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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세르비아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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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세 세르비아 공국은 6세기와 7세기 발칸 반도에 슬라브족이 정착한 이후 형성된 초기 중세 세르비아의 국가이다. 최초의 세르비아 통치자는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보호를 받았으며, "세르비아의 공작" 칭호를 사용했다. 비셰슬라브는 알려진 최초의 세르비아 통치자로, 그의 아들 라도슬라프와 손자 프로시고이가 뒤를 이었다. 블라스티미르 치세에 불가리아를 격파하며 세르비아의 위상이 높아졌고, 그의 아들 무티미르, 스트로이미르, 고이닉이 통치권을 분할했다. 892년 페타르 고이니코비치가 권력을 잡았고, 이후 불가리아와 비잔티움 제국의 세력 다툼 속에서 파블레, 자하리야가 통치했다. 차슬라브는 불가리아의 지배를 종식시키고 영토를 확장했으나, 헝가리인의 침입으로 사망하면서 공국은 붕괴되었다. 이후 세르비아는 비잔틴 제국에 병합되어 라스 카테파노로 재편성되었고, 두클랴가 부상하며 세르비아의 역사는 이어진다. 세르비아는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동방 정교회의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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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세르비아 공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공식 명칭세르비아 공국
현지 명칭 (키릴 문자)Кнежевина Србија
현지 명칭 (라틴 문자)Kneževina Srbija
일반 명칭세르비아
역사
성립780년
사건 시작설립
멸망960년
사건 종료비잔티움 제국 합병
이전 국가비잔티움 제국
이후 국가라스의 카테파나트
이후 국가 2두클랴
이후 국가 3세르비아 대공국
지도
850년 발칸반도 지도에서 갈색으로 표시된 블라스티미르 통치 시기의 세르비아
850년 동남유럽 지도에서 블라스티미르 공작 통치 시기의 세르비아 (갈색으로 표시)
정치
정치 체제군주제
통치자 칭호크냐즈(공작)
최초 통치자비셰슬라브 (이름이 알려진 최초의 통치자)
최초 통치자 재임 기간780년
주요 통치자블라스티미르
주요 통치자 재임 기간831년–850년
최초 기독교 통치자무티미르
최초 기독교 통치자 재임 기간850년–891년
마지막 통치자차슬라브
마지막 통치자 재임 기간933년–943년/960년
언어 및 종교
공용어고대 세르비아어
종교슬라브 신화(860년대 이전)
종교 2기독교(약 870년)
수도
수도여러 도시 (데스티니콘)
기타
통화없음 (당시 통용 화폐 정보 부재)
인구자료 없음
민족세르비아인, 세르비아 민족

2. 배경

슬라브족(스키라베노이)은 6세기와 7세기 동안 발칸 반도 전역에 정착하여[1] 이 지역에서 초기 비잔틴 통치의 종말을 알렸다.[2] 초기 중세 세르비아 공국과 블라스티미로비치 왕조의 역사는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누스 7세 포르피로게니투스 (재위 913–959)가 편찬한 저서 《제국 통치론》(De Administrando Imperio, 약칭 "DAI")에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최초의 세르비아 통치자(관례적으로 "미상의 아르콘"으로 알려짐)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그는 백색 세르비아인을 동남 유럽으로 이끌었고, 불가르 침공 (680) 이전에 황제 헤라클리우스 (재위 610–641)의 보호를 받았다.[3][4] 세르비아 통치자는 "세르비아의 공작 (''아르콘'')" (αρχων Σερβλίας)이라는 칭호를 받았다.[5] DAI는 이 통치자의 뒤를 아들이 잇고, 그 다음 손자가 이었다고 언급하며, 역사가들은 동일 가문의 공작 계승에 대한 DAI의 설명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이지만, 비셰슬라브 (780-800경)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들의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다.[6]

3. 초기 통치자 (780년경–830년경)

초기 세르비아는 지방 공동체 연합체인 '주페'로 조직되었으며, 각 주페는 세습 주판이 다스렸다.[2] 주판은 세르비아 공에게 보고하고 전쟁 시 그를 도와야 했다.[2]

814년경의 슬라브 공국


이름이 알려진 최초의 통치자는 비셰슬라프로, 샤를마뉴 (768–814년)와 동시대 인물이었다.[1] 비셰슬라프 시대에 세르비아인들은 비잔티움 제국 황제를 섬겼고, 이웃 불가리아와 평화롭게 지냈다.[3] 텔레릭 치하의 불가리아는 베르지티 슬라브족을 식민지화하려 했으나, 762년 20만 명 이상이 비잔티움 영토로 도망쳐 소아시아로 이주했다.[5] 783년에는 마케도니아에서 펠로폰네소스에 걸쳐 비잔틴 제국에서 대규모 슬라브 봉기가 일어났지만, 스타우라키오스에게 진압되었다.[6]

비셰슬라프의 뒤를 이어 아들 라도슬라프와 손자 프로시고이가 통치했다.[1] 이들 중 한 명이 류데비트 포사브스키의 프랑크 왕국에 대한 반란(819–822) 동안 통치했을 가능성이 높다.[2] 822년에 쓰여진 아인하르트의 ''왕실 프랑크 연대기''에 따르면, 류데비트는 시사크에서 세르비아인들에게 갔으며, 아인하르트는 세르비아인에 대해 "달마티아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라고 언급했다.[3] 지브코비치에 따르면, ''왕실 프랑크 연대기''에서 달마티아라는 용어를 세르비아인이 통치하는 땅과 크로아티아 공작이 통치하는 땅 모두를 지칭하는 데 사용한 것은 프랑크 왕국이 전 로마 제국 달마티아 속주의 전체 지역에 대한 영토적 야망을 반영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4]

3. 1. 비셰슬라프 (780년경)

샤를마뉴 (768–814년)와 동시대 인물인 비셰슬라프는 이름이 알려진 최초의 세르비아 통치자였다.[1] 당시 세르비아인들은 ''주페''(단수형 ''주파'')라는 지방 공동체 연합체로 조직되었고, 세습 ''주판''이 이들을 다스렸다.[2] ''주판''은 세르비아 공에게 보고하고 그를 도와야 했다.[2]

비셰슬라프는 이름으로만 언급되었지만, 세르비아인들은 비잔티움 제국 황제를 섬겼고, 이웃 불가리아와 평화롭게 지냈다.[3] 텔레릭 치하의 불가리아는 베르지티 슬라브족을 식민지화하려 했으나,[4] 762년 20만 명 이상이 비잔티움 영토로 도망쳐 소아시아로 이주했다.[5] 783년에는 마케도니아에서 펠로폰네소스에 걸쳐 비잔틴 제국에서 대규모 슬라브 봉기가 일어났지만, 스타우라키오스에게 진압되었다.[6]

3. 2. 라도슬라프와 프로시고이 (800년경–830년경)

비셰슬라프의 아들 라도슬라프가 계승하였고, 라도슬라프는 그의 손자 프로시고이에게 계승되었다.[1] 이들 중 한 명이 류데비트 포사브스키의 프랑크 왕국에 대한 반란(819–822) 동안 통치했을 가능성이 높다.[2] 822년에 쓰여진 아인하르트의 ''왕실 프랑크 연대기''에 따르면, 류데비트는 시사크에 있는 그의 자리에서 세르비아인들에게 갔으며, 아인하르트는 세르비아인에 대해 "달마티아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ad Sorabos, quae natio magnam Dalmatiae partem obtinere dicitur'')라고 언급했다.[3] 지브코비치에 따르면, ''왕실 프랑크 연대기''에서 달마티아라는 용어를 세르비아인이 통치하는 땅과 크로아티아 공작이 통치하는 땅 모두를 지칭하는 데 사용한 것은 프랑크 왕국이 전 로마 제국 달마티아 속주의 전체 지역에 대한 영토적 야망을 반영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4] 설명된 경계는 넓은 지역을 표시하지만, 대부분은 험준한 산악 지형으로 디나리데스 산맥의 높은 봉우리로 험하다. 이 지역 내에서 세르비아인들은 작고 고립되어 서로 멀리 떨어진 강 계곡, 카르스트 지형 및 비옥한 분지에만 정착했다. 그 영토의 일부는 농업에 적합한 비옥한 토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접근하기 어려운 일부 산악 지역은 사람이 살지 않았다.[5]

4. 불가리아와의 관계 (805년–829년)

동쪽에서는 불가리아 제국이 강성해졌다. 805년 크룸은 세르비아 동쪽에 있는 브라니체브치, 티모차니, 오보트리테스를 정복했다.[1] 815년, 불가리아와 비잔틴은 30년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오무르타그(814–836)의 통치 기간인 818년에 브라니체브치와 티모차니는 국경 지대의 다른 부족들과 함께 행정 개혁으로 인해 지역 권한을 많이 빼앗겼기 때문에 불가리아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이탈했다.[1] 티모차니는 불가리아 제국의 '사회'(협회, 동맹[2])에서 탈퇴하여, 다뉴브 강 유역의 오보트리테스와 구두스카니와 함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경건왕 루이(재위 813–840)에게 보호를 요청했고, 헤르스탈에 있는 그의 궁정에서 만났다.[2] 티모차니는 프랑크 영토, 하부 판노니아 어딘가로 이주했고, 819년에 마지막으로 언급되었는데, 이때 류데비트의 설득으로 프랑크족과 싸우는 데 합류했다.[2] 다뉴브 강 유역의 오보트리테스는 바나트에 머물면서 824년까지 불가리아에 저항했고, 그 후 그들에 대한 언급은 더 이상 없었다.[3]

불가리아 제국은 인접 민족에게 조공을 부과하고 동맹(사회)의 형태로 군사 지원을 제공하게 하고, 그들에게 자치 정부와 지역 통치자를 남겨두는 팽창 정책을 시행했다.[5]

4. 1. 불가리아의 팽창

805년 크룸은 세르비아 동쪽에 있는 브라니체브치, 티모차니, 오보트리테스를 정복하고, 부족장들을 추방한 뒤 중앙 정부가 임명한 행정관으로 교체했다.[1] 815년, 불가리아와 비잔틴은 30년 평화 조약을 체결했지만, 오무르타그(814–836)의 통치 기간인 818년에 브라니체브치와 티모차니는 국경 지대의 다른 부족들과 함께 행정 개혁으로 인해 지역 권한을 많이 빼앗겼기 때문에 불가리아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이탈했다.[1] 티모차니는 불가리아 제국의 '사회'(협회, 동맹[2])에서 탈퇴하여, 다뉴브 강 유역의 오보트리테스와 구두스카니와 함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경건왕 루이(재위 813–840)에게 보호를 요청했고, 헤르스탈에 있는 그의 궁정에서 만났다.[2]

5. 블라스티미르, 무티미르, 프르보슬라프 (830년–892년)

블라스티미르는 비셰슬라프의 증손자로, 830년경부터 851년경까지 세르비아를 통치했다. 그는 주변 세르비아 부족들을 통합하고 불가리아의 침공을 막는 데 성공했다.[4] 세르비아의 통치자는 "세르비아의 공작(''archon'')"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4] 세르비아 역사학에서는 슬라브어 칭호인 ''knez''(кнез)를 그리스어 ''arhont''(архонт) 대신 사용한다.[5]

블라스티미르의 아들인 무티미르(재위 851년경–891년경)는 두 형제 sr, sr과 함께 세르비아를 공동 통치했다. 이들은 보리스 1세가 이끄는 불가리아 군대를 격파하고 평화 조약을 맺었으며, 이 시기에 세르비아가 기독교화되었다.[1] 이후 무티미르는 형제들을 불가리아로 추방하고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1]

무티미르의 아들 프르보슬라프는 891년부터 892년까지 1년간 세르비아를 통치했다.

5. 1. 블라스티미르 (830년경–851년경)

블라스티미르는 비셰슬라프의 증손자이다. 은 830년경부터 851년경까지 세르비아를 통치했다. 세르비아의 통치자는 "세르비아의 공작(''archon'')"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4] 세르비아 역사학에서는 슬라브어 칭호인 ''knez''(кнез)를 그리스어 ''arhont''(архонт) 대신 사용한다.[5]

5. 2. 무티미르와 형제들 (851년경–891년경)

Мутимир|무티미르sr와 그의 두 형제 sr, sr은 블라스티미르의 아들들로, 851년경부터 891년경까지 세르비아를 공동 통치했다.[1] 블라스티미르 사후 세르비아의 통치권을 분할하여 다스렸다.[1]

형제들은 보리스 1세가 이끄는 불가리아 군대를 격파하고 평화 조약을 맺었다.[1] 이 시기에 세르비아는 기독교화되었고, 고대 슬라브어 전례가 채택되었다.[1]

이후 무티미르는 형제들을 불가리아의 보리스 1세에게 추방하고, 세르비아의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1]

5. 3. 프르보슬라프 (891년–892년)

스트로이미르 공작의 인장은 독일 경매에서 세르비아 정부가 구매했다. 인장 중앙에는 총대주교 십자가가 있으며, 그리스어로 "신이여, 스트로이미르(''CTPOHMIP'')를 도우소서"라고 새겨져 있다.[6]

페타르 고이니코비치 (재위 892–917)는 분명 기독교인이었던 공작이었다. 그의 시대에 기독교가 확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르비아가 불가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의 영향—그리고 아마도 선교사들—이 그곳에서 유입되었으며, 이는 20년간의 평화 기간 동안 증가했을 것이다. 이전 세대(무티미르, 스트로이미르 및 고이닉)는 슬라브 이름을 가졌지만, 다음 세대(페타르, 스테판, 파블레, 자하리야)는 기독교 이름을 가졌는데, 이는 870년대에 세르비아는 물론 아드리아 해 연안의 슬라브족에게도 비잔틴 선교가 강력했음을 나타낸다.

6. 페타르, 파블레, 자하리야 (892년–927년)

페타르 고이니코비치는 892년경 무티미르의 아들 프리비슬라프를 몰아내고 세르비아 공국의 왕좌를 차지했다. 페타르는 불가리아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의 지원을 받아 왕위를 확보했으며[1], 세르비아를 확장해 나갔다.

6. 1. 페타르 (892년–917년)

페타르는 불가리아의 차르 시메온 1세와 동맹을 맺었으나, 비잔티움 제국과도 접촉하며 독립적인 지위를 유지하려 했다. 페타르는 보스나 강 계곡을 합병하고 네레트바 부족을 복속시키는 등 세르비아 공국의 영향력을 확대했다.[1]

6. 2. 파블레와 자하리야 (917년–924년)

917년, 비잔티움 제국과 불가리아 제국은 세르비아 왕위 계승 문제에 개입하여 각자 자신들이 내세운 꼭두각시 통치자를 세우려 하였다. 불가리아의 시메온 1세는 세르비아를 공격하여 파블레를 세르비아 공작으로 임명했으나, 비잔티움 제국은 자하리야를 지원하였다. 924년, 불가리아는 세르비아를 점령하여 지방으로 만들었다.[1]

7. 차슬라브 (933년–943/960년)

차슬라브는 세르비아의 독립을 회복하고 전성기를 이끌었다.

8. 멸망과 그 이후

차슬라브 사후, 세르비아 내륙 지역은 비잔티움 제국에 병합되어 라스 카테파노로 재편되었다.[1] 세르비아는 중앙 집권적 통치를 잃었고, 여러 지방은 제국에 복속되었다.[1] 이후 해안 지역의 두클랴가 세르비아의 중심지로 부상했다.[1]

9. 통치

슬라브족(스키라베노이)은 6세기와 7세기 동안 발칸 반도 전역에 정착하여[1] 이 지역에서 초기 비잔틴 통치의 종말을 알렸다.[2] 초기 중세 세르비아 공국과 블라스티미로비치 왕조의 역사는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누스 7세 포르피로게니투스 (재위 913–959)가 편찬한 저서 《제국 통치론》(De Administrando Imperio, 약칭 "DAI")에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이름을 알 수 없는(관례적으로 "미상의 아르콘"으로 알려짐) 최초의 세르비아 통치자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그는 백색 세르비아인을 동남 유럽으로 이끌었고, 불가르 침공 (680) 이전에 황제 헤라클리우스 (재위 610–641)의 보호를 받았다.[3][4] 세르비아 통치자는 "세르비아의 공작 (''아르콘'')" (αρχων Σερβλίας)이라는 칭호를 받았다.[5] DAI는 이 통치자의 뒤를 아들이 잇고, 그 다음 손자가 이었다고 언급하며, 역사가들은 동일 가문의 공작 계승에 대한 DAI의 설명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이지만, 비셰슬라브 (780-800경)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들의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다.[6]

10. 지리

καστρα|카스트라grc / kastragrc로 표기되는 "세례받은 세르비아"에는 다음과 같은 도시들이 있었다고 한다.[1]

"거주 도시"비고
세르비아 (본토)
데스티니콘데스티니크(Destinik)와 도스티니크(Dostinik)로 슬라브화.
—미확인[2]
체르나부스케이크르노부스키(Crnobuški)와 체르나부스크(Černavusk)로 슬라브화.
—미확인[2]
메기레투스메주레체(Međurečje, "[강] 사이의 땅"이라는 의미)로 슬라브화.
—미확인[2]
드레스네이크드레즈니크(Drežnik)와 드르스니크(Drsnik)로 슬라브화.
—미확인[2]
레스니크레쉬니크(Lešnik)와 레스니차(Lesnica)로 슬라브화
—미확인[2]
살리네스솔리(Soli)로 슬라브화.
투즐라[2]
보스니아
카테라코토르(Kotor)로 슬라브화.[3]
—미확인[2][3]
데스니크—미확인[4][3][2]


11. 종교

7세기 초, 슬라브족과 아바르족의 침략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교회 질서가 파괴되었다. 9세기 후반, 세르비아는 기독교(동방 정교회)를 받아들였다.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웹사이트 Pečat srpskog kneza Strojimira http://arhiva.glas-j[...] 2006-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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