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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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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창왕은 고려의 제33대 왕으로, 1388년 우왕이 폐위된 후 조민수, 이성계 등의 추대로 9세의 나이에 즉위했다. 이성계의 섭정 하에 개혁을 시도했으나, 신진 사대부와의 갈등과 우왕 복위 시도 혐의로 1389년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된 후 시해되었다. 이성계는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후,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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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왕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왕창
한자昌王
로마자 표기Chang-wang
한국어 매큔-라이샤워 표기Ch'ang-wang
왕창(王昌)
즉위 정보
왕조고려
대수제33대 국왕
즉위일1388년 7월 12일
퇴위일1389년 12월 2일
생애
출생1380년 9월 6일
출생지개경
사망1389년 12월 31일
사망지강화도
가족 관계
아버지우왕
어머니근비 이씨

2. 생애

우왕과 근비의 외아들로, 1388년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 등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3][4]

1388년 6월부터 1389년 11월까지 재위하는 동안 조민수, 이색 등이 이끄는 보수 개혁파와 이성계, 정도전 등이 이끄는 급진 개혁파 사이에서 중재하려 했으나, 이성계의 탄핵으로 이색이 정치적 권력을 잃으면서 권위를 잃었다.[3]

1389년 11월, 우왕이 이성계를 암살하려 했다는 소문이 돌면서[5] 왕위에서 물러나야 할 이유가 되었다.[3] 공양왕 즉위 직후 아버지 우왕과 함께 유배지에서 암살되었는데, 이때 창왕의 나이는 9세였다.[6][7]

2. 1. 즉위와 폐위 배경

우왕의 외아들로, 어머니는 이림의 딸 근비이다.[3] 이름은 '''창'''(昌)이며, 왕의 칭호가 붙어 창왕으로 불린다. 정식 시호는 없으며, 폐가입진(廢假立眞)과 관련이 있다. 훗날 고려 유신들이 '''윤왕'''(允王)이라 불렀으나 이는 비공식 시호인 사시(私諡)에 해당된다. '''후폐왕'''(後廢王)이라고도 불린다.[8]

1388년 위화도 회군 직후 이성계, 정도전, 정몽주 등에 의해 우왕이 강제로 폐위되고 강화도로 추방되자, 조민수, 이성계, 이색의 추천으로 정비(定妃: 공민왕비)의 교(敎)를 받아 즉위하였다. 이때 창왕의 나이는 9세였다.[4]

1388년 6월부터 1389년 11월까지의 재위 기간 동안 창왕은 개혁의 큰 혼란을 겪었다. 보수 개혁을 원하는 파와 급진 개혁을 원하는 파, 두 파벌이 있었는데, 전자는 조민수이색이 이끌었고, 후자는 이성계정도전이 이끌었다. 창왕은 두 파벌 사이에서 중재하려 했으나, 이성계의 탄핵으로 이색이 정치적 권력을 잃으면서 창왕은 권위를 잃었고, 이성계가 고려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 되었다.[3]

1389년 11월, 전 우왕이 이성계를 암살하려 했다는 소문이 돌았고[5], 이는 창왕이 왕위에서 물러나야 할 이유가 되었다.[3] 결국 창왕은 재위 1년 만에 이성계 일파에 의해 폐위되었다. 이후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집행관 유순에게 시해되었다.[7] 공양왕이 즉위한 직후에는 아버지 우왕과 함께 유배지에서 암살되었다.[6]

2. 2. 신진 사대부의 정권 장악

1388년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사헌부·판도사(版圖司)는 권문세족들이 장악하여 유명무실화된 토지제도를 바로잡는 방법을 의논하여 보고하게 하였다. 공부(貢賦)의 법이 문란하여져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므로 모든 공물을 면하게 하고, 공물 징수를 다시 조정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 각 도의 원수(元帥)·도순문사(都巡問使)·안렴사(按廉使) 등이 군민(軍民)들로부터 사적인 목적으로 선물이나 공물을 취하는 것을 금지시켜 이를 위반하는 자는 죄를 주게 하였다.[3] 회뢰(賄賂)가 성행하는 것을 엄히 금지하게 하고, 형벌을 신중히 처리하게 하였다.[3]

그러나 신진사대부는 계속 자신들의 개혁 정책을 왕에게 상주하여 허락할 때까지 엎드려 있으면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해 수창궁(壽昌宮)의 '창'(昌)자를 피휘하여 이를 고치게 하여 수령궁(壽寧宮)이라 고치고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해 대사헌 조준(趙浚)이 전제(田制)가 고르지 못한 데에서 오는 여러 가지 폐단을 들어 상서(上書)하였고, 간관 이행(李行), 판도판서(版圖判書) 황순상(黃順常), 전법판서(典法判書) 조인옥(趙仁沃) 등도 사전(私田)의 폐단을 논하고, 농지를 농민에게 줄 것을 청하자 이를 수락하였다.[3]

군부의 성장을 염려하여 무신정권의 상설기구인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상서사(尙瑞司)를 두었으며, 또 급전도감(給田都監)을 설치하였다.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이행 등이 첨설직(添設職)을 군공(軍功) 이외에는 그 임명을 금지할 것을 청하자 수용하였고, 전선법(銓選法)을 복구하여 문무(文武)의 전주(銓注)는 이부와 병부에서 시행하도록 하였다. 또, 우상시(右常侍) 허응(許應)이 균전(均田)의 강행을 상소하였다. 대사헌 조준이 상서하여 기인(其人)의 제도가 그들을 노예와 같이 사역하여 그 고통이 심하여 도망하는 자까지 있게 됨을 들어 그 시정을 청하자 이를 수용하였다. 신진사대부들의 개혁 정책을 수용하면서도 이들을 내심 경계하던 그는 근신들을 비밀리에 파견하여 부왕 우왕의 복위운동을 추진한다.[3]

전법판서 조인옥이 상소하여 사원(寺院)의 토지수입과 노비의 고용은 그 소재하는 관(官)에서 수납하여 승도(僧徒)의 수를 헤아려 지급하고, 인가(人家)에 유숙하는 중은 범간(犯奸)으로 논하며, 귀천(貴賤)의 부녀는 절에 가는 것을 금하여 위반하는 자는 실절(失節)로써 논하고, 부녀로서 중이 되는 자는 실행(失行)으로써 논하며, 향리(鄕吏)·역리(驛吏)·노비로서 중이 되는 것을 금지할 것을 청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신진사대부들의 주장을 그는 수용하게 되었고 조정은 신진사대부가 장악하게 되었다.[3]

2. 3. 외교와 국방

왜구가 남해안을 자주 노략한다는 상소가 올라오자 1389년 1월 경상도원수 박위(朴葳)에게 명하여, 병선 100척을 내주고 대마도를 정벌하게 하였다.[1]

1389년 8월 유구국(琉球國) 중산왕(中山王) 밀도(密度)가 사신 옥지(玉之)를 고려에 보내자 직접 사신을 인견하고 그를 후히 접대하도록 하였다.[1] 창왕은 유구국의 사신을 후히 대접한 뒤 같은 해 전객령(典客令) 김윤후(金允厚) 등을 사신으로 유구국에 보내어 답례하게 하였다.[1]

2. 4. 폐위와 죽음

1388년 이성계가 우왕을 폐위시키고 9세의 나이로 창왕을 즉위시켰으나, 1389년 재위 1년 만에 이성계 일파에 의해 폐위되었다.[8] 1389년 11월 아버지 우왕과 모의해 이성계를 암살하려 했다는 사건이 발각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집행관 유순에게 시해되었다.[8]

1389년 초 이성계, 정도전 등은 창왕 역시 가짜 왕이라고 주장하며, 우왕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고 따라서 우왕과 창왕이 왕씨(王氏)가 아니고 신씨(辛氏)라 하여 그를 폐위시켰다.[8] 정몽주 등도 1389년(창왕 2년) 11월 다시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었으며, 이때 이성계 일파가 새로운 왕을 세우려 하자 이성계 등과 함께 폐가립진을 주장하며 신종의 6대손 정원부원군의 차남 정창군 왕요를 공양왕으로 영립(迎立)하는데 동조하였다.

1389년 12월 우왕은 강릉에서, 창왕은 강화에서 참수형이 집행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8] 창왕은 공양왕이 즉위한 직후 아버지와 함께 유배지에서 암살되었다.[6] 창왕의 나이는 9세였다.[7]

3. 가족 관계

인물생몰년부모비고
우왕1365년 - 1389년공민왕, 반야고려 제32대 국왕
근비 이씨생몰년 미상이림, 변한국대부인 홍씨


4. 기타

창왕은 정식 시호가 없으며, 폐가입진(廢假立眞)과 관련하여 고려 유신들이 비공식 시호인 사시(私諡)로 '윤왕'(允王)이라 불렀다. '후폐왕'(後廢王)이라고도 불린다.[8]

정몽주는 1392년 고려 멸망과 역성혁명에는 반대했으나, 이성계, 정도전, 조준 등이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폐위하는 데는 가담했다. 이성계 일파는 폐가입진(廢假立眞), 즉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는 논리로 창왕을 폐위시키고, 신종의 7세손 정창군 요를 왕위에 앉혔다.[9] 이성계 일파의 주장은 고려사, 고려사절요에도 신우, 신창으로 등재되었으나 근거 없는 낭설로 확인된다.

우왕 복위 사건은 주모자와 처리 과정에 의문이 남지만, 정몽주이성계와 뜻을 같이하여 공양왕을 세우고, '폐가입진'을 내세워 우왕과 창왕을 왕씨가 아닌 신돈의 후손으로 모는 작업에도 동참했다.[10] 우왕과 창왕이 왕위에 오를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이성계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정치적 필요에 의해 그들을 신돈의 후손으로 몰아 죽였는데, 정몽주 역시 여기에 동의한 것이다.[10] 정몽주는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후손이라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지만, 아니라는 반론도 제시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주장한 일편단심이나 성리학적 충효 사상과도 모순된다.

5. 창왕이 등장하는 작품

참조

[1] 서적 http://db.history.go[...] 2021-02-26
[2] 웹사이트 https://ncms.ncultur[...] 2021-08-01
[3] 웹사이트 http://contents.hist[...] 2022-10-31
[4] 뉴스 Choe Yeong, the Victorious General of Goryeo Dynasty https://world.kbs.co[...] 2024-02-05
[5] 뉴스 http://www.nhtimes.c[...] 2024-02-06
[6] 뉴스 http://www.nhtimes.c[...] 2024-02-06
[7] 서적 Cheongmoksan 2008
[8] 문서 조선 후기에 편찬된 개성왕씨 성원록에는 우왕을 폐왕, 창왕을 후폐왕이라 각각 칭하였다.
[9] 서적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웅진닷컴 2004
[10] 서적 내일을 여는 역사 제11호 서해문집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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