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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고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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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고후는 명나라 영락제의 둘째 아들로, 1380년에 태어났다. 그는 정난의 변에서 아버지 주체를 도와 공을 세웠으며,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아 한왕에 봉해졌지만, 봉지 부임을 거부하고 조정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홍희제와 선덕제 치세 동안 황위 찬탈을 시도하다 발각되어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처형되었으며, 그의 가족들도 모두 죽임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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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고후
기본 정보
영락제
영락제
이름주 고후 (朱高煦)
시호소 (昭)
봉호
초봉고양왕 (高陽王)
개봉한왕 (漢王)
작위
생애
출생1380년 12월 30일
사망1426년 10월 6일 (향년 45세)
아버지영락제
어머니인효문황후 서씨
정치 경력
재위1404년 ~ 1426년 (한왕)
이전 작위고양왕 (1395년 ~ 1404년)
가족 관계
배우자미상
자녀정보 없음
기타
로마자 표기Zhū Gāoxù

2. 생애

영락제의 둘째 아들이자 홍희제의 동생이다. 무용이 뛰어났고, 용모 또한 아버지를 닮아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았다고 한다. 이민족 토벌 등에서 활약했으며, 1399년 정난의 변에서는 대장으로서 주체(후의 영락제) 군을 이끌었다. 건문제 측이 유리한 전황이 되자 여러 장수들이 강화를 논의했을 때, 이들을 위협하여 아버지를 독려해 승리에 기여했다.

1425년 홍희제가 재위 1년 만에 죽자, 그의 아들인 선덕제가 즉위했다. 소외감과 억울함을 느낀 주고수는 아버지 주체처럼 황위를 찬탈하기로 결심하고 군대를 모았다. 그는 어린 황제가 자신의 계획에 큰 장애물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1] 그러나 주고수는 약한 입장에 있었고, 경험 많은 관리(대신 양융)가 이끄는 정부와 어린 황제의 능력을 과소평가했다. 1426년 9월, 주고수는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황제는 장군 설록(薛禄, 1358-1430)이 이끄는 2만 명의 군대를 직접 이끌고 낙안으로 가서 반란군을 진압했다.[1] 주고수는 투옥되었고, 그의 추종자 600명이 처형되었으며 2200명이 유배되었다.[1]

이후 조사에서 영락제의 셋째 아들인 주고수이와 다른 여러 왕자들이 반란에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으나, 국가의 안정을 위해 처벌받지 않았다.[1] 선덕제는 처음에 삼촌을 죽이려 하지 않았으나, 포로 상태에서도 오만한 주고수의 태도에 격분하여 그와 아들들을 처형하도록 명령했다.[1]

2. 1. 초기 생애와 정난의 변

주고수는 1380년 연왕(燕王) 주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주체는 명나라를 건국한 홍무제의 넷째 아들이었다. 1395년 고양왕(高陽王)에 봉해졌다. 1399년 주체는 조카인 건문제에게 반기를 들었고, 이후 일어난 내전은 1402년 주체의 승리로 끝났으며, 그는 황제에 올랐다. 건강하고 활기 넘치는 성격이었지만 거만하기도 했던 주고수는 전투에서 뛰어난 군사 지휘관임을 증명했다.[1]

정난의 변 후 주체가 즉위하자, 구복 등 여러 장수들로부터 유약한 성격이었던 주고척을 폐태자로 하고 주고수를 태자로 세우자는 추천을 받았다. 그러나 주고서는 급하고 거친 성격이었고, 영락제도 주고척의 유약함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아들 주첨기의 자질을 인정하여 태자 책봉은 보류되었다. 영락제 즉위 후 운남(미얀마) 지방의 고양왕에 봉해졌으나, 주고서는 부임을 거부하고 베이징에 머물면서 아버지의 친정에 계속 참여하여 무공을 세웠다. 후에 운남에서 락안주로 부임지가 한왕으로 변경되었지만, 이것도 거부하고 베이징에 머물렀다.

1404년, 한왕(漢王)에 봉해져 운남을 통치하게 되었으나, 먼 변방으로 가기를 거부했고, 황제는 그가 조정에 머물도록 허락했다.[1] 주고수는 이후 북쪽 국경에서 몽골과의 여러 전투에 성공적으로 참여하여 군사적 공적으로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또한 조정 정치에 개입하여 형인 주고치(朱高熾, 후일의 홍희제)와 그를 지지하는 신하들의 지위를 약화시키려고 시도했다. 1407년 계진이라는 신하의 파면에 성공했고,[1] 1414년에는 그의 적대감으로 인해 황회(黃淮)와 양식기(楊士奇)라는 대신들이 10년 동안 투옥되었는데, 양식기는 나중에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고 관직에 복귀했다.[1]

1416년 산동성 청주부의 작은 현인 낙안(樂安)에 새로운 봉지를 받았으나, 떠나기를 거부했고 징계를 받았다. 사병을 불법적으로 조직하고 장교를 살해한 결과, 백성으로 강등되어 투옥되었다. 1년 후 산동으로 유배되었다.[1]

2. 2. 영락제 치세

정난의 변에서 주고후는 대장으로서 주체(후의 영락제) 군을 이끌었다. 건문제 측이 유리한 전황이 되자 여러 장수들이 강화를 논의했을 때, 이들을 위협하여 아버지를 독려, 승리에 기여했다.[1]

정난의 변 후 주체가 즉위하자, 구복 등은 주고척을 폐태자하고 주고서를 태자로 세울 것을 추천했다. 그러나 주고서는 급하고 거친 성격이었고, 영락제는 주고척의 유약함을 알았지만 그의 아들 주첨기의 자질을 인정하여 태자 책봉은 보류했다. 영락제는 주고서의 성격 때문에 그를 꺼렸지만, 즉위의 공로로 운남(미얀마) 지방의 고양왕에 봉했다. 그러나 주고서는 부임을 거부하고 베이징에 머물면서 아버지의 친정에 계속 참여하여 무공을 세웠다. 후에 운남에서 락안주로 부임지가 한왕으로 변경되었지만, 이 역시 거부하고 베이징에 머물렀다.[1]

1404년, 한왕(漢王)에 봉해져 운남 통치를 명받았으나, 먼 변방으로 가기를 거부하여 조정에 머무는 것을 허락받았다. 이후 북쪽 국경에서 몽골과의 전투에 여러 번 참여하여 군사적 공적을 쌓아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또한 조정 정치에 개입하여 형인 주고치(朱高熾, 후일의 홍희제)와 그 지지 세력의 지위를 약화시키려 했다. 1407년 계진이라는 신하를 파면시키는 데 성공했고, 1414년에는 황회(黃淮)와 양식기(楊士奇)를 10년간 투옥시켰다. 양식기는 후에 명예를 회복하고 관직에 복귀했다.

1416년 산동성 청주부 낙안(樂安)에 새로운 봉지를 받았으나, 역시 떠나기를 거부하여 징계를 받았다. 사병을 불법적으로 조직하고 장교를 살해한 결과, 백성으로 강등되어 투옥되었다가 1년 후 산동으로 유배되었다.

2. 3. 홍희제와 선덕제 치세, 그리고 반란

홍희제는 1424년 영락제가 죽자 즉위하였으나, 재위 8개월 만에 사망하였다. 홍희제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인 주첨기가 선덕제로 즉위하였다. 주고후는 선덕제의 즉위를 계기로 사병을 이용하여 황위 찬탈을 계획했지만, 사전에 계획이 발각되어 선덕제에게 체포되었다.[2]

주고후는 정난의 변에서 큰 공을 세웠다. 구복 등 여러 장수들은 유약한 성격이었던 홍희제(주고치)를 폐태자로 하고 주고후를 태자로 세울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주고후는 급하고 거친 성격이었고, 영락제는 주고치의 유약함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아들 주첨기(후의 선덕제)의 자질을 인정하여 태자 책봉은 보류되었다. 영락제는 주고후의 성격 때문에 그를 꺼렸지만, 영락제 즉위에 대한 상으로 운남(미얀마) 지방의 고양왕에 봉했다. 하지만 주고후는 부임을 거부하고 베이징에 머물면서 아버지의 친정에 계속 참여하여 무공을 세웠다. 후에 운남에서 낙안주로 부임지가 한왕으로 변경되었지만, 이것도 거부하고 베이징에 머물렀다.[2]

1416년, 산동성 청주부의 작은 현인 낙안(樂安)에 새로운 봉지를 받았지만 그는 떠나기를 거부했고 징계를 받았다. 사병을 불법적으로 조직하고 장교를 살해한 결과, 그는 백성으로 강등되어 투옥되었다. 1년 후 그는 산동으로 유배되었다.[1]

소외감과 억울함을 느낀 주고후는 아버지 주체처럼 황위를 찬탈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어린 황제가 자신의 계획에 심각한 장애물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1] 주고후는 수도로 진격하여 황위를 찬탈할 준비를 하며 군대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와 달리 그는 약한 입장에 있었고, 경험 많은 관리 (대신 양융)가 이끄는 정부와 어린 황제의 능력을 과소평가했다. 1426년 9월, 주고후는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황제는 장군 설록(薛禄, 1358-1430)이 이끄는 2만 명의 군대를 직접 이끌고 낙안으로 가서 반란군을 진압했다.[1] 주고후는 투옥되었고, 그의 추종자 600명이 처형되었고 2200명이 유배되었다.[1]

이후 조사에서 영락제의 셋째 아들인 주고수이와 다른 여러 왕자들이 반란에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다. 국가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은 처벌받지 않았다.[1]

선덕제는 숙부인 주고후의 목숨을 살릴 것을 고려했지만, 주고후는 무죄를 주장했고, 더욱이 각 방면과 연락을 취하려 했으며, 선덕제와 면담했을 때 발로 차는 등의 난폭한 모습을 보인 것이 결정타가 되어 결국 사형을 선고받았다. 선덕제는 처음에 주고후를 무게 300근 이상의 구리 가마에 가두었는데, 괴력의 주고후가 뚜껑을 움직였기 때문에, 선덕제는 구리 가마 주위에 숯을 쌓아 불을 지폈다. 타오른 숯불에 구리 가마는 녹아내리고, 그 안에 있던 주고후도 함께 녹아 죽었다고 한다.[2] 그의 가족들도 모두 죽임을 당했다.[2]

2. 4. 최후

선덕제 즉위 후, 주고서는 사병을 이용하여 황위를 찬탈하려 했으나 사전에 계획이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선덕제는 숙부인 주고서의 목숨을 살리려 했지만, 주고서는 무죄를 주장하며 각 방면과 연락을 시도했다. 또한 선덕제와의 면담에서 발로 차는 등의 난폭한 행동을 보여 결국 사형을 선고받았다.[2]

선덕제는 처음에 삼촌인 주고서를 죽이려 하지 않았으나, 포로 상태에서도 오만한 태도에 격분하여 그와 그의 아들들을 처형하도록 명령했다.[1] 주고서는 무게 300근(약 180kg)이 넘는 구리 가마에 갇혔으나, 괴력으로 뚜껑을 움직였다. 이에 선덕제는 구리 가마 주위에 숯을 쌓아 불을 지폈고, 숯불에 달궈진 구리 가마와 함께 주고서는 녹아 죽었다.[2] 그의 나이 47세였으며, 가족들 또한 모두 죽임을 당했다.[2]

3. 가족 관계

배우자자녀
정비 위씨(韋氏)[1]
곽씨(郭氏)
등씨(鄧氏)
이름 미상


3. 1. 아들


  • 정비 위씨 소생
  • 주첨학(朱瞻壑): 의장세자(懿莊世子). 1421년에 사망.
  • 주첨기(朱瞻圻): 1421년에 세자로 책봉. 1425년에 평민으로 강등되어 유폐. 1426년에 아버지와 함께 처형.
  • 주첨탄(朱瞻坦): 1424년에 세자로 책봉.
  • 첩 곽씨 소생
  • 첩 등씨 소생
  • 이름 미상
  • 주첨자(朱瞻垐): 1424년에 제양군왕(濟陽郡王)으로 책봉.
  • 주첨역(朱瞻域): 1424년에 임치군왕(臨淄郡王)으로 책봉.
  • 주첨역(朱瞻墿): 1424년에 치천군왕(淄川郡王)으로 책봉.
  • 주첨성(朱瞻垶): 1424년에 창락군왕(昌樂郡王)으로 책봉.
  • 주첨평(朱瞻坪): 1424년에 제동군왕(齊東郡王)으로 책봉.
  • 주첨도(朱瞻壔): 1424년에 임성군왕(任城郡王)으로 책봉.
  • 주첨장(朱瞻㙊): 1424년에 해풍군왕(海豊郡王)으로 책봉.
  • 주첨방(朱瞻垹): 1424년에 신태군왕(新泰郡王)으로 책봉.

4. 가계도

1세대2세대3세대4세대5세대
주고후(1380–1426)영락제(1360–1424)홍무제(1328–1398)주시진(1281–1344)주초일(朱初一)
문소황후 서씨(1362–1407)마황후(1332–1382)순황후(1286–1344)유황후(兪皇后)
서달(1332–1385)서류사(徐柳思)진공(陳公) (1235–1334)
협씨(謝氏)채씨(蔡氏)
사재흥(謝再興)서사기(徐思齊)
정씨(鄭氏)주씨(周氏)


참조

[1] 서적 Guochao xianzheng lu
[2] 서적 酷刑 徳間書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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