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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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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보침은 청나라 말기의 관료이자 학자이다. 복건성 출신으로 1868년 진사가 된 후 한림원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1875년 한림시독을 거쳐 1881년에는 『목종본기』 편찬을 맡았다. 청불 전쟁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 독서와 저술 활동을 하였고, 1909년에는 예학관총찬대신이 되었으며 1911년에는 선통제의 스승이 되었다. 청나라 멸망 후에도 부의를 따라 자금성에 머물며 『덕종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만주사변 이후 만주국으로의 동행을 거절하고 천진에서 사망했다. 저서로는 『진문충공주소』, 『창취루문존』 등이 있으며, 10만 권의 장서를 소장한 장서가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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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침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존칭 접두사제국 스승
이름진보침
image_fileChen Baochen.jpg
직위정부 심의관
임기 시작1917년 7월 1일
임기 종료1917년 7월 12일
총리장쉰
동료장쉰, 류팅천
직위1필덕원 자문 대신
임기 시작11911년 8월 14일
임기 종료11911년 11월 1일
내각1경친왕 내각
총리1아이신 교로 이쾅
교육진사 (과거 시험)
출생일1848년 10월 25일
출생지푸저우시, 푸젠성, 청나라
사망일1935년 3월 5일
사망지베이핑시, 중화민국
직업정치인
한자 표기
간체陈宝琛
병음Chén Bǎochēn
기타 정보
국적청나라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직업정치인
시인

2. 생애

진보침은 복건성 복주부 민현(閩縣) 나주(현재 푸저우시 창산구 나주진) 출신으로, 청나라 말기부터 중화민국 초기까지 활동한 관리, 학자이자 교육자였다. 선통제 부의의 스승이었으며, 청나라 멸망 후에도 부의를 따라 그를 보좌했다.

진보침의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학문 및 교육 활동, 청 황실과의 관계, 만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을 참고하면 된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복건성 복주부 민현(閩縣) 나주(현재 푸저우시 창산구 나주진) 출신이다. 1868년진사가 되었고, 이어 한림원 서길사(庶吉士), 편수(編修)가 되었다. 1875년, 한림시독(翰林侍讀)이 되었고, 학사 장패륜, 통정사 황체방, 시랑 보정과 시국을 논하는 것을 좋아해 '청류사간(淸流四諫)'이라고 불렸다. 1881년, 한림원 시강학사가 되어 『목종본기(穆宗本紀)』 편찬을 맡았다. 1882년, 강서학정(江西學政)에 임명되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세웠다. 1884년, 청불 전쟁에서 강등되어 귀향하여 독서의 나날을 보냈다. 고향에서 조상이 지은 서고 사서루(賜書樓)를 세우고, 새롭게 창취루(滄趣樓)를 건축했다. 1899년, 오봉서원산장(鰲峰書院山長)으로 임명되었다. 1905년, 복건철로총판(福建鐵路總辦)이 되었고, 1907년에는 전민사범학당(全閩師範學堂, 현재 푸젠 사범대학)을 설립했다.

2. 2. 학문 및 교육 활동

진보침은 푸저우시 창산구 나주진 출신으로, 1868년 진사가 된 후 한림원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875년에는 학사 장패륜 등과 함께 '청류사간(淸流四諫)'으로 불리며 시국을 논했다. 1881년에는 『목종본기(穆宗本紀)』 편찬을 맡았고, 1882년에는 강서학정(江西學政)에 임명되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세웠다.

1884년 청불 전쟁으로 인해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에서 독서와 장서 수집에 힘썼다. 조상이 지은 서고 사서루(賜書樓)와 창취루(滄趣樓)를 건축하여 10만 권의 장서를 소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1899년 오봉서원산장(鰲峰書院山長)에 임명되었고, 1905년에는 복건철로총판(福建鐵路總辦)이 되었다. 1907년에는 전민사범학당(全閩師範學堂, 현재 푸젠 사범대학)을 설립하여 후학 양성에 기여했다.

2. 3. 청 황실과의 관계

1909년, 베이징으로 소환되어 예학관 총찬대신이 되었다. 1911년 선통제 부의의 스승이 되었으나, 이듬해 1912년 청조가 멸망하고 부의는 퇴위했다. 진보침은 그대로 부의를 따라 자금성에 거주하며 『덕종실록』 편찬을 맡았고, 1921년 본기가 완성되자 태부 칭호를 받았다. 장훈 복벽 때에는 의정대신으로 추천되기도 했다. 1923년 총리 내무부 대신으로 정효서를 추천했고, 1925년 부의가 자금성에서 퇴거하여 톈진으로 향하자 이를 따랐다.

만주사변을 거쳐 부의가 만주국 집정으로 옹립되자 동행을 요청받았지만, 거절하고 그대로 톈진에 머무르다 1935년 사망했다.

2. 4. 만년

1909년, 베이징으로 소환되어 예학관 총찬대신이 되었다. 1911년에는 선통제 부의의 스승이 되었으나, 이듬해 1912년 청조가 멸망하고 부의는 퇴위했다. 진보침은 그대로 부의를 따라 자금성에 거주하며 『덕종실록』 편찬에 종사, 1921년 본기가 완성되자 태부의 자리에 올랐다. 이 기간 동안 장훈 복벽 때에는 의정대신으로 추천되기도 했다. 1923년 총리 내무부 대신으로서 정효서를 추천했고, 1925년 부의가 자금성을 퇴거하여 톈진으로 가자 이를 따랐다.

만주 사변을 거쳐 부의가 만주국 집정으로 옹립되자 함께 가도록 요청받았지만 거절하고, 그대로 톈진에 머무르다 1935년에 사망했다. 장서가로 알려져 있으며, 10만 권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3. 저서


  • 陳文忠公奏議|진문충공주의중국어
  • 滄趣樓文存|창취루문존중국어
  • 滄趣樓詩集|창취루시집중국어
  • 滄趣樓律賦|창취루율부중국어
  • 南游草|남유초중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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