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나카지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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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와나카지마 전투는 1553년부터 1564년까지 10여 년에 걸쳐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전투를 통칭한다. 시나노 국 가와나카지마를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제4차 전투(1561년)에서 대규모 교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는 다케다 신겐의 시나노 지배를 위한 전략과 우에스기 겐신의 에치고 방어, 그리고 간토 지방 진출을 위한 정치적, 군사적 필요성에 의해 발생했다. 전투 결과는 명확하게 승패가 갈리지 않았으며, 양측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전투는 일본 전국 시대의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다양한 평가와 논란, 그리고 여러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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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나카지마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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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정보 | |
기본 정보 | |
전투 명칭 | 가와나카지마 전투 |
로마자 표기 | Kawanakajima no tatakai |
시기 | 1553년 ~ 1564년 |
장소 | 일본 시나노국 가와나카지마 (현재 나가노시) |
관련 시대 | 센고쿠 시대 |
교전 세력 | |
교전 1 | 다케다 가문 |
교전 2 | 우에스기 가문 |
지휘관 | |
다케다 가문 지휘관 | 다케다 신겐 다케다 노부시게 야마모토 간스케 아나야마 노부타다 고사카 마사노부 호시나 마사토시 사나다 유키타카 사나다 노부쓰나 하지카노 다다쓰구 바바 노부하루 모로즈미 도라사다 무로즈미 도라사다 |
우에스기 가문 지휘관 | 우에스기 겐신 우에스기 가게노부 가키자키 가게이에 아마카스 가게모치 이로베 가쓰나가 시바타 나가노리 야스다 나가히데 무라카미 요시키요 나가오 후지카게 다카나시 마사요리 혼조 시게나가 |
전력 및 피해 | |
4차 전투 다케다군 병력 | 20,000명 |
4차 전투 우에스기군 병력 | 13,000명 |
4차 전투 다케다군 사상자 | 4,000명 이상 |
4차 전투 우에스기군 사상자 | 3,000명 이상 |
다케다군 주요 전사자 | 다케다 노부시게 모로즈미 도라사다 야마모토 간스케 하지카노 다다쓰구 제각호정 |
우에스기군 주요 전사자 | 시다 요시토키 오카와 다다히데 시다 사다타카 |
결과 | |
결과 | 양측 모두 승리 주장, 가와나카지마 지역은 다케다 세력권 하에 들어감 |
2. 배경
가와나카지마 전투는 1553년부터 1564년까지 총 5차례에 걸쳐 시나노노쿠니 북부 가와나카지마(현재의 나가노시 남부)를 중심으로 벌어진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 간의 전투이다. 특히 1561년에 벌어진 제4차 전투가 가장 격렬했던 전투로 알려져 있다.[56]
다케다 신겐은 시나노 대부분을 장악하고 북 시나노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고자 했고, 우에스기 겐신은 자신의 영지인 에치고노쿠니를 방어하고 북 시나노를 탈환하고자 했다.[57] 결과적으로 다케다 신겐이 북 시나노 지배를 계속하게 되어 전략적으로 승리했다고 평가되지만, 우에스기 겐신 역시 에치고를 지켜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5차례의 전투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다나카 요시나리(田中義成)는 제2차와 제4차 전투만을 가와나카지마 전투로 보는 '2회 전투설'을 주장하기도 했다.[58]
다케다 노부토라는 1542년 아들 신겐에 의해 추방되었고, 신겐은 스와 요리시게(諏訪頼重일본어)를 공격해 스와 씨를 멸망시키는 등 시나노를 침략하여 영토를 넓혀갔다. 시나노의 여러 세력들은 단결하지 못하고 다케다 군에 의해 차례로 공략당했다.[59]
1547년에는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憲政일본어)를 격파하고 시가성(현재의 사쿠시)을 함락시켰으나, 1548년 우에다하라 전투에서는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義清일본어)에게 패배하기도 했다. 이후 시오지리토게 전투에서 오가사와라 나가토키(小笠原長時일본어)를 격파하며 다시 우위를 점했지만, 1550년에는 도이시성(현재의 도미시) 공격에 실패하기도 했다. (도이시 성 전투) 1551년 사나다 유키타카(真田幸隆일본어)의 모략으로 도이시 성을 함락, 무라카미 요시키요는 본거지인 가쓰라오성에 고립되었다.
결국 다케다 신겐은 북시나노 일부와 남시나노 일부를 제외한 시나노 대부분 지역을 제압하면서 에치고의 나가오 가케토라(우에스기 겐신)와 국경을 맞대고 대치하게 되었다.
1541년 신겐은 신슈(시나노 국) 정복을 시작했고, 1550년에는 하야시 성 등을 함락시키고 오가사와라 나가토키는 무라카미 요시키요에게 도망쳤다. 같은 해 10월, 신겐은 도이시 성 공략을 시작했으나 실패했다. 1551년 무라카미는 성을 버릴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가쓰라오 성 전투가 성공적으로 끝났다.
가와나카지마는 젠코지 평야 남쪽, 사이가와와 지쿠마가와가 합류하는 지점에 펼쳐진 땅이다. 당시에는 경제적 가치가 없는 황무지였으나, 에치고로 이어지는 도로가 통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60] 다케다 신겐에게는 시나노 지배 완수를 위해, 우에스기 겐신에게는 에치고 방어를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지역이었다.
2. 1. 센고쿠 시대 동국(東國)의 정세
- -]
무로마치 시대 동국(東國)은 가마쿠라 쇼군의 분열과 가마쿠라 쇼군, 관동 간료의 대립 등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전국 시대에는 각지에서 전국 다이묘화된 지역 세력이 출현하여, 가이국은 수호 다케다 씨, 에치고국은 수호대 나가오 씨에 의해 국내 통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시나노국은 슈고인 오가사와라씨가 분열되었고, 북시나노의 무라카미씨 등 유력한 국인이 수호에 필적하는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오가사와라 나가무네 시대에 오가사와라 씨가 통일되고 무라카미 씨와 혼인 동맹을 체결하여 지역 세력화가 시작되려던 1542년(덴분 11년) 나가무네가 병사, 적남 나가토키에게 가독이 계승된다.
가이 국은 신코 시대에 국내 통일이 이루어지고, 양 우에스기씨, 스루가 이마가와씨, 시나노 스와씨와 화목이 성립되어 시나노 사쿠군・오카타군 침공을 모색하고 있었다. 1542년(덴분 11년) 다케다 하루노부에게 가독이 계승되고, 하루노부 시대에 스와 씨와 동맹 관계가 끊어진다. 덴분 11년 관동 간료 우에스기 노리마사가 사쿠 군에 출병, 스와 씨는 다케다 씨나 무라카미 씨에게 통고 없이 사쿠 군을 할양했는데, 다케다 씨는 이를 동맹 위반으로 간주했다.[7] 다케다 하루노부(신겐)가 가독을 계승하면 스와 군을 제압하고 시나노 침공을 본격화, 사가미 고호조씨와 관계 개선을 도모하는 외교 방침을 전환한다.
다케다 씨와 우호적 관계였던 야마우치 우에스기 가는 관동에서 호조씨와 적대하고 있었기에, 다케다 씨가 호죠 씨와 동맹하는 것은 양자 간 관계 악화를 초래, 시나노 국중을 보호한 야마우치 우에스기 씨와 대립하게 된다.
가이의 다케다 하루노부는 시나노 국으로 군 출병을 반복, 시나노를 영토화했다. 사쿠에 인접하는 오카타 지방은 무라카미 씨, 스와에 인접하는 주신 지방은 후카시를 거점으로 한 시나노 슈고가 오가사와라 씨가 저항을 계속했다.
다케다 군은 다카토씨, 후지사와씨, 오이씨 등 시나노 국인 씨를 공략, 1547년(덴분 16년) 사쿠에 영향력을 남기고 있던 관동 간료우에스기 노리마사를 오다이하라에서 격파하고, 가사와라 씨의 시가성(사쿠시)을 함락시켜 무라카미 씨와 대치한다.
1548년(덴분 17년) 우에다하라 전투에서 다케다 하루노부가 무라카미 요시키요에게 패배하지만, 시오지리토게 전투에서 다케다 군은 오가사와라 나가토키를 격파한다.
1550년(덴분 19년) 다케다 군은 오가사와라 나가토키를 몰아내고 니나카 모리요시를 신복으로 삼아 주신 지방을 제압, 자국 영토로 한다.
같은 해, 다케다 군은 무라카미 요시키요의 지성 도이시성(토이시 성)을 공격하지만 패퇴한다(도이시 붕괴). 그러나 이듬해 1551년(덴분 20년) 사나다 유키타카의 활약으로 도이시 성을 함락한다. 야시로씨 등 북부 여력 씨의 이반으로 무라카미 요시키요는 본거지 가쓰라오성에 고립, 다케다 씨 세력은 젠코지(가와나카지마) 이북과 남시나노 일부를 제외한 시나노 국 거의 전역에 퍼졌다.
신겐은 에치고 인근국 엣추국 내란에 계속 간섭, 겐신은 여러 차례 엣추 국에 원정, 1576년(덴쇼 4년) 겐신이 엣추 국을 통일한다.(엣추의 전국 시대 참조)
다케다 씨, 무라카미 씨와 협력 관계에 있던 나가노 분지 이북 북시나노 국인 씨(다카나시씨, 이노우에씨 일족 등)는 무라카미 씨와 북시나노 패권을 다투던 시대부터 에치고 수호대가 나가오씨와 인연이 있었다. 시나노에서 무라카미 씨 세력이 쇠퇴하고 다케다 하루노부의 다케다 군 위협이 증대되자 북시나노 국인 씨는 에치고 나가오 씨에게 원조를 요청한다. 나가오 씨와 타카나시 씨는 인척 관계였고, 나가오 다메카게 친어머니는 타카나시 가 출신이었다. 에치고 수호 관동 간료우에스기씨와 싸움에서 나가오 가는 다카나시 마사모리에게 많은 지원을 받았다. 다카나시 마사요리 아내는 케이토루의 고모였다. 에치고 케이토루는 북시나노 싸움에 본격적으로 군사 개입한다.
2. 2. 가와나카지마의 지리적, 전략적 중요성
시나노노쿠니 북동부, 시나노 국경지대 주변의 지쿠마가와 강변에는 젠코지 평야[60]라고 부르는 분지가 펼쳐져 있었다. 이 땅에는 신앙을 모으던 명찰(名刹) 젠코지(善光寺일본어)가 있어 유력한 경제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젠코지 평야의 남쪽, 사이가와와 지쿠마가와가 합류하는 지점이 넓게 펼쳐진 땅을 가와나카지마라고 불렀다. 당시 가와나카지마는 여러 갈래의 작은 하천이 흐르고 있는 소택지(沼沢地)와 황지(荒地)가 펼쳐져 있어 경제적인 가치는 없었다. 그러나 에치고노쿠니로 이어지는 도로가 통하는 전략상의 요지였기에 다케다 하루노부에게는 시나노노쿠니 지배 완수를 위해, 나가오 가케토라(우에스기 겐신)에게는 에치고노쿠니 방어를 위해서 어떻게든 지배해야 할 수밖에 없는 토지였다.[60]시나노 국 북부, 치쿠마가와 강변에는 나가노 분지라고 불리는 분지가 펼쳐져 있었다. 이곳에는 유명한 사찰인 선광사가 있으며, 도가쿠시 신사와 오스가 신사, 이이나 등 수행의 성지도 있어 강력한 경제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나가노 분지 남쪽, 사이가와가 치쿠마가와에 합류하는 지점부터 펼쳐지는 땅을 가와나카지마라고 불렀다. 예로부터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전략적 가치도 높았다. 다케다 씨에게는 나가노 분지 이북의 북시나노에서 에치고 국으로 이어지는 요충지였고, 우에스기 씨에게는 치쿠마가와를 따라 동쪽으로 진군하면 오가와, 사쿠를 거쳐 코즈케, 카이에 이르고, 그대로 남하하면 시나노 국의 국청이 있던 마쓰모토 분지에 이르는 요충지였다.
이 지역에는 구리다씨와 이치카와 씨, 야시로, 오다기리, 시마즈 등의 소국 영주와 지사무라이들이 분립하고 있었다. 이들은 무라카미 요시키요를 맹주로 삼아 다케다 군의 시나노 침공에 대항했으나, 다케다 군의 연이은 공세 앞에 무라카미 씨는 풍전등화에 놓이게 되었다. 그 때문에 북시나노의 고쿠진들은 에치고노쿠니의 나가오 가케토라에게 원조를 요청하게 되었다.
3. 전투 경과
가와나카지마 전투는 1553년부터 1564년까지 12년에 걸쳐 총 5차례 벌어졌다. 특히 1561년에 벌어진 제4차 전투는 가장 큰 격전으로, 에이로쿠 4년(1561년) 9월 9일부터 10일까지 벌어진 전투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56]
- 제1차 전투(1553년)
- 제2차 전투(1555년)
- 제3차 전투(1557년)
- 제4차 전투(1561년)
- 제5차 전투(1564년)
이 전투는 우에스기 군이 북 시나노 탈환과 에치고 방어를, 다케다 군은 이에 대한 저지와 에치고 침공을 목표로 했다. 결과적으로 다케다 신겐이 북 시나노 지배를 계속하여 시나노 지배를 확고히 했기 때문에 전략적 승리를 거두었다고 평가된다. 우에스기 겐신은 에치고를 지켜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5회 전투설이 알려져 있지만, 다나카 요시나리는 제2차와 제4차 전투만을 가와나카지마 전투라고 부르는 '2회 전투설'을 주장하기도 했다.[58]
3. 1. 제1차 전투 (1553년)
덴분 22년(1553년) 4월, 다케다 하루노부(다케다 신겐)는 북시나노에 출병하여 오가사와라 씨의 잔당과 무라카미 씨의 여러 성을 공략했다. 무라카미 요시키요는 가쓰라오 성을 버리고 에치고 국으로 도망쳐 나가오 가게토라(우에스기 겐신)에게 지원을 요청했다.5월, 무라카미 요시키요는 가케토라의 지원을 받아 반격, 하치만 전투(현재의 지쿠마시 하치만 지구, 무스이베쓰 신사 부근)에서 승리하고 가쓰라오 성을 탈환했다. 7월, 다케다 군은 다시 북시나노를 침공, 시오다 성을 공격했다. 8월, 무라카미 요시키요는 다시 에치고로 도망쳤다.
9월 1일, 가케토라는 직접 출진, 후세 전투(현재의 나가노시 시노노이)에서 다케다 군 선봉을 격파하고 아라토 성을 함락, 아오야기 성을 공격했다. 다케다 군은 아라토 성에 야습을 가해 가케토라 군의 퇴로를 차단하려 했으나, 가케토라는 하치만바라까지 군을 물렸다. 가케토라는 시오다 성의 하루노부가 결전을 피하자 9월 20일 에치고로 돌아갔고, 하루노부도 10월 17일 고후로 귀환했다.
이 전투는 나가노 분지 남쪽 지쿠마 강변에서 벌어졌으며, 나가노 분지 대부분을 반(反) 다케다 측 호족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나가오 씨는 무라카미 씨의 옛 영토 회복에는 실패했지만, 북시나노 국인들이 다케다 씨에게 붙는 사태는 막았다. 다케다 씨는 나가노 분지 진출은 저지되었지만, 오가타군과 무라카미 씨의 본거지인 하니와군을 장악하여 양측 모두 성과를 거두었다.
가케토라는 제1차 전투 후 고나라 천황을 알현, '사적치벌의 윤지(私敵治罰の綸旨)'를 얻어 다케다 씨와의 전투에 대한 대의명분을 얻었다. 한편 하루노부는 시나노 국의 사쿠군, 하이 이나군, 기소군을 제압했다.
다케다 씨 연구자 시바쓰지 슌로쿠는 가케토라의 직접 출진에 대한 확실한 사료가 확인되지 않아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8]
3. 2. 제2차 전투 (1555년)
1554년, 다케다 하루노부는 후 호조씨, 이마가와씨와 동맹을 맺어 배후를 든든하게 했다.[61] 그 이전 나가오 가케토라의 가신 기타조 다카히로에게 반란을 사주하였다. 가케토라는 곧 기타조 다카히로를 항복시켰고, 배후에 있던 하루노부와의 대립은 깊어졌다.1555년 시나노쿠니 젠코지의 구리다(栗田鶴寿)가 다케다 측으로 넘어가자, 다케다 씨 세력이 시나노, 에치고 국경 부근까지 육박하게 되었다. 4월 가케토라는 젠코지 탈환을 위해 가와나카지마에 출진했다. 구리다와 다케다 씨 원군 3,000은 구리다 씨의 아사히야마성[62]에 농성했다. 가케토라는 아사히야마 성을 압박하기 위해 그리고 북시나노의 전진 거점으로 가쓰야마성을 쌓았다.
하루노부도 병사를 이끌고 가와나카지마에 출진해 사이가와를 사이에 두고 양군은 대치했다. 7월 19일 나가오 군이 사이가와를 건너 전투를 벌였으나, 결판은 지어지지 않고, 양군은 200여 일 동안 서로 대치만 하게 되었다. 병참선이 길었던 다케다 군은 병량 조달에 어려움이 많았다. 나가오 군에서도 동요가 일어났기에 가케토라는 휘하 무장들에게 충성을 확인시키는 서약서를 요구했다.
윤 10월 15일 스루가국의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중개로 화의가 성립되어 양군은 철수하였다. 화의 조건으로 하루노부는 스다 씨, 이노우에 씨, 시마즈 씨 등 북시나노 고쿠진들의 복귀를 인정하고 아사히야마 성을 파괴하는 것으로 성립되었다.
그 후 하루노부는 기소 군의 기소 요시야스, 기소 요시마사 부자를 항복시켜, 남시나노 평정을 완료하였다.
3. 3. 제3차 전투 (1557년)
고지 3년(1557년) 정월, 가케토라는 다케미즈와케 신사(현재의 나가노현 센바쿠시에 있는 고라카 하치만궁)에 원문을 봉납하여 다케다씨 토벌을 기원하였다. 같은 해 2월 15일, 하루노부는 나가오 측의 전진 기지였던 미즈우치군 가쓰야마성(나가노시)을 함락시키고 오치아이씨를 멸망시켰으며, 다카나시 마사요리의 거성인 이이야마성을 압박했다.[14] 하루노부는 3월 14일에 출진하여 북시나노 국중(国衆)에 대한 포상 등을 실시했다. 가케토라의 대응은 눈이 녹을 때까지 지연되었다.나가오씨도 공세를 강화하여, 4월 18일 가케토라 자신이 출진하여 나가노 분지에 도착했다.[15] 4월부터 6월에 걸쳐 북시나노의 다케다씨의 여러 성을 공격하여 다카이군 야마다성, 후쿠시마성을 함락시키고, 나가누마성과 젠코지를 탈환했다. 요코야마성에 주둔하여, 파괴되었던 아사히야마성을 재건하여 본영으로 삼았다. 5월, 가케토라는 다케다씨 영내 깊숙이 침공하여, 니카사군·오가타군 경계 사카키의 이와하나까지 진군했다.
6월 11일, 가케토라는 다카나시 마사요리를 파견하여 다카이군의 이치카와 토우쟈쿠(신방인가)에 대한 포섭을 시도하였고, 16일 하루노부는 토우쟈쿠에게 원군을 약속했다. 18일에는 호조 쓰나나리의 군대가 우에다에 도착했고, 23일 가케토라는 이이야마성으로 후퇴했다. 하루노부는 이치카와씨 구원에 시오타성의 하라 요자에몬노죠의 아시가루들을 파견했지만 제때 도착하지 못했고, 시오타성의 이이토미 도라마사에게 이후 이치카와씨의 위급 시에는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지 말고 파병하라고 명령했다.[16] 다케다씨는 시쿠미고우의 방위에 성공했다. 나가오씨는 다케다 영내 깊숙이 침공하여 나가노 분지 탈환을 도모하여 7월에는 다카이군 노자와성·니카사리성을 공격했으나 다케다씨는 결전을 피했고, 가케토라는 이이야마성(나가노현 이이야마시)으로 철수했다.
고지 3년(1557년) 7월 5일, 다케다씨는 아즈미군 히라쿠라성(현재의 오다니성)을 공략하고 북시나노·가와나카지마로 침공했다.[17] 8월 하순에는 게산성 근처 미즈우치군 우에노하라에서 다케다씨와 나가오씨가 합전을 벌였다.[18] 가케토라는 아사히야마성을 재건한 것 이외에 큰 전과를 올리지 못했고, 9월에 에치고국으로 철수했고, 하루노부도 10월에 가이국으로 귀국했다.
세 번째 전투는 "우에노하라 전투"로도 알려져 있으며, 1557년에 다케다 신겐이 가쓰라야마 성을 함락시키면서 시작되었다. 가쓰라야마 성은 젠코지 절을 북서쪽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이어서 이이야마 성을 함락하려 시도했으나, 우에스기 겐신이 젠코지에서 군대를 이끌고 나오자 철수했다.[1] 네 번의 전투 중 이 전투는 가와나카지마 평야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벌어졌다.
3. 4. 제4차 전투 (1561년)
에이로쿠 4년(1561년)에 벌어진 제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는 하치만바라 전투(八幡原の戦い)라고도 불린다. 간토 출병을 준비하던 우에스기 마사토라(겐신의 다른 이름)는 배후의 다케다 신겐을 견제하기 위해 가와나카지마에 출진했다. 제1차부터 제5차에 걸쳐 벌어진 가와나카지마 전투 중에서 유일하게 대규모 전투가 벌어져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56]유명한 제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에 대해선, 전투의 구체적인 경과를 서술한 사료는 고요군칸 등의 군기물 이야기(軍記物語)밖에는 없다. 그 때문에 본 내용은 사료적인 신빙성이 떨어지는 고요군칸 등 에도시대의 군기물을 소재로 항간에 알려진 전투의 경과를 서술하게 되었다. 확실한 사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전투의 구체적 실상은 현재까지 의문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중에도 묘법사기나 다케다씨, 우에스기씨의 간죠 등 이 전투가 일어났다는 것을 전해주는 신빙성이 높은 사료는 남아있어 그해 이 땅에서 격전이 벌어졌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현대의 작가들은 이 전투에 대해서 새로운 학설을 내놓고 있으나, 이것도 사료에 의거하지 않은 상상하는 부분이 많다.
덴분 21년(1552년) 호조 우지야스에게 패배한 간토간레이 우에스기 노리마사는 에치고노쿠니로 달아나 가케토라에게 우에스기씨의 가문과 간토간레이직을 양도하였다. 에이로쿠 2년(1559년) 가케토라는 간토간레이직 취임을 허락받기 위해 2차례 상락하였다. 가케토라는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배알하고, 간토간레이직 취임을 정식으로 허락받았다. 에이로쿠 3년(1560년) 대의명분을 얻은 가케토라는 간토로 출진하였다. 간토의 여러 다이묘들 다수가 가케토라측에 참가하여 그 군세는 10만에 달하였다. 호조 우지야스는 결전을 피하고 오다와라성에서 농성했다. 에이로쿠 4년(1561년) 3월 가케토라는 오다와라성을 포위했으나, 수비가 견고하여 공격은 실패했다.

호조 우지야스는 동맹자 다케다 신겐(하루노부가 에이로쿠 2년에 출가하여 개명했다)에게 원조를 요청하였고, 신겐은 이에 응하여 북시나노에 침공했다. 가와나카지마에 가이즈성(海津城)을 쌓고 가케토라의 배후를 위협했다. 이윽고 참가한 간토 여러 무장들 중 일부가 철수하기 시작하자, 가케토라는 오다와라성의 포위를 풀었다. 가케토라는 사가미국 가마쿠라의 쓰루가오카 하치만궁에서 우에스기 가문 상속과 간토간레이직 취임의식을 거행하고, 이름을 '''우에스기 마사토라'''라고 개명한 뒤 에치고 국으로 돌아갔다.
간토제압을 목표로 하던 마사토라에게 배후의 시나노-에치고 국경을 굳히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 때문에 다케다씨의 전진거점인 가이즈성을 공략하여 다케다군을 억누를 필요가 있었다. 같은 해 8월 마사토라는 에치고노쿠니를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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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스기 마사토라는 8월 15일 젠코지에 도착하여 수송대와 병사 5,000명을 젠코지에 남겨두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13,000명을 이끌고 사이가와, 지쿠마가와를 건너 사이죠야마(妻女山)에 진(陣)을 세웠다. 사이죠산은 가와나카지마 남쪽에 위치해 가와나카지마 동쪽에 있던 가이즈성과 마주보는 곳이었다. 다케다 신겐은 가이즈성 성주이자 가신이던 고사카 마사노부로부터 마사토라가 가와나카지마에 출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16일 고후를 출발했다.
신겐은 24일 병력 2만을 이끌고 가와나카지마에 도착해 서쪽의 차우스야마(茶臼山)에 진을 세우고, 우에스기군과 대치했다. 다만 고요군칸에서는 신겐이 차우스야마에 진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없었고, 차우스야마 포진은 이후의 군기물에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서로 퇴로를 봉쇄하는 형태를 보이며, 그대로 노려보기를 계속했다. 다케다군은 이 포진에 의한 전선(戰線)의 경직을 피하기 위해 29일 가와나카지마의 중심에 해당하는 하치만바라(八幡原)를 가로질러 가이즈성에 입성했다.
서로 노려보기를 계속하자, 사기저하를 우려한 다케다씨의 중신들은 우에스기군과의 결전을 주장했다. 마사토라의 능력을 알고 있던 신겐은 그래도 신중했기에 야마모토 간스케와 바바 노부하루에게 우에스기군 전멸작전입안을 명령했다. 야마모토 간스케와 바바 노부하루는 병력을 둘로 나눠, 대규모의 별동대를 편성한다는 계획을 진언했다.
이 별동대에게 사이죠야마의 우에스기군을 공격하게 하여 우에스기군이 이기지못하고 산에서 내려오면 이것을 평야에서 포진한 본대가 매복하고 있다가 별동대와 협공하여 궤멸시키는 작전이었다. 이것은 딱따구리가 부리로 벌레가 숨어있는 나무를 두드려 놀라게 한 뒤 나무에서 나온 벌레를 잡아먹는 방식과 비슷했기에 딱따구리 전법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다케다 신겐의 군사로써 명성이 높았던 야마모토 간스케였으나, 고요군칸이외의 사료에는 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가, 전후에 발견된 이시가와 문서에서 전령장교역할의 무사로서 존재하여 군사로써의 야마모토 간스케의 실재는 현재 어느 정도 부정 받고 있다.
9월 9일 깊은 밤, 고사카 마사노부, 바바 노부하루 등이 이끄는 별동대 12,000명이 사이죠야마을 향하고, 신겐이 이끄는 본대 8,000명은 하치만바라에 포진했다. 그러나 마사토라는 가이즈성에서의 밥 짓는 연기가 예전보다 많다는 것을 보고 이 움직임을 간파했다. 마사토라는 일절 소리를 내는 것을 금지하고 야음을 틈타 비밀리에 사이죠야마을 내려와 지쿠마가와를 건넜다. 이것이 라이 산요의 한시 가와나카지마의 일절 '鞭声粛々夜河を渡る'의 한 장면이었던 것이다. 마사토라는 아마조 마사시게에게 병사 1,000명을 주어 도하지점에 배치해 다케다군 별동대에 대비했다. 자신은 그 사이에 하치만바라에 포진했다.

10일 오전 8시경, 가와나카지마을 감싸 안았던 깊은 안개가 사라질 때쯤 난데없이 우에스기군이 눈앞에 포진해 있는 것을 본 신겐이 이끄는 다케다군 본대는 경악했다. 마사토라는 맹장 가키자키 가케이에를 선봉으로 하여 차현진[63]으로 다케다군을 습격했다. 다케다군은 완전히 허를 찔린 모습이 되었고, 급히 학익진[64]을 만들어 응전하였지만, 고전을 면치 못해 신겐의 동생 다케다 노부시게를 비롯해 야마모토 간스케, 모로즈미 도라사다, 하치노 겐고로 등의 유력무장이 차례로 전사하는 등 상황이 매우 위험했다.
난전 중에 노출된 신겐의 본진에 마사토라가 쳐들어 왔다. 방생월모에 몸을 싣고, 명도 소두장광을 휘두른 마사토라는 의자에 앉아있던 신겐에게 칼을 3번 내리쳤고, 신겐은 군배(軍配)를 갖고 이를 막다가 어깨에 부상을 입었지만 시종들이 달려와서 신겐의 목숨을 구했다. 라이 산요는 이 장면을 '流星光底長蛇を逸す'이라고 읊었다. 가와나카지마 전투를 묘사한 그림이나 동상에서는 겐신(마사토라)이 수행하는 승려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으나, 마사토라가 출가하여 우에스기 겐신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9년 후 겐키 원년(1570년)이었다. 신겐과 겐신의 일대일 대결이란 유명한 장면은 역사소설이나 드라마 등에서 여러 차례 등장하였기에 사실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다만, 맹우관계였던 간바쿠 고노에 사키히사에게 전투후 마사토라가 보낸 서찰에는 마사토라 자신이 칼을 휘둘렀다는 이야기가 있는바 격전이었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마사토라에게 간파당해 이미 텅 빈 사이죠야마에 공격해 들어간 고사카 마사노부, 바바 노부하루가 이끄는 다케다군 별동대는 하치만바라로 급히 달려갔다. 다케다 별동대는 우에스기군의 후군을 맡았던 아마조 부대를 격파하고, 오전 12시경에 하치만바라에 도착했다. 예정보다 꽤 늦어졌지만, 다케다군 본대는 우에스기군의 공격을 겨우 견뎌내고 있었기에 별동대의 도착으로 인해 우에스기군은 협공 받는 형세가 되었다. 판세가 불리해진 것을 알아챈 마사토라는 병사를 이끌고 사이가와를 건너 젠코지로 퇴각하고, 신겐도 오후 4시에 추격을 멈추고 하치만바라로 병사를 물리면서 이로써 전투는 끝났다. 우에스기군은 가와나카지마 북쪽의 젠코지에 배치했던 병사 3,000과 합류하여 에치고 국으로 돌아갔다.
이 전투에 의한 전사자는 우에스기군 3,000여 명, 다케다군 4,000여 명이라고 전해져, 서로 다수의 전사자가 발생한 격전이었다. 신겐은 하치만바라에서 가쯔토(勝鬨)를 외치게 한 뒤 물러났고, 마사토라도 수실검(首実検)을 한 뒤에 에치고로 귀환했다. 고요군칸에서는 이 전투를 "전반은 우에스기의 승리, 후반은 다케다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전투후의 서찰에서도 양쪽이 승리를 주장했다. 다만 다케다군은 최고 간부인 다케다 노부시게, 모로즈미 도라사다가 전사한 것에 비해 우에스기군의 간부층에서는 전사자가 없었기 때문에 전술적으로는 우에스기군 우세로 끝났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다시 말하자면 명확한 승패가 갈린 전투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 전투에 대해 신겐과 마사토라의 간죠가 6통이 남겨져 있어, 이것을 혈염의 간죠라고 부른다. 다만 芝辻俊六氏를 시작으로 문체나 서체, 필적 등이 의문시 되는 것이 있어, 이 간죠의 진위여부에 대한 재검토의 여지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제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는 양측의 사상자 비율이 매우 높았으며, 당시 전술적으로 흥미로운 전투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 다케다 군
구분 | 병력 | 지휘관 |
---|---|---|
기본 부대 | 8,000명 | 다케다 신겐, 다케다 노부시게, 다케다 요시노부, 다케다 노부카즈, 다케다 요시카쓰, 아나야마 노부키미, 이이토미 마사카게, 쿠도 스케나가, 무로스미 코라미쓰, 아토베 카쓰스케, 이마후쿠 코라타카, 아사리 노부타네, 야마모토 간스케, 무로가 노부토시 |
쓰메요산 별동대 | 12,000명 | 카스가 토라쓰나, 바바 노부하루, 이이토미 토라마사, 오야마다 노부아리 (야자부로)?, 아마리 마사타다, 사나다 유키쓰나, 아이기 마사토모, 아시다 노부모리, 오야마다 마사타쓰, 오바타 켄시게 |
- 우에스기 군 (13,000명)
구분 | 지휘관 |
---|---|
총대장 | 우에스기 겐신 |
주요 지휘관 | 카키자키 카게이에, 혼죠 사네노부, 이소쿠노야 하루나가, 나카죠 후지스케, 야스다 나가히데, 카지 하루쓰나, 이로베 가쓰나가, 혼죠 시게나가, 아유카와 키요나가, 야마요시 토요모리, 무라카미 요시키요, 타카나시 마사요리, 이누에 키요마사, 호죠 타카히로, 우사미 사다미쓰, 아라카와 나가사네, 시다 요시토키, 오가와 타다히데 |
소하타 호위 | 나오에 가게쓰나 |
진격 | 가마스케 가게모치 |
가스가야마 유수거 | 나가오 마사카게 |
에치고 방면 수비 | 사이토 아사노부 |
3. 5. 제5차 전투 (1564년)
에이로쿠 7년(1564년), 우에스기 겐신(우에스기 마사토라가 에이로쿠 4년 말에 쇼군 요시테루의 한 글자를 받아 개명)은 다케다 신겐의 히다 국 침입을 막기 위해 가와나카지마에 출진했다. 가와나카지마에 진을 친 겐신에 대해 신겐은 결전을 피하고 시오자키 성에 진을 친 채 대치로 끝났는데 이를 '''시오자키의 대진'''이라고도 한다.[65]겐신은 간토에 매년 출병하여 후호조씨와의 전투를 계속했다. 후호조씨와 동맹을 맺은 다케다씨는 항상 겐신의 후방을 위협했다. 겐신의 신겐에 대한 증오는 엄청났고, 거성이었던 카스가야마 성(니가타현 조에쓰시) 내의 간경소와 야히코 신사(니가타현 니시칸바라군 야히코촌)에 "다케다 하루노부 악행의 일"이라는 제목의 간원문을 봉납하여 신겐을 극렬하게 비난하고 반드시 토벌하겠다고 맹세했다.
히다 국에서는 국중(国衆)들 간의 싸움이 다케다 씨와 우에스기 씨의 대립과 연관되어 있었다. 미쓰키 요시요리(三木良頼)[66]와 에마 도키모리가 다툼을 벌이자, 신겐이 에마씨를, 데루토라가 미쓰키씨를 지원하며 개입했다.
1564년 8월, 데루토라는 신겐의 히다 국 침입을 막기 위해 가와나카지마에 출진했다. 신겐도 시오자키 성에 포진했으나, 결전을 피하였고, 2개월에 걸쳐 대치하였다. 10월에 이르러 양군이 철수하면서 끝났다. 이후 신겐은 도카이도나 미노 국, 고즈케 국 방면으로 세력을 확대했고, 데루토라는 간토 출병에 힘을 기울였기에 가와나카지마에서 큰 전투는 이후 벌어지지 않았다.[1]
3. 6. 제6차 전투 (1567년)
1568년에 벌어진 제6차 전투는 본죠우 시게나가의 난을 틈타 다케다 신겐이 이이야마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철수한 사건이다.1568년 7월 10일, 신겐은 이이야마성을 공격했다.[31] 그러나 같은 해 10월, 이이야마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철수했다.[31] 이 전투는 같은 해 3월에 발생한 본죠우 시게나가의 난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31] 우에스기 겐신이 직접 신슈(信濃)에 출진한 것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초기 단계에서 니이타다 씨의 군대 등이 원군으로 파견되었다.[31] 또한 신겐의 요청을 받은 본원사 겐뇨의 명령을 받은 사이곤지(長野市)(西厳寺 (長野市)) 등에 의한 일향일규도 다케다 측에 동원된 대규모 전투였다.[31][32][33][34]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에이로쿠 11년(1568년) 9월, 오다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고 상락에 성공하면서 시대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이후 천하통일을 완수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가와나카지마를 방문하여 신겐과 겐신의 군략을 칭송하면서도 "쓸데없는 전투를 했다"라고 평가했다고 전해진다. 좁은 가와나카지마를 둘러싼 국지전에 병력과 시간을 낭비하여 노부나가의 대두를 허용했다는 평가가 많다.[35]
그러나 근래에는 양측 모두에게 불가피한 전투였다는 견해도 있다. 3국 동맹을 전략의 대전제로 삼았던 신겐에게는 후호조 씨의 적대자인 겐신과의 대결이 필연적이었다. 겐신 역시 신겐의 북시나노 영유를 방치하면 본국인 에치고노쿠니가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충돌은 불가피했다.
우에스기 군은 62%, 다케다 군은 72%의 사상자를 냈다고 전해지나, 보수적인 추산으로는 약 20%였다고 한다. 연대기에는 다케다 군이 사이조야마 진영을 불태우고 젠코지를 거쳐 에치고국으로 후퇴하는 우에스기 군을 막으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가와나카지마를 둘러싼 다케다 씨와 우에스기 씨 간의 항쟁은 4차 전투를 계기로 종식되었고, 이후 양측은 직접적인 충돌을 피했다. 겐신은 신겐의 지원을 받은 에치고의 무장들과 에치고 일향 일기 진압에 몰두했다. 다케다 씨는 동맹국이었던 이마가와 씨와 적대하는 오다 씨와 외교 관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대외 정책을 전환했다.
겐키(元亀) 4년(1573년) 신겐 사후,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참패한 다케다 가쓰요리는 우에스기 겐신과 화목하고 가이로 귀국했다. 겐신 사후 에치고에서 고칸의 난(1578년)이 발발하자, 다케다 가쓰요리는 에치고에 출병,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가쓰요리의 이복 여동생 기쿠히메와 혼인하여 고에쓰 동맹을 성립시켰다.
고에쓰 동맹으로 다케다 씨의 세력은 가와나카지마 4군을 넘어 에치고 국에까지 미쳤다. 결과적으로 고소 동맹을 다시 파탄시켰고, 우에스기 씨는 시바타 가쓰이에 등이 이끄는 오다 군의 공세를 방어했지만, 다케다 측에서는 덴쇼 10년(1582년)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의 침공(가쓰요리 정벌)으로 멸망했다.
다케다 씨 멸망 후 시나노 국은 모리 나가요시 등 오다 가신들이 지배했으나,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죽자 모리 나가요시는 도망쳤다. 무주지가 된 다케다 유령은 우에스기, 도쿠가와, 호조 세 세력의 쟁탈전(덴쇼 임오의 난)이 벌어졌고, 결국 도쿠가와 씨가 확보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우에스기 가문은 아이즈를 거쳐 요네자와로 이봉되었고, 가와나카지마 지역은 도쿠가와 씨의 세력 하에 들어갔다. 히데요시는 가와나카지마를 방문하여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전투를 벌였구나”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겐나 8년 (1622년) 사나다 씨가 도쿠가와 정권에 의해 우에다 성에서 가이즈 성(마쓰시로 성)으로 이전되었다. 전란과 홍수로 황폐해진 가와나카지마 지방은 마쓰시로 번에 의해 보호, 전승되었다.
5. 평가 및 논란
좁은 가와나카지마를 둘러싸고 벌어진 국지전에 신겐과 겐신이 병력과 10년 이상의 시간을 낭비했기 때문에, 노부나가의 대두를 허용하게 되었다는 평가가 예로부터 많았다. 이 때문에 신겐과 겐신은 지방 다이묘에 불과하고, 천하인이 된 노부나가, 히데요시에 비해 역량이 떨어진다고 판단하는 작가나 평론가도 많다.
한편, 최근 학자들은 양측 모두 필요에 의해 전투를 벌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신겐에게는 3국 동맹이 전략의 대전제였기 때문에 후 호조씨의 적대자인 겐신과의 대결은 필연적이었다. 이후 3국 동맹을 파기하고 스루가에 침입한 신겐은 고립되어 어려운 전략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겐신에게 있어서도 신겐의 북시나노 영유를 쉽게 인정하면 본국인 에치고 자체가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충돌은 필연적이었다는 것이다.
가와나카지마 전투에 관련된 기록 중에는 널리 알려진 것과는 다른 견해도 존재한다.
- 다케다, 나가오(우에스기) 양 가문이 내분을 일으킬 수 있는 가신들에 대한 구심력을 높이기 위해 벌인 일종의 '퍼포먼스'였다는 설이 있다.[36]
- '딱따구리 전법'에 대해서는, 사이죠야마 산기슭의 경사가 깊어 말이 통과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협공이 가능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37] 그래서 사이죠야마에 진을 친 우에스기 군을 포위하여 보급을 차단하고, 궁지에 몰린 우에스기 군이 전군을 이끌고 다케다 군 본진에 돌격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 제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에 대해서는 양군이 짙은 안개 속에서 행군하다 본대끼리 우연히 조우하여 전투가 벌어졌다는 '예기치 못한 조우설'이 있다.[38] 당시 전투로서는 이례적으로 양 군의 사망률이 높은 것도 이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정황 증거를 바탕으로 분석하면 딱따구리 전법도 신빙성이 있다는 의견도 있다.
- 사이죠야마는 전술적으로 병사를 움직이거나 보급이 곤란한 사지(死地)였기 때문에, 나오에 가케쓰나, 가키자키 가케이에 등이 반대했으나 겐신은 이를 물리치고 그곳에 진을 쳤다. 희대의 전술안을 가졌던 우에스기 겐신이 가와나카지마의 지형을 이해하지 못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에 배수의 진을 친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 제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와 관련하여 '정흥사 문서'에는 에이로쿠 4년 9월 28일 전투를 기원하는 사찰이 전화에 휩쓸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9월 10일의 전투에서 양군 합계 전군의 2할에 달하는 전사자를 냈고, 그 후에도 장기간 전투를 계속했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우에스기 군은 62%, 다케다 군은 72%의 사상자를 냈다고 전해진다. 다만, 좀 더 보수적인 추산으로는 사상자 수가 약 20%였다고 한다.
2007년, 니시카와 코헤이는 에이로쿠 10년(1567년) 8월 7일과 8일에 다케다 씨의 가신이 시나노 국의 시모노고우 신사에 봉납한 기청문(起請文) "생도아지시마 신사 기청문"을 분석한 결과, 다케다 씨와 우에스기 씨 양군이 가와나카지마에서 대치하고 있었다고 결론지었다.[29]
이 기청문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다케다 요시노부의 사건과의 관련성으로 논의되어 왔지만, 문장 속에 나가오 카게토라(우에스기 겐신)를 토벌하는 것과 전공을 세우는 것 등이 적혀 있으며, 우에스기 군과의 전투를 의식한 내용이 많다. 한편, 같은 8월 7일에 우에스기 겐신이 오타 스케마사에게 서장을 보내 이이야마 성의 보수 공사로 인해 출진이 늦어진 것을 사과하면서, 8월 중에 에치고하여 사노의 처벌을 하겠다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문서에서 이이야마 성의 보수 공사가 10월에 완료되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또한 에치고 우오즈 성주가 된 가와다 나가치카가 10월 20일에 가와카미 주무교에게 보낸 서장에서 에치고의 정세에 대해 언급한 후, 우에스기 군이 7월부터 60일 이상 가와나카지마에서 대치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종래에는 이 서장은 제5차 합전 당시의 것이라는 설이 강했지만, 가와다 나가치카가 우에노 누마타 성주에서 에치고 우오즈 성주로 이동한 것은 에이로쿠 9년(1566년)이므로 그 이후의 연도가 아니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것으로부터 에이로쿠 10년에는 겐신과 신겐 모두 가와나카지마에 출진했을 가능성이 높고, 이것을 "제6차 합전"으로 보는 것이 최근의 견해이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시오자키 성에서의 대치를 제5차 합전이 아닌 이 제6차 합전 당시의 일로 생각하는 것이 더 일관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연구자도 있다.[30]
에도 시대 막부의 고문 승려였던 천해의 목격 정보 등을 바탕으로 한 양 군의 규모는 다음과 같다.
우에스기군 | 다케다군 | 비고 | |
---|---|---|---|
제1차 | 8000명 | 10000명 | 소규모 충돌로 종결. |
제2차 | 8000명 | 12000명 | 교착 상태가 되어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중재로 아사히야마성 파괴와 사이가와를 경계로 북쪽을 우에스기 영토, 남쪽을 다케다 영토로 하는 것으로 화해. |
제3차 | 10000명 | 23000명 |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중재(어내서)로 화해. 하루노부가 신슈슈고가 됨. |
제4차 | 13000명 | 20000명 | 많은 사상자를 낸 격전이 되어 양측 모두 승리를 주장. 다케다 노부시게, 쇼카쿠 토라사다, 야마모토 간스케 등 명성이 자자한 무장들이 전사하였으나, 북신슈 지방은 다케다가 제압. |
제5차 | ?명 | ?명 | 양군이 대치한 채로 양측 모두 철수. |
근대 역사학에서는 1889년에 다나카 요시나리가 5전설을 부정하고,[39] 가와나카지마 전투는 고지 원년(1555년)과 에이로쿠 4년(1561년)의 2회였다고 하였다. 또한, 1932년에는 군인인 키타무라 타테노부가 다나카의 2전설을 보강하고 있다.[40]
이에 대해, 1929년에는 와타나베 세이우스케가 5전설을 제창하고,[41] 전후에는 1959년에 고바야시 케이이치로가 5전설을 지지하고 있다.[42]
2000년에는 시바츠지 준로쿠가 5전설을 재검토하고,[43] 가와나카지마 전투와 그 외의 소규모 전투를 코에쓰 대전(甲越対戦)과 구별하여, 가와나카지마 전투는 에이로쿠 4년 9월의 제4차 합전으로 한정된다고 하였다.
2002년에는 히라야마 유가 시나노 국중(国衆)의 동향을 중심으로 다케다 신겐의 시나노 침공에서 가와나카지마 전투에 이르는 과정을 재검토하여, 가와나카지마 전투를 동국 전국사(東国戦国史) 속에 위치시켰다.[44]
2007년에는 니시카와 코헤이가 에이로쿠 10년(1567년)에 다케다 신겐이 가신단에 명하여 시모노고우 신사(현재의 생도아지시마 신사)에 봉납하게 한 83매의 기청문(起請文)(「생도아지시마 신사 기청문」중요문화재)을 분석한 결과, 이 기청문이 같은 해에 발생한 이이야마 성 공방전과 관련하여 제출되었고, 이때 다케다·우에스기 양군이 호쿠시나노(北信濃)에서 대치한 제6차 합전이 있었다는 6전설을 제창하였다.[29] 참고로, 니시카와의 논문에 따르면, 『갑양군감』에는 가와나카지마 전투를 5전이라고 명기되어 있지 않고, 「가와나카지마 5전」이라는 호칭은 『호쿠에츠군기』 등의 에치고류 군학 계열의 서물에 보이는 것으로, 코스케·하니카·타카이·미즈나미의 4군을 「가와나카지마 4군」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에스기 씨가 동 지역의 지배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만들어낸 호칭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29]
마에지마 빈의 집계에 따르면, 에이로쿠 원년(1558년)·동 10년(1567년)·동 11년(1568년)에도 가와나카지마 전투로 위치지을 수 있는 전투가 있었다는 연구가 있으며, 모두를 세면 8회의 전투가 행해진 것이 된다.[45]
6. 작품
가와나카지마 전투는 에도 시대에 우키요에 판화의 인기 있는 소재였는데, 이는 다케다 씨와 우에스기 씨가 모두 멸망하여 그들의 업적을 찬양하는 것이 당시 지배 세력이었던 도쿠가와 막부에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49] 우타가와 구니요시는 가와나카지마 전투를 소재로 한 우키요에를 남겼다.
우키요에(浮世絵)의 화제(畵題) 중 하나인 무사에(武者絵)에서도 가와나카지마 전투도는 자주 그려졌고, 그 수는 200종류를 넘는다고도 한다.[49] 텐쇼(天正) 연간 이후의 전투나 인물을 다룬 작품에서는 변명(変名)이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 이전의 전투인 가와나카지마 전투의 경우는 인물이나 전투 이름도 사실대로 표기되는 것이 특징이다.
근세에는 『甲陽軍鑑(코우요우군감)』, 『北越軍談(호쿠에츠군단)』을 바탕으로 甲州流軍学(코우슈류군가쿠)·越後流(에치고류) 군학이 형성되어 다이묘가(大名家)에도 초빙되었다. 에도 전기부터 다이묘가에서는 『군감(軍鑑)』, 『군담(軍談)』, 『甲越信戦録(코우에츠신센로쿠)』, 『絵本甲越軍記(에혼코우에츠군키)』 등을 바탕으로 가와나카지마 전투도 병풍이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가와나카지마 전투를 다룬 작품은 다음과 같다.
제목 | 연도 | 종류 | 비고 |
---|---|---|---|
풍림화산 | 1969년 | 영화 | 야마모토 간스케의 일대기를 다룬 일본 영화로, 1561년 제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가 클라이맥스 장면으로 묘사된다. |
센고쿠 제이타이 | 1979년 | 영화 | 가와나카지마 전투의 허구적 버전을 다룬다. |
하늘과 땅 | 1990년 | 영화 | 가도가와 하루키가 다시 가와나카지마 전투를 영상화했다. |
가와나카지마 장기(ja) | 장기 변형 | 이 전투에서 이름을 따왔다. | |
이노우에 야스시 저, 『풍림화산』 | 2005년 | 소설 | 신초사 출판, 개정판 |
신다 지로 저, 『다케다 신겐』 | 2005년 | 소설 | 문예춘추 출판, 신장판 |
카이온지 쇼고로 저, 『천지 하권』 | 2004년 | 소설 | 문예춘추 출판, 개정판 |
하무라 요시 저, 『전국자위대』 | 2005년 | 소설 | 각가서점 출판, 신장판 |
이토 쥰 저, 『불어라 바람 불러라 폭풍』 | 2016년 | 소설 | 쇼덴샤 출판 |
가와나카지마 전투 | 1941년 | 영화 | 도호 제작 |
풍림화산 | 1969년 | 영화 | 도호 제작 |
전국자위대 | 1979년 | 영화 | 도호 제작 |
천지 | 1990년 | 영화 | 도호 제작 |
하늘과 땅과 | 1969년 | NHK 대하드라마 | |
다케다 신겐 | 1988년 | NHK 대하드라마 | 제27회 『가와나카지마 혈전(일)』, 제28회 『가와나카지마 혈전(이)』 |
풍림화산 | 1992년 | 일본텔레비전 드라마 | |
풍림화산 | 2006년 | 텔레비전 아사히 드라마 | |
풍림화산 | 2007년 | NHK 대하드라마 | 제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가 최종회 |
하늘과 땅과 | 2008년 | 텔레비전 아사히 드라마 | 텔레비전 아사히 개국 50주년 기념 드라마 스페셜 |
전국 양키 가와나카지마 학원 | 2010년 | tvk 드라마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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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 날개 형태 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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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스기 마사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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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K 역사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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