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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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종광시는 당나라 말기 진남군 절도사 종전의 아들로, 906년 아버지의 사후 진남군 유후가 되었으나, 회남 절도사 양악에게 멸망했다. 종전의 양자 종연규의 투항과 주전충과의 결탁 모의라는 모함 속에 양악의 공격을 받아 홍주가 함락되었고, 그는 양주로 압송되었다. 양악은 종광시를 용서했지만, 그의 사마 진상은 처형되었다.

종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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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종광시의 출생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 종전은 882년에 강남서도 관찰사 겸 진남군절도사로 임명되어 해당 지역을 다스렸다.

종광시는 894년 아버지에 의해 원주자사로 임명되었으며, 마은의 세력을 공격하는 등 군사 활동에 참여했다. 901년에는 무주(撫州) 자사 위전풍과의 전투 후, 위전풍의 딸과 혼인하여 화평을 맺었다.

906년 아버지 종전이 사망하자, 종광시는 진남군(鎭南軍)의 장병들에 의해 유후(留後)로 추대되어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버지의 양자였던 종연규(鍾延規)는 자신이 후계자가 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회남 절도사 양악에게 투항하며 종광시를 모함했다.

이를 빌미로 양악은 906년 5월 부장 진배(秦裴)에게 진남군 공격을 명령했다. 진배는 종광시의 군대를 격파하고 9월 진남군의 본부인 홍주(洪州)를 함락시켰다. 종광시는 포로로 잡혀 회남도의 본부인 양주(揚州)로 압송되었다. 양악은 종광시를 질책했으나 죽이지는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후 그의 행적과 사망 연대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2.1. 종전의 통치 기간

종광시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그의 아버지 종전은 중화 2년(882년)에 강남서도관찰사, 즉 진남군절도사에 공식 임명되었다. 이는 그가 이미 얼마 전부터 진남군을 장악하고 있던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건녕 원년(894년), 종전은 장남인 종광시를 원주자사로 임명하였다. 종광시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당시 패망했던 군벌 손유의 잔존 세력을 이끌던 마은을 공격하였다.

천복 원년(901년), 종전은 무주(撫州, 현 장시성 푸저우) 자사인 위전풍을 공격하여 무주를 포위하였다. 이후 위전풍은 종전의 명령을 따르기로 하고 화평을 요청하였다. 이 과정에서 위전풍은 자신의 딸을 종광시에게 시집보내 화평의 증표로 삼았다.

2.2. 짧은 통치와 몰락

천우 3년(906년), 아버지 종전이 사망하자 진남군(鎭南軍)의 장병들은 종광시를 유후(留後)로 추대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무안군(武安軍) 절도사 위전풍은 "종광시에게 3년간 절도사 직을 맡기고, 그 다음에는 내가 그 직을 맡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종전의 양자이자 강주(江州, 현재의 장시성 주장 시) 자사였던 종연규(鍾延規)는 자신이 종전의 후계자가 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었다. 그는 회남(淮南) 절도사 양악에게 사신을 보내 투항하였다. 또한 종광시가 당시 강력한 군벌이었던 선무군(宣武軍, 본부는 현재의 하남성 개봉시) 절도사 주전충과 결탁하여 회남도를 공격하려 한다고 주장하며 양악을 자극했다.

906년 5월, 양악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장군이자 승주(昇州) 자사인 진배(秦裴)를 서남행영도초토사(西南行營都招討使)로 임명하고 진남군 공격을 명령했다. 같은 해 7월, 진배는 진남군의 본부인 홍주(洪州, 현재의 강서성 남창시) 인근의 요주(蓼洲)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일부 장수들은 수세를 이용한 방어를 건의했으나, 진배는 종광시의 용맹한 장수인 유초(劉楚)를 유인하여 격파할 생각으로 이를 듣지 않았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종광시의 용맹한 장수는 유초 하나뿐이다. 만약 그가 군대를 거느리고 을 지킨다면, 빠른 시일 내에 성을 함락시킬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일부러 요해처(要害處, 군사상의 요충지)를 이용하여 그를 이곳으로 유인해 온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배는 유초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를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이어 진남군의 본부인 홍주를 포위하였고, 이 과정에서 진남군 관할 중 하나인 요주(饒州) 자사 당보(唐寶)가 진배에게 투항하였다. 906년 9월, 진배는 마침내 홍주를 함락시켰다. 종광시와 그의 사마(司馬) 진상(陳象), 그리고 진남군 장병 5,000명은 포로로 잡혀 회남도의 본부가 있는 양주(揚州)로 압송되었다. 양악은 스스로 진남군 절도사를 겸임하였고, 진배를 홍주제치사(制置使)로 삼아 점령지를 관리하게 했다.

종광시와 진상이 양주로 압송되자, 양악은 종광시에게 왜 더 일찍 항복하지 않았냐고 질책했다. 종광시는 머리를 조아리며 죽음을 청하였다. 양악은 그의 태도를 가엾게 여겨 목숨은 살려주었으나, 그의 참모였던 진상은 저잣거리에서 참수형에 처했다.

이 사건 이후 종광시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정사에서 찾아볼 수 없으며, 언제 사망했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