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다 다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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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쿠다 다케오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1905년 군마현에서 태어나 도쿄 대학을 졸업했다. 1952년 중의원 의원에 당선된 후 자유민주당에서 활동하며 당 정무조사회장, 간사장, 농림대신, 대장상, 외상을 역임했다. 1976년 미키 다케오의 뒤를 이어 제67대 일본의 총리가 되었으며, 재임 기간 중 중일평화우호조약을 체결하고 후쿠다 독트린을 발표했다. 총리 퇴임 후에도 중의원 의원으로 활동하다 1990년 정계에서 은퇴했으며, 1995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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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다 다케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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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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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후쿠다 다케오 |
일본어 이름 | 福田 赳夫 |
로마자 표기 | Fukuda Takeo |
출생일 | 1905년 1월 14일 |
출생지 | 일본 군마현 다카사키시 |
사망일 | 1995년 7월 5일 |
사망지 | 일본 도쿄도 기타구 |
배우자 | 미에 후쿠다 |
자녀 | 5명 (후쿠다 야스오 포함) |
서명 | FukudaT kao.png |
소속 정당 | 자유민주당 |
학력 |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졸업 |
칭호/훈장 | 정2위, 대훈위 국화대수장, 법학사 (도쿄 제국대학, 1929년), 군마현 명예현민 |
친족 (정치인) | 후쿠다 젠지 (아버지), 후쿠다 헤이시로 (형), 후쿠다 고이치 (동생), 후쿠다 야스오 (장남), 오치 미치오 (사위), 오치 다카오 (손자), 후쿠다 다쓰오 (손자) |
주요 경력 | |
직위 | 내각총리대신 |
재임 기간 | 1976년 12월 24일 ~ 1978년 12월 7일 |
이전 총리 | 미키 다케오 |
다음 총리 | 오히라 마사요시 |
직위 | 자유민주당 총재 |
재임 기간 | 1976년 12월 23일 ~ 1978년 12월 1일 |
이전 총재 | 미키 다케오 |
다음 총재 | 오히라 마사요시 |
직위 | 중의원 의원 |
선거구 | 군마 3구 |
재임 기간 | 1952년 10월 1일 ~ 1990년 2월 18일 |
다음 의원 | 후쿠다 야스오 |
추가 경력 | |
직위 | 경제기획청 장관, 부총리 |
내각 | 미키 내각, 미키 개조내각 |
재임 기간 | 1974년 12월 9일 ~ 1976년 11월 6일 |
직위 | 대장대신 |
내각 | 제1차 사토 제1차 내각 제1차 사토 제2차 내각 제2차 사토 제2차 개조 내각 제3차 사토 내각 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제1차 개조 내각 |
재임 기간 | 1965년 6월 3일 ~ 1966년 12월 3일, 1968년 11월 30일 ~ 1971년 7월 5일, 1973년 11월 25일 ~ 1974년 7월 16일 |
직위 | 행정관리청 장관 |
내각 | 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 |
재임 기간 | 1972년 12월 22일 ~ 1973년 11월 25일 |
직위 | 외무대신 |
내각 | 제3차 사토 개조 내각 |
재임 기간 | 1971년 7월 5일 ~ 1972년 7월 7일 |
직위 | 농림대신 |
내각 | 제2차 기시 개조 내각 |
재임 기간 | 1959년 6월 18일 ~ 1960년 7월 19일 |
직위 | 자유민주당 간사장 |
총재 | 기시 노부스케, 사토 에이사쿠 |
재임 기간 | 1959년 1월 ~ 1959년 6월, 1966년 12월 ~ 1968년 11월 |
직위 |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
총재 | 기시 노부스케, 이케다 하야토 |
재임 기간 | 1958년 ~ 1959년, 1960년 ~ 1961년 |
직위 | 자유민주당 최고 고문 |
총재 | 스즈키 젠코, 나카소네 야스히로, 다케시타 노보루, 우노 소스케, 가이후 도시키, 미야자와 기이치, 고노 요헤이 |
재임 기간 | 1980년 ~ 1995년 |
관료 경력 | |
직위 | 대장성 주계국장 |
임명일 | 1947년 9월 2일 |
퇴임일 | 1948년 9월 24일 |
대장대신 | 구리쓰 다케오, 기타무라 도쿠타로 |
2. 생애
군마현 출신으로 도쿄 대학을 졸업한 후쿠다 다케오는 1952년 총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1959년부터 1969년까지 농상, 1969년부터 1971년까지 대장상, 1971년부터 1973년까지 외무상을 역임했다.
1976년 미키 다케오의 뒤를 이어 일본의 총리가 되었으며, 재임 기간 동안 중일평화우호조약을 체결하고 '후쿠다 독트린'으로 불리는 전향적인 동남아시아 외교 정책을 펼쳤다. 그의 아시아 중시 외교는 '전방위 외교'라고도 불린다.
1978년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하고 한일의원연맹 회장을 지내는 등 한국과의 관계 증진에 힘썼다. 1990년 정계 은퇴 후 1995년 만성 폐기종으로 사망했다. 2007년에는 장남 후쿠다 야스오가 총리에 취임하여 일본 최초의 부자(父子) 총리가 탄생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관료 경력
1905년 1월 14일 군마현 군마군 가나고정(현 다카사키시)에서 태어났다.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29년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수석 합격하여 대장성에 들어갔다.[1][14][3][18][19][20]이듬해 런던 주재 일본대사관에 재무관 보좌역으로 파견되었다가 3년 반 만에 귀국했다.[2] 태평양 전쟁 중에는 왕징웨이 정권의 재정 고문을 역임하기도 했다.[2]
일본 항복 당시 대장성 장관 비서관이었으며, 1946년 은행국장, 1947년 주계국장으로 승진했다.[1][3]
1948년 쇼와덴코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이는 여러 관료, 사업가, 정치인이 연루된 대규모 부정부패 사건으로 아시다 히토시 내각이 몰락하는 원인이 되었다. 후쿠다는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1950년 대장성을 퇴직했다.[1][3][4]
2. 2. 정치 경력
1952년 총선에서 군마현 제3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이후 자유민주당(자민당)에 합류했다.[2] 1958년 당 정무조사회장에 취임했고, 1959년에는 당 간사장과 농림상을 역임했다.[22]이케다 하야토 내각에서는 "고도 경제 성장 정책은 2, 3년 안에 파탄에 이를 것"이라며 이케다의 정책을 비판했고, '당풍쇄신연맹'을 결성하여 반주류 입장에 섰다.[22] 이 때문에 이케다 내각에서 중용되지 못하고 긴 냉대 시기를 겪었다.[23][24]
사토 에이사쿠 정권에서는 대장대신, 당 간사장, 외무대신 등 요직을 역임하며, 다나카 가쿠에이와 '포스트 사토' 자리를 두고 치열한 경쟁(각복전쟁)을 벌였다.[25] 일본 열도 개조론을 내세운 다나카와 달리, 후쿠다는 균형 재정 지향의 안정 경제 성장론을 주장했다.[25] 1972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다나카에게 패배했지만, 이후 다나카 내각과 미키 다케오 내각에서 경제 정책을 담당했다.
1976년 미키 다케오의 후임으로 제67대 일본의 총리가 되었다.
2. 3. 내각총리대신
1976년 미키 다케오의 후임으로 제67대 일본의 총리가 되었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일본의 경제 상황은 악화되었으나, 외교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었다. 일본의 군사대국화 포기를 약속하고 경제 원조 등을 약속하기도 하였다. 1978년 총리직을 사임했으며, 재임 기간 중 중국과 중일평화우호조약을 체결하는 성과를 남겼다.[27] 베트남 전쟁 이후 그의 동남아시아에 대한 전향적 입장은 '후쿠다 독트린'으로 불리며, 반공 기조를 유지하였으나 친미에 속하지는 않았다. 그의 아시아 중시 외교를 '전방위 외교'라고 부른다.[27]
1976년 선거에서 자민당의 부진한 성적 이후 미키 다케오가 총리직에서 물러나자 후쿠다 다케오가 그의 뒤를 이어 총리로 선출되었다. 1978년까지 총리직을 유지했지만, 의회 다수당을 유지하기 위해 소수 정당의 지지에 의존해야 했다. 일본항공 472편 납치범들의 요구에 굴복하면서 "인명은 지구보다 귀하다"라고 말하여 국제적인 비판을 받았다.[27]
일중 관계에서 후쿠다 다케오는 자민당 내 보수적인 친대만 인사 중 한 명이었으나, 총리가 된 시점에는 자민당 내부와 일본 재계에서 장기적으로 무역 접근 확대를 위해 중국과의 평화 조약 협상을 더욱 추진해야 한다는 요구가 증가함에 따라 이를 수용해야 했다. 주요 분쟁은 중국이 조약에 일본이 소련을 겨냥한 것으로 간주한 "반패권 조항"을 포함시키려고 고집했던 점이며, 후쿠다 다케오는 일본이 중소 분열에 개입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조약 논의가 오랫동안 교착 상태에 있던 후, 중국 측이 결국 반패권 문제에 대해 유연성을 보이자 협상 추진을 승인했다. 결국 추가 논의 끝에 수정된 조약에 최종적으로 동의했고, 그것은 나중에 일중 평화우호조약이 되었다.
1977년 8월 18일, 마닐라에서 열린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후쿠다 독트린"으로 불린 연설을 했다. 이 연설에서 일본의 평화주의 약속을 재확인하고, 일본과 아세안 국가 간의 상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신뢰를 높이며, 일본이 아세안 국가들과 "동등한 파트너"가 되고자 하는 의지를 보였다.
자민당의 파벌 시스템을 종식시키기 위해 당내 당내 경선을 도입했다. 1978년 말 첫 경선에서 오히라 마사요시에게 패배하여 총리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1976년, 총재 선거에서 다른 후보가 없었기 때문에 양원의원총회에서의 논의를 통해 총재로 선출되었고, 수반 지명되어 후쿠다 내각을 수립했다. 71세라는 고령을 걱정하는 주위의 목소리에 대해, 자신의 출생 연도에 빗대어 “'''메이지 38세'''”라고 말하며 젊음을 어필했다. 또한, 외교 문제 해결을 비롯한 실무형 내각이었던 것으로부터, 내각을 “일하자 내각”이라고 표현했다.
오히라 마사요시와 “2년 후에 정권을 넘긴다”는 다이후쿠 밀약에 의해 총리 자리를 얻었다는 것과, 자민당 내에서도 우익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좌익층에 지지를 확대하기 어려운 등의 이유로, 취임 초의 지지율은 낮았다.
1977년 7월, 제11회 참의원의원 통상선거에서 자민당은 개선 의석을 상회하는 의석을 확보했다. 같은 해 왕정치를 표창할 필요성으로부터 국민영예상을 창설했다.
같은 해 9월에 발생한 다카 항공기 납치 사건에서는 “'''인명은 지구보다 무겁다'''”라고 하여 범인 측의 인질 해방 조건을 받아들여, 테러리스트의 협박에 굴복했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27] 전방위 외교를 내걸고, 중국에 대한 ODA 개시나 적극적인 동남아시아에 대한 개발 원조를 실시하는 등, 아시아 외교를 중시했다. 그 자세는 아시아개발은행의 설립이나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발표된 후쿠다 독트린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국가 프로젝트이면서도, 1971년의 대집행 이후, 사리즈카 투쟁 등에 의해 거의 진전이 없었던 나리타 공항 문제에 대해, “모든 곤란을 극복하고 개항을 실현하라”고 지시.[28] 1978년 5월 20일의 신도쿄 국제공항(현·나리타 국제공항) 개항에 이르렀다.
10월 23일, 덩샤오핑 부총리를 일본에 맞이하여, 일중 평화 우호 조약에 조인했다.
파벌 해소를 목표로 당원·당우 투표에 의한 자민당 총재 예비 선거를 도입했지만, 다이후쿠 밀약의 총리 총재 2년 임기 후의 오히라에 대한 정권 젠죠를 거부하고, “세계가 후쿠다를 요구하고 있다”고 하여 1978년 11월의 자민주당 총재 선거에 재선을 걸고 출마했다. 밀약을 파기당한 형태가 된 오히라와의 일기토가 되었다. 후쿠다는 오히라에게 패배했다. “예비 선거에서 진 자는 국회의원에 의한 본선거 출마를 사퇴해야 한다”고 예전부터 발언하고 있었기 때문에, 본선거 출마 단념으로 몰리게 된다. 기자 회견에서 “민의는 천명이다라고 하지만, '''천명에도 이상한 목소리도 가끔은 있구나, 라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뭐 좋습니다! 오늘은 패군의 장, 병을 말하지 않습니다. 헤이, 헤이, 헤이”라는 말을 남기고 총리 총재를 물러난다.
2. 4. 총리 퇴임 이후
1978년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1979년부터 1989년까지 중의원 의원을 지냈으며, 민간 외교 차원에서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34] 한일의원연맹 회장을 역임하는 등 한국과의 관계 증진에 힘썼다.[34] 1990년 정계에서 은퇴했고, 5년 후인 1995년 만성 폐기종으로 세상을 떠났다.[17] 2007년 9월 25일에는 장남인 후쿠다 야스오가 제91대 총리로 취임하여 일본 최초로 부자(父子) 총리가 탄생하였다.오히라 마사요시 내각 하에서는 비주류파의 리더로 활동했다. 1979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의석수를 줄이자 오히라 총리의 책임을 물어 사임을 요구했고, 총리 지명 선거에서는 비주류파의 표를 얻었다(40일 항쟁).[31] 이후에도 당내 갈등은 계속되었고, 비주류파는 오히라 총리가 물러나지 않으면 야당이 제출한 내각 불신임 결의안 표결에 불참하겠다고 압박했다. 그러나 오히라 총리가 거의 양보하지 않아 비주류파도 퇴로가 막혔고, 결국 불신임 결의안은 가결되었다(해프닝 해산).[31] 이 표결 직전 후쿠다 다케오는 사태 수습을 위해 후쿠다 파 소속 의원들에게 표결에 출석하여 반대표를 던지라고 지시했지만, 오히려 파벌 내 강경파에 밀려 본인도 불참하게 되었다.[31] 불신임 결의안 가결로 후쿠다 다케오는 당내외에서 비판을 받았다.[31]
스즈키 젠코 내각 (개조)의 후임 총재 선출을 위한 당내 조정 과정에서, 후쿠다 다케오가 총리 대신을 맡지 않고 자민당 총재만 맡는 방안이 거론되었으나 실현되지 못하고 총재 선거가 시작되었다.[31] 이때 후쿠다 파는 후쿠다 다케오 대신 아베 신타로를 총재 후보로 내세웠고, 후쿠다 다케오는 총재 선거에서 한 발 물러섰다.[31]
한편, 후쿠다 다케오는 세계 각국의 대통령·총리 경험자들이 모여 세계 문제 해결을 위한 제언을 하는 '인터랙션 카운슬'(OB 서밋)을 1982년에 설립하는 등, '사회 개혁'을 주창하며 '쇼와 시대의 미토 고몬'을 자처했다.[31] 훗날 총리가 되는 모리 요시로와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31]
1984년 니카이도 스스무 옹립 구상이 무산되면서 후쿠다 다케오의 영향력은 약화되었다.[31] 이때 후쿠다 다케오의 제자였던 모리 요시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등도 세대교체를 주장했기 때문에, 나카소네 야스히로 정권의 후계 구도(포스트 나카소네)에서 아베 신타로를 지원하기 위해 1986년 파벌을 아베 신타로에게 물려주었다.[31] 이로 인해 중선거구제였던 야마구치현 제1구에서 아베 신타로의 경쟁자였던 다나카 다쓰오가 정계 은퇴를 결심했다고 알려져 있다.[31]
리크루트 사건으로 다케시타 노보루 내각이 총사퇴했을 때, '포스트 다케시타'로 후쿠다 다케오의 임시 정권 구상이 떠올랐다.[32] 당시 정계 최고 실력자였던 가네마루 신이 지지했고, 나카소네 파, 미야자와 파 등도 반대하지 않아 84세였던 후쿠다 다케오의 재등판이 실현될 뻔했으나, 아베 신타로의 반대[32]와 원로들의 기용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 등으로 무산되었다.[33] 후쿠다 다케오는 "이런 중대한 시국을 맡기에는 조금 너무 젊지 않은가"라고 말하며 의욕을 보였다고 한다.[33] 아베 신타로가 사망한 후에는 모리 요시로 등이 후쿠다 다케오를 다시 파벌 영수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후쿠다 다케오는 "나는 고령이라 적합하지 않다"며 고사했다.[33]
1990년 제3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계기로 정계에서 은퇴했고, 장남 후쿠다 야스오가 뒤를 이었다.[34] 은퇴할 때까지 14회 연속 당선되었다. 같은 선거구였던 구 군마 3구에서는 '조슈 전쟁'이라 불릴 정도로 나카소네 야스히로와 치열하게 1위 자리를 다퉜지만, 사에구사 부인(후쿠다 다케오의 아내)의 내조 덕분에 거의 매번 후쿠다 다케오가 압승했다.[34]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총리로 재임할 때에도 후쿠다 다케오의 득표수가 더 많았다(통산 전적: 후쿠다 다케오 11승 3패).[34] 1995년 이와나미 쇼텐에서 『회고 90년』을 출간하고 출판 기념회에 건강한 모습을 보였으나, 같은 해 7월 5일 도쿄도 미나토구의 도쿄 여자 의과 대학 부속 아오야마 병원에서 만성 폐기종으로 별세했다. 향년 90세.[17] 장례는 같은 해 9월 6일 내각·자민당 합동장으로 치러졌다.[35] 묘소는 다카사키시 도쿠쇼지에 있다.
1990년 1월 20일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이 사망한 이후부터 후쿠다 다케오가 사망할 때까지 생존한 최고령 총리 경험자였으며, 1993년 12월 16일 다나카 가쿠에이가 사망한 후에는 최연장 총리 경험자였다.[34] 최고참 총리 경험자와 최고령 총리 경험자가 동일했던 기간은 이후 2019년 11월 29일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사망할 때까지 25년 11개월간 이어졌다.[34]
3. 정책 및 정치 이념
후쿠다 다케오는 기시 노부스케의 직계로, 자민당 우파로 평가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균형 재정을 지향하고 안정적인 경제 성장을 추구했다.[37] 국제적으로는 흑자 과잉 문제 해결을 위해 내수 주도형 경제 운영을 통해 수입을 늘리는 등 시장 개방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5년에는 재무대신으로서 불황으로 인한 세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 최초로 2000억엔 규모의 적자 국채를 발행하기도 했다.
외교적으로는 "전방위 평화 외교"를 내세웠다.[38][39] 특히 아시아 국가들과의 연대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후쿠다 독트린"을 발표했다. 1977년 8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발표된 후쿠다 독트린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발생한 동남아시아와 일본 간의 심리적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일본의 평화주의를 재확인하고, 일본과 아세안 국가 간의 상호 신뢰를 높이며, 일본이 아세안 국가들과 "동등한 파트너"가 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는 것을 주요 목표로 했다. 이를 위해 일본은 대출과 개발 지원을 제공할 의향이 있음을 밝혔지만, 아세안이 일본에 배타적인 무역 블록에 가입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일중 관계에 있어서, 후쿠다 다케오는 초기에는 자민당 내 보수적인 친대만 인사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총리가 된 후에는 자민당 내부와 일본 재계에서 중국과의 평화 조약 협상을 추진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면서 이를 수용해야 했다. 그는 소련과의 관계, 중소 관계 등을 고려하여 신중한 입장을 취했지만, 결국 중국과의 협상을 추진하여 일중 평화우호조약 체결에 기여했다.
한국과의 관계에서는 한일대륙붕협정을 비준하여 양국에 인접하는 대륙붕 북부의 경계를 설정하고 대륙붕 남부의 공동 개발을 규정했다.
그는 정치 이념으로 "협조와 연대", "정치는 최고의 도덕"을 강조했다.
4. 논란
일본항공 472편 납치범들의 요구에 굴복하면서 "인명은 지구보다 귀하다(人命は地球より重い)"라고 말하여 국제적인 비판을 받았다.[40]
일중 관계에서, 총리가 된 후쿠다 다케오는 일본 재계의 요구에 따라 중국과의 평화 조약 협상을 추진했다. 그러나 소련과의 관계, 중소 분열 등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일본이 중·소 분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조약 논의가 교착 상태에 빠졌을 때, 중국이 "반패권 조항"에 대해 유연성을 보이자 협상을 진행했다. 하지만 자민당 내 친대만 세력의 압력으로 후쿠다 다케오의 지지율이 하락하기도 했다. 결국 수정된 조약에 동의했고, 이는 일중 평화우호조약으로 이어졌다.
1977년 8월, 마닐라에서 열린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후쿠다 독트린"을 발표했다. 이 독트린을 통해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동남아시아와 일본 간의 심리적 장벽을 극복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평화주의를 재확인하고, 아세안 국가들과 "동등한 파트너"가 될 것을 약속하며, 대출 및 개발 지원을 제공할 의향을 밝혔다.
자민당의 파벌 시스템을 종식시키기 위해 당내 당내 경선을 도입했으나, 1978년 오히라 마사요시에게 패배하여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1978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서 "내각총리대신"이라고 기재하고 "개인적인 참배"라고 밝혔다.[40] 이후 4회 참배하였다.
5. 평가
후쿠다 다케오는 총리대신으로서 재임 기간은 짧았지만, 오랫동안 보수 정계의 거물로 기대를 모았으며 각료와 당 간부로서 능숙하게 일을 처리했다. 1960년대 고도성장기에는 미즈타 미키오와 함께 여러 차례 재무대신을 역임했고, 70년대 오일쇼크 이후 전환기에는 재무대신, 부총리 겸 경제기획청 장관, 총리로서 일관되게 경제 운영의 중심에 있었다. “60년대~70년대의 경제 위기는 모두 후쿠다에 의해 수습되었다”는 지적도 있으며[42], 특히 다나카·미키 내각에서 오일쇼크 이후 관민이 총력을 기울인 총수요 억제 정책을 지휘하여 성공시킨 것은 높이 평가받고 있다.
총리대신 취임 이후, 내정 면에서는 여야가 팽팽하게 맞선 국회 환경에 더해 당을 정적 오히라에게 빼앗기고, 최초로 예산 수정과 감세를 강요받는 등, 균형 재정의 신봉자였던 후쿠다에게는 불만스러운 정권 운영을 강요받게 되었다. 반면 총리로서 외교 분야의 업적은 현저하며[43], 1977년의 후쿠다 독트린은 오늘날까지 일본의 동남아시아 외교의 기축이 되고 있다. 또한 일중평화우호조약의 체결은 그 이후의 일중 경제 협력의 기초를 쌓는 결과가 되었다. 이처럼 1980년대 이후 일본의 외교 노선과 동아시아의 경제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6. 한국과의 관계
총리직 사임 후 1979년부터 1989년까지 중의원을 지냈고, 민간외교 차원에서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하기도 하였으며, 이후 한일의원연맹 회장을 지내는 등 한국과의 관계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한국과 일본 양국에 인접하는 대륙붕 북부의 경계를 설정하고 대륙붕 남부의 공동 개발을 규정한 「한일대륙붕협정」을 비준하였다.[38][39]
7. 어록
"'''고물가(狂乱物価)'''", "'''쇼와 원로쿠(昭和元禄)'''", "'''시계 제로(視界ゼロ)'''", "'''매일 반성(日々是反省)'''", "후쿠다 내각은 '''자, 일하자 내각(さあ働こう内閣)'''이다", "'''청소 대신(掃除大臣)'''" 등 후쿠다 어록(福田語録)을 남겼다.[41]
8. 연보
- 1929년 4월 - 대장성에 입성하여 대신관방문서과에 배속됨.
- 1942년 12월 - 대장성 총무국 문서과장.
- 1944년 2월 - 대장성 총무국 문서과장 겸 대신관방비서과장 겸 대장대신비서관.
- 1945년 5월 - 대장성 대신관방문서과장 겸 대신관방비서과장 겸 대장대신비서관.
- 1945년 9월 - 대장성 대신관방장 겸 대신관방비서과장직무취급 겸 대장대신비서관.
- 1946년 7월 - 대장성 은행국장.
- 1947년 9월 - 대장성 주계국장.
- 1948년 9월 - 쇼와전공사건(昭電疑獄)과 관련하여 체포됨.[36]
- 1950년 11월 - 퇴관.
- 1952년 10월 -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중의원 의원에 당선.
- 1958년 6월 - 자민당 정무조사회장.
- 1958년 11월 - 쇼와전공사건에 대해 도쿄고등법원에서 무죄 판결(확정).
- 1959년 1월 - 자민당 간사장.
- 1959년 6월 - 농림대신에 취임.
- 1960년 12월 - 당 정무조사회장.
- 1965년 6월 - 대장대신에 취임.
- 1966년 12월 - 당 간사장(두 번째).
- 1968년 11월 - 대장대신에 취임.
- 1971년 7월 - 외무대신에 취임.
- 1972년 7월 -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패배.
- 1973년 11월 - 대장대신에 취임.
- 1974년 12월 - 부총리 겸 경제기획청 장관에 취임.
- 1976년 12월 - 제67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
- 1978년 12월 - 내각총리대신 사임.
- 1979년 1월 - 신파벌 세이와 정책연구회(清和政策研究会) 결성, 아카사카 프린스호텔에 사무국 설치.
- 1986년 7월 - 파벌을 아베 신타로에게 넘기고, 후쿠다파 회장 사임.
- 1990년 2월 - 정계 은퇴.
- 1995년 7월 5일 - 만성 폐기종으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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