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젠묘쓰쓰미 전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젠묘쓰쓰미 전투는 1561년, 또는 1556년에 마츠다이라 모토야스 (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미카와 키라 씨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오케하자마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씨로부터 독립하여 미카와 국을 통일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전투는 토죠성 공방전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며, 마츠다이라 요시카게가 전사하는 등 마츠다이라 가문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전투 이후 마츠다이라 씨는 미카와 통일을 달성했으며, 전투 연도와 전투 성격, 키라 씨 당주에 대한 기록 등에서 이설이 존재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561년 분쟁 - 후지나미나와테 전투
    1561년 9월 13일, 마쓰다이라 모토야스(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씨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히가시조 씨 영토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후지나미나와테 전투에서 혼다 히로타카와 마쓰이 다다쓰구가 이끄는 도쿠가와 군이 기라 가문의 가로 도미나가 타다모토를 격파하고 승리하여 히가시조 성을 함락시켰다.
  • 도미나가씨 - 후지나미나와테 전투
    1561년 9월 13일, 마쓰다이라 모토야스(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씨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히가시조 씨 영토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후지나미나와테 전투에서 혼다 히로타카와 마쓰이 다다쓰구가 이끄는 도쿠가와 군이 기라 가문의 가로 도미나가 타다모토를 격파하고 승리하여 히가시조 성을 함락시켰다.
  • 1561년 일본 - 가와나카지마 전투
    가와나카지마 전투는 1553년부터 1564년까지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이 시나노 국 가와나카지마에서 시나노 지방의 지배권을 두고 벌인 다섯 차례의 전투로, 복잡한 정치적, 군사적 배경 속에서 전개되었으며 현대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 1561년 일본 - 후지나미나와테 전투
    1561년 9월 13일, 마쓰다이라 모토야스(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씨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히가시조 씨 영토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후지나미나와테 전투에서 혼다 히로타카와 마쓰이 다다쓰구가 이끄는 도쿠가와 군이 기라 가문의 가로 도미나가 타다모토를 격파하고 승리하여 히가시조 성을 함락시켰다.
젠묘쓰쓰미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정보
전투 이름젠묘쓰쓰미 전투
교전 대상 2기라 씨
지휘관 2기라 요시아키
교전 대상 1마쓰다이라군
지휘관 1마쓰다이라 요시카게
결과기라군의 승리
장소미카와국
날짜에이로쿠 4년 (1561년) 4월 15일
분쟁모토야스의 미카와 통일 공방전
사상자 1마쓰다이라 요시카게의 전사
전역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전투

2. 배경

스루가국센고쿠 다이묘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사망한 후, 마츠다이라 모토야스(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마츠다이라씨 가문을 이끌고 독립했다. 그는 미카와 통일을 추진했으나, 미카와의 명문가인 키라씨가 이에 반대하며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다.[1]

키라 요시아키는 자신의 거점인 니시오성을 가신에게 맡기고 토죠성으로 이동했다. 후코즈 마츠다이라씨의 2대 당주 마츠다이라 요시카게는 후코즈성을 거점으로 삼고 있었는데, 토죠성은 후코즈성의 정면에 위치하여 서로 대치하는 형세였다. 마츠다이라 요시카게는 나카지마 성(현재의 아이치현 오카자키시 나카지마정 고야시키)으로 이동하여 토죠 성을 견제했다. 에이로쿠 4년 (1561년) 2월, 이에야스가 직접 토죠 성을 공격했으나, 요시아키가 효과적으로 방어하여 함락에 실패했다.[1]

3. 토죠성 공방전

스루가국센고쿠 다이묘 이마가와 요시모토 사후 독립한 마쓰다이라씨의 당주 마쓰다이라 모토야스는 미카와 통일 사업에 적대적인 미카와의 명가 키라씨와 대립하였다.

키라 요시아키는 자신의 거성 니시오성을 집안 사람에게 맡기고 도조 성에 들어갔다. 후코즈 마쓰다이라씨 2대 마쓰다이라 요시카게는 후코즈성을 나와 나카지마 성 (현 아이치현 오카자키시 나카지마정 고야시키)에 들어가 도조 성을 견제하였다. 에이로쿠 4년(1561년) 2월, 이에야스가 직접 도조 성을 공격했지만, 요시아키가 잘 싸워 함락되지 않았다.

4. 마츠다이라 요시카게의 전사

에이로쿠 4년 (1561년) 4월 15일, 키라 요시아키는 계략을 세워 토미나가 타다모토에게 수백 기를 주어 사카이 타다나오가 지키는 우에노성 (현 아이치현 도요타시)을 공격하게 했다. 이에야스의 지시를 받은 요시카게는 이에타다와 적남 코레타다를 출동시켜 후코즈성(혹은 미조노성)으로 돌아갔다. 그 틈을 타서 키라 요시아키는 나카지마성을 공격했다. 요시카게는 부재중인 일족ㆍ가신 불과 50여 기를 이끌고 나카지마로 향했다. 마구잡이로 적을 공격한 후 패주하는 키라군을 추격했다. 그러나, 키라 측의 타다모토는 군을 돌려 키라군을 추격하는 요시카게를 더욱 추격하여 요시카게의 퇴로를 막았다. 키라령에서 요시카게 등은 복병에게 길이 막히고, 키라 세력에 둘러싸였다. 용전하여 적진을 뚫고 나카지마로 돌아가려 했으나, 요시카게를 비롯하여 일족 21명, 가신 등 34명 모두 공격당해 생환한 자는 없었다고 한다.

이 장소는 후에 요로이가하마 고전장(요로가부치 고전장)이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요시카게가 사망한 곳은 젠묘 쓰쓰미 근처 (시모나가라)이다. 몸통만 묻힌 무덤(혹은 도즈카)이 있다.

5. 참가 무장

마쓰다이라 군키라 군


6. 전투 이후

이 전투로 모토야스는 이타쿠라 요시시게(이타쿠라 가쓰시게의 아버지) 등 많은 일족과 가신을 잃었지만, 후에 후지나미나와테 전투에서 기라 씨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고, 우도노 씨 등 이마가와 측 세력 및 잇코잇키와의 전투도 이겨내고 미카와 통일에 성공했다.[1]

마쓰다이라 요시카게의 뒤는 마쓰다이라 고레타다가 이었다. 고레타다는 나가시노 전투에서 활약했지만 전사했다.[1]

7. 이설 (고지 2년 설)

이 전투는 통설로는 에이로쿠 4년 (1561년) 4월 15일에 일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마쓰다이라기』에서는 고지 2년 (1556년)에 일어난 일로, 마쓰다이라 요시카게의 손자인 마쓰다이라 이에타다가 쓴 『이에타다 일기』 덴쇼 6년 (1578년) 3월 4일조에 요시카게의 23주기 추선공양을 한 기사(「할아버지 大炊助 23년의 마음가짐」)가 있다. 고지 2년설을 취했을 경우, 『마쓰다이라기』에 같은 해 4월 경, 기라 요시아키가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배반해 오다 노부나가와 맺었다고 하기 때문에, 싸움의 성격도 "마쓰다이라 대 이마가와(기라)"에서 "이마가와(마쓰다이라) 대 오다(기라)"라는 도식으로 바뀐다.

또한, 『마쓰다이라기』에 있는 고지 연간 전투 때, 키라 씨의 당주는 기라 요시아키가 아니라 형 기라 요시야스라는 설도 있다.[1]

참조

[1] 논문 天文・弘治年間の三河吉良氏
[1] 서적 今川義元 戎光祥出版 2019-0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