] 이듬해 1974년 제10회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패배하자 미키, 후쿠다, 호리 세 사람이 잇달아 각료직을 사임하였고, 다나카는 다시 개조를 시도하였으나 결국 내각은 붕괴하였다.
2. 1. 욤키푸르 전쟁과 오일 쇼크
1973년 10월에 제4차 중동 전쟁이 발발하면서 오일 쇼크가 발생하여 일본 국내에서 에너지 위기와 물가 급등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1월 23일 아이치 기이치 대장대신이 현직에서 급서했다.[1]다나카 가쿠에이 총리는 경제 정책 전환을 위해 아이치의 후임 대장대신으로 후쿠다 다케오 행정관리청 장관을 기용하는 등 자민당의 주요 인물들을 내각에 배치하여 국가적 위기에 대응하고자 했다.[1]
2. 2. 아이치 기이치 대장대신의 급서
1973년 10월에 제4차 중동 전쟁과 그로 인한 오일 쇼크으로 일본 국내에 에너지 위기와 물가 급등 문제가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1월 23일 대장대신 아이치 기이치가 현직인 채로 급서했다.[1]아이치의 사망 소식을 접한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는 경제 정책 전환을 위해 행정관리청 장관 후쿠다 다케오를 아이치의 후임 대장대신으로 기용했다. 또한 자유민주당의 실력자들을 주요 각료에 배치하는 강력한 포진으로 국가 위기에 대처하고자 내각 개조를 단행했다.[1]
3. 내각 구성 (1973년 11월 25일 ~ 1974년 11월 11일)
국토청 장관 (1974년 6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