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다이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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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다이라씨는 미카와국에서 유래한 씨족으로, 센고쿠 시대에는 세이와 겐지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마쓰다이라 씨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문의 조상으로, 에도 시대에는 도쿠가와 쇼군가를 제외한 친족들이 사용했으며,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여러 다이묘 가문에게도 하사되었다.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화족으로 작위를 받았으며, 후쿠이 마쓰다이라 가문이 후작, 다른 가문들은 백작, 자작, 남작 작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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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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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성씨 | 마쓰다이라 |
성씨 (일본어) | 松平 |
로마자 표기 | Matsudaira-shi |
가문 문장 | 세 잎 접시꽃 |
가문 문장 (일본어) | 丸に三つ葉葵 |
본성 | 칭・세이와 겐지닛타 씨 지류 칭・가모 씨 칭・아리와라아손 |
기원 | 미카와 국(가모 군) 마쓰다이라 향 |
근거지 | 미카와 국 무사시 국 도쿄 부 / 도쿄 도 |
창시자 | 마쓰다이라 지카우지 |
최종 통치자 | 도쿠가와 요시노부 |
현재 수장 | 이에히로 도쿠가와 |
창립 연도 | 14세기 |
해체 | 도쿠가와 씨로 존속 |
통치 종료 | 1873년 (폐번치현) |
주요 인물 | 마쓰다이라 노부미쓰 마쓰다이라 기요야스 마쓰다이라 히로타다 마쓰다이라 모토야스 마쓰다이라 노부야스 |
가계 | |
주요 분가 | 마쓰다이라 향 마쓰다이라 가문 (무가・사족) 도쿠가와 씨 (무가・공작) 기타 18마쓰다이라, 고가몬, 고렌시 등 참조 |
기타 분가 | 다수 |
작위 | |
작위 (후작) |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 |
작위 (백작) | 마쓰에 마쓰다이라 가문 마에바시 마쓰다이라 가문 다카마쓰 마쓰다이라 가문 |
작위 (자작) | 상기 4가문 제외 구 다이묘 마쓰다이라 가문 |
작위 (자작) | 마쓰다이라 요시타미 가문 |
작위 (남작) | 마쓰다이라 사이 가문 마쓰다이라 마사나오 가문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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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마쓰다이라씨의 기원
마쓰다이라씨에 대해 동시대 자료에서 확인 가능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3대 마쓰다이라 노부미쓰 이후에 대한 것이며, 그 이전은 불분명하다.[2]
후세의 도쿠가와씨・마쓰다이라씨 계보에 따르면, 도쿠가와씨의 조상이 되는 마쓰다이라 지카우지는 세이와 겐지 닛타씨의 지류에서 고즈케국 닛타군 닛타노쇼 에가와향(得川郷, 현재 군마현 오타시 도쿠가와정)을 거점으로 하는 도쿠가와 요시스에 (세라다 요시스에, 도쿠가와 사부로 요시히데)의 후예라고 칭하는 시종 승려였다. 그는 마쓰다이라향의 영주 마쓰다이라 타로자에몬 소위 노부시게의 사위가 되어 그 이름을 이어받아 마쓰다이라 지카우지라 하였다.
마쓰다이라 씨는 미카와국에서 유래했다.[2] 그 기원은 불확실하지만, 센고쿠 시대에 이 씨족은 중세 세이와 겐지의 분파인 미나모토 씨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에 따르면, 마쓰다이라 가문의 창시자는 14세기에 살았던 마쓰다이라 지카우지로, 미카와국 마쓰다이라 마을에 세력을 굳혔다.
2. 1. 초기 역사
마쓰다이라씨에 대해 동시대 자료에서 확인 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3대 마쓰다이라 노부미쓰 이후에 대한 것이며, 그 이전에는 분명하지 않다.[2]
후세의 도쿠가와씨・마쓰다이라씨의 계보에 의하면, 도쿠가와씨의 조상이 되는 마쓰다이라 지카우지는 세이와 겐지 닛타씨의 지류에서 고즈케국 닛타군 닛타노쇼 에가와향(得川郷, 현재 군마현 오타시 도쿠가와정)을 거점으로 하는 도쿠가와 요시스에 (세라다 요시스에, 도쿠가와 사부로 요시히데)의 후예라고 칭하는 시종의 승려로, 마쓰다이라향의 영주 마쓰다이라 타로자에몬 소위 노부시게의 사위가 되어 그 이름을 이어 마쓰다이라 지카우지라고 했다.
마쓰다이라 씨는 미카와국에서 유래했다.[2] 그 기원은 불확실하지만, 센고쿠 시대에 이 씨족은 중세의 세이와 겐지의 분파인 미나모토 씨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에 따르면, 마쓰다이라 가문의 창시자는 14세기에 살았던 마쓰다이라 치카우지로, 미카와국 마쓰다이라 마을에 세력을 굳혔다.
에도 시대 이후 여러 차례 주조가 바뀌어 기원을 확정할 수 없다. 『松平村誌』의 「松平氏由緒書」에서는 가모씨나 스즈키씨의 일족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2. 2. 마쓰다이라 향과 국가 사적
마쓰다이라 씨(松平氏)는 미카와국에서 유래했다.[2] 그 기원은 불확실하지만, 센고쿠 시대에 이 씨족은 중세의 세이와 겐지의 분파인 미나모토 씨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에 따르면, 마쓰다이라 가문의 창시자는 14세기에 살았던 마쓰다이라 지카우지로, 미카와국 마쓰다이라 마을에 세력을 굳혔다.
도요타시 경계 내에 위치한 마쓰다이라 마을의 여러 장소는 2000년에 국가사적(Monuments of Japan)으로 일괄 지정되었다.[3]
항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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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탄생지였던 도모에 강(아스케 강) 동쪽 제방에 있는 센고쿠 시대의 요새 유적.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후 신격화 이후 1615년에 건립된 마쓰다이라 도쇼구 신사의 일부이다. |
센고쿠 시대에 마쓰다이라 씨가 미카와국 일부를 지배했던 마쓰다이라 성. |
1507년경에 건립되어 1575년까지 마쓰다이라 씨가 사용했던 오규 성. |
마쓰다이라 씨의 보다이지인 불교 사찰 고게쓰인. |
지카우지의 자녀 또는 야스치카의 자녀인 마쓰다이라 노부미쓰는 무로마치 막부의 만도코로 집사 이세씨의 피관이 되어 교토에 출사했다. 이로써 무가로서의 마쓰다이라 가문이 시작되었다.
3. 무로마치 시대의 마쓰다이라씨
간쇼 연간(1460년~1466년)에는 오미국 스가우라장・오우라장 (시가현 나가하마시 니시아자이정 스가우라・오우라)에 파견된 교고쿠씨의 대관에 마쓰다이라 마스치카라는 인물이 있었다. 1461년 10월 13일, 교토의 히노 카츠미츠의 명에 의해 스기우라 주민에게 군사 공격을 가할 때 미카와로부터 수만 기의 원군이 동원되었다고 한다.[30] 이 오미의 마쓰다이라씨도 미카와 마쓰다이라씨의 동족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미카와의 슈고는 잇시키씨였지만, 야마나씨의 여당인 잇시키씨의 세력을 두려워한 무로마치 막부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는 미카와 슈고 잇시키 요시츠라를 암살하고, 호소카와 모치츠네를 미카와 슈고로 임명했다. 이로 인해 미카와 국내는 내전 상태가 되었고, 누카다군 농민봉기도 일어났다. 오닌의 난에서 마쓰다이라 노부미쓰는 미카와 슈고 호소카와 시게유키와 함께 미카와 복권을 노리는 잇시키씨를 꺾었다. 또한 마쓰다이라씨는 노부미츠 때의 내실이 잇시키 무네요시의 딸이어서, 잇시키씨와 인척관계였다고 한다.
3. 1. 이세씨의 가신
무로마치 막부의 만도코로 집사 이세씨의 피관이 되어 교토에 출사한 마쓰다이라 노부미츠는 무가로서 마쓰다이라 가문의 첫 출발을 하였다. 노부미츠는 아시카가 쇼군가의 직할령인 미카와 고료소 경영을 장악하고, 마쓰다이라향 남쪽 평야의 현관인 누가타군 이와즈성 (오카자키시 북부 이와즈정)으로 거성을 옮겼다. 이후 니시미카와의 히라노부로 세력을 확대해 각지에 제자를 분봉하고 18 마쓰다이라로 불리는 다수의 분가를 창설했다.
3. 2. 미카와 슈고 잇시키씨의 쇠퇴와 마쓰다이라씨의 성장
무로마치 막부의 만도코로 집사 이세씨의 피관이 되어 교토에 출사한 마쓰다이라 노부미츠는 무가로서 마쓰다이라 가문의 첫 출발을 알렸다. 미카와의 아시카가 쇼군가 직할령인 고료소 경영에 개입한 노부미츠는 마쓰다이라향 남쪽 평야의 관문인 누가타군 이와즈성 (오카자키시 북부 이와즈정)으로 거성을 옮기고, 니시미카와의 히라노부로 세력을 확대하여 각지에 제자를 분봉하고 18 마쓰다이라로 불리는 다수의 분가를 창설했다.
간쇼 연간에는 오미국 스가우라장・오우라장 (시가현 나가하마시 니시아자이정 스가우라・오우라)에 파견된 교고쿠씨의 대관에 마쓰다이라 마스치카라는 인물이 있었다. 1461년 10월 13일, 교토의 히노 카츠미츠의 명에 의해 스기우라 주민에게 군사 공격을 가할 때 미카와로부터 수만 기의 원군이 동원되었다고 한다.[30] 이 오미의 마쓰다이라씨도 미카와 마쓰다이라씨의 동족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미카와의 슈고는 잇시키씨였지만, 무로마치 막부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는 미카와 슈고 잇시키 요시츠라를 암살하고, 호소카와 모치츠네를 미카와 슈고로 임명했다. 이로 인해 미카와 국내는 내전 상태가 되었고, 누카다군 농민봉기도 일어났다. 이 기회를 타 마쓰다이라 노부미츠와 토다 무네미츠가 득세했다. 오닌의 난에서 마쓰다이라 노부미츠는 미카와 슈고 호소카와 시게유키와 함께 미카와 복권을 노리는 잇시키씨를 꺾었다. 또한 마쓰다이라씨는 노부미츠 때의 내실이 잇시키 무네요시의 딸이어서, 잇시키씨와 인척관계였다고 한다.
미카와 국에 영지를 가진 마쓰다이라 씨는 서쪽에는 오와리 국의 오다씨, 동쪽에는 스루가 국의 이마가와씨에 둘러싸여 있었다. 마쓰다이라 가문의 당주들은 대대로 이웃들과의 관계를 신중하게 조율해야 했다.
4. 센고쿠 시대의 마쓰다이라씨
전국 시대 노부미쓰는 이와즈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오카자키성과 안죠성을 세력 하에 두는 등 세력을 확대했다. 그는 자신의 자식들을 분립시켜 타케노야 마쓰다이라가, 안죠 마쓰다이라가, 카타노하라 마쓰다이라가 등 여러 분가를 각지에 두었다.
미카와 국에 영지를 가진 마쓰다이라 씨는 서쪽에는 오와리 국의 오다 씨, 동쪽에는 스루가 국의 이마가와 씨라는 강력한 이웃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마쓰다이라 가문의 당주들은 대대로 이웃들과의 관계를 신중하게 조율해야 했다. 마쓰다이라 히로타다 당주 시대에는 오다 씨와 이마가와 씨의 위협을 받아 한때 이마가와 씨의 휘하에 들어가기도 했다.[1]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패사하자, 히로타다의 아들 마쓰다이라 모토야스는 다이쥬지 주지의 설유를 얻어 출생지인 오카자키 성으로 돌아왔다. 곧 이마가와 씨로부터 독립하여 이름을 마쓰다이라 이에야스로 개명했다. 이에야스는 미카와를 통일하고 1566년에 칙허를 얻어, 선조 요시스에 이래의 도쿠가와 성씨를 부활시키고, 더 나아가 자자(嘉字)인 '''도쿠가와 씨'''로 개명했다. 다만, 도쿠가와 성씨는 이에야스 일가만이 사용했고, 마쓰다이라 여러 가문의 성씨는 마쓰다이라로 남았다. 이에야스는 이로써 자신의 가계를 마쓰다이라 일족 중에서 특별한 존재로 국내외에 인식시키는 데 성공했고, “18마쓰다이라” 여러 가문은 도쿠가와 씨의 친족이 아닌 가신의 신분인 “후다이”로 위치 지정되었다.[2]
4. 1. 안조 마쓰다이라가의 발전
전국 시대의 마쓰다이라 노부미쓰는 이와즈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오카자키성과 안죠성을 세력 하에 두는 등 세력을 확대했다. 그는 자신의 자식들을 분립시켜 타케노야 마쓰다이라가, 안죠 마쓰다이라가, 카타노하라 마쓰다이라가 등 여러 분가를 각지에 두었다.
노부미쓰의 아들 중 셋째 아들인 치카타다 (1501년 사망)는 헤키카이군 안죠성 (안죠시)을 받아 안죠 마쓰다이라 초대 당주가 되었다. 그는 이다노 (오카자키시 이다정 근처)에서 나카조씨 등을 물리치고 무용을 떨쳤으며, 마쓰다이라씨의 보리사인 다이쥬지를 건립했다.
4. 2. 마쓰다이라 기요야스와 히로타다
센고쿠 시대에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른 것은 오카자키 성에 거주하던 마쓰다이라 본가였다. 마쓰다이라 히로타다 당주 시대에는 오다 씨와 이마가와 씨의 위협을 받아 한때 이마가와 씨의 휘하에 들어가기도 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사망과 이마가와 씨의 몰락 후, 히로타다의 아들 마쓰다이라 모토야스는 오와리 국의 패자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는 데 성공했다. 모토야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1603년에 초대 도쿠가와 쇼군이 되었다.[1]히로타다의 아들 다케치요(9대, 원복하여 모토야스)는 今川氏의 인질로 駿府에 보내졌고, 마쓰다이라 씨의 미카와 지배는 사실상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기요야스와 히로타다 모두 공식적으로는 적자 이외의 남자아이가 없었기 때문에(낙윤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히로타다가 사망했을 당시 8세였던 다케치요를 후견할 친족이 없었고, 또 다케치요에게 만일의 사태가 발생하면 그대로 마쓰다이라 씨의 멸망으로 이어질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마가와 씨가 다케치요를 보호하여 마쓰다이라 씨를 종속적인 국중으로 만드는 것으로 존속을 도모한 측면도 있었다.[2]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今川義元이 패사하자, 모토야스는 大樹寺 주지의 설유를 얻어 출생지인 오카자키 성으로 돌아왔다. 곧 이마가와 씨로부터 독립하여 이름을 마쓰다이라 이에야스로 개명했다. 이에야스는 미카와를 통일하고 1566년에 칙허를 얻어, 선조 요시스에 이래의 도쿠가와 성씨를 부활시키고, 더 나아가 자자(嘉字)인 '''도쿠가와 씨'''로 개명했다. 다만, 도쿠가와 성씨는 이에야스 일가만이 사용했고, 마쓰다이라 여러 가문의 성씨는 마쓰다이라로 남았다. 이에야스는 이로써 자신의 가계를 마쓰다이라 일족 중에서 특별한 존재로 국내외에 인식시키는 데 성공했고, “18마쓰다이라” 여러 가문은 도쿠가와 씨의 친족이 아닌 가신의 신분인 “후다이”로 위치 지정되었다(실제로 18마쓰다이라 여러 가문은 중신인 사카이 씨나 이시카와 씨의 여력·조하로 여겨졌다).[2]
4. 3.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쓰다이라 제 가문의 가신화
에도 시대 이전에는 마쓰다이라 씨의 주요 분가가 19개 있었다. 竹谷|다케노야일본어, 形原|가타노하라일본어[4], 大草|오구사일본어, 長沢|나가사와일본어[5], 能見|노미일본어[6], 五井|고이일본어, 深溝|후코즈일본어, 大給|오규일본어[7], 滝脇|다키와키일본어[8], 福釜|후카마일본어, 桜井|사쿠라이일본어, 東条|도조일본어, 藤井|후지이일본어[9], 三木|미쓰기일본어, 岩津|이와쓰일본어, 西福釜|니시후카마일본어, 矢田|야타일본어, 鵜殿|우도노일본어, 加賀|가가일본어 등이다. 가가-마쓰다이라 씨(가가 국으로 이전한 경우)를 제외한 각 분가는 거주지였던 미카와 국 지방의 지역 이름을 따서 명칭을 사용했다. 또한 많은 분가들이 서로 싸우는 경우가 잦았다.
센고쿠 시대에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른 것은 오카자키 성에 거주하던 마쓰다이라 본가였다. 마쓰다이라 히로타다 당주 시대에는 오다 씨와 이마가와 씨의 위협을 받아 한때 이마가와 씨의 휘하에 들어가기도 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사망과 이마가와 씨의 몰락 후, 히로타다의 아들 마쓰다이라 모토야스는 오와리 국의 패자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는 데 성공했다. 모토야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1603년에 초대 도쿠가와 쇼군이 되었다.
마쓰다이라 기요야스와 히로타다 모두 공식적으로는 적자 이외의 남자아이가 없었기 때문에(사생아가 있었다는 설도 있다), 히로타다가 사망했을 당시 8세였던 다케치요(히로타다의 적자, 9대 당주)를 후견할 친족이 없었고, 또 다케치요에게 만일의 사태가 발생하면 그대로 마쓰다이라 씨의 멸망으로 이어질 상황이었다.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패사하자, 모토야스는 다이주지 주지의 설유를 얻어 출생지인 오카자키 성으로 돌아왔다. 곧 이마가와 씨로부터 독립하여 이름을 마쓰다이라 이에야스로 개명했다. 이에야스는 미카와를 통일하고 1566년에 칙허를 얻어, 선조 요시스에 이래의 도쿠가와 성씨를 부활시키고, 더 나아가 자자(嘉字)인 도쿠가와 씨로 개명했다. 다만, 도쿠가와 성씨는 이에야스 일가만이 사용했고, 마쓰다이라 여러 가문의 성씨는 마쓰다이라로 남았다. 이에야스는 이로써 자신의 가계를 마쓰다이라 일족 중에서 특별한 존재로 국내외에 인식시키는 데 성공했고, “18마쓰다이라” 여러 가문은 도쿠가와 씨의 친족이 아닌 가신의 신분인 “푸다이”로 위치 지정되었다(실제로 18마쓰다이라 여러 가문은 중신인 사카이 씨나 이시카와 씨의 가신으로 여겨졌다).
5. 에도 시대의 마쓰다이라씨
도쿠가와 이에야스(이전 이름은 마쓰다이라 모토야스)는 1603년에 초대 도쿠가와 쇼군이 되었다. 에도 시대 이전의 여러 마쓰다이라 가계가 에도 시대까지 이어졌으며, 그중 일부는 다이묘(大名)가 되었다. 도쿠가와 성은 쇼군이나 주요 도쿠가와 가문의 당주 아들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상속인만이 도쿠가와 성을 받았고, 그의 형제들은 모두 마쓰다이라 성을 받았다. 예를 들어,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미토 번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장남이 아니었기에, 미성년 시절 마쓰다이라 시치로마로 알려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복형제인 히사마쓰 사다카쓰가 창설한 히사마쓰-마쓰다이라 씨는[20] 이에야스와의 혈연 관계로 인해 마쓰다이라 성을 사용할 수 있었다. 히사마쓰-마쓰다이라 씨의 일부 분가들은 도쿠가와 가문의 문장을 사용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후다이 가문이 아닌 신판으로 공식적으로 도쿠가와 친족으로 인정받았다. 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동생인 마쓰다이라 기요타케가 창설한 오치-마쓰다이라 씨는[25] 하마다 번(Hamada Domain)을 지배했다. 호시나 마사유키는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아들로, 다카토 번의 영주 호시나 마사미쓰에게 양자로 들어가 호시나-마쓰다이라 씨를 창설했다. 마사유키는 이복형제인 도쿠가와 이에미쓰에 의해 도쿠가와 가문의 친족으로 인정받았다.
5. 1. 도쿠가와 막부와 마쓰다이라씨
도쿠가와 이에야스(이전 이름은 마쓰다이라 모토야스)는 1603년에 초대 도쿠가와 쇼군이 되었다.에도 시대 이전의 여러 마쓰다이라 가계가 에도 시대까지 이어졌으며, 그중 일부는 다이묘(大名)가 되었다. 타키와키-마쓰다이라 가문은 오지마 번의 다이묘가 되었고, 1868년부터 1871년까지는 조자이 번(사쿠라이 번)을 다스렸다.[10] 나가사와-마쓰다이라 가문(오코치-마쓰다이라 가문)은 여러 분가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미카와 국의 요시다 번을 다스렸다.[10] 초기 에도 시대의 정치가인 마쓰다이라 노부쓰나는 저명한 나가사와-마쓰다이라 가문 출신이다. 후코즈-마쓰다이라 가문은 시마바라 번을 다스렸다. 사쿠라이-마쓰다이라 가문은 아마가사키 번을 다스렸다.[11] 오규-마쓰다이라 가문은 많은 분가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오쿠토노 번을 다스렸다. 나가이 나오유키는 오쿠토노의 오규-마쓰다이라 가문의 저명한 막말 시대 후손이었다. 가문의 에도 시대 이전 분가들은 하타모토(旗本)가 되었다.
도쿠가와 성은 쇼군이나 6개의 주요 도쿠가와 가문의 당주 아들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상속인만이 도쿠가와 성을 받았고, 그의 형제들은 모두 마쓰다이라 성을 받았다. 예를 들어,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미토 번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장남이 아니었기에, 미성년 시절 마쓰다이라 시치로마로 알려졌다. 이들 중 일부, 특히 3대 도쿠가와 가문(''고산케'')의 아들들은 자신의 가문을 형성하고 자신의 영지를 받았다. 여기에는 다카마쓰,[12] 시시도,[13] 후추,[14] 모리야마[15] (미토 도쿠가와의 분가), 사이조 (키이 도쿠가와의 분가),[16] 타카스 (오와리 도쿠가와의 분가)[17]가 포함된다. 다카마쓰의 마쓰다이라 요리토시와 후추의 마쓰다이라 요리타카는 주목할 만한 마쓰다이라 가문 인물이다. 20세기 작곡가인 마쓰다이라 요리쓰네와 그의 아들 마쓰다이라 요리아키는 후추 마쓰다이라의 후손이었다.
유키 히데야스가 창설한 유키-마쓰다이라 씨는[18] 에도 시대 동안 여러 분가가 생겨났다. 유키-마쓰다이라 씨는 기타노쇼(후에 후쿠이로 개명됨)를 계속 지배했지만, 본가는 쓰야마에 있었다. 이 가문의 여러 분가가 후쿠이, 히로세, 모리, 마쓰에, 쓰야마, 아카시, 이토이가와, 마에바시 번을 지배했다. 유명한 유키-마쓰다이라 씨에는 에도 시대 후기의 두 다이묘인 마쓰다이라 나리타미[19]와 마쓰다이라 요시나가가 있다. 특히 마쓰다이라 요시나가는 메이지 시대 초 일본 정치에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고, 그의 지도력 덕분에 후쿠이 번은 보신 전쟁(1868~1869)에서 승리한 편에 섰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복형제인 히사마쓰 사다카쓰가 창설한 히사마쓰-마쓰다이라 씨는[20] 이에야스와의 혈연 관계로 인해 마쓰다이라 성을 사용할 수 있었다. 히사마쓰-마쓰다이라 씨의 일부 분가들은 도쿠가와 가문의 문장을 사용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단순한 후다이(fudai) 가문이 아닌 신판(shinpan)으로 공식적으로 도쿠가와 친족으로 인정받았다. 히사마쓰-마쓰다이라 씨의 분가들은 쿠와나,[21] 이마바리,[22] 이요마쓰야마 번을 다스렸다.[23] 유명한 히사마쓰-마쓰다이라 가문 사람으로는 정치 개혁가인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마지막 교토 쇼시다이(Kyoto Shoshidai)였던 마쓰다이라 사다아키, 막부 정치가인 이타쿠라 가쓰키요가 있다. 메이지 시대에 모든 히사마쓰-마쓰다이라 씨 분가의 당주들은 새로운 귀족 작위를 받았다.[24]
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동생인 마쓰다이라 기요타케가 창설한 오치-마쓰다이라 씨는[25] 하마다 번(Hamada Domain)을 지배했다. 1866년 ちょう슈 전쟁 중 오무라 마스지로가 지휘하는 장주 번(Chōshū Domain)군에 성읍이 점령되면서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다. 마지막 다이묘(daimyō)였던 마쓰다이라 타케아키라는 하마다를 탈출하여 번의 비연속 영토 중 하나인 쓰루타로 갔고, 1871년 번이 폐지될 때까지 쓰루타 번(Tsuruta Domain)을 설립했다. 메이지 시대에 타케아키라의 아들 마쓰다이라(오치) 타케나가는 화족(kazoku) 자작(viscount) 작위를 받았다.[24]
호시나 마사유키가 창설한 호시나-마쓰다이라 씨는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아들로, 다카토 번의 영주 호시나 마사미쓰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마사유키는 이복형제인 도쿠가와 이에미쓰에 의해 도쿠가와 가문의 친족으로 인정받았다. 이에미쓰 사후, 마사유키는 미성년 쇼군 도쿠가와 이에츠나의 섭정으로 일하며 사실상 막부를 통치하였다. 이때 마사유키는 아이즈(23만 석의 영지)의 영주가 되었다. 2대 후, 3대 영주 마사카타 시대에 마쓰다이라 성과 휘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가문은 막부의 정무와 에조(현재의 홋카이도) 경비 임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또한 여러 무술 도장을 후원하고, 지역 공예품 생산 개발 및 보급에도 힘썼다. 막말에는 8대 영주 마쓰다이라 가타타카가 페리 제독의 일본 방문 당시와 그 이후의 경비 임무를 지원했으며, 가타타카의 뒤를 이은 9대 영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교토 슈고쇼쿠''를 역임했으나, 보신 전쟁에서 패배하였다. 아이즈-마쓰다이라 씨는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살아남아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24] 가타모리의 아들 마쓰다이라 모리오는 일본 제국 해군에서 제독으로 복무했다. 이 가문은 현재까지도 존속하고 있으며, 1980년대 후쿠시마현 지사를 역임한 마쓰다이라 이사오도 이 가문의 후손이다. 히로히토 천황의 형제인 치치부궁 요시히토 친왕의 부인 치치부궁 세쓰코 친왕비도 이 가문의 후손이다.
에도 시대 동안, 도쿠가와 막부는 특정 가문에 명예로운 호칭으로 마쓰다이라 성을 사용할 권한을 부여했다. 여기에는 후다이(譜代) 다이묘 가문과 도자마(外様) 다이묘 가문 모두 포함되었다. 센다이 번의 다테 가문,[26] 사쓰마 번의 시마즈 가문,[27] 장주(長州)의 모리 가문, 가가 번의 마에다 가문(그리고 다이쇼지(大聖寺)와 도야마(富山)의 분가), 도사 번의 야마노우치 가문, 후쿠오카의 구로다 가문, 히로시마(広島)의 아사노 가문(그리고 히로시마 신덴(広島新田)의 분가), 사가(佐賀)의 나베시마 가문, 돗토리(鳥取)의 이케다 가문(그리고 오카야마(岡山), 시카노(鹿野), 와카자쿠라(若桜), 히라후쿠(平福)의 분가, 하타모토(旗本)급 이케다 가문), 도쿠시마(徳島)의 하치스카 가문은 모두 마쓰다이라 성을 사용할 권한을 가진 도자마 가문이었다. 야마토(大和)의 야나기사와 가문[28]과 미야즈 번(宮津藩)의 혼죠 가문은 마쓰다이라 성을 사용할 권리를 가진 후다이 가문 중 두 가문이었다. 도쿠가와 궁주가 다른 가문에 시집을 갈 경우, 그의 남편은 한 세대 동안 마쓰다이라 성과 도쿠가와 문장을 사용할 권리를 가졌다.
5. 2. 마쓰다이라 성씨를 하사받은 가문
- 카타노하라 마쓰다이라가 (탄바국 카메야마 번. 유신 후 자작)
- 노미 마쓰다이라가 (분고국 키츠키 번. 유신 후 자작)
- 후코즈 마쓰다이라가 (히젠국 시마바라 번. 유신 후 자작)
- 오규 마쓰다이라가 (미카와국 니시오 번. 유신 후 자작)
- * 지카요시류 오규 마쓰다이라가 (분고국 후나이 번. 유신 후 오규(大給)로 개성하여 자작)
- * 노리마사류 오규 마쓰다이라가 (미노국 이와무라 번. 유신 후 자작)
- * 마쓰구류 오규 마쓰다이라가 (시나노국 다쓰오카 번. 유신 후 오규(大給)로 개성하여 자작→백작)
- 타키와키 마쓰다이라가 (가즈사국 사쿠라이 번. 유신 후 타키와키(滝脇)로 개성하여 자작)
- 사쿠라이 마쓰다이라가 (셋쓰국 아마가사키 번. 유신 후 사쿠라이(桜井)로 개성하여 자작)
- 후지이 마쓰다이라가 (데와국 가미노야마 번. 유신 후 자작)
- * 다다하루류 후지이 마쓰다이라가 (시나노국 우에다 번. 유신 후 자작)
도쿠가와 막부는 에도 시대 동안 특정 가문에 명예로운 호칭으로 마쓰다이라 성을 사용할 권한을 부여했다. 이러한 가문에는 후다이 다이묘 가문과 도자마 다이묘 가문 모두 포함되었다.
- '''도자마 다이묘'''
가문 | 영지 |
---|---|
다테 가문 | 센다이 번[26] |
시마즈 가문 | 사쓰마 번[27] |
모리 가문 | 조슈 번 |
마에다 가문 | 가가 번 (그리고 다이쇼지 번, 도야마 번의 지가문) |
야마노우치 가문 | 도사 번 |
구로다 가문 | 후쿠오카 번 |
아사노 가문 | 히로시마 번 (그리고 히로시마 신덴 번의 지가문) |
나베시마 가문 | 사가 번 |
이케다 가문 | 돗토리 번 (그리고 오카야마 번, 시카노 번, 와카자쿠라 번, 히라후쿠 번의 지가문, 그리고 하타모토급 이케다 가문) |
하치스카 가문 | 도쿠시마 번 |
- '''후다이 다이묘'''
또한, 도쿠가와 궁주가 다른 가문에 시집을 갈 경우, 그의 남편은 한 세대 동안 마쓰다이라 성과 도쿠가와 문장을 사용할 권리를 가졌다.
5. 3. 주요 분가
- 카타노하라 마쓰다이라가(탄바국 가메야마 번). 유신 후 자작
- 노미 마쓰다이라가(분고국 기쓰키 번). 유신 후 자작
- 후코즈 마쓰다이라가(히젠국 시마바라 번). 유신 후 자작
- 오규 마쓰다이라가(미카와국 니시오 번). 유신 후 자작
- * 지카요시류 오규 마쓰다이라가 (분고국 후나이 번). 유신 후 오규(大給)로 개성하여 자작
- * 노리마사류 오규 마쓰다이라가 (미노국 이와무라 번). 유신 후 자작
- * 마쓰구류 오규 마쓰다이라가 (시나노국 다쓰오카 번). 유신 후 오규(大給)로 개성하여 자작→백작
- 타키와키 마쓰다이라가(가즈사국 사쿠라이 번). 유신 후 타키와키(滝脇)로 개성하여 자작
- 사쿠라이 마쓰다이라가(셋쓰국 아마가사키 번). 유신 후 사쿠라이(桜井)로 개성하여 자작
- 후지이 마쓰다이라가(데와국 가미노야마 번). 유신 후 자작
- * 다다하루류 후지이 마쓰다이라가 (시나노국 우에다 번). 유신 후 자작
6. 메이지 시대 이후의 마쓰다이라씨
메이지 유신 이후, 여러 마쓰다이라 가문은 화족 제도의 일원이 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생모 전통원과 구마쓰 도시카쓰의 후손인 구마쓰 마쓰다이라 가문은 시모우사 국 다고 번과 이요 국 마쓰야마 번을 다스렸으며, 각각 자작과 백작 작위를 받았다. 이세 국 구와나 번과 이요 국 이마바리 번을 다스린 구마쓰 마쓰다이라 가문도 자작 작위를 받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딸 가메히메와 오쿠히라 노부마사의 후손인 오쿠히라 마쓰다이라 가문은 무사시 국 시노비 번과 고즈케 국 오바타 번을 다스렸고, 각각 자작 작위를 받았다.
이케다 테루마사는 이에야스의 딸 도쿠히메와 결혼하여 마쓰다이라 성을 사용하는 것이 허락되었고, 그의 자손들도 마쓰다이라 성을 사용했다. 이케다 가문 중 도토리 번주 이케다 가문은 메이지 유신 이후 후작 작위를 받았고, 후쿠모토 번 이케다 가문은 남작 작위를 받았다.[37]
6. 1. 왕정복고와 마쓰다이라 성씨
1868년 왕정복고 이후 도쿠가와 이에사토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뒤를 이어 도쿠가와 종가 16대 당주가 되었고,[1]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마쓰다이라 노부노리와 함께 근신 중이었다.[2] 이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 화족 제도가 생기면서 마쓰다이라 성씨를 유지하거나 다시 사용하게 되었다.6. 2. 마쓰다이라씨와 화족
에도 시대 이전에 여러 마쓰다이라 가계는 에도 시대까지 이어졌으며, 그중 일부는 다이묘(大名)가 되었다. 타키와키-마쓰다이라 가문은 오지마 번(荻島藩)의 다이묘가 되었고, 1868년부터 1871년까지는 조자이 번(庄内藩, 사쿠라이 번(桜井藩))을 다스렸다.[10] 나가사와-마쓰다이라 가문(長澤松平家)은 오코치-마쓰다이라(大河内松平家)로도 알려져 있으며 여러 분파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미카와 국(三河国)의 요시다 번(吉田藩)을 다스렸다.[10] 후코즈-마쓰다이라 가문(福重松平家)은 시마바라 번(島原藩)을 다스렸다. 사쿠라이-마쓰다이라 가문(桜井松平家)은 아마가사키 번(尼崎藩)을 다스렸다.[11] 오규-마쓰다이라 가문(奥州松平家)은 많은 분파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오쿠토노 번(奥殿藩)을 다스렸다.
호시나-마쓰다이라 씨는 호시나 마사유키에 의해 창설되었다. 마사유키는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아들로, 다카토 번의 영주 호시나 마사미쓰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마사유키는 이복형제인 도쿠가와 이에미쓰에 의해 도쿠가와 가문의 친족으로 인정받았다. 이에미쓰 사후, 마사유키는 미성년 쇼군 도쿠가와 이에츠나의 섭정으로 일하며 사실상 막부를 통치하였다. 이때 마사유키는 아이즈 번(23만 석의 영지)의 영주가 되었다. 2대 후, 3대 영주 마사카타 시대에 마쓰다이라 성과 휘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가문은 막부의 정무와 에조(현재의 홋카이도)의 경비 임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막말에는 8대 영주 마쓰다이라 가타타카가 페리 제독의 일본 방문 당시와 그 이후의 경비 임무를 지원했으며, 가타타카의 뒤를 이은 9대 영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교토 슈고쇼쿠''를 역임했으나, 보신 전쟁에서 패배하였다. 아이즈-마쓰다이라 씨는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살아남아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24]
에도 막부 개막 이후, 도쿠가와 씨는 마쓰다이라 씨와 혈연 관계가 없는 유력 다이묘에게도 마쓰다이라 성을 사용할 것을 허락했다. 이들 다이묘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마쓰다이라 성을 사용하고, 본래의 성은 사용하지 않았다.
7. 마쓰다이라씨의 본성에 대하여
구 미카와국 가모군 (주게하라번) 마쓰다이라향, 히가시가모군 마쓰다이라무라, 마쓰다이라정 마쓰다이라]]
마쓰다이라씨에 대해, 동시대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3대 마쓰다이라 노부미쓰 이후에 관한 것이며, 그 이전은 불분명하다.
후세의 도쿠가와씨・마쓰다이라씨의 계보에 따르면 마쓰다이라 지카우지는 세이와 겐지의 니타씨의 지류[29]로, 우에노국 니타군 니타쇼 도쿠가와고(에가와(江川), 현재의 군마현 오타시 도쿠가와마치)를 거점으로 하는 도쿠가와 요시스에(세라다 요시스에(世良田義季), 도쿠가와 사부로 요시히데라고도 함)의 후예로서, 시종의 승려였는데, 마쓰다이라향의 영주・마쓰다이라 타로자에몬 쇼이 노부시게의 사위가 되어 그 명적을 이어 마쓰다이라 지카우지를 자칭했다고 한다.
마쓰다이라 노부미쓰는 가모씨 또는 겐지 성을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 가모 성이었던 것을 겐지 성으로 개칭한 것으로 보인다. 세잎 아오이 가문 또한 가모씨에 유래한다고 여겨진다. 7대 기요야스는 세이와 겐지(겐지 조신 세라다 씨)라고 칭하기도 했다. 9대 당주가 된 이에야스는, 이마가와로부터 독립 직후인 에이로쿠 4년(1561년)에 발급한 스가누마 씨에 대한 안도장에서 "겐 겐야스"라고 서명하고 있다.("스가누마가푸"『쿠노산 도쇼구 소장문서』) 에이로쿠 4년부터 6년 사이에, 5점의 정문을 포함한 6점에 "겐지" 서명이 보인다.
이에야스의 도쿠가와 개성과 서임 당시, 요시다 겐우가 만리코지가의 문서를 조사한 결과, 닛타씨 계 도쿠가와 씨가 두 갈래로 나뉘어 한쪽이 "후지와라 성"이 된 선례가 발견되었다. 이 건에는 고노에 마에히사가 관여하고 있으며, 그 경위를 자식인 고노에 노부타다에게 보낸 서장이 현존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에야스의 서작은 "'후지와라 이에야스'"로 행해지고, 이후 이에야스도 후지와라 씨를 사용했다. 가사야 가즈히코는 겐지의 도료(棟梁)인 아시카가 쇼군가에 이에야스가 인연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쇼군가가 당시 당주 부재라는 이례적인 상황을 맞이하고 있어, 주선을 한 고노에 마에히사가 관위 청원을 하기 위해서는 후지와라 씨 일문인 쪽이 유리했던 점을 지적하고 있다.
요네다 유우스케가 관무인 "임성가 문서"에 있는 구선을 조사한 결과, 덴쇼 14년(1585년)의 권중납언 취임 이전의 구선은 모두 후지와라 성이지만, 덴쇼 15년(1586년) 등은 불명이며, 덴쇼 20년(1592년) 9월, 도쿠가와가를 청화의 가격으로 하는 "청화 성립" 발급 시에는 겐지 성이 되고, 이후 일관되게 겐지 성을 사용했던 것이 명확해졌다. 요네다는 겐지 개성을 덴쇼 20년(1592년)으로 보고 있지만, 가사야는 『쥬라쿠 행행기』에서 이에야스가 "대납언 겐 이에야스"라고 서명했다는 기사를 지적하며, 덴쇼 16년(1588년)의 쥬라쿠데이 행행 무렵의 시기라고 보고 있으며,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출가에 의한 쇼군가 소멸이 계기였다고 보고 있다. 이후의 현존하는 발급 문서에서도 겐지 성이다.
8. 마쓰다이라 가계도
wiki
마쓰다이라 성씨를 하사받은 가문은 다음과 같다.[1]
가문명 | 영지 | 비고 |
---|---|---|
전다가 | 가가국 (가나자와번) | 1605년 하사, 메이지 유신 후 후작 |
다테가 | 무쓰국 (센다이번) | 1608년 하사, 메이지 유신 후 백작 |
모리가 | 주부국 (야마구치번) | 1608년 하사, 메이지 유신 후 공작 |
야마우치가 | 도사국 (고치번) | 1610년 하사, 메이지 유신 후 후작 |
구로다가 | 지쿠젠국 (후쿠오카번) | 1612년 하사, 메이지 유신 후 후작 |
하치스카가 | 아와국 (도쿠시마번) | 1615년 하사, 메이지 유신 후 후작 |
시마즈가 | 사쓰마국 (사쓰마번) | 1617년 하사, 메이지 유신 후 공작 |
아사노가 | 아키국 (히로시마번) | 1627년 하사, 메이지 유신 후 후작 |
전다가 | 에치고국 (도야마번) | 1631년 하사, 메이지 유신 후 백작 |
전다가 | 가가국 (다이쇼지번) | 1634년 하사, 메이지 유신 후 자작 |
나베시마가 | 히젠국 (사가번) | 1648년 하사, 메이지 유신 후 후작 |
오카야마 번주 이케다가 | 비젠국 (오카야마번) | 이케다 도시타카 계통, 1608년 하사, 메이지 유신 후 후작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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