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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납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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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대중 납치 사건은 1973년 8월, 김대중이 일본에서 납치되어 한국으로 강제 송환된 사건이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에게 패배한 김대중은 이후 유신 체제를 비판하며 망명 생활을 이어갔고, 1973년 일본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되어 살해 위기에 처했으나 극적으로 생환했다. 일본 경찰은 주일 한국 대사관 직원의 연루를 밝혀냈고, 한국 정부는 사건 개입을 인정했으나, 일본 정부는 공식 사과와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 이 사건은 한일 관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한국 정부의 개입과 은폐 시도로 인해 논란이 지속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은 사건 개입을 공식 인정했으나, 일본은 공식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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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납치 사건
지도
사건 개요
사건명김대중 납치 사건
발생 일시1973년 8월 8일
발생 장소일본 도쿄
납치 주체대한민국 중앙정보부
피해자김대중
결과김대중 대한민국으로 강제 이송
사건 은폐 시도
국제적 비판 및 논란 발생
관련 인물
주요 인물김대중
납치 실행대한민국 중앙정보부 요원
납치 공모 의혹박정희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
사건의 배경
김대중대한민국의 정치인 및 민주화 운동가
박정희 정권의 주요 반대자
중앙정보부박정희 정권의 정보기관
반체제 인사 감시 및 탄압
납치 과정
장소일본 도쿄 호텔 그랜드 팔레스
대한민국으로 강제 이송
납치 방법호텔에서 납치
배를 이용한 이송
대한민국으로 강제 이송
대한민국 도착 후자택 감금
감시 및 언론 통제
사건의 영향
국내박정희 정권에 대한 국민적 비판 증가
민주화 운동 활성화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저항 의식 확산
국제국제사회의 대한민국에 대한 비판
일본과의 외교 관계 악화
인권 문제에 대한 국제적 관심 증가
사건 이후
진상 규명사건 진상 규명 요구 지속
관련자 처벌 요구
국가 차원의 사과 및 보상 요구
김대중의 이후 행보대한민국 대통령 역임
노벨 평화상 수상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
추가 정보
사건의 또 다른 이름김대중 사건, 김대중 납치사건
관련 사건1980년 신군부의 거짓 사건인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2. 사건의 배경

1971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신민당 후보로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와 경쟁했으나, 90만여 표의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

대선 직후, 김대중은 대형 트럭과 충돌하는 교통사고를 당해 허리와 고관절에 부상을 입었다. 이는 KCIA가 교통사고로 위장한 암살 기도였음이 পরবর্তীতে 밝혀졌다.[8]

박정희가 유신 체제를 선포하자, 해외에 있던 김대중은 귀국하면 살해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귀국을 포기했다. 그는 일본과 미국에서 한국의 민주주의와 자유선거를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한편, 박정희의 측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평양을 방문, 김영주 조직지도부장과 회담했고, 박성철 제2부수상이 서울을 방문하여 이후락과 회담했다. 7월 4일 남북 공동성명을 발표, 조국통일 원칙에 합의했다.

이후, 이후락박정희의 정적 김대중을 납치하는 계획을 세웠다.

2. 1. 제7대 대통령 선거

1971년 4월 27일에 치러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였던 김대중민주공화당 후보 박정희에게 94만 표 차이로 석패하였다.[24][25] 김대중은 유세 기간 중 박정희가 영구 집권을 위해 총통제를 실시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정권 교체의 필요성을 역설했다.[21]

박정희는 삼선개헌을 추진하며 장기 집권 시도를 이어갔고, 전국적으로 개헌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16] 김대중은 이러한 박정희에 맞서 대선 전후로 폭발물 사고, 교통사고 등 불미스러운 사건들을 겪었다.

2. 1. 1. 폭발물 사고

1971년 1월 27일,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 마당에서 사제 폭발물이 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26] 당시 김대중은 야당 대통령 후보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 중이었다.[27]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제1야당의 대통령 후보 집에서 발생한 사건이라 국회까지 나서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등 정국이 경색될 조짐을 보였다. 경찰은 김대중의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 조행덕(22세)의 진술을 근거로 김대중의 조카 김홍준(당시 15세)을 구속하였다.[28] 김홍준은 장난삼아 한 일이라고 자백하였다. 그러나 이틀 후 벌어진 구속적부심 심사에서 김홍준은 범행 사실 자체를 부인하고 경찰의 위협과 가혹행위 때문에 허위 자백을 했다고 진술을 번복하였다. 법원은 구속 소명자료가 불충분하다며 석방을 결정했다.[29]

2. 1. 2. 교통사고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지원 유세 중이던 5월 24일, 김대중이 탄 차량이 14톤 대형 트럭과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다.[30][31] 김대중은 목포에서 비행기로 수원에 갈 예정이었으나, 비행기가 결항되어 차량으로 광주로 이동하던 중 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김대중은 양팔 정맥과 골반 관절 부위에 부상을 입어 장애인이 되었으며,[32] 사망할 때까지 이 사고를 당시 정권의 암살 시도였다고 주장했다.

2. 2. 유신 체제와 김대중의 망명

1971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나선 김대중은 현직 대통령이었던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에게 90여만 표의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1] 대선 직후 김대중은 교통사고를 당해 고관절을 다쳤는데, 이는 KCIA가 개입한 암살 시도였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8]

1972년 10월 11일, 김대중은 고관절 치료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33][34] 그곳에서 10월 유신 선포 소식을 접한 김대중은 귀국을 포기하고 망명을 결심했다. 계엄령 하에서는 정치 활동이 불가능했기에, 해외에서 박정희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우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35]

이후 김대중은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유신 체제를 비판하고, 1973년 7월 6일 워싱턴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결성하여[36] 초대 의장으로 취임, 해외 교포들을 중심으로 반정부 투쟁을 전개했다.

한편, 박정희 정권은 1972년 5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평양에 밀사로 보내 김일성김영주 조직지도부장을 만나게 했다.[37] 박성철 제2부수상도 서울을 답방하여 이후락, 박정희와 회담을 가졌고, 7월 4일에는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38] 그러나 이러한 남북 대화는 유신 체제 강화를 위한 명분 쌓기였다는 비판을 받았다.

3. 사건 경위

1973년 8월 8일 오전 11시경, 김대중도쿄 그랜드팰리스 호텔에서 민주통일당 대표와 회의를 했다. 회의 후 방을 나서던 중 신원 미상의 남성들에게 납치당했다. 당시 호텔 해당 층 전체가 한국 중앙정보부(KCIA)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마치이 히사유키가 운영하는 야쿠자 조직에 의해 임대되었다는 소문이 있었다.[2] 김대중은 오사카를 거쳐 서울특별시로 옮겨졌다.

한국으로 향하는 배 위에서 김대중은 손과 발이 묶인 채 바다에 던져질 뻔했으나, 일본 해상보안청이 납치범들의 배를 추격하면서 계획은 무산되었다.[2] 납치범들이 김대중을 갑판으로 끌어올리려는 순간 조명탄이 발사되었다.[2] 결국 김대중은 납치 5일 후 서울 자택에서 살아있는 채 발견되었다.[2]

일부 보도에 따르면, 필립 하비브 미국 대사가 KCIA의 연루 사실을 알고 한국 정부에 개입하면서 김대중이 구출될 수 있었다.[3]

3. 1. 납치 및 감금

1973년 8월 8일 김대중은 도쿄 그랜드팰리스 호텔 2211호실에서 민주통일당 대표 양일동과 회담을 가졌다.[44] 오후 1시경 회담이 끝나고 방을 나오던 김대중은 괴한들에게 습격당해 비어 있던 2210호실에 감금되었고, 마취약을 투여받아 의식을 잃었다.[45] 이후 김대중은 오사카를 거쳐 한국으로 납치되었다.[45]

3. 2. 수장 시도와 극적 생환

용금호[46]에 있던 자들은 김대중을 배 밑쪽 선실로 끌고 가 손발을 꼼짝 못하게 묶고 눈에는 테이프를 여러 겹 붙인 다음 붕대를 감았다.[47] 오른손목과 왼발목에는 각각 수십 킬로그램이 되는 돌을 달았다. 등에 판자를 대고 몸과 함께 묶으며 "던질 때 풀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 등의 말을 주고 받았다. 김대중은 당시 "발은 밧줄로 양쪽을 묶어서 당기려고 해도 끄떡도 않았다. 바다에 던질 계획을 하는데 솜이불을 붙여야 안 떠오른다고 했다.[47] 그리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상어가 먹기 좋다는 말도 하더라"라고 증언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꼬꼬무)에 따르면, 김대중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토마스 모어 세례명)로서 예수께 "국민들이 불쌍하니 살려달라"면서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김대중이 바다에 수장될 위기에 처했을 때, 동해 일본 측 해안에서 해상자위대 함정이 추격해 왔다. 일본 해상보안청이 납치범들의 배를 추격하기 시작하면서 납치범들은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2] 납치범들이 김대중을 갑판으로 끌어올리려는 순간, 조명탄을 발사했다. 사건이 발각될 것을 우려한 괴한들은 계획을 변경하여 김대중을 8월 13일 밤 10시경 서울 동교동 자택 근처 주유소 뒷골목에 풀어주었다.[48] 김대중은 자서전에서 "나는 집 문 앞에 이르러 이제 막 퇴근해서 돌아오는 가장들처럼 초인종을 눌렀다"고 하였다.[49]

일부 보도에 따르면, 미국 대사 필립 해비브가 KCIA의 연루 사실을 알아채고 한국 정부에 개입하면서 김대중은 구출될 수 있었다.[3]

4. 사건 이후

1973년 8월 23일, 일본 참의원 법무위원회에서 한국 정보기관의 개입 혐의와 일본 주권 침해 여부 등이 논의되었다. 다나카 이사지 법무성 장관은 "비밀 경찰 소행이 틀림없다"라고 발언했고, 오히라 마사요시 외무성 장관은 사건을 단정할 수 없다고 답했다.[51] 이 사건으로 요미우리 신문 서울지국이 폐국되기도 했다.

1973년 8월 25일, 박정희는 한국 대사관 직원의 사건 개입 의혹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으나, 다나카 법무성 장관은 "매우 괘씸한 변명"이라며 비판했다.

중앙정보부는 김대중을 납치하는 과정에서 현장에 유류품과 지문을 남기는 등 여러 실수를 저질렀다.[52] 납치 실행 후, 윤진원은 김대중을 살해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렸으나, 결국 이후락, 박정희 모두 직접적인 살인을 원치 않아 김대중은 살아남았다.[53]

1973년 9월 21일, 일본 국회에서는 내각 불신임안이 제출되었으나 부결되었다. 이 불신임안에는 김대중 납치 사건이 포함되었다.

2006년 2월, 대한민국 외교통상부는 비공개 외교문서를 공개하여 당시 납치 사건과 관련된 내용을 밝혔다.

4. 1. 일본 정부의 항의와 진상 규명 요구

일본 경찰은 납치 현장에서 주일 한국 대사관 1등 서기관 김동운의 지문을 발견했다.[51] 이는 한국 정부가 일본의 주권을 침해했다는 비판으로 이어졌다. 1973년 8월 23일 참의원 법무위원회에서 한국 정보기관 개입 혐의, 주권 침해 여부 등이 논의되었다. 다나카 이사지 법무성 장관은 "비밀 경찰 소행이 틀림없다"라고 발언했으나, 오히라 마사요시 외무성 장관은 박정희 해명 이후 태도를 결정하겠다고 답했다.

1973년 9월 5일 경시청은 김동운을 용의자로 지목했고, 일본 야당은 강력 대응을 요구했지만, 일본 정부는 진상 규명을 우선시하며 한국과 관계 변화에는 소극적이었다.

1973년 9월 17일 한국 정부는 "용금호에서 납치 용의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라고 일본에 회답했다. 1973년 11월 1일 박정희는 김동운을 면직시키고,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에게 유감을 표명했다. 1974년 8월 6일 일본 수사당국은 김동운을 범인 중 한 명으로 지목했으나, 박정희는 1974년 8월 14일 증거 부족을 이유로 일본에 통보했다.[54][55]

1974년 10월 25일 일본은 박정희 수사 결과에 불만을 표하며 상세 설명을 요구했고, 박정희는 1975년 7월 22일 김동운 불기소 처분 및 공무원 지위 박탈을 통보했다.

일본 정부는 1975년 7월 23일 미야자와 기이치 외무성 장관 방한을 통해 양국 관계 개선을 모색하며 김대중 납치 사건을 종결지으려 했다.

4. 2. 한국 정부의 개입 인정과 논란

1973년 11월 1일, 박정희는 납치 사건에 주일 한국 대사관 직원이 관여했음을 사실상 인정하고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에게 유감을 표명했으며, 김동운 일등서기관을 면직시켰다. 다음날 김종필 총리가 일본을 방문해 다나카 총리와 회담을 가졌으나, 한일 관계는 악화되었다.[54][55] 1974년 문세광 사건으로 육영수가 사망하면서 한일 관계는 더욱 경색되었다.

1974년 10월 25일, 일본은 박정희 정부의 수사 결과에 대해 추가 설명을 요구했다. 1975년 7월 22일, 박정희는 김동운 일등서기관의 직위 해제 이후 수사를 진행했지만 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찾지 못해 불기소 처분했다는 요지를 통보했다.

1975년 7월 23일,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외무성 장관이 한국을 방문하여 양국 간 정기 회담 개최에 합의하고, 김대중 납치 사건은 종결되었다고 발언했다. 그러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미국 의회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은 한국 중앙정보부의 범행'이라고 증언하면서 사건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1987년에는 납치사건을 주도한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인터뷰를 안기부가 막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57]

1998년 공개된 중앙정보부의 'KT공작 계획문서'에 따르면, 중앙정보부의 원래 계획은 김대중을 일본에서 납치해 동교동 자택까지 강제로 끌고 오는 것이었다.[58]

2007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중앙정보부(KCIA)가 납치에 조직적으로 개입했음을 공식 인정했다. 그러나 암살 계획 여부에 대해서는 관련자들의 진술이 엇갈려, 암살이 공작 목표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1973년 5월 5일 김대중에게 보내진 익명의 편지에는 암살 음모를 경고하는 내용이 담겨 있어, 실제로 암살 계획이 존재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다.[59][60]

4. 3. 한일 관계에 미친 영향

이 사건으로 인해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급격하게 냉각되었다.[51] 일본 경찰은 납치 현장에서 주일 한국 대사관의 김동운 1등 서기관의 지문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일본 정부는 자국의 주권이 침해되었다고 주장했다. 1973년 8월 23일 참의원 법무위원회에서 다나카 이사지 법무성 장관은 "이 나라 비밀 경찰의 소행이 틀림없다"라고 발언했다.[51] 오히라 마사요시 외무성 장관은 사건에 대해 단정할 수 없다고 답했다.

1973년 8월 25일, 박정희는 주일 한국 대사관 참사관을 통해 일본 국회와 언론에 유감을 표명했다. 다나카 법무성 장관은 "매우 괘씸한 변명"이라며 박정희를 비판했다.[51]

1973년 9월 5일, 경시청은 김동운을 용의자로 지목했다. 일본 야당은 한국 정부에 강력히 대응할 것을 요청했으나, 일본 정부는 진상 규명이 우선이라고 밝혔다. 1973년 9월 21일 일본 국회에서 내각 불신임안이 제출되었으나 부결되었다.

1973년 11월 1일, 박정희는 김동운을 면직시키고,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에게 유감을 표명했다. 다음날 김종필 대한민국 총리가 일본을 방문해 다나카 총리와 회담을 가졌다.[54][55] 1974년 8월 6일 일본 수사당국은 김동운을 범인 중 한 명으로 지목했다.

1974년 8월 15일, 문세광의 박정희 대통령 암살 시도로 육영수 여사가 사망했다. 9월 19일 일본 정부 특사가 한국을 방문해 박정희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다.[56]

1974년 10월 25일 일본 당국은 박정희의 수사 결과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1975년 7월 22일 박정희는 김동운의 직위 해제 이후 수사를 중단했으며,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없어 불기소 처분했다고 통보했다.

1975년 7월 23일, 미야자와 기이치 외무성 장관이 한국을 방문하여 양국 정기 회담 개최에 합의하고, 김대중 납치 사건의 결말을 선언했다.

1977년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미국 의회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은 한국 중앙정보부의 범행'이라고 증언하면서 사건이 다시 불거졌다. 1987년 이후락의 인터뷰가 한일간 외교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로 안기부가 막는 사건이 발생했다.[57]

1998년 공개된 중앙정보부의 KT공작 계획문서에 따르면, 김대중을 일본에서 납치해 동교동 자택까지 강제로 끌고 오는 것이 목표였다.[58] 그러나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살해 계획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2006년 대한민국 외교통상부는 비공개 외교문서를 공개하여 당시 납치 사건과 관련된 내용을 밝혔다. 김대중은 이 사건을 불문에 붙이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2006년 2월 5일 공개된 기밀 문서에 따르면 양국 정부가 정치적 타결로 사건을 무마하려 했다.

2006년 7월 26일 한국 정부는 한국 중앙정보부(KCIA)의 조직적 범행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2007년 10월 24일 국가정보원 진상조사위원회는 당시 KCIA의 조직적인 범행이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10]

일본국 정부는 일본의 주권 침해에 대한 공식 사과와 일본 수사 당국의 관계자 조사를 요구했지만, 2021년 현재까지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는 없다.

5. 사건의 역사적 의미와 평가

김대중 납치 사건은 박정희 정권의 폭력성과 반민주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이 사건은 국제적으로 인권 탄압 문제를 제기하고, 한국 민주화 운동에 대한 지지를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10]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진보 진영에서는 이 사건을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맞선 민주화 투쟁의 중요한 역사로 기억하고 있다.

2006년 7월 26일, 한국 정부는 한국 중앙정보부(KCIA)의 조직적 범행이었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국가 기관의 개입을 정부 차원에서 처음으로 인정했다.[10] 2007년 10월 24일, 국가정보원 진상조사위원회는 당시 KCIA의 조직적인 범행이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10] 유명걸 주일대사는 일본에 사과했다.[11]

하지만 일본국 정부는 일본의 주권 침해에 대한 공식 사과와 일본 수사 당국의 관계자 조사를 요구했지만, 2021년 현재까지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는 없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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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뉴스 Saving Kim Dae-jung: A tale of two dissident diplomats http://www.boston.co[...] 2009-08-25
[4] 뉴스 S Korean spies admit 1973 snatch http://news.bbc.co.u[...] 2007-10-24
[5] 뉴스 South Korea's Spy Agency Admits Kidnapping Kim Dae Jung in 1973 http://www.bloomberg[...] 2007-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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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서적 김대중 자서전 1 삼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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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뉴스 金大中후보宅 爆發物사건 金弘準군 釋放결정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1971-02-13
[30] 서적 나의 삶 나의 길 산하 2009-08-25
[31] 뉴스 동아일보 1971-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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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서적 나의 삶 나의 길 산하 2009-08-25
[35] 서적 나의 삶 나의 길 산하 2009-08-25
[36] 서적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2 인물과 사상사 2009-06-12
[37] 서적 남산의 부장들 1 동아일보사 1992-12-19
[38] 뉴스 박정희 정부, 유신선포 전 북에 통보 http://www.hani.co.k[...] 한겨레 2009-09-24
[39] 서적 김대중 납치사건 이것이 진상이다 금산기획 1998-09-23
[40] 서적 나의 삶 나의 길 산하 2009-08-25
[41] 서적 김대중 납치사건 이것이 진상이다 금산기획 1998-09-23
[42] 서적 나의 삶 나의 길 산하 2009-08-25
[43] 서적 김대중 납치사건 이것이 진상이다 금산기획 1998-09-23
[44] 서적 한국 외교, 어제와 오늘 다락원 2002-07-13
[45] 서적 나의 삶 나의 길 산하 2009-08-25
[46] 서적 김대중 납치사건 이것이 진상이다 금산기획 1998-09-23
[47] 서적 나의 삶 나의 길 산하 2009-08-25
[48] 서적 나의 삶 나의 길 산하 2009-08-25
[49] 서적 나의 삶 나의 길 산하 2009-08-25
[50] 서적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2 인물과 사상사 2009-06-12
[51] 서적 나의 삶 나의 길 산하 2009-08-25
[52] 서적 유신: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 혼돈 속의 실행 준비
[53] 뉴스 윤진원도 이후락도 박정희도 자기 손엔 피를… 한겨레
[54] 서적 김대중 살리기 울림사 1995-06-19
[55] 서적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2 인물과 사상사 2009-06-12
[56] 서적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2 인물과 사상사 2009-06-12
[57] 뉴스 [동아일보를 통해 본 대한민국 근현대사]<14> 1987년 민주화 물꼬 트다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10-10-11
[58] 웹인용 안기부`KT공작` 문건 언론사 입수 http://www.busan.com[...] 2020-12-03
[59] 웹인용 [단독] 'DJ 납치' 녹취 입수…"암살 음모 있다" 사전 경고 https://n.news.naver[...] 2020-12-03
[60] 웹사이트 https://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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