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치 기이치
1. 개요
아이치 기이치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1907년 도쿄부에서 태어나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대장성에 들어가 관료로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참의원 의원, 통상산업대신, 내각관방장관, 법무대신, 외무대신, 재무대신 등을 역임하며 활발한 정치 활동을 펼쳤다. 외무대신 재임 시절 오키나와 반환 협정 체결에 기여했으며, 재무대신으로 변동 환율제 이행과 경제 외교를 추진했다. 1973년 급성 폐렴으로 사망했으며, 사후 종2위가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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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아이치 기이치 (愛知 揆一) |
|---|---|
| 로마자 표기 | Aichi Kiichi |
| 출생일 | 1907년 10월 10일 |
| 출생지 | 일본 도쿄 |
| 사망일 | 1973년 11월 23일 (향년 66세) |
| 사망지 | 일본 도쿄 신주쿠구 |
| 국적 | 일본 |
| 직업 | 각료 |
| 출신 학교 | 도쿄 대학 (구 도쿄 제국대학) |
|---|
| 전직 | 국가 공무원 (대장성) |
|---|---|
| 소속 정당 | (자유당 →) 자유민주당 (사토파 → 다나카파) |
| 칭호 및 훈장 | 종2위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
| 가족 | 양녀: 아이치 아야코 사위: 아이치 가즈오 손자: 아이치 지로 |
| 배우자 | 아이치 도미코 |
| 대장대신 | 내각: 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 임기: 1972년 12월 22일 ~ 1973년 11월 23일 |
|---|---|
| 외무대신 | 내각: 제2차 사토 제2차 개조 내각, 제3차 사토 내각 임기: 1968년 11월 30일 ~ 1971년 7월 5일 |
| 내각관방장관 | 내각: 제1차 기시 개조 내각, 제1차 사토 제2차 개조 내각 임기: 1957년 7월 10일 ~ 1958년 6월 12일, 1966년 8월 1일 ~ 1966년 12월 3일 |
| 문부대신, 과학기술청 장관 | 내각: 제3차 이케다 개조 내각, 제1차 사토 내각 임기: 1964년 7월 18일 ~ 1965년 6월 3일 |
| 법무대신, 자치청 장관 | 내각: 제2차 기시 내각 임기: 1958년 10월 28일 ~ 1959년 1월 12일 |
| 통상산업대신, 경제심의청 장관 | 내각: 제5차 요시다 내각 임기: 1954년 1월 9일 ~ 1954년 12월 10일 |
| 중의원 의원 | 선거구: 구 미야기 1구 당선 횟수: 7회 임기: 1955년 2월 28일 ~ 1973년 11월 23일 |
|---|---|
| 참의원 의원 | 선거구: 전국구 당선 횟수: 1회 임기: 1950년 6월 5일 ~ 1955년 2월 1일 |
| 자유민주당 세제 조사 회장 | 대수: 제4대 총재: 이케다 하야토 임기: 1961년 8월 ~ 1962년 8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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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기현 센다이 제2고등학교 동문 -
안도 리키치
안도 리키치는 일본 제국 육군 군인으로 육군 장교를 지내며 중일전쟁과 남지나방면군 사령관 등을 역임하고 타이완군 사령관과 타이완 총독을 겸임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전범 혐의로 기소되기 전 자결했다. -
일본의 자치대신 -
후쿠다 하지메
후쿠다 하지메는 도메이 통신 기자 출신으로 중의원 의원을 거쳐 통산상, 자치상, 법무상 등 주요 각료직과 중의원 의장을 지낸 일본의 정치인이다. -
일본의 자치대신 -
노나카 히로무
노나카 히로무는 부락민 차별 경험을 바탕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자민당 간사장 등 요직을 역임하며 일본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정치인으로, 평화주의를 강조하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활동을 펼쳤다. -
도쿄도 출신 -
이와야 사자나미
이와야 사자나미는 메이지 시대에 아동 문학을 보급하고 일본 최초의 아동 문학 총서 간행, 전승 설화 리텔링, '옛날이야기 하이쿠 그림' 창조 등을 통해 일본 근대 아동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아동 문학가, 소설가, 시인, 수필가이자 문예 평론가이다. -
도쿄도 출신 -
미시마 유키오
미시마 유키오는 1925년 도쿄에서 태어나 소설, 희곡, 평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일본의 전통과 현대 사이의 갈등을 작품에 담아낸 20세기 일본 문학의 중요한 인물이며, 1970년 자위대에서 쿠데타를 시도하다 실패하고 할복 자살했다.
2. 생애
아이치는 1907년 도쿄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도호쿠 제국대학의 교수였고, 1923년에 복어독으로 인한 식중독으로 사망하였다.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대장성에 들어가, 전후에 관방장, 은행국장(1947년)을 역임했다.
1950년 자유당 소속으로 참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이케다 하야토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1952년 이케다·로버트슨 회담에서 정부 대표를 맡았다. 제5차 요시다 내각에서는 통상산업대신 겸 경제심의청 장관을 역임했다.
1955년 제2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미야기현 제1구에서 당선되어 중의원 의원으로 전직했다. 보수 합동으로 자유민주당에 참가했다. 제1차 기시 개조 내각에서 내각관방장관, 제2차 기시 내각에서는 법무대신 겸 자치청 장관에 취임했다. 제3차 이케다 개조 내각에서 문부대신 겸 과학기술청 장관을 역임했다.
사토 에이사쿠파에 속해 사토파 5봉행 중 한 명으로 불렸으며, 사토 내각 성립 후 내각관방장관과 외무대신을 역임했다. 외무대신 시절에는 오키나와 반환에 관한 미·일 교섭을 담당해 오키나와 반환 협정 체결에 공헌하였다.
사토 에이사쿠 퇴임 시 다나카 가쿠에이를 지지했고, 1972년 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에서 대장대신이 되었다. 1973년 스미소니언 협정 붕괴 속에서 엔의 변동 환율제 이행을 결정했고, 일본 열도 개조론으로 인한 경기 과열과 제4차 중동 전쟁으로 인한 유류 파동 속에서 경제 외교를 추진하였다.
1973년 급성 폐렴으로 6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스미소니언 협정이 붕괴되면서 엔의 변동 환율제로의 이행이 결정되어 외환 거래가 크게 전환되는 상황을 일으켰고, 일본 열도 개조론에 의해 경기과열에 따른 심한 물건 부족과 인플레이션, 제4차 중동 전쟁으로 인한 제1차 유류 파동으로 인플레이션과 물건 부족이 심해지자, 재정부 장관이었던 아이치는 각 국을 방문하여 경제 외교를 추진하였다.
1973년 11월 23일, 아이치는 분쿄구유시마 자택에서 신주쿠구시나노마치의 게이오 병원으로 구급차로 이송되었지만,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그는 구급차 안에서 "나는, 나는, 이런 일로 죽지 않아!"라고 외쳤고, 의식이 혼탁해지는 가운데 헛소리처럼 프랑스어를 중얼거렸다고 한다. 결국 같은 날 오후 9시 50분에 사망했다.
당시 총리였던 다나카 가쿠에이는 아이치의 사망에 큰 충격을 받고 "거성이 졌다… 이 시기에 아이치 군을 잃은 것은 아프다…"라고 중얼거렸다. 다나카는 내각 개조를 단행하여, 후임 재정부 장관에 후쿠다 다케오를 임명했다. 아이치의 묘소는 조시가야 영원에 있다.
사위 아이치 가즈오는 중의원 의원을 지냈으며, 환경청 장관과 방위청 장관을 역임했다. 손자 아이치 지로는 참의원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1. 관료 시절
아이치 기이치는 1907년 도쿄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도호쿠 제국대학의 교수였고, 1923년에 복어독으로 인한 식중독으로 사망하였다.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대장성에 들어갔으며, 은행국에 배속되었다. 전후에 관방장, 은행국장(1947년)으로 일하였다. 주로 재무·국제 금융을 담당했다. 종전 후에는, 동성 관방장, 은행국장(1947년) 등을 역임, GHQ에 의한 재벌 해체 속에서 일본의 금융계를 지키기 위해 고심했다. 은행국장 시절인 1948년, 우메바야시조 및 다케나카 공무점에 대한 융자 문제로 중의원 부당 재산 거래 조사 특별 위원회에서 이케다 하야토, 고사카 젠타로 등과 함께 증인 소환되었다.
1950년 대장성을 퇴직하고 참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대장성 근무 경력을 바탕으로 1952년 이케다-로버트슨 회담에서 정부 대표를 맡았다.
2.2. 정치 입문
아이치 기이치는 1907년 도쿄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도호쿠 제국대학의 교수였으며, 1923년에 복어 독으로 인한 식중독으로 사망하였다.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대장성에 들어가, 은행국에 배속되었다. 전후에는 관방장 (官房長), 은행국장(1947년)으로 일하였다.
1950년 제2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 자유당 소속으로 참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대장성에서 근무했던 경력이 이케다 하야토에게 높게 평가되어 1952년 이케다-로버트슨 회담에서 정부 대표를 맡았다. 1955년 제2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미야기현 제1구에서 입후보하여 당선되어 중의원 의원으로 전직했다.
2.3. 주요 정치 경력
아이치 기이치는 1907년 도쿄부에서 태어났다.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대장성에 들어가, 전후에 관방장, 은행국장을 역임했다.
1950년 자유당 소속으로 참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이케다 하야토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1952년 이케다·로버트슨 회담에서 정부 대표를 맡았다. 제5차 요시다 내각에서는 통상산업대신 겸 경제심의청 장관을 역임했다.
1955년 제2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미야기현 제1구에서 당선되어 중의원 의원으로 전직했다. 보수 합동으로 자유민주당에 참가했다. 제1차 기시 개조 내각에서 내각관방장관, 제2차 기시 내각에서는 법무대신 겸 자치청 장관에 취임했다. 제3차 이케다 개조 내각에서 문부대신 겸 과학기술청 장관을 역임했다.
사토 에이사쿠파에 속해 사토파 5봉행 중 한 명으로 불렸으며, 사토 내각 성립 후 내각관방장관과 외무대신을 역임했다. 외무대신 시절에는 오키나와 반환에 관한 미·일 교섭을 담당해 오키나와 반환 협정 체결에 공헌하였다.
사토 에이사쿠 퇴임 시 다나카 가쿠에이를 지지했고, 1972년 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에서 대장대신이 되었다. 1973년 스미소니언 협정 붕괴 속에서 엔의 변동 환율제 이행을 결정했고, 일본 열도 개조론으로 인한 경기 과열과 제4차 중동 전쟁으로 인한 유류 파동 속에서 경제 외교를 추진하였다.
1973년 급성 폐렴으로 6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다나카 가쿠에이는 내각 개조를 단행하여 후임 재정부 장관에 후쿠다 다케오를 임명했다.
2.4. 사망
아이치 기이치는 1973년 급성 폐렴으로 6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스미소니언 협정이 붕괴되면서 엔의 변동 환율제로의 이행이 결정되어 외환 거래가 크게 전환되는 상황을 일으켰고, 일본 열도 개조론에 의해 경기과열에 따른 심한 물건 부족과 인플레이션, 제4차 중동 전쟁으로 인한 제1차 유류 파동으로 인플레이션과 물건 부족이 심해지자, 재정부 장관이었던 아이치는 각 국을 방문하여 경제 외교를 추진하였다.
1973년 11월 23일, 아이치는 분쿄구유시마 자택에서 신주쿠구시나노마치의 게이오 병원으로 구급차로 이송되었지만,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그는 구급차 안에서 "나는, 나는, 이런 일로 죽지 않아!"라고 외쳤고, 의식이 혼탁해지는 가운데 헛소리처럼 프랑스어를 중얼거렸다고 한다. 결국 같은 날 오후 9시 50분에 사망했다.
당시 총리였던 다나카 가쿠에이는 아이치의 사망에 큰 충격을 받고 "거성이 졌다… 이 시기에 아이치 군을 잃은 것은 아프다…"라고 중얼거렸다. 다나카는 내각 개조를 단행하여, 후임 재정부 장관에 후쿠다 다케오를 임명했다. 아이치의 묘소는 조시가야 영원에 있다.
사위 아이치 가즈오는 중의원 의원을 지냈으며, 환경청 장관과 방위청 장관을 역임했다. 손자 아이치 지로는 참의원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3. 평가
3.1. 비판
4. 가족 관계
아이치 기이치 부부에게는 친자녀가 없어, 아내 도미코의 조카 아야코를 양녀로 삼았다. 도미코는 2007년 2월 26일에 91세로 사망했고, 아야코는 2020년 10월 5일에 78세로 사망했다.
아이치의 후계자는 아야코의 남편이자 사위인 아이치 가즈오(구 성씨: 나카타)이다. 아이치 가즈오는 지역구를 물려받아 1976년 총선에서 중의원 의원이 되었으며, 환경청 장관과 방위청 장관을 역임했다. 손자인 아이치 지로는 전 참의원 의원이며, 아이치 가즈오의 차남이다. 형 아이치 다로는 도요 학원 대학 이사장 겸 학장, 아이치 기이치 복지 진흥회 대표 이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